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of the French Royal Family RAW novel - Chapter (45)
프랑스 왕가의 천재가 되었다 45화 왕자의 기세(45/355)
왕자의 기세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기온.
전형적인 파리의 봄날씨가 돋보이는 어느날.
오랜만에 리세 루이르그랑을 찾은 나는 더 이상 여기서 수업다운 수업은 받을 수 없을 것 같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학교측은 며칠 전부터 따로 준비를 했는지 거창한 환영회를 열었고, 선생들도 말 한마디 섞어 보려고 안달이었다.
사실 현대에서도 그랬지만 이 시대 역시 교육은 돈과 직결되어 있다.
양질의 학문을 다루는 것도, 이름난 강사를 초빙하는 것도, 어떤 주제로 연구를 시작하는 것도 전부 예산이 뒷받침 되어줘야 가능한 일이다.
학교가 굴러가는 연료는 결국 돈이며, 알게 모르게 학계에는 이미 자본주의적인 정서가 만연했다.
“전하! 이번에 저희의 주최로 열리는 학술회에 혹시 왕실의 이름으로 후원이 가능할지 검토를······.”
“태양왕께서 그러셨듯 전하께서도 학문의 새 지평을 여는 존재가 되시기를 기원······.”
내 위상이 나날이 커지고 있으니 학교측도 혹시라도 왕실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 기대하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굳이 여기에 돈을 쏟아부을 마음이 없었다.
현 프랑스 왕실의 재정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 원인은 왕실의 사치와 향략이 원인이 아니었다.
산업혁명 이후 한창 성장 중인 영국과 달리 아직 프랑스는 과거의 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했다.
아니, 성장하기는커녕 루이 14세부터 쌓여온 빚 때문에 질식하기 일보직전이었다.
루이 15세 시절에도 이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7년 전쟁에서까지 패배해 안 그래도 많았던 빚이 천문학적 수준으로 늘어나버렸다.
이제 소위 말하는 따서 갚으면 되잖아도 쉽게 시전할 수 없는 형국이 됐다.
뭐, 사실 내 개인만 놓고 보자면 왕실에 손을 빌리지 않아도 됐다.
백신의 특허로 산더미처럼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데다가 라부아지에가 추가로 돈을 굴려서 막대한 수익까지 얻은 덕분이다.
이 돈은 앞으로 쭉쭉 늘어나지 줄어들 예정은 아니라 내가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건 전혀 아니었다.
다만 이 돈은 앞으로의 미래를 고려하면 사용처가 확실히 정해져 있어 지금은 한 푼도 허투루 쓸 마음이 없다.
“지금은 검토해야할 사항이 너무 많아 여유가 없습니다. 차후에 느긋하게 시간을 내서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죠.”
대강 둘러댄 뒤 머리를 식힐겸 학교의 정원으로 나왔다.
물론 여기라고 딱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암살미수 사건의 반동으로 내가 움직일 때는 언제나 훈련을 받은 정예 호위들이 주변을 따라다녔다.
이들은 루이 15세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이들이라 내가 마음대로 물리지도 못한다.
“전하! 저번에 토론했던 주제에 대해 나름대로 답을 구해왔습니다. 언제 한 번 들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여기에 나를 알아보고 쪼르르 달려온 로베스피에르가 수다스럽게 말을 늘어놓았다.
그래도 그에게는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기에 짬이 나는대로 어울리며 열심히 호감도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공화정이 정말로 흠결없는 체제인가 생각해보라고 했던 것 말인가?”
“예!”
로베스피에르가 해맑게 대답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가 미래의 공포정치의 주역이라는 지식에 혼선이 오는 것만 같았다.
“자네가 들려줄 답을 기대하고 있겠네. 그러고보니 저번에 열린 재판에는 갔었나?”
“물론입니다. 전하께도 인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제가 낄 자리가 아닌지라 먼 발치에서 뵌 걸로 만족했습니다.”
“그렇군.”
