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Hidden Powerhouse Of The British Empire RAW novel - Chapter (121)
대영제국의 숨은 거물이 되었다 121화(121/537)
결혼해주세요
대영제국의 국서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만 한다.
이건 법으로 강제 된 사항은 아니지만 당연히 모두가 지켜야 할 규범으로서 인식되어 왔다.
사실 법으로 강제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법보다 훨씬 더 강한 구속력을 발휘하는 규칙의 사례는 넘쳐난다.
특히 전통을 중시하는 상류층 사회일수록 이런 경향은 더 강했다.
즉, 내가 아무리 죽었다 깨어나봐야 국서가 되면 장관직에서는 내려올 수밖에 없다.
그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최대한 준비가 될 때까지는 빅토리아와의 결혼을 미루려 했던 것이고.
“폐하. 하지만 결혼을 해도······.”
“아니, 잠깐. 거기까지. 당연히 장관···아니, 킬리언도 생각이 있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일단 돌아가서 생각을 정리해줬으면 좋겠어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생각을 정리해볼게요.”
“예?”
이건 또 뭔 소리래. 최대한 빠르게 와달라며 부르더니 이제는 돌아가라니.
“이해가 안 될 수 있겠죠. 그래도 일단 오늘 부른 건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려주기 위해서였어요. 그리고 나와 함께 하는 게 킬리언에게 어떤 리스크가 있는지, 그리고 휘그당이 그걸 노리고 당신을 추천한 게 맞는지 확인해보고 싶었고요.”
“그렇군요. 하지만 저는 지금이라도 대답을 들려드릴 수 있는데.”
“내가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요. 솔직히 말하면 킬리언의 대답 여하에 따라 나는 별다른 고민이나 고찰 없이 결론을 내버릴 수도 있겠죠. 그게 싫은 거에요.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줄 수도 있는 문제를 내가 스스로 고민하지 않고 답을 낸다면 어떻게 떳떳할 수 있겠어요?”
그런거였구나.
다시 말해서 내가 다 계획이 있으니 걱정말라고 하면 빅토리아는 ‘역시 킬리언~믿고 있었다고!’ 하면서 바로 결혼을 진행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결국 내가 알아서 리스크를 해소시켰기 때문일뿐.
빅토리아는 결혼이라는 중대사에 그렇게 숟가락만 얹어서 묻어가고 싶지 않은가 보다.
하긴 그녀가 내가 많은 리스크를 짊어져야 한다는 걸 모르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갈 수 있는 성격은 아니지.
그만큼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 기특하기도 하고.
“그러면 저도 나름대로 생각을 한번 더 정리해보고 있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그리 길지는 않을 거에요. 짧으면 하루, 길면 이틀?”
“부담 가지지 마시고 더 천천히 고민해 보셔도 됩니다. 저는 그러면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나가보겠습니다.”
빅토리아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두는 사이 나는 당 내부를 단속해두면 되겠지.
설마하니 빅토리아가 폭주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으로 대비해둔 대책을 휘그당의 전략을 받아치는 용도로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결혼이라···최소 3년은 이른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언급이 되니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
전생에서도 결혼을 해본적은 없었는데 설마 나 진짜로 이번에는 유부남이 되는 건가?
아니, 감상에 빠지기엔 아직 이르다.
이 중대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부터 확실히 방침을 정해둬야지.
켄싱턴 궁전을 나온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웰즐리의 타운 하우스 쪽으로 마차의 방향을 돌렸다.
그래도 정확히는 아니지만 대충 미리 말해놓긴 해서 다행이네.
그런다고 해서 웰즐리가 받을 충격의 양이 딱히 적어지지는 않을 것 같지만.
* * *
킬리언을 내보낸 뒤 빅토리아는 넓은 방 안에 홀로 남아 호화로운 가구를 멍하니 둘러보았다.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면 이런 방 안에서도 그와 함께 지내게 되는 걸까.
배속 안쪽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의 준비를 한 덕분인지 가슴과는 다르게 머리는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국서···국서라.”
킬리언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야망이 강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쭉 지켜보고 내린 결론이었으니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걸 선호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는 언제나 권력의 중심에 있었고, 이 나라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서가 된다면 그런 행보에 제약이 걸리게 된다.
