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bastard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84
84화. Episode. 27 호르교의 성자님 (2)
바렌티스 국왕의 얼굴에 주름이 깊어졌다.
눈 밑에 생긴 어둠은 그간 겪은 심마를 잘 보여 주고 있었다.
“후우…….”
대체 이 나라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국왕은 야속한 현실에 한탄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꾸역꾸역 속으로 삼켜 냈다.
그가 다스려야 하는 건 두려움에 떠는 백성이요, 조국을 위해 초개 같이 목숨을 던지는 기사와 병사였으니.
왕 된 자로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국왕은 마음부터 다스리고자 눈을 감았다.
감은 눈앞은 죄 새카매야 정상일진대, 어찌 된 일인지 리오 성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졌다.
바람에 나부끼는 연합의 깃발.
그 아래 성을 증축하느라 굵은 땀을 흘리는 병사들.
다시 닥쳐올 악몽을 묵묵히 기다리는 기사들.
결의와 사명 너머에 가려진 긴장과 공포.
분명 현재 리오 성은 저런 광경일 것이다.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으득-
국왕이 이를 악물었다.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찾아든 어둠.
그 끔찍한 것이 왕국 절반을 집어삼킨 건 순식간이었다.
바렌 왕국은 너무나 큰 타격을 입었다.
자랑스럽던 폴린 성은 악의 종양이 되어 버렸고, 리오 성에선 수많은 피가 흘렀다.
바텐베르크의 도움이 없었다면 왕국은 진작에 멸망했을 것이다.
하나 이제는 그들도 떠나간 상황.
다른 나라의 지원이 불가피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바렌 왕국과 국경이 인접한 타국에선, 동맹이랍시고 고작 병사 몇과 쓰잘 데 없는 지원품만 보내 올 뿐이었다.
우습게도 그치들이 자랑하던 기사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마인이라는 악독한 것이 창궐하여 본 국은 경계 태세를 강화하였소. 우리도 바렌의 암운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지원품과 함께 도착한 서신엔 구구절절한 사연이 적혀 있었다.
불필요한 미사여구를 제외하면, 이쪽을 도와줄 짬이 없다는 것이었다.
국왕은 서신을 찢은 뒤 태웠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종이 쪼가리를 보며 분노를 삼켰다.
여기는 마인이 없는 줄 아는가.
오히려 다른 곳보다도 더 많은 이들이 미쳐 날뛰어 댔다.
그야 왕국의 절반이 악몽에 삼켜졌으니 말이다.
온 대륙에서 바렌보다 마기가 짙은 곳은 없었다.
“수백 년의 약조도 어둠 앞에선 덧없이 바스러질 뿐인가.”
겁쟁이가 되어 버린 동맹국을 떠올린 국왕이 기어코 한탄을 터트렸다.
비단 동맹국뿐이랴.
북대륙의 방패라며 치켜세워 주던 이들은 어느샌가 바렌 왕국으로부터 눈을 돌렸다.
이 나라가 무너지면 어찌 되는지 알면서.
제 것만 지키겠다고 온몸을 꽁꽁 싸맨 것이다.
그러다 문득, 국왕은 자신도 얼마 전까진 겁쟁이처럼 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조금이나마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건 바텐베르크의 막내아들, 리하르트를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
국왕은 왕좌에 파묻히듯 앉아 리하르트의 빛을 되새겼다.
그 찬란하고 영광된 광채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용기를 주었다.
국왕의 눈에 현기가 맴돌았다.
이대로 골머리만 싸매고 있을 순 없다는 결단이 내려졌다.
그가 사람을 불러 중요한 서신을 작성하고자 할 때였다.
희망을 품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리하르트 바텐베르크께서 기사들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오셨다고 합니다! 지, 지원! 바텐베르크가 다시 지원군을 보낸 것 같습니다!”
빛이 꼭 용기만 주는 건 아니었다.
왕국에 희망이 도래했다.
국왕을 포함한 왕실은 뜬눈으로 리하르트를 기다렸다.
