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knight in a fantasy novel RAW novel - Chapter 13
13. 폭풍 전야
기껏해야 사생아 정도인 줄 알았던 시녀였다.
‘바보같이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내가 기억하는 원작에선 제인이 막연히 이 시기에 렌슬렛에 숨어 있었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 시녀로 있었다는 설정을 읽었던 거 같기도 하고? 애초에 설정 자체를 너무 대충 넘겨서.’
이렇게 시녀로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대단하다, 공작 부인. 이러니 귀족파에서 죽어도 못 찾았지.’
나는 고양이처럼 조용히 앞서가는 제인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로니아드 이놈의 원래 목표가 바로 눈앞에 있다. 저 아이에게 어떤 식으로 해야 만족할 거냐? 로니아드.’
지금의 로니아드가 빙의 전의 로니아드에게 물었다.
‘공작성에서 갑자기 분노 조절 장애가 온 것이 이제야 설명이 되는군.’
자신이 수호해야 할 존재가 눈앞에서 희롱당하고 있으니 빡 돌지 않는 게 이상하다.
‘이 몸뚱이의 원래 신분은 과거 왕실 기사단 소속의 로니아드 칸브라만. 솔직히 이것도 정확한 정체는 아니지만.’
시녀답지 않은 기품을 가진 소녀가 걸음을 멈추고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기사님? 참고로 그때 성에서 도와주신 것은 이 자리를 빌려 다시 감사드립니다.”
제인은 시녀의 몸동작 같지 않은 움직임으로 아름답게 인사를 한다.
나는 그녀의 모습에 잠시 침묵한 후에 정중히 경례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기사님! 저는 평민 출신 시녀입니다. 공작 부인과 영애를 담당하는 시녀들이 하급 귀족가 출신이긴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말씀을 낮춰 주세요.”
자신에게 말을 낮춰 달라고 부탁하는 처지지만, 전혀 비굴하거나 낮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제인 시녀님만 따로 편하게 대하는 것도 형평성에 어긋납니다.”
암! 그럴 순 없다.
“무엇보다도 세상 어느 상급 시녀가 제인 시녀님만큼 행실이 반듯할까요? 일부로 입 밖으로 말하지 않으면 교육 잘 받은 귀족가 여식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
나는 뼈있는 한마디와 함께 제인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리곤 그녀를 보면서 생각했다.
‘찾았다! 왕녀.’
* * *
시녀 제인.
본래 이름은 제인 에어 마누스 룬 아르미다츠.
10년 전 갑작스레 죽은 라이오스 국왕의 딸이자, 몰락한 왕가의 핏줄이다.
원작 주인공 로지스트 마누스 룬 아르미다츠의 누이이기도 하다.
그런 제인의 본래 신분과 별개로, 따스한 햇살이 대지를 덮는 좋은 날씨에 이노와 아리아 그리고 나는 근처 정원에서 가벼운 피크닉을 가지게 되었다.
“주방에 말해서 샌드위치도 가져왔습니다.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 가져오겠습니다.”
제인은 어느새 주방에서 준비한 다과와 샌드위치 등을 예쁘게 차려 놨고, 나는 휴대용 식탁과 의자를 시종들과 함께 설치한 후 조용히 기립해 있었다.
나와 제인은 함께 나란히 서서 두 모녀가 아름다운 정원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머니,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냐면요~.”
“그렇구나, 대단한걸?”
모녀간의 대화는 아름다운 정원과 환상적인 날씨와 어우러져 훈훈하고 보기 좋았다.
아리아는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고, 그것은 이노도 마찬가지였다.
“영애께서 마님과 저렇게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굉장히 드물다고 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제인이 조용히 내게 말했다.
내가 무슨 의미냐는 듯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마저 입을 열었다.
“마님은 늘 격무로 정신없이 바쁘십니다. 영애와 함께 대화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요. 늘 마님의 업무가 끝나면 늦은 밤이 됩니다. 그렇다고 따로 휴일을 챙기시는 것도 아니고.”
제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아리아와 이노를 보았다.
아리아는 처음 나를 보기 위해 집무실에 온 듯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어머니와의 시간을 가지게 되자, 본래의 목적은 까맣게 잊고는 이노 앞에서 아기 새처럼 재잘거린다.