“속이 뻥 뚫리는 것처럼 시원했습니다. 제가 폐하에 대해 그릇된 오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계기도 되었고요.”
로베스피에르는 내가 정원을 산책하는 내내 쉬지않고 재판에 대한 감상을 줄줄이 읊어댔다.
아직 어리긴 해도 그는 젊은 지식인 중에는 손꼽히게 똑똑한 학생이다.
이런 계층이 법복귀족들의 숙청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도 로베스피에르의 반응은 지극히 호의적이었다.
그만이 아니라 친하게 지내는 학생들 대부분도 다 같은 생각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런데 재판의 핵심 증인이었던 라부아지에 가문은 전하와도 가까운 사이지요? 그래서 학생들 사이에서는 전하께서 이 재판에도 중대한 역할을 하신 게 아닐까 하는 추론이 돌고 있습니다.”
“중대한 역할까지야. 그냥 라부아지에가 더 이상 법원의 비리를 봐줄 수 없다고 하기에 폐하와 연결시켜줬네. 그게 다야.”
“전 그것만 해도 대단한 결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원은 지금까지 전하의 뒤를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던 세력이 아닙니까. 대의를 위해서라면 자신에게 이득을 가져다주던 자들조차 잘라낼 수 있는 결단력! 이런 굳은 신념이야말로 전하가 다른 권력자들과 차별화되는 점이 아니겠습니까.”
대의를 위해 수많은 친우들과 정치적 동반자들을 줄줄이 단두대로 보내버린 사람이 그런 얘길 하니 확실히 무게감이 남달랐다.
왜 이렇게 엉겨붙나 했더니 설마
나를 자신과 동류로 판단해서 그런걸까.
그렇게 봐준다면 나로서는 나쁠 게 없지.
이대로 로베스피에르의 멘토 같은 포지션을 고수해서······.
“······?”
쭉 이어지던 상념은 저 멀리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익숙한 인영을 본 순간 뚝 끊겼다.
“···여기서 대체 뭐하는 거야.”
천진난만한 얼굴로 웃고 있는 여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아내.
원래라면 궁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어야 할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굉장히 수수한 드레스와 별다른 장신구를 걸치지 않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왕자비라고는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근처에 있는 수행원들의 얼굴은 이미 불안감으로 까맣게 죽어있었다.
눈치 빠른 내 호위들 역시 이를 악물고 그녀를 모르는 사람 취급하는 중이었다.
위엄을 잃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간 나는 황급히 마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쩌자고 그런 복장으로 여기 온 겁니까?”
“그렇지만 정식으로 궁 밖으로 나오면 그것만으로도 공식 행사가 돼버리잖아요. 그러면 여유롭게 구경을 할 수가 없으니까······.”
“구경이요?”
“예. 저도 학교라는 데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거든요. 특히 당신이 다니고 있는 곳인 데다가 3신분의 비중이 높은 곳이라고 하니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있어야지요.”
하긴 요새 일이 너무 바빠서 통 함께 있어주지 못했다.
변명이 아니라 진짜로 지금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일이 많았다.
모푸에게 은근슬쩍 바람을 넣어서 임용될 대법관의 성향을 내 구미에 맞게 조정하고, 언론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방법을 모색하고, 오를레앙 공과 샤르트르 공작에 대한 뒷조사까지.
잠자는 시간조차 줄여가며 구르는 중이었지만 변명을 해봐야 나만 나쁜 남편이 될 뿐이겠지.
기왕 이렇게 된 거 잠깐의 일탈을 마음껏 즐기게 해주는 게 도리가 아닐까 싶었다.
어차피 마리의 성격상 하지 말라고 해도 분명 어떻게든 몰래 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원 역사에서도 그렇게 사람들이 말려도 기어코 승마를 하겠다며 조랑말을 탄 사람이 아니던가.
“어쩔 수 없네요. 그러면 마침 시간도 남으니 내가 안내를······.”
“전하!”
