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knight in a fantasy novel RAW novel - Chapter 141
141. 숨 고르기(3)
이카본의 물음의 다른 의미는 ‘네놈도 설마 황족이냐?’라는 것이었다.
“너무 억측 아닌가? 모든 적통들이 거인의 봉인을 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로니아드가 이소레타를 보며 말했다.
“어지간하면 된다. 황녀 전하도 아직 각성 못 한 성인이라 좀 더 지켜봐야 하고.”
이카본은 로니아드의 시선을 따랐다가 다시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그래서 대답은?”
로니아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모르지. 나는 기억을 잃은 상태니까.”
“아주 편리한 변명이군.”
“변명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인걸?”
이카본은 로니아드의 기억 상실을 진지하게 믿는 것 같지 않았다.
“나중에 기억이 나면 말해 주게.”
그렇게 말하곤 나무 위로 올랐다. 그리고 큼지막한 가지에 누워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이카본이 사라지고, 로니아드는 헌스터의 봉인에 대해 생각했다.
‘나로 인해 헌스터의 봉인이 풀렸다고?’
저 멀리, 뒤뜰에 있는 헌스터를 보았다.
헌스터는 이소레타를 비롯한 나머지 일행들과 함께 있었다.
그곳에서 서로 각자의 검술이나 격투술, 정령술을 공유하는 듯했다.
‘거인족 대장로의 봉인 설화와 내 몸이 관련이 있다…….’
거인족 대장로의 설화는 익히 알고 있었다.
원작의 설정에도 있었고, 이세계에서도 알 사람은 아는 설정이다.
암흑시대 당시, 세계는 어둠의 마나로 마이너스적인 감정이 진했다.
본래에도 호전적인 거인들은 어둠의 마나에 의해 더더욱 강해졌고 포악해졌다.
포악해진 거인들은 어둠의 일족은 아니었지만, 종말급 웨이브 못지않은 피해를 줬다고 한다.
그런 거인들을 보다 못한 제르다가 당시 거인족 대장로를 제압했고, 거인족 대장로의 피에 거인족의 모든 증폭된 힘을 봉인했다.
그리고 그 봉인을 당시 힌미르에게 관리하라고 위임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대장로 거인들에게 드래고니안들처럼 대장로의 봉인된 피가 이어지게 되었다.
또 힌미르의 적통들은 대장로 거인을 부릴 수 있었고, 현재 그 피를 제대로 이어받은 거인이 바로 헌스터다.
‘도대체 이 몸의 정체는 뭘까?’
최근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빙의 전의 기억이라…….’
죽을 위기에 놓일 때마다, 봉인된 힘과 기억이 일부 되살아난다는 것은 진작에 알았다.
그렇다고 일부로 죽을 위기를 찾지는 않았다.
그러다 실제로 죽을 수도 있으니까.
‘흐음, 이번에 그건 뭐였을까?’
로니아드가 이카본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끝내 말하지 않은 게 있다.
‘분명 고대의 전쟁이었어.’
로니아드의 봉인된 과거였다.
최근 가사 상태일 때 보았던 기억들이다.
‘기억 속의 전쟁은 아마 암흑시대와 신성 시대의 싸움.’
기억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몬스터 군단이 보였다.
필히 종말급 웨이브였을 터.
‘문헌이나 구전으로 내려온 것보다 더 참혹했지.’
오스카에서 겪었던 종말급 웨이브는 기억 속의 웨이브와 비교하면 동네 아이들 싸움 수준이었다.
최소 수십은 중첩되었을 종말급 웨이브.
몬스터 군단 뒤에서 강림하는 마족, 리치 그리고 마왕들.
그 아래 어둠에 종속된 이카디아의 수많은 종족들.
그리고 이에 맞서는 작고 초라했던 인류 연합군.
그리고 그런 인류를 지휘하는 신화 속의 영웅들.
‘제르다, 힌미르, 마누스, 테오스, 셀테라네…… 그 외 신화 속 영웅들과 천사들.’
교단에서 제르다를 그린 그림과 똑같은 구도, 똑같은 장면이었다.
그들과 뭔가 대화를 나누고 그들과 함께 싸웠던 기억.
‘이 로니아드의 몸, 인간이 맞기는 한 걸까?’
전생의 기억이 아니면 최소 지금까지 이어 온 기억일 텐데…….
‘하긴 인간치고는 너무 뛰어나고 너무 잘나긴 했지.’