성대한 환대를 준비했고, 근위 기사들을 내보내 바텐베르크의 지원군을 맞이하도록 조치했다.
그렇게 며칠 뒤.
리하르트가 군대를 이끌고 왕도에 도착했다.
“바텐베르크의 자비에…… 음?!”
격양에 찬 국왕의 음성이 당황에 젖었다.
리하르트와 그 뒤편의 기사들.
그들의 가슴팍엔 응당 있어야 할 문장이 없었다.
리하르트는 덤덤한 얼굴로 국왕을 마주했다.
이런 반응은 예상했다는 기색이었다.
◈ ◈ ◈
“저와 기사들은 이제 바텐베르크가 아닙니다.”
리하르트는 한자리에 모인 국왕과 왕도의 귀족들을 보며 말했다.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그 말은 큰 파장을 불러왔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이오?”
기사들은 한 번 내건 사명은 곧 죽어도 지키고자 한다.
그런 이들이 사명의 이정표라 할 수 있는 기사단을 단체로 나섰단다.
더 믿을 수 없는 건 바텐베르크라는 영광된 이름을 떼어 낸 리하르트였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에 귀족과 왕이 얼굴을 굳혔다.
“바텐베르크와 저희의 뜻이 달랐을 뿐입니다.”
“으음…….”
국왕이 침음성을 흘렸다.
리하르트가 무슨 뜻을 품고 가문을 나섰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가 군대를 이끌고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물론 리오 성의 영웅이라고 불린 리하르트였지만, 그건 그가 바텐베르크였을 때의 이야기일 뿐.
바렌 왕실은 이젠 적인지 아군인지 모를 군대에게 제 손으로 문을 열어 준 격이나 다름없었다.
원탁 사이사이로 긴장감이 흘렀다.
“저희는 리오 성의 형제들을 돕고자 찾아왔습니다.”
리하르트는 그들의 생각을 짐작했다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바렌 왕실의 표정은 풀릴 생각을 않았다.
“바렌이 그대에게 지불할 수 있는 것은 몇 없소.”
기껏 가문을 나와서 한다는 게 자원봉사일 리가 없었다.
다 무너져 가는 왕국에게 무엇을 얻겠다고 여기까지 온 걸까.
“대가는…… 따로 바라지 않습니다.”
경계의 눈초리에도 리하르트는 시종일관 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리오 성은 제법 잘 대비하고 있더군요.”
“그걸 어찌…….”
“신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국왕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리오 성에서 한창 유행 중인 단어, 신.
새로이 투입된 왕실 기사단과 병사들마저도 신을 부르짖고 있었다.
국왕은 그 유행의 시발점이 리하르트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나 그게 대체 무엇인지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언젠간 알아봐야겠거니 생각했을 뿐, 휘청거리는 왕국을 부여잡느라 뒷전으로 밀려나 버리고 말았다.
그저 두려움을 이겨 내기 위한 주문 같은 것이라 여겼건만, 리하르트의 진지한 표정을 보니 그도 아닌 것 같았다.
“바텐베르크라는 영광의 이름을 떼어 낸 건 종교 때문이었구려.”
리하르트가 내뱉는 신이란 단어가 정말 종교의 것이라면, 리하르트의 출가 또한 단번에 이해되었다.
그 대단한 바텐베르크에서 종교 같은 미신을 인정해 줄리 없으니 말이다.
귀족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왕실이 계산기를 두드리는 순간에도 리하르트는 입을 열었다.
“바렌 왕국은 적잖은 난항을 겪고 있을 테지요.”
“…….”
“폴린 성의 악몽뿐만이 아니라 군사적, 정치적, 외교적 문제까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소만.”
툭, 툭-
리하르트의 기다란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악몽을 막아 내도 문제는 커져만 갈 겁니다.
이미 바렌 왕국은 제 기능을 상실했고, 되려 이쪽의 영토에서 마기가 터져 나왔다는 이유로 덤터기를 쓸지도 모릅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들추지 않아도 아는 현실이었다.
“본론만 말해 주시오.”
“그러지요.”