그때, 호위의 가장 뒷열에서 병사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산통이 깨진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리며 그쪽을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또 무슨 행사 참석 요청이 들어온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폐하께서 보내신 전언입니다. 속히 베르사유로 입궁하라 하십니다.”
“지금 당장?”
급한 불은 다 꺼놨으니 이렇게 급하게 나를 찾을 이유는 없을 텐데.
무슨 변수가 생겼거나 아니면 전혀 새로운 문제가 터졌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이라도 마차에 오르려던 나는 반사적으로 마리의 안색을 살폈다.
실망했다기 보다는 혹시라도 큰일인가 싶어 걱정하는 얼굴이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로베스피에르를 불렀다.
“내가 지금 바로 폐하께 가봐야 해서 그러는데 자네가 나 대신 저분에게 학교와 주변을 안내해줄 수 있겠나? 아무래도 자네가 제일 믿을 만해서.”
“전하께서 절 믿어주셔서 맡긴 일이니 목숨을 걸고!”
“아···목숨까지는 걸지 않아도 되니까 최대한 신경써서 해주게. 저 분은 그러니까···공작가의 따님이신데 워낙 귀하게 커서 보통의 사회경험이 없거든. 그리고 내게도 엄청 중요한 사람이니 잘 부탁하네.”
“예! 맡겨주십시오.”
로베스피에르는 의욕이 넘쳐 보였고, 마리도 차질없이 관광을 계속할 수 있다는 말에 기뻐했다.
로베스피에르와 마리를 한 자리에 놔두고 가는 게 괜찮을까 싶었지만, 지금 시점에서야 별 문제는 없겠지.
로베스피에르는 아직 혁명가가 아니고 마리도 국민 밉상인 왕비와는 거리가 먼 이미지니까.
나는 마리에게 저녁까지는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그대로 마차 위로 올랐다.
이번에는 또 어떤 사건이 나를 부르고 있는 걸까하는 모 명탐정의 심경으로.
※※※
크리스티앙이 탄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던 마리는 이내 로베스피에르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 학교의 학생이시죠? 보니까 남ㅍ···이 아니라 왕자 전하와 남다르게 친해 보이시던데 맞나요?”
“그, 그렇게 보이셨습니까? 감사합니다. 하하하.”
“여기가 프랑스 최고의 명문학교 중 하나라고 하던데 그러면 학생분도 굉장히 뛰어난 지식인이시겠네요.”
“과찬이십니다. 전하께서 지니신 식견에 비하면 저야 하찮은 범부에 지나지 않지요.”
로베스피에르가 얼굴이 빨개진 채 어쩔줄을 몰라했다.
총명한 학생이라고는 해도 아직은 어린 소년이다.
연상의 미녀가 해맑은 얼굴로 던지는 칭찬 세례에 면역이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로베스피에르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학교 시설과 주변을 안내하며 성실한 설명까지 곁들였다.
마리는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별거 아닌 광경을 볼 때도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신기해했다.
로베스피에르로서는 처음 겪어보는 반응이었다.
‘대체 얼마나 온실 속 화초처럼 컸기에···혹시 파리 시내로 나와보는 게 처음인가?’
뒤를 따라오는 수행원들이 초조해하는 모습도 뭔가 수상쩍었다.
원래 공작가 정도의 신분이 되면 저런 것인가.
태어나서 공작가의 인물은 만나본 적도 없는 로베스피에르로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다음에는 저쪽 건물로 가볼까요? 아직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이 있을 겁니다. 그래도 멀리서 조용히 구경하는 정도는 괜찮겠죠.”
“와~기대 되네요.”
마리가 방긋 웃으며 따라붙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가씨 같지만 로베스피에르는 딱히 거부감을 느끼진 않았다.
일단 크리스티앙 왕자와 친하다는 점에서 가산점이 붙었다.
거기에 무엇보다 예쁘고 자상하다.
이 나이대의 소년에게는 무엇보다도 그게 중대 사항이었다.
“그런데 왕자 전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은가요?”
“물론입니다! 그분을 흠모하지 않는 학생이 있을리가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돌아오자 마리가 쿡쿡 웃었다.
