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bastard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216
14화. 배웅
음유시인은 평화 속에서 영웅담을 노래했다.
그들의 노래는 수십 년이 흘러서도 이어졌다.
세상을 구한 리하르트와 호르의 이야기.
그와 함께 했던 군단의 이야기.
스쳐 가는 시간 앞에도 신을 향한 믿음은 빛바래지 않았고, 그들의 영웅담은 조금씩 전설로 승화하여 세계 속에 자리 잡았다.
“…….”
창밖을 내다보던 노인이 눈을 감았다.
후우-
가느다란 숨결에 노인의 인생이 담겨 흘러나왔다.
“나만 남았구나.”
작년 겨울, 아론이 별세했다.
그보다 조금 전엔 휴거가 세상을 떠났다.
천천히 시간을 더듬어 올라갈수록 먼저 떠나간 이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들 모두 웃으며 죽었다.
세계수의 품에서, 그리운 이라도 만난 듯이 웃으며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이제는 노인의 차례였다.
노년기의 하루는 젊은이의 일 년과 같다고 하던가.
지독히도 시간이 안 간다고, 무료해 죽겠다고 엄살을 부리던 기억이 난다.
“나까지 가 버리면, 너도 참 심심하겠다.”
턱을 괸 노인의 말이 허공을 맴돌았다.
쯧, 여전히 대답 한번 듣기 힘들구먼.
혼자 중얼거린 노인은 종이와 펜대를 쥐었다.
바텐베르크의 장로로서, 후대에게 남겨 주고 싶은 몇 가지 당부를 종이 위에 새겼다.
그것으로 준비는 끝이 났다.
다음 날, 노인은 가문의 배웅을 뒤로하고 바텐베르크를 나섰다.
마차로 모시겠다는 이들을 한사코 만류한 것은 늙은이의 고집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횡단하고 싶었던 대륙,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기회가 없었다.
마침 때는 화창한 봄이었다.
노인의 발걸음을 따스한 햇볕이 함께해 주었다.
소국의 마을을 지나고, 우연히 마주친 인심 좋은 상인에게 과일을 얻었다.
아삭한 과일을 베어 문 노인은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 ◈ ◈
봄이 지나 무더운 여름이 되었을 적에 노인의 걸음이 멈췄다.
바텐베르크에서 여기까지, 죽을 자리를 찾아 나선 길치고는 제법 길었더랬다.
쿠드득.
거대한 숲이 노인의 앞을 터주었다.
얼마를 더 걷자 엘프들의 터전이 눈앞에 펼쳐졌다.
“모리츠. 무슨 산책을 여기까지 하러 왔느냐.”
익숙한 목소리.
그 안에 숨겨진 서글픈 기색에 노인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산책은 얼어 죽을. 잠이나 자러 왔다.”
“여기가 무슨 여관인 줄 아느냐. 죄다 자러 오는구나.”
수십 년이 흘러도 변함없는 모습의 아델이 씁쓸하게 웃었다.
인간의 수명은 짧다.
그리고 호르의 군단 대부분이 인간이거나, 그와 비슷하게 살다 죽는 이종족들이었다.
그들은 죽을 때가 되면 이곳을 찾았다.
맹세의 석판이 잠들어 있는 땅 아래, 자신들의 몸을 누이고 싶어 했다.
“이젠 살 만큼 살았다. 뭐, 어차피 이게 끝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 해도 하나둘 떠나가니 외로운 건 어쩔 수 없구나.”
자신은 늙어 죽을 수도 없는 몸이라고, 아델이 심통이라도 난 듯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리하르트가 있는데 무얼 외롭다고.”
노인, 모리츠가 킬킬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몇 번이고 찾아왔던 엘프들의 터전, 혹은 군단의 묫자리.
아론이 이곳에 잠들 적에 모리츠 또한 곁을 지켰다.
모리츠는 그가 눈을 감기 직전에 보여 주었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녀석, 리하르트를 본 것이겠지.”
목소리에 조금씩 힘이 빠졌다.
영혼은 이리도 생생히 살아 있는데, 그 늙은 육체가 끝을 보이고 있었다.
“졸리구나.”
쓰게 웃는 아델에게 모리츠가 한 걸음 나아갔다.
시야가 흔들린다.
어느 순간 아델과 싱그러운 나무는 보이지 않고, 풀잎 가득한 땅이 보였다.
◈ ◈ ◈
툭.
노인은 천천히 쓰러졌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지는 그의 육신을 거대한 나무줄기가 받쳐 주었다.
“그러게 그 몸으로 여기까지 왜 걸어왔느냐. 마차라도 빌려 탈 것이지.”
쯧.
혀를 찬 아델이 나무를 조종해 모리츠를 세계수의 앞으로 옮겼다.
수많은 엘프들이 그의 곁을 둘러쌌다.
나뭇가지 위에서 지저귀던 새들이 침묵하고, 가벼운 산들바람조차 멈췄다.
마치 세상이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듯했다.
“후우.”
뿌리 위에 몸을 기댄 노인이 힘겹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 쨍쨍한 하늘, 저 위에 동료들이 있을 터였다.
아버지, 형님, 아론과 휴거…….
다만 그들 사이에 리하르트는 없다.
