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knight in a fantasy novel RAW novel - Chapter 14
14. 저스트 텐 미닛
렌슬렛 대저택은 평소 늘 바쁘고 뭔가 꼬여 있었지만, 분위기 자체는 평화로웠다.
하지만 오늘 낮에 공작이 3일 후 방문한다는 얘기가 있은 뒤론 분위기가 우중충해졌다.
이노를 지지하는 세력은 마치 외세의 침략을 걱정하는 모습이었고, 렌슬렛 공작을 지지하는 공작파들 또한 잔뜩 긴장한 모습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길래 저러지?’
원작에선 렌슬렛 공작 하이든을 딱히 크게 다룬 적이 없었다.
단순히 귀족파고, 아내 이노와 사이가 나쁘며, 수도에서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점. 거기에 똑똑한 아내에게 열등감을 가질 정도로 무능한, 한마디로 안 좋은 것만 몰빵한 등장인물 설정이었다.
공작에게 유일한 장점이라면 렌슬렛 대대로 이어져 오는 은발에 보라빛 눈동자를 소유한 미남이라는 정도다.
아리아는 그런 아버지의 외모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럼 이대로 진행하는 것으로 하죠.”
“네,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별일 없을 겁니다.”
이노의 집무실에서 저택의 가신들이 모였다.
긴급히 저택의 중역들이 모인 회의는 생각보다 빨리 싱겁게 끝나 버렸다.
애초에 이 촉박한 시간 내에 준비 할 수 있는 것도 없거니와, 이렇게 탁상공론할 시간에 하나라도 더 몸으로 해결하는 것이 나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짧은 회의가 끝나고, 나는 이노와 함께 모두가 떠난 텅 빈 집무실에 남게 되었다.
늘 이노 주변에 서성이던 시녀와 시종 들도 공작의 방문을 준비해야 해서 착출된 상태다.
“공작 부인.”
“어, 어? 왜 그러나요, 비서관?”
시간은 촉박하지만 최대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보려고 이노를 쳐다보았다.
‘공작 부인께서도 멘털에 금이 가셨군.’
당장 이노부터가 우왕좌왕이다.
“보통 렌슬렛 공작께서 오실 때 장부를 그대로 보고하는 편입니까?”
“그, 그대로 올렸다간 여기 사람들은 전부 굶어 죽을 거예요! 하이든 그는 메뚜기 떼 같은 자라.”
“한마디로 이중장부 같은 걸 만든다는 것인가요?”
“보통 그렇게 해요. 하지만 지금 서류 작업을 하기엔 시간이…….”
덜덜덜덜.
이노의 어깨가 잘게 떨린다.
무엇에 대한 두려움일까?
렌슬렛 공작 하이든이 두려운 것일까?
아니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책임감 때문이다.
자신이 지키지 못할 백성들에 대한 미안함이 책임감이 되어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꽈악!
“!!”
난 무례함을 무릅쓰고 떨고 있는 그녀의 양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릴 정도로 살짝 힘을 주어 안마하듯 주물렀다.
뜻밖의 감각에 이노의 흔들리던 눈동자에 남색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한 얼굴이 들어왔다.
“그 이중장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모든 관련 서류를 저에게 주십시오.”
내 말에 이노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해요! 하이든 그자는 멍청하지만 그가 데리고 있는 비서관과 행정관들은 아카데미를 나온 엘리트 출신이에요. 보통의 장부론…….”
“공작 부인.”
또 한 번 무례를 무릅쓰고 이노의 말을 끊었다.
평소라면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노는 크게 개의치 않아 보였다.
“지금까지 혼자 모든 것을 감내하느라 정말 힘드셨을 겁니다.”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양어깨를 잡은 양손에 다른 성질의 마나를 분배했다.
“하지만 저택에는 공작 부인을 위해 밤낮없이 최선을 다하는 인재들이 많습니다. 그중엔 저도 있습니다.”
이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촉촉해졌다.
“그 어깨의 짐, 제가 같이 짊어지겠습니다. 그러니 부인께서는 굳건히 모두의 기둥이 되어 주셔야 합니다.”
그녀의 어깨에 올린 손을 조심스레 내렸다.
콩닥, 콩닥, 이노의 심장이 갑자기 크게 뛰는 것이 어깨를 잡은 내 손에까지 전달됐기 때문이다.
내 말에 이노는 급히 눈가를 닦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 처음 들어요. 고마워요, 비서관.”
많이 진정된 느낌이다. 진정된 것을 넘어서 뭔가 크게 결심을 한 모습!