장담컨대 신화 속 영웅 중 유일한 인간인 테오스도 이 정도는 아닐 터.
‘나, 진짜 힌미르의 적통이거나 그런 거 아니야?’
드래고니안 중 일부는 선조의 기억 중 일부를 이어받는다는 얘기도 있으니까.
황당하지만 충분히 신빙성 있다.
비록 다른 드래고니안처럼 뿔이 나거나 손톱이 길어지지는 않지만, 죽을 위기에 처하면 정체불명의 각성(?)을 하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라-고이트 황족인데 먼 방계나 사생아였을지도?’
간혹 먼 방계에서 적통의 자질이 나는 경우도 있긴 하니까.
‘잠깐? 미친!!’
그러다가 오싹한 생각이 들었다.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저 앞에 헌스터와 함께 있는 이소레타를 본다.
‘만약 이 몸이 라-고이트 황실의 피를 이었다면, 이소레타와는 절대 결혼이 안 되지 않나?’
근친 아닌가, 근친! 최악은 이복 남매고. 최고로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방계다. 가족, 친척이라는 것이다.
‘물론 사촌 간의 결혼도 인정되는 세계라지만…….’
하지만 그의 한국적 윤리 관념이 거부감을 일으킨다.
“아니다. 이렇게 해 봐라, 어린 하이 엘프야.”
“어린, 이라는 말은 좀 빼 줄래?”
“야만 군단장, 그대는 너무 힘으로 하는 듯싶다. 엘프는 그 정도의 힘이 없다.”
로니아드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헌스터와 이소레타 그리고 테노바가 구석에서 훈련 중이었다.
테노바는 이소레타에게 정령술과 정령검을 알려 줬다.
로니아드의 말이 있어서 그런지 이소레타는 열심히 배웠고, 테노바도 무뚝뚝하지만 알려 줄 건 알려 주는 듯하다.
헌스터는 테노바에게 거인들의 격투술을 알려 줬다.
복잡한 심경, 복잡한 머릿속.
‘아직 정확한 것도 아닌데 신경 쓰지 말자. 언젠가 기억이 돌아오면 어떻게든 되겠지.’
로니아드는 복잡함에 터질 것 같던 생각과 고민들을 잠시 묻었다.
그렇게 멍하니 입을 벌리고 세 사람을 보고 있었다.
“이제야 혼자가 됐네요?”
옆에서 앨리스가 다가와 말을 건다.
“이카본 있을 때는 안 오다가 왜?”
앨리스가 등장하자 로니아드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뭔가 무서워서요, 히히.”
늘 어른스럽던 앨리스가 또래 소녀처럼 익살맞게 웃는다.
‘얘도 원래 설정은 소시오패스 성향이 강한 악녀였는데,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건가?’
로니아드의 영향과 흑마법을 급하게 익힌 후유증 등이 겹친 것이라 추정할 뿐이다.
“흐음, 이제부터 뭐 하실 건가요?”
앨리스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은근슬쩍 로니아드의 팔을 잡는다.
“왜? 데이트나 하려고?”
그런 앨리스의 태도에 로니아드가 별생각 없이 농담 삼아 물었다.
“네, 해요! 데이트.”
앨리스가 로니아드의 말을 냉큼 받아 삼킨다.
“어? 그래.”
고고한 자존심 때문에 거절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어서 가요. 조용히 빠르게.”
다른 여자들이 두 사람을 볼세라, 로니아드의 팔을 잡아당기는 앨리스의 몸짓이 다급해 보였다.
‘여자 혼자 낯선 곳을 돌아다니려니 어렵게 느껴질 수 있겠지.’
반면 로니아드는 가벼운 마음으로 별생각 없이 그녀와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요정의 숲에서 함께 걸었다.
물론 세계수의 결계 안쪽이다.
“그러고 보니, 카디나는 잘 있나요?”
앨리스가 갑자기 카디나에 대해 물었다.
“지금쯤 제인과 아리아와 함께 방학을 보내고 있겠지.”
그래도 이복 언니라고 걱정이 되었던 걸까?
“흐응~ 그래요?”
표정을 보면 그건 또 아닌 거 같고.
이곳으로 오기 전, 카디나에게 주요 인물들의 경호를 부탁했었다.
대표적으로 제인, 아리아, 이노다.
물론 카디나 혼자서 세 사람을 모두 커버하는 것은 힘들 터.