리하르트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숨결마다 섞여 들어오는 마기에 그의 수려한 미간이 찌푸려졌다.
고오오-
리하르트의 몸에서 찬란한 아지랑이가 일었다.
그 빛은 왕성을 뒤덮을 정도로 밝고 넓게 퍼져 나갔다.
신앙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자리.
“아, 아아……!”
처음 맛보는 신앙의 기운에 귀족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리오 성에서 그 편린을 경험했던 국왕조차도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 ◈ ◈
“바렌 왕국에 호르의 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화두를 던졌다.
국왕을 비롯한 왕실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이쪽은 호의를 베풀고자 한 말인데, 저쪽은 마치 무리한 부탁을 받은 사람이 지을 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렌에 종교를 전파하겠단 말씀이십니까?”
나를 향해 물어 오는 귀족에게 그렇다고 답했다.
곳곳에서 헛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손을 들어 신앙을 다시 한번 밝혔다.
왕실은 그 빛을 보면서도 곤란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리오 성의 사내들은 믿음을 통해 마기를 이겨 냈습니다. 믿고 의지할 데가 있다는 건 큰 축복이지요.”
“으음…….”
신앙을 경험했음에도 불신과 염려는 지워지지 않았다.
원래 손에 쥔 게 많을수록 의심이 짙어지는 법.
난 바렌이 백성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가하기를 원했다.
호르교가 거점으로 삼을 곳이니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상황을 약점으로 삼아, 신을 믿으라 윽박지르고 싶지는 않았다.
힘으로 압도하기보다는 마음을 얻어 내는 것이 더 확실한 정복이었으니.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종교를 거절하셔도 리오 성의 지원은 약속하겠습니다.”
“……무엇 하나 쉽지 않구려.”
눈을 감은 국왕이 푸념을 내뱉었다.
“우리는 리하르트 공이 말하는 종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오.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그것이 어떻게 바렌의 암운을 해결하겠다는 건지도.”
“이제부터 아시면 됩니다.”
“……그럼, 알려 주시오.”
왕실은 탐색전을 걸어왔다.
그들은 묻고, 나는 답한다.
그러한 행위가 수차례나 반복되었다.
‘가주랑 대화할 때랑 비슷하군.’
신이 정말 있냐느니, 신은 무엇을 할 수 있냐느니 등의 시시콜콜한 물음부터, 종교의 지도자는 누구냐는 질문도 있었다.
난 민감한 질문도 서슴지 않는 왕실에게 성심성의껏 답해 주었다.
“허어!”
그들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리오 성에서 종교가 퍼져 나간 세세한 경위를 들은 탓이었다.
‘에라이, 너구리 자식들.’
왕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입으론 나와 신에 대한 찬사를 내뱉지만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떤 선택이 왕국에게 더 이득일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이들은 끝까지 중립적인 자세를 취할 것이다.
그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의 기본 소양이었다.
“리오 성의 병력이 어째서 리하르트 공을 성자라 부르는지 이제야 알겠구려.”
“제가 가진 재주라곤 빛을 밝히는 것밖에 없습니다. 진정 위대한 분은 호르이시죠.”
“그렇다 해도 리하르트 공을 중심으로 우직한 사내들의 마음이 모이지 않았소? 그건 대단한 일이라오. 군주들도 기사의 마음을 얻기란 쉽지 않소.”
찬사와 감탄 속에 예리함이 섞여 들어온다.
손 대신 입과 두뇌가 무기인 자들이었다.
알게 모르게 정보를 얻어 내려는 화술이 참으로 교묘했다.
그래서 난 이들이 마음에 들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무엇이 길고 짧은지 대 보는 신중한 성격은 사업적 파트너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들이 진정으로 내 편이 되기만 하면 정말 든든할 테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한 가지의 선택지를 권유해 드리는 것뿐입니다.”
“이건 쉬이 결정할 사안이 아니란 것을 이해해 주시오.”
국왕의 현기 짙은 시선이 날 향했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로선 알 길이 없었다.
부디 먼 길 돌아가는 일 없이 현명한 선택을 해 주었으면 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