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bastard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96
96화. Episode. 31 역병의 습격 (2)
잠시간 부유감이 느껴지더니, 내 몸은 이내 저 아래로 뚝 떨어졌다.
성벽 아래 이빨을 딱딱 부딪쳐 대는 아귀들이 포효했다.
누런 침을 질질 흘려 대는 모습이, 이곳이 마치 제 집 식탁인 줄 아는 모양이다.
역겨운 노란색 액체가 땅을 적시는 게 보였다.
그냥 역겹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무려 역병을 품은 침이다.
감히.
내가 옛 적에 침 발라 놓았던 성에.
나는 허리춤에서 코어 두개를 빼내 신성력을 일으켰다.
코어를 집어삼킨 빛무리가 형태를 갖추어 갔다.
『두 자루의 검성 ? 발동.』
완성된 별 두 개가 성벽 아래 땅을 쓸었다.
그 궤적에 걸린 괴물들이 픽픽 쓰러져 나갔다.
더럽고 더러운 피보라가 이는 가운데, 나는 그곳에 섰다.
쿵, 쿵쿵!
템플나이츠의 기사들이 뒤따라 착지했다.
자욱하게 낀 흙먼지를 뚫고선 괴물들이 들이닥쳤다.
혼전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템플나이츠! 대열을 갖춰라!”
앞을 가로막는 괴물들을 베어 내며 외쳤다.
기사들이 기세를 크게 뿜어내곤 대열을 갖추기 시작했다.
누가 바텐가의 정예였던 놈들 아니랄까 봐 이런 난리 통에서도 내 뒤편으로 잘도 늘어서고 있었다.
곧 쐐기형 대열이 완성되었다.
우리는 돌격대였고, 오물 한복판을 꿰뚫을 창이 됐다.
성채에서부터 들려오는 찬송가가 우리의 등을 떠밀었다.
“취이익! 출발하시구려!”
휴거가 신난 어조로 재촉하고.
“성자님!”
아론을 비롯한 기사들이 내게 신뢰를 내비쳤다.
기드마저 염려는 접어 두곤, 기대감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에 따라 나는 예봉(銳鋒)이 되어 걸음을 옮겼다.
눈앞에서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건 죄다 베어 냈다.
용맹한 기사들이 내 뒤를 받쳐 주었다.
우리의 걸음은 곧 뜀박질이 되었고, 이내 말 탄 기마대에 못지않은 돌진으로 변했다.
“크에, 엑!”
앞을 가로막는 괴물들의 살덩이가 허공을 날았다.
더러운 핏줄기가 땅에 흩뿌려졌다.
우리는 그 위를 짓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왈칵 솟은 신앙이 오물 한복판에서 빛났다.
적들의 추악한 형체가 여지없이 비춰졌다.
아가리가 수십 개나 달린 놈도 있었고, 온몸에서 점액질을 질질 흘려 대는 놈도 있었다.
갖가지 생김새를 한 녀석들이 부나방처럼 달려들었다.
그리고 전부 목이 따였다.
데구르르-
땅을 구르는 대가리를 군홧발들이 쉼 없이 짓밟고 지나갔다.
내 뒤를 따라오는 템플나이츠의 기세는 무척이나 거셌다.
그들은 양 떼 사이에 파고든 늑대처럼 거칠게 날붙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나는 그 늑대들의 우두머리였다.
가장 앞에 서서, 가장 거칠게 검격을 흩뿌렸다.
한창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돌연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괴물들의 살을 베어 내는 감각이 무척 불쾌한데 불쾌하지 않았다.
뜨겁고 더러운 피가 몸을 적시는 감각은 토기가 쏠리면서도 거북하지 않았다.
흥이 차올랐다.
“낙오하는 놈들은 용납 못해!”
검을 흩뿌리며 외쳤다.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마십시오!”
“호-르!”
“호오르으으!”
어쩌면 중독될지도 모를 기분이었다.
◈ ◈ ◈
“미친!”
리하르트가 뛰어내리는 걸 본 한스의 반응은 딱 이랬다.
그의 뒤를 따라 몸을 던진 템플나이츠를 볼 때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성벽 높이가 얼만데.
아니 그보다, 성벽 아래서 흉성을 들썩이는 괴물들이 대체 몇인데!