“이게 다 기사님 덕분입니다.”
“제가요?”
“네, 기사님이 비서관 업무를 하시는 덕분에 모처럼 일에 여유가 생겼거든요.”
‘그 정돈가?’
공작성이 고질적인 인력 부족을 겪고 있다고는 얼핏 들었다.
실제로 치안대장이나 저택의 일부 기사들을 제외하면 저게 기사인지 양아치 새끼인지 구분 안 가는 놈들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서임이랑 토너먼트로 그나마 인력 수급이 나은 기사가 이 정도면, 행정이나 마법 같은 인력은 정말 대책 없겠군.’
아니, 행정 인력도 상단 같은 데서 쫓겨난 사람들을 구하면 어찌 될 것 같다.
하지만 마법사는? 아무리 마법 혁명인지 뭔지로 30여 년 전부터 마법이 보편화됐다지만, 아직까진 충분치 못하다.
여전히 마법사는 세계적으로 귀하디귀한 존재.
그런 나의 의문은 아리아의 대화로 해소되었다.
“저번에 율카네스 스승님이 알려 주신 바람 마법 수식도 벌써 사용할 수 있어요! 스승님께서도 제가 벌써부터 사용하는 걸 보고는 놀라셨어요~!”
아리아의 입에서 원작에서도 살짝 언급되었던 인물의 이름이 나왔던 것이다.
“정말 대단하구나. 우리 아리아가 나중엔 대마도사가 되겠어. 율카네스 공은 제국 현자의 탑 출신의 마도사이니 늘 예의 바른 제자가 되도록 하렴.”
‘아아! 스승이란 양반이 좀 대단했다고 했지? 이름은 까먹고 있었는데 율카네스였군.’
원작에선 직접 등장하진 않지만, 주요 인물들의 대사에서 종종 언급되던 마도사였다.
제국 출신의 마도사인데 여행을 다니다 아리아의 재능을 눈여겨보고는 잠시 렌슬렛에 정착한 마도사라는 설정.
훗날 아리아의 각성을 돕고 렌슬렛 공작 하이든으로부터 아리아를 구해 준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아리아가 어느 수준까지 성장하자 속세를 등지고 은거했다는 설정이었다.
‘그 마도사 스승 덕에 마법사 인력을 어느 정도 충당할 수 있었구나.’
이 세계, 이카디아 대륙에서 마법 하면 제국의 현자의 탑이 넘버 원이다.
그 현자의 탑 출신의 마도사가 있는 곳이라면, 제아무리 변방의 허울뿐인 공작령이라도 혹시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찾아오는 하급 마법사들이 있다.
이노는 아쉬운 대로 그런 마법사들을 고용한 것이다.
‘절박한 상황에서도 나름 최선을 다해서 여기까지 온 건가? 대단하군.’
몰락하진 않았지만 크게 쇠락한 가문 출신에 사랑 없는 결혼생활이다.
힘들게 영지 경영으로 뭔가를 이루려 하면, 그걸 전부 빼앗아 탕진하는 망나니 같은 남편.
그럼에도 묵묵히 후일을 준비하는 인내심.
보면 볼수록 존경심이 들 정도다.
“자주는 아니지만 이런 일상이 한 달에 두 번이라도 있었음 좋겠어요.”
그런 아리아와 이노를 보는 제인의 얼굴에는 모처럼 편안하고 풀린 표정이 드러났다.
‘그러고 보니 제인, 이 아가씨도 대단하네. 왕녀 신분으로 시녀로 지내기 쉽지 않을 텐데.’
나는 공작성에서 희롱당하던 그녀를 잠깐 떠올리며 말했다.
“네, 부디 이 평화가 오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원작을 아는 나로서는 꽤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굳이 쓸데없는 말로 이상한 놈 되기는 싫다.
“마님~! 마님!!”
하지만 이런 평화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깨지고 말았다.
통신 마법구를 관리하는 마법사가 헐레벌떡 예의도 못 차리고 뛰어온 것이다.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죠?”
마법사의 모습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이노가 표정을 굳히고는 물었다.
아리아는 어머니와의 잠깐의 평화가 깨지자, 눈에 보일 정도로 풀이 죽은 꼴이다.