“그 얘기도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전하에 관한 이야기라면 밤새도록 할 수도 있으니까요. 여기 학생만이 아니라 파리의 시민들도 전부 전하를 사랑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분은 언제나 시민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시니까요. 그러니 그분께서 오스트리아 여자를 왕자비로 들인 것조차 사람들이 담담히 넘어가는 거겠지요.”
생글생글 웃고 있던 마리의 표정이 처음으로 흠칫 굳어졌다.
“···오스트리아인과 결혼하는 게 그렇게나 큰 흠결이 되는 건가요?”
“이를 말씀입니까. 프랑스가 합스부르크와 얼마나 오랜 기간 척을 지고 있었는데요. 영국 정도는 아니라도 그 오랜 악감정이 결혼 좀 했다고 풀릴리가요.”
“그렇군요. 그럼 그 왕자비에 대한 인식도 별로 좋지 않겠네요? 시민들은 그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어떻게고 자시고 프랑스 사람이라면 다 같은 심정이겠죠. 아! 우리 왕자 전하에게 오스트리아인 묻었어! 뭐 대충 이런 느낌 아닐까요? 이름도 그렇죠. 마리 앙투아네트라고 했었나요? 프랑스식이긴 해도 숨길 수 없는 오스트리아인의 느낌이······.”
말을 이어가려던 로베스피에르는 마리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걸 보고 순간적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저건 분명히 뭔가에 상처를 받은 표정이었다.
자세히 보아하니 울음을 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크리스티앙이 중요한 사람이니 잘 대해주라고 한 사람을 울려버린다면?
그날로 자신은 왕자의 눈밖에 나는 게 확정이다.
대체 자신이 뭘 잘못 말했는지 맹렬히 머리를 굴려 추론하던 그는 한 가지 위화감을 느꼈다.
오스트리아인 왕자비의 인식이 좋지 않다는 건 파리 시민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아무리 공작가의 금지옥엽이라고 해도 당연히 알고 있을 텐데.
게다가 생면부지 남의 인식이 좋지 않다고 저렇게 안색이 좋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어딘가에서 본 듯한 느낌도 드는데······.’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인 건 확실하다.
이건 낯이 익은 게 아니라 먼 발치에서 몇 번인가 본듯한 그런 느낌에 더 가까웠다.
게다가 여인의 프랑스어는 억양이 묘하게 어색한 부분이 군데군데 있었다.
거기까지 추론한 로베스피에르는 어떤 가능성을 떠올렸다.
크리스티앙이 중요한 사람이니 잘 대해줘야 한다고 신신당부한 이유는 역시 그것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
“마리 앙투아네트···오스트리아의 느낌이 물씬 풍기면서도 프랑스 식의 이름이라 고귀하면서도 우아하지 않습니까? 왕자 전하와 어울리는 품격 있는 인상이란 느낌입니다.”
“···예? 아, 뭐···그런데 오스트리아 사람의 인식이 그 정도로 좋지 않으니······.”
“그게! 일반적인 인식이겠지만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건 왕자 전하의 옆에 계신 분께서 어떤 마음으로 프랑스의 백성들에게 다가가냐는 것이겠죠. 왕자 전하의 인기가 워낙 좋으시니 왕자비께서 정말로 프랑스 백성들을 위한다면 그 진심은 자연스레 전해지지 않겠습니까.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건 바로 이런 진심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네, 그렇고 말고요.”
거의 마구처럼 휘어진 절묘한 변화구에 울상이던 마리의 안색이 조금이나마 펴졌다.
“정말로 그럴까요?”
“물론입니다. 제가 왕자비 전하께서 어떤 분이신지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왕자 전하의 여인이시니 분명 마음씨가 따스한 분이시겠죠. 국적 뭐 그런 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하하······.”
“그렇군요. 진심으로 다가가는 게 중요하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서 중얼거리는 마리를 보며 로베스피에르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자신도 모르게 애먼 포탄에 맞고 사망하는 최악의 경우만큼은 피한 듯 싶었다.