‘정신적인 각성이라도 한 것일까?’
나는 흥미로운 기분을 느끼며 그녀에게 말했다.
“레미앙에서 온 렌슬렛의 어머니시여,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처억, 척!
말을 하면서 주군께 보고하는 기사처럼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상황이 이럴진대 이 정도 쇼맨십은 필요하다.
직장 생활 10년차 샐러리맨의 처세술이다.
“네! 지금부터 행정 업무는 비서관에게 전권을 부여하겠습니다. 최종 결과물만 저에게 보고하세요!”
내가 만들어 낸 분위기에 이노 또한 취했는지 그녀는 붉게 상기된 볼을 빛내며 위엄 있게 명했다.
그녀를 달래고 강하게 만드는 데는 고작 10분이면 됐다.
10분이었지만 그 10분 만에 저택 내의 분위기가 역전됐다.
“지금부터 모든 행정 및 재정 관리는 비서관인 제가 합니다. 이의 있습니까?”
이노의 명으로 저택의 모든 행정관과 서기관 그리고 재정관이 모였다.
하급, 중급, 상급 할 것 없이 모두다.
“저희는 이의 없습니다.”
“로니아드 경, 아니, 지금은 비서관이라고 불러야 하나? 비서관의 경력은 짧지만 강렬했지. 우린 상관없네.”
“재정관들도 협조하기로 했네. 잘 부탁하지.”
반발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하급과 중급 관리들이야 짧게나마 같이 일했던 경험이 있으니 그러려니 하는데, 저택에 단 3명뿐인 상급 관리까지 순순히 협조하다니.
“다들 이중장부 만드는 것은 전부터 꺼리던 일이거든요. 장부 조작하다 걸리면 최소한 사형이지요. 지금처럼 시간이 촉박한데 그런 책임을 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의아해 하는 내 모습을 보고 하급 서기관 에밀이 몰래 귀띔해 줬다.
에밀의 말에 모든 것을 이해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참으로 익숙하고 정겨운 광경이군.’
어쩜 이렇게도 사람 사는 곳은 똑같은지.
평소에 너무 급해서 월권하려 하면 지랄 발광을 다 떨다가도 막상 책임져야 하는 일이 생기면 재빠르게 넘겨 버리는 모습.
지구에서 상대했던 회사 임원들의 모습과 분신처럼 똑같다.
“그나저나 에밀, 저 관리들 중에 공작파 라인도 있지 않나?”
“아아~ 그거라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이제는 직급에서나 능력에서나 압도적인 우열이 나뉘었기에, 로니아드는 에밀을 아래 사람으로 대했다.
에밀 또한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했다.
“일단 행정 쪽 관리들 중에 공작파 라인은 많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공작님이 공작령을 전부 털어 가면 파벌과 상관없이 자기들도 굶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는 서로 협력하는 편입니다. 또 상당수 공작파 관리들 중 대부분이 공작령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입니다. 아카데미를 나오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왕도 근무 때문에 친지들을 배반하고 고향을 버릴 이유가 없지요.”
‘무슨 공동 운명체냐?’
에밀의 말에 나는 어느 정도 납득했다.
한마디로 반역 같은 것만 안 일으키면 가만히 있겠다는 것 아닌가?
찝찝하지만 이 정도면 해 볼 만하다.
“행정에선 장부 구분 작업을 도와주세요. 서기관 여러분은 필사 작업을! 믿을 수 있는 마법사가 있다면 모셔 와서 필사 마법을 지원받아도 됩니다. 재정 쪽에선 징세관들을 이용해 공작령의 재물들을 분류해 주세요!”
나의 막힘 없는 지시에 관리들이 새삼스러운 듯 나를 바라본다.
“공작 부인보다 더 지휘를 잘하는 것 같지 않아?”
“쓸데없는 소리! 그래도 기사라서 그런지 지휘 능력이 남다르긴 해.”
“저 양반은 기사가 아니라 행정관을 해야 해.”
수군거리는 헛소리는 한 귀로 흘렸다.
‘마치 기습적으로 감사받을 때 같군. 물론 이 정도야 지구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지구에서 나는 대기업은 아니지만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중견 기업에서 근무했다.
살인적인 업무에 비합리적인 지시가 일상이었던 곳.
라인을 잘못 탔을 경우엔, 종종 감사팀에서 기습 감사가 나오곤 했다.
그런 기억을 돌이켜 보면 지금 여기의 일은 귀여운 수준이다.
