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bastard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77
77화. Episode. 26 금의환향 (1)
무거운 침묵이 맴도는 가운데, 나는 입을 열었다.
“저희, 바텐베르크는 본연의 임무를 다하였습니다.”
이제 그만 손 떼겠다는 뜻이다.
초상집 분위기인 이들에게 쉬이 할 말은 아니었으나 어차피 언젠간 해야 할 말이었다.
애당초 우리가 부여받은 임무는 리치 척살.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국왕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물들었다.
오지 말아야 할 악몽은 또 온다고 하고, 가지 말아야 할 원군은 간다고 하니 그 심정이 어떨지는 짐작이 되었다.
그런 국왕의 마음을 달래 준 건 수뇌부들이었다.
“오르드 백작가는 계속 리오 성을 지킬 겁니다.”
“자칼 자작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이언의 기사들도 함께합니다.”
“린느도 기사의 의무를 완수할 것입니다.”
그들이 앞다투어 용맹함을 드러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동자엔 굳은 사명감이 어려 있었다.
바텐베르크의 부재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이미 각오를 마친 기색이었다.
나는 이 와중에도 입을 다물고 있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수장 잃은 가문의 지휘관 아발트.
그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헬가도 바렌 왕국의 암운을 막아 내겠습니다.”
그렇다고 한다.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이내 아발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 ◈ ◈
“그래도 왕은 왕이네.”
성을 증축하고 왕실 기사단과 병사들을 파견할 것이오-
국왕이 이곳을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이다.
곧 죽을 사람 같은 얼굴을 하더니 그새 결단을 내렸다.
반면, 난 회의 내내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았다.
화제를 던져 놓곤 철저히 방관자의 태도를 취했다.
나를 비롯한 바텐베르크의 사람들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니까.
적어도 아직까지는.
“성자님. 정말 가실 겁니까?”
방에서 혼자 상념에 잠겨 있었는데, 아발트가 나를 찾아왔다.
“그래. 갈 거야.”
“……그렇군요.”
내 덤덤한 대답에 그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뭘 그리 걱정해? 두려워해서 바뀔 건 아무것도 없어. 물론 쉽진 않겠지만…….”
“그런 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성자님이랑 떨어질 생각을 하니 서글퍼서 그렇습니다.”
사내놈이 징그럽게 섭섭한 티를 낸다.
닭살 돋은 팔을 벅벅 긁으며 대꾸했다.
“그럼 나한테 붙으래도.”
수장 잃은 무가, 헬가 백작가의 기사들.
솔직히 말해 탐이 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용맹함과 우직함은 그야말로 정예 중 정예였으며, 신앙심 역시 유난히 투철했으니까.
그래서 연회가 한창 이어질 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배신자는 잊고 나를 모실 생각은 없느냐고.
나와 같이 바텐베르크로 가지 않겠느냐고.
“죄송합니다.”
물론 돌아온 답은 지금처럼 단호한 거절이었다.
“하나 헬가의 기사들 모두 마음속으론 성자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근데 왜 같이 안 가고.”
그가 허리를 곧게 폈다.
단단히 쥔 주먹으론 가슴을 두드렸다.
“조국의 위험을 어찌 모른 척하겠습니까. 주군의 죄가 어찌 가신의 죄가 아니겠습니까. 배신자 폴랜드 헬가를 잊을지언정, 배신자를 섬겼던 죗값과 바렌 왕국을 잊을 순 없습니다.”
이건 모두의 뜻이라며, 아발트는 단호히 거절했다.
‘아주 대차게 까여 버렸구나.’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계속 치근덕대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
그런데 어쩌냐.
나는 이놈들이 더욱 마음에 들었는데.
“그래. 나도 강요는 안 해.”
일단은 일보 후퇴.
아무리 탐나도 성급할 필요는 없었다.
“아, 지금쯤이면 네 방에 도착했을 텐데.”
“예? 무엇이 말입니까?”
“선물.”
글쎄 유품이라 해야 하는 게 맞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아발트에게 가 보라 손을 휘저었다.