※※※
루브르 궁 북쪽에 위치한 대저택 팔레 루아얄은 100여년 전부터 오를레앙 가문의 본거지로서 기능해 왔다.
샤르트르 공작은 자신이 오를레앙 공에 오르면 이 저택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세력확장을 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건 자신이 아버지의 모든 걸 물려받은 뒤의 일이다.
일단 지금 해야 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
루이 크리스티앙.
갑작스레 나타난 그의 존재가 샤르트르 공작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대체 이런 인물이 어디서 뚝 떨어졌는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 너는 법복 귀족들의 숙청의 배후에는 크리스티앙 왕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버지 오를레앙 공은 샤르트르 공작이 직접 작성한 보고서를 흥미롭게 읽어보았다.
“예. 여러 번 떠봐도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수고했다. 이만 가서 쉬거라.”
샤르트르 공작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갔다.
방문이 닫히자 자애로워 보이기만 하던 오를레앙 공의 표정이 싹 변했다.
“···역시 그랬군. 하긴 처음부터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한편, 지금까지 한 마디도 입을 뻥긋하지 않고 있던 시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에스터하지가 일을 똑바로 처리하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러게 말이야. 입만 번지르르했지 아무짝에도 쓰잘데기 없던 놈이었어.”
“새로운 체스말을 알아볼까요?”
“아니.”
오스트리아에서의 계획은 솔직히 완벽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끼어든 변수인 루이 크리스티앙을 암살하고, 그 범인인 에스터하지의 입도 막는다.
그리고 그 계획을 일부러 오스트리아측에서 알 수 있게 흘리기까지 해놓았다.
자연스럽게 외교 관계는 박살 날 테고 결혼 동맹도 파탄.
왕실의 명예는 실추되고, 왕세자의 입장도 곤란해지게 만들 수 있는 환상적인 한 수였다.
그런데 그 계획이 완벽하게 틀어막혔다.
아니, 막힌 걸 넘어서 루이 크리스티앙은 이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철저하게 이용해먹고 있는 중이었다.
“어쩌면 왕자는 배후에 우리가 있을 거라는 의심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지금은 엎드려 있어야 할 때야.”
상대방의 능력은 상상 이상이다.
인정해야 했다.
오를레앙 공은 자신이 최악의 적을 만드는 실수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걸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아마 국왕은 이번에 논의되는 그 일도 왕자에게 수습을 맡기겠지. 지금은 그의 일처리 솜씨를 지켜보고 대책을 생각해보는 게 최선일 게야.”
“하지만 왕자가 이번 일마저 완벽하게 해낸다면 그 입지가······.”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신중하게 나갈 수밖에. 잘못해서 꼬리가 밟히면 이쪽도 법복귀족들처럼 그 웃기지도 않은 기구에 목이 날아가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야.”
오를레앙 공은 그렇게 말하며 시종이 올렸던 보고서들을 불태웠다.
화르륵.
지금까지 세웠던 계획들은 한 줌의 재가 된 문서와 같이 백지로 되돌렸다.
그는 아들이 품고 있는 야심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잘 알았다.
분가이긴 해도 그들 역시 부르봉 왕가의 일원.
자신은 이미 욕심을 버렸지만 아들은 분명히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적법한 계승권자들을 재기할 수 없게 흠집을 내거나 치워버린다면 다음 차례는 아들에게 돌아갈 터.
그렇다면 아버지로서, 그리고 가문의 수장으로서 아들의 앞길에 장애물이 될만한 것들은 치워두는 게 자신에게 주어진 숙업일 것이다.
혼란으로 치닫고 있는 프랑스의 정국은 위기이긴 하지만 기회로 작용할 수도 있다.
확실한 건 지금은 움직이기 좋은 시기가 아니다.
오를레앙 공은 까맣게 쌓여가는 잿가루를 응시하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상대는 기회를 최대로 이용할 줄 아는 자···당분간은 웅크릴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