물론 여왕의 남편으로서 지금보다 많은 걸 누릴 수도 있을테지만 그건 킬리언이 원하는 인생과는 조금 거리가 있을 터.
그럼에도 결혼을 하라는 건 나의 행복을 위해 네가 희생 좀 하라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킬리언이라면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러면 문제 없잖아.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게다가 분위기를 보아하니 지금 킬리언은 분명 자신과 결혼할 때를 대비해 어떤 묘책을 준비해두었음이 틀림없다.
솔직히 기뻤다. 그것도 아주 많이.
저쪽이 피해를 입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마음놓고 결혼하자고 해도 걸릴 게 없겠네? 라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진 게 사실이었으니.
하지만 동시에 또다시 그런 마음으로 그이에게 기대려는 자신의 안일함이 부끄럽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 처음 만난 이래 자신은 항상 1살 더 어린 연하의 소년에게 의지해왔다.
그렇게 쭉 성장해 왔으니 마음 한구석에서는 나를 위해서 그이가 어떻게든 해주겠지 하는 마음을 뗠쳐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 앞으로도 쭉 그렇게 살려고?”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앞으로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심지어 부부가 아닐 때조차 그렇게 해주었는데 부부가 된다면 더 말할 것도 없지 않나.
마음껏 의지하고 부탁해도 지금처럼 잘 들어주겠지.
“아니지.”
이런 게 바로 자신의 발전을 좀먹는 나쁜 생각이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악영향이 올 수 있으니 자제하는 게 좋다.
빅토리아는 천천히 눈을 감고 앞으로 예상되는 문제점들을 짚어나갔다.
킬리언이 말했다시피 결혼을 하게 되면 그는 장관직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보수당과 가까운 사이로 지낼 수는 있어도 지금처럼 대놓고 그들을 밀어줄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결혼 명분 자체가 아일랜드 포용인 이상 그쪽으로 뭔가 방법이 있을 것도 같은데······.”
킬리언이 어련히 알아서 돌파구를 마련해놓겠지만 이쪽은 대영제국의 여왕이다.
분명히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어떤 묘수가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헛된 고민을 하는데 소비한 시간이 아까워졌다.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여러 장의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쳐두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구상들을 일단 마구잡이로 적어내려갔다.
이걸 하나하나 쭉 분석하다 보면 적어도 한가지쯤 쓸만한 게 나오겠지.
역시 아무리 고민해 봐도 그녀가 내릴 결정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글래드스턴에게 제의를 받았을 때부터.
아니, 그 옛날 이튼에 갔을 때 처음으로 그를 본 순간부터.
운명은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 * *
웰즐리와 만나 앞으로의 방향을 논의한 바로 다음 날.
빅토리아는 그녀가 뱉은 말대로 딱 하루만에 다시 나를 궁전으로 불렀다.
응접실이 아닌 개인방에서 나를 맞이한 그녀는 이전보다도 훨씬 더 긴장되고 뻣뻣한 얼굴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오랜만, 아니. 하루만···아니,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어쨌든 어제는 잘 잤나요?”
“여러 가지 생각할 게 많아 그렇게까지 푹 자지는 못했습니다. 폐하께서도 아마 그러신 것 같네요.”
“그렇긴 하네요. 솔직히 말하자면 두 시간도 채 자지 못한 거 같아요.”
“그렇게까지 무리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아뇨. 무리를 해야했어요. 그리고 오히려 좋아요. 지금부터 해야 할 말을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살짝 정신이 몽롱한 상태가 오히려 더 나으니까요.”
빅토리아는 커피를 마치 술처럼 한잔 쭉 비우고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어떤 말을 하려는지 서로가 짐작을 하고 있는 상태인데도 이렇게 운을 떼기가 힘들다니 뭔가 비이성적이지만 그렇기에 낭만이라는 게 있는 거겠지.
“폐하. 제가 말씀을······.”
“아니. 이건 꼭 내가 먼저 말해야겠어요. 그···조금 뜬금없이 들리겠지만 킬리언은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죠?”
“예. 이튼에서였죠. 폐하와 차를 마시면서 카드 마술로 메세지를 전달해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이전에 마차에서 내렸을 때도 눈이 마주쳤어요. 사실 세실리아에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서 킬리언이라는 사람이 누구일지 조금 궁금한 상태였었거든요.”
