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Hidden Powerhouse Of The British Empire RAW novel - Chapter (522)
대영제국의 숨은 거물이 되었다-522화(522/537)
< 영원을 향해서 (2) >
“총리님,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묵묵하게 준비를 마친 웰즐리는 비서들이 입혀준 정장을 입고 거울을 한번 바라보았다.
최고급 원단을 사용해 만든 완벽에 가까운 맞춤 정장.
하지만 아무리 고급 양복을 가져다 입혀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노쇄한 모습까지는 가려주지 못한다.
“하나 둘씩 떠나보내는 게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는군. 차라리 일찍 가버리는 게 더 편할지도 모르겠어.”
“그런 말씀 마십시오. 총리님께서는 아직 정정하시지 않습니까.”
“정정은 무슨. 아침마다 무릎이 쑤셔서 죽겠는데”
불과 며칠전에 킬리언과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면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는데 오늘은 이렇게 동료의 장례식에 나가야 하는 입장이다.
이 또한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면 씁쓸하긴 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겠지.
그는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마차에 올랐다.
요새는 개인용 자동차의 시대다 뭐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는 아직도 말이 끌어주는 마차가 더 좋았다.
어쩌면 이것 또한 나이가 먹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뭐라더라, 킬리언이 예전에 하던 것만 계속하고 새로운 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나이가 든 거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별다른 반론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보니 너무 뼈아픈 지적이라 아무 말도 못했던 건지도 모른다.
“도착했습니다.”
“그래, 수고했네.”
웰즐리는 디즈레일리의 장례를 국장으로 열고 싶어했지만 너무나 많은 인파가 몰릴 걸 우려해 어쩔 수 없이 계획을 포기했다.
대신 총리와 빅토리아 황제, 그리고 킬리언과 황태자 에드워드까지 참가했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화려한 장례식은 없을 것이다.
온갖 핑계를 대며 추도사를 읽지 않을 거라는 디즈레일리의 예측과는 달리 글래드스턴은 의외로 순순하게 장례식장에서 추도사를 읽었다.
애초에 아무리 사이가 나빴다고 해도 보수당의 지도자는 엄연히 자신이었으니 글래드스턴 역시 디즈레일리는 진심으로 적대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글래드스턴이 추도문을 읽는 동안 웰즐리는 옆에 앉은 킬리언을 힐끗 바라보았다.
우수에 가득 찬 눈빛으로 디즈레일리가 쉬고 있는 관을 응시하는 표정을 보니 여러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제임스가 죽었을 때는 약간 혼이 빠져나간 거 같았는데 그렇게 따지면 이런 감정도 경험이 쌓일수록 익숙해지는 걸까.
자신과 그 중 누가 먼저 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이 차이를 고려하면 십중팔구는 자신이 먼저 가게 될 것이다.
그때는 이것보다는 더 슬퍼해줬으면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냥 우중충하게 축 쳐져 있는 것보다는 축제에 가까운 분위기로 자신을 보내줬으면 하는 상반된 감정도 들었다.
“···숨을 거두기 전에 본 마지막 사람이 폐하셨다면서요?”
“그랬죠.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다시는 못볼 사이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 정도로 기력이 있어보였거든요.”
“마지막 불꽃이었던 모양이네요. 그래도 이야기를 들어보니 웃으면서 갔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마지막에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전부 들려줬거든요. 안 그랬으면 크게 후회할뻔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쟁쟁한 사람들의 애도를 받으며 마지막 길을 떠나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게다가 병으로 질질 끌면서 계속 고통받다가 죽은 것도 아니니 이 정도면 충분한 호상이다.
다만 웰즐리는 이제 디즈레일리가 죽었으니 당의 분위기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고민이 많아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치적인 파장을 1순위로 고려하는 걸 보면 자신 역시 완전히 정치에 뇌가 절여진 인감이 된 게 틀림없다.