그래서 노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애써 제 발로 걸음을 옮기며 육체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시간을 끌었다.
다만 그것도 이제는 끝이었다.
늙어 감옥처럼 느껴지던 몸이 조금씩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저 하늘에서 신기루 같은 빛이 쏟아져 내렸다.
“아…….”
천국의 다섯 호르를 원망하는 그였으나, 언뜻 훔쳐 본 천국의 절경만큼은 감탄사를 터트리기에 충분했다.
곧 빛을 등지고 천사들이 땅 위로 내려왔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듯, 천사들은 엘프들 사이를 걸어 모리츠의 앞에 당도했다.
[모시러 왔습니다.]천사가 손을 뻗어, 노인의 손을 잡았다.
천천히 일으켜 세우는 손길에 모리츠의 영혼이 육신에서 빠져나왔다.
“…….”
이게 죽음이라는 걸까.
많은 것을 경험해 본 그로서도 생소한 감각이었다.
“녀석들은 잘 지내고 있나?”
모리츠는 하늘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예.] [다들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그렇겠지.
특히 휴거 녀석은 자신이 먼저 천국에 간다고 약올리기까지 했었다.
그들을 볼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으나 어째선지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쯤 보고 가고 싶었거늘.
“이 망할 동생은 끝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구먼.”
바쁜 천사들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모리츠는 아쉬움을 삼키고 천사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러나 몇 걸음도 채 가지 못하고 멈추고 말았다.
“이놈아. 나 간다.”
커흠!
헛기침을 한 노인이 다 들으라는 듯 크게 외쳤다.
역시 그놈 얼굴을 못 보고 가는 건 성에 차지 않는다.
“야!”
소리치는 모리츠의 목소리가 조금씩 젊어져 갔다.
노인에서 중년으로.
중년에서 청년으로.
청년에서, 그들과 함께했던 그 시절로.
“야. 인마! 한 번쯤은 나와 봐야 하는 거 아니냐!”
성을 토하는 그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섭섭하고, 서운하고.
쉽게 눈물 글썽이는 모습이 딱 그 시절의 모리츠였다.
“쯧. 하여간에 너무하다니까.”
체념한 모리츠가 등을 돌려 다시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툭.
누군가가 그의 등을 쳤다.
촤르륵-
한 박자 늦게 울리는 쇳소리.
덜컥 굳은 모리츠가 서서히 몸을 돌렸다.
“안 가고 뭐 하고 있냐.”
낡고 해진 로브를 둘러쓴 그가, 그곳에 있었다.
로브의 음영 아래 삐뚜름한 미소는 모리츠가 잘 알고 있는 자가 으레 짓던 웃음이었다.
하, 모리츠가 언뜻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참 일찍도 온다.”
다만 망령은 천연덕스레 웃을 뿐이었다.
“무슨 소리야. 나 계속 너랑 같이 걸었는데.”
“뭐?”
“가라. 애들 기다리겠다.”
망령이 하늘에 열린 천국을 올려다보았다.
모리츠도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눈부신 햇볕 속에 새로운 세상이 그 편린을 보여 주고 있었다.
“너희 같은 자들을 위해 만든 천국이다. 기분 좋게 가라.”
“다른 녀석들은 어땠어?”
“너랑 똑같지. 한참 망설이다 가더군.”
짧은 대화가 오갔다.
몇 분도 채 안 되는 그 대화에 어쩐지 모리츠는 모든 아쉬움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 간다.”
모리츠는 끝이 마지막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맹세의 석판이 영원히 자리하는 한, 어디에 거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애들한테 안부 전해 줄게.”
툭.
모리츠와 리하르트의 주먹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 ◈ ◈
가르텐은 고요했다.
아델과 마르는 모리츠의 시신을 뿌리 아래 안치했고, 엘프들은 눈을 감고 묵념하는 것으로 예를 표했다.
“잘 가.”
그리고 나는 모리츠가 향했던 하늘을 향해 중얼거렸다.
시원섭섭하다고 해야 할까.
죽어서 좋은 곳으로 간 동료들을 생각하면 분명 기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더 이상 지켜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몰려왔다.
뭐, 이리 될 것이란 걸 모르진 않았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군단은 죽어서 천국에 거하기를 약속받은 자들이었다.
약속은 이행되고, 맹세는 지켜질 터다.
잠시 가르텐의 익숙한 얼굴들을 돌아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 ◈ ◈
세상을 걸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걸음을 옮길수록 세상이 변해 갔다.
영원할 것만 같던 평화 속에 조금은 사소한 다툼이 일기도 했다.
누군가의 영웅담은 신빙성 없는 전설이 되었고.
누군가의 신앙심은 이기심으로 변질되었다.
삐걱거리는 톱니바퀴처럼, 시간이 흐를 때마다 좋지 못한 징조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하지만 괜찮다.
이 세상은 내가 지켜보고 있었다.
나의 주시 아래 영웅과 용사가 탄생할 테고, 악인은 합당한 벌을 받을 터였다.
마치 나와 군단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를 두고 누군가는 어리석은 분쟁의 굴레라고 칭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이것을 근사한 자정 작용이라 부르고 싶었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 지켜보리라.
누가 새로운 평화를 이끌지, 또 누가 구세주로 불릴지.
나와 그들이 구한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영원히.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