I became a bastard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209
7화. 미녀와 야수 (1)
“왕은 도전을 받으라!!”
시끄러운 외침이 온 왕국을 울렸다.
그 목청이 어찌나 크던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여름이건만 주변의 나뭇가지가 파르르 떨어 댔다.
“취익, 목청으론 그대가 왕이구려. 내가 졌소. 그냥 왕 하시오.”
사색에 잠겨 있던 휴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이익! 나 정도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거냐!”
감히 왕에게 도전장을 내민 전사는 아직 어리디어린 오크였다.
태어난 지 이제 열다섯은 되었을까 싶은, 풋내기 티가 채 가시지도 않은 애송이.
그 어린 도전자를 보는 휴거의 시선이 언뜻 아련한 빛을 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딱 그대 나이쯤이었을 때 드래곤과 처음으로 사투를 벌였지.”
녹색 비늘에 파충류 특유의 찢어진 동공.
휴거는 이따금 꿈을 꿨다.
자신의 부족을 몰살시킨 용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 꿈을.
“드, 드래곤……?”
어린 오크가 귀를 쫑긋거렸다.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가 영웅의 서사시에 눈을 반짝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게 퍽 귀여웠던 걸까.
휴거가 씩 미소를 지으며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끙…….”
잠시 망설이던 오크가 그의 옆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필시 원대한 포부를 품고 내밀었을 도전장이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나는 홉슨 산맥의 핏빛 나무 부족에서 태어났소. 그리 큰 부족은 아니었지만 훌륭한 전사들이 많았소, 취익!”
타이탄의 왕은 풋내기 도전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평화로웠던 부족의 일상부터, 그 일상을 단숨에 깨트린 증오스러운 드래곤까지.
“열다섯에 난 부족을 잃었소. 그 당시 내게 남은 건 도끼 한 자루와 몸뚱어리뿐이었다오. 그거면 복수를 다짐하기에 충분했지.”
휴거가 제 피부를 가로지른 흉터들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췩! 나는 그 용을 찾아가 싸웠소. 이건 내가 놈과의 첫 전투에서 입은 상처고, 여기 이 찢어진 자국은 놈이 나를 집어삼킨 바람에 입은 상처구려.”
“크륵! 어, 어떻게 용이랑 싸워서 살아남은 거야?”
어느덧 어린 오크의 음성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용맹한 전사들의 성지, 타이탄에서 나고 자란 오크에게 흉터란 영광의 상처에 불과했으니, 어린 오크의 눈에 사투의 흔적이 가득한 휴거의 몸은 훈장처럼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잘나서 살아남은 게 아니오. 놈은 수도 없이 덤벼드는 나를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소. 벌레를 갖고 노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눈빛이었지.”
그렇게 십 년을 죽지 못해 살고 나서야 광명이 찾아왔다고, 휴거는 웃으며 말했다.
“그들을 처음 만난 것도 그때였다오.”
용의 심장을 얻기 위해 홉슨 산맥을 방문한 인간 전사들.
휴거에게 있어 그들은 하늘이 내려 준 동아줄과도 같았다.
“그중에서도 대단한, 아니 위대한 인간 전사는 유난히 밝게 빛났소.”
“위대한 인간 전사라면…….”
“리하르트 바텐베르크. 나의 친우. 그가 거들어 준 덕에 복수를 끝마칠 수 있었소.”
그 대가로 나 또한 그와 함께 세상을 구하게 되었지.
아련한 휴거의 눈이 먼 산을 향할 때였다.
어린 오크가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음? 왜 그리 쳐다보시오?”
“왕보다, 그 인간이 더 강해?”
움찔.
휴거가 입술을 떨었다.
어린 오크에게 왕의 체면을 세울 것이냐, 아니면 사실을 인정할 것이냐.
선택의 기로에 놓인 휴거가 곧 콧김을 내뿜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위대한 인간 전사와 자웅을 겨룬 것도 단 한 번이었다.
그 당시엔 자신이 제법 우위를 점했더랬다.
그러니까, 이 정도 허세는 지옥에 있을 그도 못 본 척해 주리라.
휴거는 그리 믿었다.
“췩! 당연히 이 몸이 더……!”
다만 당사자의 의견은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믿음이었나 보다.
촤르륵-
어디선가 들려온 희미한 쇳소리가 휴거의 말을 끊었다.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잘못 들은 걸까.
휙휙 세차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어본 휴거가 눈을 반짝였다.
혹시 이 주변에 있는 건 아니겠지.
그래. 시험해 보자.
“……췩, 지금 다시 싸우면 내가 이길 자신 있소.”
“크륵. 그 인간이 더 강했단 뜻이네.”
“아니 지금은 내가 이긴다니까? 이것 보시오. 위대한 인간 전사도 내 말에 동의하니까 나타나지 않고 있잖소.”
물론, 위대한 인간 전사라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어서 나타나시오.
그는 일말의 기대를 담아 귀를 기울였다.
“왕. 그거 고인 모독 아니야? 죽은 사람더러 인정 못 하겠으면 나타나라니. 아예 앉은뱅이한테 걸어 보라고 시키지그래.”
하지만 왕의 귀를 파고든 것은 어린 오크의 일침 뿐이었다.
“……에휴, 맹세의 석판에 이름도 새기지 못한 애송이가 뭘 알겠소.”
한숨을 내쉰 휴거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역시 자신이 잘못 들은 모양이라고, 그의 표정이 일순 씁쓸한 빛을 띠었다.
맹세의 날 이후 일 년이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리하르트가 매정할 따름이었다.
“두고 봐! 나도 언젠간 왕이나 그 인간처럼 대단한 전사가 될 거니까!”
그런 휴거의 뒤편에서 패기 넘치는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 ◈ ◈
“흠흠.”