하긴 총리로서 살아온 시간이 그렇지 않은 시간보다 길어지려고 하는 걸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그러나 박수칠 때 무대에서 내려가라는 말이 있듯이 이제는 슬슬 정리를 해야 할 시기가 오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마지막까지 꾸역꾸역 총리직을 지키다가 관저에서 켁 하고 죽어버리는 것과.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내려가 안락하게 여생을 즐기다가 조용히 눈을 감는 걸 비교하면 후자가 압도적으로 그림이 좋지 않은가.
당장 킬리언도 지금 에드워드에게 많은 일을 맡기고 2선으로 물러났는데 이쪽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뭔가 억울하기도 하다.
그는 모든 행사가 마무리 된 이후 마차로 돌아가려고 하는 킬리언을 붙잡았다.
“폐하, 혹시 오늘 일정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오늘은 다 비워뒀는데요.”
“그러면 오늘은 저하고 좀 시간을 보내시는 게 어떨까요? 저도 오늘 하루는 일정을 싹 비워뒀거든요.”
“총리가 그래도 되는 겁니까?”
“저는 그래도 됩니다. 저보다 총리질 더 잘할 자신 있는 사람 있다면 나오라고 하세요. 언제든 물려줄 테니까.”
“그럼 오늘은 총리님과 우리의 친구 디즈레일리를 애도하며 한잔 걸치도록 할까요? 가시죠.”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킬리언은 빅토리아와 에드워드를 먼저 보낸 뒤 웰즐리의 마차를 힐끗 보더니 나직하게 혀를 찼다.
“제가 자동차 한대 보내드리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왜 아직도 마차를 끌고 다니세요?”
“그건 엔진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요.”
“그런 신기술이 널리 상용화 되려면 총리님 같은 사람이 앞장서서 타고 다니셔야죠. 전 사람들 많은 곳 갈 때는 일부러 자동차를 타고 간다는 말입니다.”
“저도 공적인 자리에 참가할 때는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래도 오늘은 사적인 자리니까 상관없지 않을까요?”
킬리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잠시간의 침묵이 감돌았지만 웰즐리도 킬리언도 딱히 이걸 어색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장장 50년 이상이나 만나다 보면 침묵조차도 일상의 한 부분이 되기 마련.
이건 부부에게만 국한된 일은 아니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있던 킬리언이 문득 창밖의 경치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겁니까? 여기는 관저로 가는 방향이 아닌데요. 딱히 총리님 자택으로 가는 것 같지도 않고.”
“기왕 시간을 보내는 거 의미 있는 장소로 갈까 해서요.”
한 15분 정도 마차가 더 나아가자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잦아들며 마차가 멈춰섰다.
문을 열고 내린 킬리언은 자리에 못박힌듯 눈 앞에서 보이는 건물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여기는···.”
“그리운 장소 아닙니까. 우리가 처음 만난 장소이기도 하고 따지고 보면 여기가 바로 모든 게 시작된 장소니까요.”
사기를 당하는 줄도 모르면서 호구처럼 돈을 뜯기고 있던 자신에게 웬 맹랑한 꼬맹이가 와서 도와주겠다고 말한 수십년 전의 바로 그 날.
이곳에서 바로 두 사람의 위대한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은 카지노가 아닌 VIP들을 위한 사교클럽으로 바뀌었지만 그들이 간단한 카드 게임 같은 걸 즐길만한 장소는 아직 남아있었다.
“오늘은 폐하와 둘이서만 즐길려고 미리 대관을 했습니다. 어떻게, 오랜만에 옛날 기억이나 더듬어 볼 겸 포커 한판 치시겠습니까?”
“그럴까요? 이거 옛날 생각 나고 좋네요.”
“딜러는 여기 클럽의 직원이 맡아줄 테지만 둘이만 치면 재미 없으니까···어디, 자네들도 와서 좀 같이 하지.”
“여, 영광입니다!”
대영제국의 최고 실세 두 명과 카드게임을 친다는 사실에 바짝 얼어붙은 수행원들이 쭈뼛쭈뼛 다가와 자리를 잡았다.
웰즐리는 오랜만에 떨리는 마음으로 딜러에게서 카드를 받아들었다.