저건 영락없는 자살행위가 아닌가.
“서, 성자니임!”
한스는 당장 성벽에 뛰어내려 그들을 찾고 싶었다.
그에게 있어 유일한 희망인 리하르트를 이렇게 허무히 잃을 순 없었다.
그러나 한스에겐 성벽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것조차 쉽사리 하지 못할 일이었다.
대뜸 괴물의 아가리가 튀어나오면 어쩌나 전전긍긍하기만 바빴다.
한데, 성벽 위는 이미 한참 전에 지옥이 되었다.
한스가 밖으로 고개를 내밀지 말지 따위를 고민할 수 있을 만큼, 이곳은 한가로운 곳이 아니었다.
“으악!”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친 붉은 팔.
겁쟁이 병사 한스가 창대를 들어 막아 냈다.
운이 좋았고, 기적적이라 할 수 있었으나 그게 다였다.
우지끈-
부러진 창대가 마치 그의 미래 같았다.
‘빌어먹을!’
엉덩방아를 찧은 채, 자기에게 다가오는 괴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리하르트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죽을 위기에 처한단 말인가.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역시 자신은 이 성에 쓸모가 없었다고, 괜히 명부에 이름이 적히게 되었을 뿐이라고.
“크에에엑!”
괴물이 우악스러운 팔을 치켜들었다.
그 모습에 한스가 몸을 떨었다.
축축하게 젖은 가랑이가 무척이나 불쾌했다.
저열하고, 한심하고, 비참하게.
비운의 병사는 그러한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싫어, 싫다고!”
그가 몸을 굴렸다.
간발의 차로 떨어져 내린 괴물의 팔이 성벽을 때렸다.
콰앙!
사방으로 튀는 돌가루와 함께 흙먼지가 일어나 시야를 가렸다.
한스에겐 둘도 없을 기회였다.
그는 냅다 몸을 돌려 성벽의 계단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괴물 같은 건 잘나신 기사가 해치워 주리라 믿었다.
“윽…….”
마음은 전력으로 뛰라고 성화를 부리는데, 리하르트에게 걷어차였던 배가 유난히 욱신거리며 움직임을 방해했다.
“……젠장!”
스스로가 한심했다.
하지만 살고 싶었다.
얼 빠져 있을 거면 성벽에서 이탈하라고 했던가.
리하르트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이따위 지옥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얼 같은 건 평생이고 빼 놓을 수 있었다.
전투 전에 활활 타올랐던 사기는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봉신의 의무 같은 얄팍한 사명감은 공포로 가려진 채였다.
그때였다.
익숙한 기운이 성벽 너머로 느껴졌다.
다급히 놀리던 발이 멈췄다.
홀린 듯 고개가 돌아갔다.
성벽 너머에 이백 여 기사들이 보였다.
괴물 한복판을 노도같이 가르는, 리하르트와 템플나이츠.
진작 죽은 줄 알았는데.
죽기는커녕, 고작 이백의 기사가 이천의 괴물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 뒷모습에 두려움이나 망설임 따윈 보이지 않았다.
설령 저들의 몸에 묻은 피가 역병의 피일지라도.
저들의 살갗을 할퀸 것이 역병의 발톱일지라도.
기사들은 제 앞에 펼쳐진 진창을 기꺼운 얼굴로 헤엄치고 있었다.
“호-르!”
“호오르으으!”
핏물로 더럽혀진 리하르트의 외침이 성벽까지 닿았다.
뒤따른 템플나이츠의 포효가 메아리치며 전장을 울렸다.
그러자 성벽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호-르!”
“호-르!”
날붙이를 높이 치켜든 연합의 환호.
언데드 전쟁을 이겨 냈던 자들이 사기를 드높였다.
“호르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헬가의 지휘관이 구호를 외쳤다.
그렇지 않아도 동분서주하던 연합군이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한스나 왕실의 병력들에겐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깟 외침이 뭐라고.
그게 뭐라고 이렇게나 날뛰는 것일까.
“…….”
한스가 고개를 바로 했다.
성벽을 내려가는 계단이 코앞인데, 발이 전혀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깟 외침이라 치부했던 것이 양심이 되어 발목을 붙잡았다.
마음속에 그려진 한 줄기 선.