기억이 가물가물한 상태였는데 이제 확실히 기억이 난다.
그때 분명 시선이 딱 마주치고 혹시라도 나를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가 무슨 바보같은 자뻑이냐며 헛웃음을 흘렸었지.
그런데 그게 도끼병이 아니라 사실이었다니 나름 반전이라면 반전이네.
“폐하 덕분에 조금 무료했던 학창 생활이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사실 지금은 폐하도 다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폐하와 가까워 지고 싶어서 대놓고 접근한 거였거든요.”
“그렇겠죠. 그래도 덕분에 나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에 너무나 큰 위로를 받았고 삐뚤어지지 않게 잘 성장할 수 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킬리언에게 배운 지식 덕분에 지금 이렇게 여왕으로서 존경받을 수 있게 되었고요. 몇 번을 감사해도 모자랄 정도로···나는 킬리언에게 인생을 구원받은 거에요.”
감정이 북받쳤는지 그녀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돌려준 적이 없는 거 같아요. 항상 도움을 받기만 하고 의지만 하고······.”
“아닙니다. 아일랜드 건도 그렇고 내각 불신임 때도 그렇고 폐하께서 많은 도움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당신이 해준 일에 비하면 정말 작은 일에 불과할 뿐이에요.”
“루타바가를 생으로 드신 게 절대 작은 일은 아니죠. 솔직히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아, 그거 진짜 맛없었는데···맞아요. 정정해야겠네요. 나도 나름대로 은혜를 갚기 위해서 열심히 한 거 같긴 해요.”
열심히 한 정도가 아니라 최근에는 거의 애정 페이로 혹사를 당한 수준이었지.
오죽하면 내가 미안해서 눈치를 봤겠는가.
“어렸을 때도 제가 폐하게 도움을 드리긴 했지만 폐하께서도 그에 못지 않게 제게 도움을 주셨습니다. 폐하를 가르치는 시간은 즐겁기도 했으니 제가 딱히 일방적으로 봉사를 한 건 아니고요.”
“나도 항상 찾아오는 사람이 킬리언이라서 좋았어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휘그당에서 킬리언과 결혼하는 게 어떠냐 물어봤을 때 그 자리에서 알겠다고 승낙하고 싶었어요. 그러지 못했던 건 이 결혼이 당신에게 족쇄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서에요.”
“그건 제가 어제 말씀드렸다시피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나름대로 생각해둔 바가 있으니까요.”
“그랬겠죠. 킬리언 고어가 어떤 사람인데 당연히 생각해둔 바가 없지 않을 거에요. 하지만 그게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분명 내 이런 욕심 때문에 당신이 하지 않아도 될 수고를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요?”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지금까지 티를 내지는 않았을 뿐, 빅토리아 역시 적지 않은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좋아하니 결혼은 하고 싶은데 그 결혼이 상대방의 커리어를 끝장낼 수도 있다고 하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폐하. 제가 정말로 싫었다면 이렇게 대책을 마련해두는 게 아니라 폐하와 거리를 뒀을 겁니다. 그러니 제가 좋아서 한 일에 부담감을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알아요. 하지만 지금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킬리언에게 계속 부담이 가해질 수 있어요. 나와 함께한다는 건 결국 그런 거니까. 하지만 그럼에도···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염치 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나는···킬리언이 계속 내 옆에 있었으면···좋겠어요.”
마지막 말은 거의 기어들어갈듯한 작은 소리였지만 그래도 확실히 들렸다.
“폐······.”
“잠깐. 내 말 아직 안 끝났어요. 그러니까 물론 일방적으로 부담을 지라는 그런 말은 아니에요. 나도 최대한 이 결혼이 킬리언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아끼지 않을 거에요. 여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거고, 필요하다면 정치적 개입으로 여겨질 수 있는 일까지도 망설이지 않을 거에요. 이미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름대로 방법도 다 생각해놨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드레스를 주름이 생길 정도로 꽉 쥐며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던 그녀는 이내 결심한듯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랑합니다. 평생 내 곁에 있어주세요.”
어떤 멋들어진 수식어나 꾸미는 말도 없었지만 그래서 더욱 무거운 고백.
내가 여기에 뭐라고 더 말을 보탤 수 있겠나.
그래서 그냥.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나의 여왕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