“오, 시작부터 좋은데요? 그냥 치면 재미없으니까 간단한 내기도 해보면 어떨까요?”
“지금 이 나라의 총리님이 황실의 국서에게 내기 도박을 제안하는 겁니까?”
“왜요. 혹시라도 질까봐요? 물론 그런 거라면 저도 이해합니다.”
“나원, 눈앞에서 사기를 당해도 전혀 눈치 못채던 분을 겨우 사람 구실하게 만들어준 게 누구인지 생각이 안나시나 본데. 수행원들도 다 보고 있으니 적당히 힘조절 하면서 쳐드리겠습니다.”
킬리언은 자신만만하게 카드를 집었지만 원래 포커는 판수가 쌓이기 전 초반은 운에 상당히 좌우되기 마련.
“풀 하우스네요! 하하하하! 제가 이겼습니다.”
“어라? 이번에는 플러쉬? 오늘은 운이 좀 따라주네요.”
예상보다 카드가 손에 잘 붙은 웰즐리는 무난하게 칩을 가져갔고, 반대로 킬리언의 테이블에 놓인 칩은 계속해서 줄어들어갔다.
“이상한데 이거···총리님 미리 딜러랑 짠 거 아닙니까?”
“제가 미쳤다고 폐하를 상대로 사기게임을 하겠습니까. 이거이거 우리 폐하께서 그동안 너무 열심히 국정을 돌보시느라 실력이 팍 죽어버리셨나 봅니다.”
“···어디 두고 봅시다.”
진짜로 긁힌 킬리언이 진지하게 집중하기 시작하자 역시나 웰즐리는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사전에 분배한 칩을 죄다 털리고 패배했지만 오히려 신이 난 건 웰즐리였고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킬리언이었다.
“원래 제가 폐하를 못이기는 게 당연하죠. 그래도 나름 선전했으니 만족합니다. 하하하!”
“이게 진짜 내기 도박이었으면 총리님은 가진 돈 다 털렸을 텐데 뭐가 선전입니까?”
“하지만 내기 도박을 받아들이지 않은 건 폐하신데요?”
“아니 일국의 총리와 국서가 내기 포커를 치는 게 말이나 되냐고요.”
“그럼 다음 게임은 우리끼리 느긋하게 하기로 할까요?”
수행원들에게 다시 밖에서 대기하라고 명령을 내린 뒤 웰즐리는 의자에 비스듬하게 앉아 카드를 휙휙 섞었다.
“옛날에 폐하께서 보여주신 그 뭐였더라···중장 빼기? 밑장 빼기? 그게 진짜 대단했었는데···아, 그런데 혹시 방금전에도 그 기술을 쓰신 건 아니죠?”
“그게 아무 준비 없이 휙휙 되는 게 아니에요. 작정하고 하면 할 수 있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이겨야만 하는 장소도 아니고.”
“그러면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상황이었다면 쓰셨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써야죠.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자리라면.”
킬리언이 웰즐리가 섞고 있는 카드를 넘겨 받더니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다섯장을 손가락으로 튕겨서 던져주었다.
반사적으로 확인을 해보니 5장의 카드는 무려 스페이드의 A, K, Q, J, 10.
분명히 자신이 섞은 카드를 받았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줄 수 있는지 의문이었지만, 이게 킬리언이었으니 새삼 무엇을 놀라겠는가.
“생각해 보면 폐하와의 동행도 딱 이런 느낌이기는 했습니다. 정치라는 건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혼돈과도 같은데 폐하는 언제나 자신이 뽑고 싶은 카드를 가져가듯 최선의 결과만을 끌어냈죠.”
“그건 총리님 덕분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여당과 황실이 한팀이었는데 정국을 주도하지 못한다면 그게 더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죠. 저나 폐하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힘이 더해진 덕분에···아, 그러고 보니 우리 친구 디즈레일리도 폐하께서 데려온 사람 아니었습니까?”