21세기, 세계 10대 경제 대국의 중견 기업 행정 감사가 빡셀까? 아니면 이제 막 중세에서 벗어난 영지의 행정 감사가 빡셀까? 심지어 여긴 컴퓨터도 없다.
‘심지어 나는 지구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전권을 위임받은 상황이란 말이지.’
내 지시 하나하나에 수십의 관리들이 반응하고, 수백의 병사와 시종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움직인다.
어느덧 자정을 넘긴 밤, 나는 피곤함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일에 재미를 느꼈다.
* * *
이틀째 한숨도 자지 않았다.
잠깐 눈을 붙이려 했지만, 내일이 마지막이기에 조금만 더 하자는 생각을 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마치 재밌는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을 며칠 밤새워 하는 기분이야.’
물론 나를 제외한 관리들은 철야를 하더라도 중간중간 저택 내의 방에서 몇 시간씩 눈을 붙이긴 했다.
하지만 그들도 처음엔 가능성 없다고 여겼을 결과물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자, 눈이 뒤집어진 상태로 업무에 열중하고 있다.
심지어 그 결과물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해 온 어떤 결과물보다 더 좋았다.
그들에겐 신세계를 엿본 충격일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저녁 늦게 공작이 보낸 전령이 도착했다.
기사 한 명을 먼저 보내 사전 통보를 한 것이다.
“공작 각하께서 내일 아침에 방문 예정이십니다! 촉박하겠지만 소홀함이 없게…….”
공작과 한 패인 전령은 당당히 외쳤다.
당황하고 패닉에 빠져 있을 저택 사람들의 얼굴을 기대하면서.
“준비와 환대를…… 어?”
하지만 전령의 목소리는 그를 바라보는 저택 사람들을 보면서 서서히 작아졌다.
“그래, 정말 굉장히 촉박해서 얼마 준비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미흡하진 않을 거다!”
전령이 본 것은 결의와 의기양양한 얼굴을 한 저택 사람들이었다.
공작 부인 또한 담담한 얼굴로 전령을 맞이했다.
자정이 된 늦은 밤.
나와 관리들은 드디어 그럴듯한 최종 결과물을 완성했다.
나는 그 결과물을 조심스레 품에 안고는 공작 부인 이노가 있을 집무실로 향했다.
아마 그녀 또한 잠을 자고 있지 않을 터.
“아가씨! 어서 주무셔야지요!”
“하지만 잠이 안 오는걸? 제인 너도 못 자고 있잖아.”
“저는 괜찮습니다.”
이노의 집무실 근처에서 아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런 아리아를 달래는 제인의 목소리까지.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는 아리아의 침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침실의 문이 열리더니 제인이 나를 맞이한다.
갑작스러운 나의 방문에 그녀도 살짝 놀란 상황.
“로니아드 경!”
문틈 새로 내 모습을 본 아리아가 나를 반겼다.
나는 조용히 웃으며 아리아에게 물었다.
“잠이 안 오십니까?”
“으응.”
이유야 내일 아침 공작의 방문이 걱정돼서겠지.
“벌써 이틀째 잠을 설치셔서 걱정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제인의 눈 아래에 옅은 다크 서클이 보인다.
그녀 또한 저택 일을 돕느라 제대로 쉬지 못했을 것이다.
“제가 노래를 불러 드리죠.”
“노래!”
문득 갑자기 실험해 보고 싶은 게 생겼다. 내 제안에 아리아는 활짝 웃는다.
‘과연 목에 마나를 담아 노래를 부르면 어떤 효과가 나타날까?’
나는 목에 마나를 분배하고는 지구에서 즐겨 불렀던 노래 중 하나를 선택했다.
라일락 꽃향기 맡으면~ 잊을 수 없는 기억에~ ♬
확실히 몸도 좋고 목소리도 좋은 데다 감각도 뛰어나 노래가 아주 잘 불러진다.
버스는 마차로 개사해서 노래를 불렀다.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노래를 중간쯤 부르다 어느덧 주변을 보니, 아리아가 편안한 얼굴로 커튼 사이로 비추는 달빛을 머금고 잠들었다.
코오~코.
아리아 침대 옆에 앉아 있던 제인 또한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제인의 감긴 두 눈엔 작게 눈물 몇 방울이 고여 있었다.
나는 그녀가 편히 잘 수 있게 의자를 연결해 눕게 해 줬다.
추울까 봐 망토를 벗어 덮어 주었다.
어느 찬비 흩날린 가을 오면~
간만에 부르는 노래의 여운을 그대로 느끼고 싶었기에 나는 마저 노래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