그리 마음에 드는 선물은 아니겠지만, 앞으로 요긴하게 쓸 물건이다.
현명한 사내이니 못 본 척 어디 짱박아 두진 않을 것이다.
쿵, 쿵쿵!
아발트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누군가의 거친 발걸음이 가까워지더니, 방문이 거칠게 열어젖혀졌다.
“리하르트으! 너 정말 손 뗄 거냐고!”
범인은 모리츠였다.
못생긴 내 형제는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그럼 천년만년 여기에 있을 줄 알았냐?”
“하지만!”
“하지만이고 자시고.”
꽉 그러쥔 모리츠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다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우리 임무는 끝났지. 하지만 이대로 아무렇지 않게 쏙 빠지겠다니……!”
“무슨 말이 하고픈 거야.”
“우리가 바렌 왕국의 기사도, 무가도 아닌 건 알아. 그래도 우리 모두 함께 호르를 섬기는 형제들 아니었어? 이렇게 위험을 못 본 척할 순 없는 거잖아!”
이야…….
정말 다시 봤다.
이러한 소리를 할 위인이 아니었는데.
“모리츠. 너 그 말 잊지 마.”
“뭐?”
“나중에 가서 딴소리 말라고. 난 똑똑히 들었으니까.”
내 말이 뚱딴지같은 것인지,
모리츠 녀석도 아발트랑 똑같이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 ◈ ◈
떠들썩했던 성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그건 절망이나 공포가 아닌, 굳센 각오의 고요함이었다.
사내들은 덤덤히 사실을 받아들였다.
지긋지긋한 악몽이 또 찾아온다는 것도, 바텐베르크가 떠난다는 것도.
“바텐베르크는 지금까지 우릴 도와주었어.”
“그분들을 붙잡을 순 없지. 이미 갚기도 벅찬 은혜를 입었잖아.”
“어차피 왕국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거다.”
그들은 떠날 준비를 하느라 바쁜 바텐베르크의 기사들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제대로 인사를 할 새도 없이 떠나는 건 섭섭했지만, 사정이 있겠거니 싶었다.
“새로 오는 놈들 교육 잘하고. 일단 마기에 익숙해지도록 미친 듯이 굴려. 저 앞까지 매일같이 순찰 보내란 말이야. 그래도 벌벌 떨어 대면 아예 성 밖으로 쫓아내. 눈물 콧물 쏙 빼고 미치기 직전까지.”
“예입! 받들겠습니다!”
그 와중에 리하르트는 연합의 기사들에게 살벌한 조언의 말을 전했다.
새로이 올 왕실 기사단과 병사들한테 악감정이라도 있는 건지 참으로 가혹한 조언이었다.
그러나 기사들은 맡겨만 달라는 듯 가슴을 두드려 댔다.
일종의 신고식이다.
왕실의 샌님들은 철저히 굴러 봐야 제법 쓸 만해지리라 생각했다.
“도련님.”
리하르트가 성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이야기를 나눌 즈음, 아론이 다가왔다.
“꼭 이렇게 서둘러 철수해야 하는 겁니까? 아직 본가로부터 복귀 명령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두 눈 짙은 아쉬움과 걱정은 아론의 심정을 대변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리하르트는 그를 보며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남아서 싸울 놈들은 깔끔하게 이별을 받아들이는데, 정작 떠날 놈들이 난리였다.
“밍기적거릴 시간 없어.”
결국 바텐베르크의 군대는 그의 성화에 못 이겨 말에 올라타야 했다.
그렇게 그들이 막 성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추웅! 바텐베르크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호르께서 당신들과 함께하시길!”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급히 떠나는 그들을 연합의 사내들이 배웅했다.
높이 치켜든 연합의 깃발과 호르교의 휘장이 바람결에 펄럭였다.
“……자식들.”
리하르트는 피식 웃으며 출발 신호를 보냈다.
◈ ◈ ◈
왕실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대열을 이루었다.