“그랬죠. 크게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참으로 새삼스러운 생각이긴 하지만 킬리언의 안목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었다.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경제, 문화, 과학, 심지어 의료쪽에서까지 그가 찍은 사람들 대부분이 지금 엄청난 성과를 보이고 있지 않나.
사람을 보는 눈이라면 자신도 어느정도 숙달됐다고 자신했지만 역시 저 사람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할 뿐이다.
마치 처음부터 대성할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장바구니에 주워담는다고 해야할까.
디즈레일리 역시 그렇게 킬리언의 보석함에 장식된 사람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럼 그때 이곳에서 저 역시 크게 될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접근하셨던 겁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건 아닌데요.”
“엥?”
이건 또 예상외의 답변이라 음정이 튀었다.
당연히 총리님이라면 이 나라의 최장기 총리가 될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해서 접근했네 어쨌네 하는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정확히 말하면 총리님을 크게 될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거죠. 하지만 제 예상보다도 훨씬 더 커져버리더군요. 그렇게 따지자면 이건 제 예상이 빗나갔다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이거 기분 좋아해야 할지 나빠해야 할지 애매한 평가인데요?”
“제가 신도 아닌데 어떻게 모든 걸 다 예측하겠습니까. 확실한 건 제가 이 사람은 좀 크겠다고 예상한 그 누구보다도 총리님이 거물이 되셨다는 거죠.”
“킬리언의 예측이 빗나간 유일한 존재라. 그렇게 보면 확실히 기분이 좋긴 하군요.”
“엄밀히 말하면 유일한 건 아니고요.”
“좀 맞춰주십쇼. 유일하다고 하면 어디가 덧납니까?”
지금으로부터 50년도 더 된 오랜 이야기.
우연히 카지노에서 마주친 한참이나 어린 꼬마 아이와 힘을 합쳐서 대영제국의 최고까지 올라가자는 약속을 나누었다.
의기투합해 협력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렇게 유치한 말장난을 주고 받기도 하면서 지금 여기까지 당도했다.
원하는 모든 걸, 아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수많은 걸 다 이루었다.
“폐하, 제가 여기에 폐하를 모신 이유가 뭔지 짐작이 가십니까?”
“···이제는 내려오겠다는 말씀을 하려는 거겠죠.”
아, 깜짝 발표를 하려고 했는데 모르는 척 좀 해주지 거 눈치 한번 진짜 빠르네.
흥이 조금 식었지만 원래 이런 사람이었으니 어쩌겠나.
웰즐리는 웃으며 쭉 흐트러놓았던 카드를 정리해 가죽 케이스 안에 가지런히 집어넣었다.
“올해까지만 하고 은퇴하겠습니다. 이제 저도 가족들과 시간도 더 보내고 해외로 나가서 느긋하게 휴양도 즐겨보고 해야죠.”
“그렇게 하세요.”
모든 게 처음 시작된 장소도 이곳이었으니 모든 걸 내려놓는 장소 또한 이곳이었으면 좋겠다.
예전부터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목표를 하나 이룬 웰즐리는 웃으며 카드 케이스 위에 자신의 서명을 새겨 킬리언에게 건네주었다.
“지금 이 카드 말입니다. 사실 예전에 카지노에서 썼던 그 카드들입니다. 기념으로 제가 지금까지 쭉 가지고 있었던 거죠.”
“그랬습니까? 그건 전혀 몰랐네요.”
“일종의 부적이었습니다. 이게 있으면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거 같았거든요. 하지만 이제 저는 이 운이 필요치 않으니 폐하께 돌려드리겠습니다.”
복잡한 표정으로 카드를 건네받은 킬리언을 향해 그는 아주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했습니다, 폐하. 여러가지로.”
“감사는 내가 해야죠. 수고했습니다, 총리님.”
* * *
디즈레일리의 장례식이 치러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해의 마지막 12월 31일.
대영제국 최장기 총리 웰즐리는 열화와 같은 갈채를 받으며 기나긴 정치 여정을 마무리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수백년이 지나도 갱신되지 않을 불멸의 기록을 남긴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