그 선을 놓고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이내 승패가 결정됐다.
“씨발…….”
결국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검 하나를 주워들었다.
“호, 호르……!”
그러곤 발걸음을 돌리며 힘껏 외쳤다.
몇 번 그렇게 반복하니 다 죽어 가던 용기가 움찔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호오오르으으으!”
목청이 터져라 외치는 그에게 병사들의 시선이 모였다.
곧 불씨가 옮겨 붙었다.
입술을 몇 번 움찔거린 병사들이 하나둘 따라 외쳤다.
어째선지 시위를 당기는 손이 빨라지고, 창칼을 휘두르는 팔에 힘이 실렸다.
“호-르!”
급기야 왕실 기사들까지 검을 치켜들었다.
성벽을 지키는 모두가 쉴 새 없이 포효했다.
리오 성에 불같은 사기가 퍼져 나갔다.
등불로부터 전해 받은, 리오 성만의 횃불이었다.
◈ ◈ ◈
내 앞을 막는 건 모조리 벴다.
그렇게 베고, 베고, 또 베니 괴물은 없고 어느새 언덕이 펼쳐졌다.
기어코 오물 한복판을 꿰뚫은 것이다.
“지치셨습니까?”
한차례 숨을 몰아쉬고 있자니 기드가 물어 왔다.
뭣하면 자리를 바꿔 드릴 수도 있다고 능청을 떨었다.
“늙은이가 욕심 부리면 못쓰는데.”
“끌끌…….”
난 걸음을 멈추지 않고 방향을 틀었다.
내 뒤의 기사들이 군소리 없이 따라왔다.
“다시 간다.”
적은 아직 널리고 널렸다.
우리는 이놈들을 전부 죽이려고 성을 뛰쳐나온 것이다.
“키에에엑!”
성을 향해 발광을 하던 괴물들이 이쪽을 노려봤다.
내가 뿜어내는 빛에 심기가 거슬린 듯, 리오 성이라는 진수성찬을 마다한 채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저 더러운 것들에게 둘러싸이면 곤란하다.
그래서 다시 뛰었다.
놈들의 피로 범벅되었던 몸에 뜨끈한 핏물이 재차 쏟아졌다.
주르륵-
거뭇한 오물이 흐르고 난 살가죽에 검은 멍이 피어올랐다.
역병의 증세였다.
이미 육신의 절반이 칠흑처럼 검게 물든 뒤였다.
찌르르 몸을 내달리는 격통에 관절까지 삐걱거렸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템플나이츠 전원이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
전투가 벌어지기 전부터 상정했던 일이었다.
아무리 돌격을 위해 단단히 대비했다고 한들, 지금 우리가 역병에 오염되지 않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신앙 품은 갑옷은 더럽혀졌고, 찢어진 살갗엔 놈들의 피가 스며들었으니까.
파아앗-!
뿜어낸 빛이 기사들을 감쌌다.
겨우 이 정도로는 한껏 물든 역병을 정화할 수 없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성자님!”
한참 적들을 베어 내는데, 아론이 나를 불렀다.
엉망진창이 된 그가 손가락을 들어 성을 가리켰다.
괴물들의 이목이 이쪽으로 쏠린 가운데, 성문이 열리고 있었다.
거기서 기사들이 우르르 쏟아지고 있었다.
연합의 사내도 있었고, 왕실의 사내도 있었다.
“자식들, 늦었잖아.”
별로 늦진 않았으나 괜스레 심술을 부렸다.
사실은 예정에도 없던 왕실 기사단의 등장이 반갑기도 했다.
마냥 새침데기 같던 그들의 얼굴이 지금은 제법 봐줄 만하게 바뀌었으니.
아무튼 이제는 전투를 끝낼 차례였다.
쿠구국-
나는 드래곤 투스 위에 오러를 엮었다.
신앙으로 짜여진 오러가 주변의 공기를 진동시켰다.
바쁘게 움직이던 템플나이츠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어울리지 않게도 괴물들까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한 번 달려들었으면 끝장을 봐야지.”
걸음을 내디뎠다.
오러 위에 다시 오러를 엮었다.
키이잉-
압도적인 예기에 주변의 대기가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소드마스터의 격에 올라, 처음으로 내어 보는 전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