“공작께서! 렌슬렛 공작께서! 3일 뒤에 영지로 오신다고 합니다!”
“……!”
마법사의 말에 이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아리아는 아주 새파랗게 겁을 먹었고, 늘 침착하던 제인마저 아랫입술을 깨물며 손을 보이지 않게 숨겼는데 얼핏 보니 덜덜 떨고 있었다.
특히 이노의 얼굴은 굳은 것을 넘어서 분노와 모욕으로 이글거렸다.
“3일 후에 도착이면 못해도 한 달 전에는 수도에서 출발했다는 것인데.”
“예, 공작께서는 공작령에 따로 통보 없이 기습적으로 방문하시는 거 같습니다. 빠른 속도로 이동 중이라 한 달 전이 아닌 보름 전에 출발했다고 합니다. 이 내용도 이웃 영지의 통신 마법사로부터 들은 내용입니다.”
“이웃 영지라 하면, 스펠렌 백작령인가?”
“네, 백작령으로 오늘 공작 각하께서 경유차 들리셨길래 부인께서 혹시나 해서…….”
“백작 부인께는 꼭 감사의 인사를 전하세요. 이따 감사 편지를 써 줄 테니 그걸 보내고.”
“알겠습니다.”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다.
수도에서 출발하여 렌슬렛까지 급히 오면서 여러 영지들을 지났을 것이다.
호화롭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그가 야영이나 주점 같은 곳에서 묵지는 않았을 테니, 필히 영주관에서 머물렀을 터.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귀족들이 렌슬렛 공작 부인을 딱하게 봤을까?’
만약 금슬 좋은 부부라면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위해서 그런 것일 수 있겠지만, 냉전 중인 렌슬렛 부부에겐 그런 이벤트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렌슬렛 공작가의 부부 사이가 엘프와 다크 엘프만큼 나쁘다는 것을 사교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아주 공작 부인을 없는 사람처럼 개무시한다는 뜻이거나, 불시에 언제든 검문할 수 있는 아랫것으로 본다는 것이군.’
보통이라면 왕도 아르미에서 영지까지 한 달 정도 걸리니, 출발하면서 마법으로 통보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보름 전에 급히 출발했고, 유례없이 빠르게 오고 있다고 한다.
공작 부인을 좋게 보는 이웃 백작가의 백작 부인이 따로 얘기해 주지 않았다면 방문 당일까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원작엔 이때의 얘기가 거의 없어서 추측이 안 돼. 무엇보다 급히 오고 있다는 것이 더더욱 찝찝해.’
습관적으로 원작의 내용을 떠올렸지만, 딱히 관련 내용은 없는 듯하다.
내가 아는 내용은 올해 말에 일이 터진다는 것뿐이다.
‘갑자기 이런 식으로 왜 기습 방문하는 것일까?’
패닉에 빠진 이들을 잠시 두고 따로 생각을 하던 중, 머리에 뭔가가 번쩍하고 떠올랐다.
‘설마! 나 때문인가?’
공작이 출발한 때와 내가 공작성에 부임한 날짜가 얼추 비슷하다.
‘부임 다음 날부터 사고를 쳤으니까.’
그리고 그때는 내가 공작의 사생아가 아니냐는 이상한 소문이 막 퍼졌을 때였다.
‘젠장.’
만약 내 추측이 사실이라면 가장 난감한 것은 이들 중에 나다.
‘나도 문제지만 나를 통해 꼬리를 타고 가다 보면 제인까지 걸리게 돼.’
“일단 급히 대책부터 세우는 게 좋을 듯합니다. 시종을 시켜 중급 이상 관리들을 소집하겠습니다.”
“그래요, 로니아드 경, 그렇게 하세요.”
뭔가 가슴이 찔리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얼굴이 굳어 있는 이노를 부축했다.
“아가씨, 진정하시고 이쪽으로 오세요. 곧 율카네스 님의 마법 수업 시간이에요.”
귀족파 공작에게 정체를 숨겨야 하는 제인도 간신히 심신을 추스르고는 창백해진 아리아를 모셨다.
평화로웠던 피크닉은 비가 내리지도 않았음에도 우중충한 분위기와 함께 끝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