그날 역시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매일같이 도전장을 내미는 어린 오크에게 교훈 어린 이야기를 해 주고, 몇 가지 왕의 업무를 수행하는 단조로운 일상.
다만 내일은 달랐다.
중요한 약속이 있었다.
휴거가 제 도끼날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췩! 역시 난 잘생겼구려. 나이를 먹고 나서야 동안인 것을 알게 됐소.”
타이탄의 왕이라는 직책엔 큰 명예가 뒤따른다.
무려 여성 오크들이 가장 흠모하는 사내 일 순위로 뽑히는 명예가.
물론 그는 지조를 지킬 줄 아는 진정한 사나이였다.
휴거, 방년 38세.
동정.
“이번엔 뭔가 느낌이 좋소.”
찹찹.
그가 붉고 투박한 손에 기름을 발랐다.
그러곤 평소 봉두난발로 하고 다니던 머리를 뒤로 빗어 넘겼다.
이동 중에 다시 산발이 될 게 뻔할 뻔 자인데, 휴거는 온 정성을 다해 머리털을 정리했다.
마지막은 타이탄의 왕관, 글로리아라는 꽃을 본 따 만든 머리핀을 꽂았다.
두근두근.
떠올리기만 해도 설레는 이 감정이란.
“사랑인 건가~”
절로 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린 그가 거처를 나섰다.
왕의 거처 앞엔 수많은 오크들이 휴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어이, 왕! 믿고 있다고! 개선장군처럼 돌아와라!”
“이렇게, 딱! 박력 넘치게 고백해라! 이 푸른 나무 부족의 하룬이 응원한다!”
저마다 개성 넘치는 응원이 온 왕국에 들끓었다.
왕은 굳은 결의를 품은 얼굴로 끄덕였다.
십 년 하고도 삼 년.
이제는 기나긴 외쪽사랑의 나머지 반쪽을 찾을 때가 되었다.
“귀여운 고양이 친구! 출발하시구려!”
나르의 등에 올라탄 휴거가 설레는 가슴을 부여잡곤 외쳤다.
◈ ◈ ◈
“크릉!”
나르가 땅을 접어 달렸다.
귀찮은 오크의 짝사랑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인지, 심기 불편해 보이는 백사자의 갈기를 휴거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거, 조금만 도와주시오. 오랜만에 메리 소저를 보러 가는 길 아니오.”
이게 정말 얼마 만일까.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거진 오 년은 되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이제 만나고 싶다 하여 쉬이 만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재앙이 종식된 후, 바렌으로 향한 메리는 성녀로서 점차 명성을 쌓아 나가기 시작했다.
상처받은 이들에게 축복을.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위로를.
오늘날 다듬어진 평화엔 그녀의 공헌도 적지 않았다.
“췩! 사실, 이번에도 거절당할 것이 뻔하오.”
휴거가 어느새 산발을 한 머리로, 덤덤히 중얼거렸다.
나는 오크고, 그녀는 인간이니까-, 라는 하찮은 이유로 거절을 예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메리가 누군가와 교제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휴거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죽어서 천국에 간다.
성녀인 메리 또한 분명 천국에 가겠지.
시간은 많으니 조바심 낼 필요가 조금도 없었다.
그저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신사답게 다가가자고 다짐할 뿐이었다.
그렇게 휴거는 왕도 인근의 마을에 들러 꽃다발을 한 아름 구매했다.
바삐 걸음을 옮긴 그의 앞에 곧 바렌 왕도가 나타났다.
“흐암…… 아! 휴거 씨! 이야, 이게 몇 년 만입니까?”
“췩, 그대는 이번에도 졸고 있구려! 그러니 몇 년이 지나도 말단인 것 아니오?”
“하하, 휴거 씨는 또 꽃다발을 사 오셨군요.”
왕도의 정문에서 보초를 서던 사내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 파이팅하십쇼.”
휴거와 제법 친분이 있는 사이인 듯, 그가 장난스레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왕도에 입성한 휴거는 왕실에서 파견된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평화로운 거리를 걸었다.
종족 간의 골이 채워진 지도 벌써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세상.
특히 신성 왕국인 바렌엔 적지 않은 이종족들이 드나들었다.
오크인 휴거를 보고 새삼 두려워할 이들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세간에 용사 중 하나로 알려진 휴거에겐 경외의 시선이 뒤따랐다.
“……취익.”
광장에 다다른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위대한 인간 전사와 동료들의 석상, 그중엔 자신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었다.
“후후, 역시 일등은 나인가. 이등은 모리츠 동지고.”
“예?”
난데없이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휴거에게 호위 기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어서 신전으로 가시구려.”
대륙에도 몇 없는 호르교의 신전.
그중에서도 바렌 왕도의 신전이 가장 유명했다.
그야 대륙 제일의 드워프 부족, 하얀 모루의 명장들이 지은 건축물이기도 하거니와, 리하르트가 살아 있을 적에 지어졌던 유일한 신전이니까.
“휴거! 하하, 오랜만이오!”
마침내 휴거가 신전에 다다랐을 적에 낯익은 얼굴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폴크! 잭! 다들 잘 지냈소?”
한때는 바텐베르크를 지키던 제3기사단이었고, 지금에 이르러선 신전을 지키고 있는 템플나이츠의 제1기사단이었다.
옛 전우들을 본 휴거가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새하얀 신전 앞에 그녀가 서 있었다.
이제 30대 중반에 접어든 여인의 모습이, 그리도 아름다울 수가 없었더랬다.
“허억.”
휴거가 숨을 들이켰다.
긴장하지 말자고 그리도 다짐했거늘 쿵쾅거리는 심장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후우. 위대한 인간 전사. 내게 용기를 주시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