왕명을 받아 리오 성으로 향한다기엔, 그들의 얼굴은 영 다부지지 못하였다.
사기는 그야말로 최악.
반면 걸음걸음마다 엉겨 붙는 마기는 짙어져만 갔다.
악몽이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도 꿈속이라더라.
리오 성의 성주는 한참 전에 죽고, 오르드 백작이 며칠 전에서야 승계하였다더라.
본래 성을 지키던 병력도 모두 죽어서, 무가연합이 계속 지키게 되었다더라.
그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
리오 성이 얼마나 큰 위험을 막아 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험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이젠 자신들이 막아 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이 한 몸 불살라 왕국을, 리오 성을 지켜 내고 말리라-
가슴은 그러한 사명감으로 불타오르는데, 머리는 저 끔찍한 마기에 겁먹고 떨기 바빴다.
물론 리오 성에 대해 안 좋은 소식만 들려온 건 아니었다.
호르라는 신이 성을 지켜 준다느니, 바텐베르크의 리하르트가 빛을 이끌고 왔다느니.
이래저래 희망찬 이야기도 적잖게 들려왔다.
다만 정말 희망차기만 한, 근거 없는 소문을 믿을 만큼 긍정적인 자는 이곳에 없었다.
“빌어먹을…… 왜 우리를 보내는 거야.”
“왕실 기사단은 몰라도 우린 쓸모없을 텐데.”
가장 공포에 빠진 이들은 병사였다.
엘리트 취급을 받던 리오 성의 수비병들이 악몽 초창기에 모두 몰살당한 건 알음알음 퍼진 사실이다.
지금이야 안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온통 기사들 천지인 그곳에서 병사 나부랭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도대체 왜 자신들이 원군으로서 차출된 건지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국왕 전하께선 더욱 무심하시고.
병사 하나가 고개를 쳐들곤 중얼거릴 때였다.
저 앞, 행렬의 선두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추……! 바텐…… 뵙습니……!”
병사들은 하도 뒤쪽에 배치된 터라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안 그래도 심란한데 또 무슨 일이람-
그가 불만스레 궁시렁거렸다. 보나 마나 귀족 나으리라도 만난 것이리라.
곧 행렬이 다시 진군을 시작했다.
그러고 조금 뒤에서야 소란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헉! 바텐베르크!”
행렬을 스쳐 지나는 수많은 기사.
흉갑에 새겨진 문장은 바텐베르크의 것이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듯 울상 짓던 병사들이 바텐베르크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불만을 내뱉던 병사도 마찬가지였다.
“머, 멋있다…….”
저 당찬 기세와 철벽같은 덩치.
눈빛은 깊고 심후하며, 꾹 다문 입술은 주군을 향한 충성만을 표할 것 같다.
무릇 칼 쥔 사내라면 누구나 동경할 수밖에 없는 최강의 집단.
저들은 대체 어디로 향하는 걸까.
재차 다가올 어둠에 방비를 굳혀야 하지 않던가.
병사들에게만큼은 바텐베르크의 철수 소식이 의도적으로 숨겨졌다.
사기 저하를 염려한 국왕이 함구를 명한 것이다.
때문에 병사는 바텐베르크가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예를 들면 악몽을 조기에 종결 내러 간다든가.
폴린 성의 위치는 정반대이건만,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그들이었다.
그 순간.
파아앗-
웬 빛이 번쩍였다.
밝고 찬란한 빛이었다.
행렬을 이어 가던 왕실의 병력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저만치 멀어져 가는 바텐베르크의 기사들.
그 사이에 등불 같은 빛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어어…….”
“뭐야, 저건……?”
빛은 모든 병사들을 비추었다.
그리고 병사들은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차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한없이 따뜻해 보이는 빛일 뿐인데도, 병사들의 눈빛이 한없이 일렁였다.
왜인지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호르라는 신이 리오 성을 지켜 준다.
리하르트 바텐베르크가 빛을 이끌고 왔다.
근거없는 낭설이라 치부했던 것이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신이시여…….”
겁 많은 병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