상황에 따라 가장 무방비인 것 같은 사람을 경호하라고 부연 설명을 했었다.
‘잘 지내겠지?’
떠나던 당시, 제국 못지않게 체스카드 왕국도 불안했다.
‘아무리 못 지내도 지금의 나보단 잘 지내겠지.’
이내 걱정을 덮었다.
“저기 봐요! 저건 뭘까요?”
앨리스가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어디론가 또 그를 잡아끌었다.
앨리스와의 데이트는 평화롭고 평범했다.
물론 데이트 장소는 요정의 숲이라 전혀 평범하진 않았지만.
로니아드와 앨리스는 함께 요정의 숲을 거닐었고, 숲을 대충 돈 후에는 클라메니크를 함께 걸었다.
“자아~ 벌꿀에 담근 산딸기가 있습니다!”
“두 개 주세요.”
“2은닢입니다.”
두 사람은 클라메니크를 돌면서 엘프들의 다양한 음식들을 사 먹었다.
“엘프들이 화폐를 쓰다니 정말 의외네요?”
앨리스가 신기하다는 듯 은빛과 금빛이 나는 잎사귀를 만지작거렸다.
“뭐, 엘프라고 아주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로니아드는 빙의 전의 기억과 원작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으나, 앨리스에겐 생소할 법했다.
“물물교환할 줄 알았는데.”
엘프들로만 이뤄진 사회였지만, 도시라서 그런지 화폐가 있었다.
“엘프 여왕님이 웬 나뭇잎을 주나 했더니, 이 때문이었구나.”
엘프들의 화폐는 세계수의 떨어진 잎으로 만들었다.
회의가 끝나고 아우레가 한동안 도시에서 생활함에 부족함이 없으라고 잎사귀 같은 걸 줬는데, 이게 화폐였을 줄이야.
앨리스는 엘프의 화폐 중 일부를 품속에 조심히 넣었다.
아마 기념품으로 따로 챙기려는 듯싶었다.
그 뒤로도 앨리스와 로니아드는 숲과 나무로 이뤄진 거대하고 아름다운 도시를 구경했다.
엘프들은 두 사람에게 호기심과 조심스러운 태도로 맞이했고, 이내 친절하게 이것저것 설명을 해 줬다.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어떻게 저렇게 조화롭게 자연과 하나가 되었을까요?”
“그림으로 남기고 싶을 정도야.”
“그림 그릴 줄 아세요?”
“글쎄?”
자신하진 못했지만 어째 붓만 쥐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춤도 노래도 연주도 다 하는데 그림이라고 못 할까?’
언제 시간이 되면 한번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숲을 비추던 햇빛이 달빛으로 바뀌려던 때, 서서히 앨리스와의 데이트가 끝나 가려 한다.
한창 신나게 걷던 앨리스의 걸음이 느려졌다.
‘아쉬워서 그런가?’
밝고 즐거워하던 표정도 진지해진 기분이다.
“저기…… 로니아드 경.”
“응?”
앨리스가 뭔가 결심했는지, 걸음을 멈추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미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로니아드 당신을 좋아해요.”
“……?”
두 사람의 데이트는 끝이 아닌 절정으로 가고 있는지도.
“아! 좋아한다는 의미는 빠져나갈 구멍이 있으니 정정하죠.”
오늘은 두 개의 달 중 순백 달이 유독 밝다.
순백의 달빛이 앨리스를 비췄다.
“저는 로니아드, 당신을 이성으로, 남자로 좋아해요.”
하얀빛을 받은 앨리스의 두 볼이 붉었다. 귀도 빨갛다.
“카디나는 마음의 정리를 한 것 같지만 저는 아니에요.”
나름 굳은 각오와 큰 용기를 낸 검은 머리의 소녀.
“민폐였고 당신에게 여러 차례 목숨의 은혜도 입었죠. 그럴수록 더더욱 당신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요…….”
앨리스의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반면 로니아드는 당황 그 자체였다.
‘아니, 얘는 왜 갑자기 고백을 하고 난리야?’
가뜩이나 방금까지 이소레타와의 관계 때문에 복잡했던 그의 머리다.
과부하에 힘겨워하던 그의 뇌가 또 다른 난관에 부딪혔다.
‘열 미녀 마다하는 남자가 어디 있겠냐만은.’
일부다처제 세계에서 예쁜 여자가 이렇게 대시해 오는데, 혹하지 않는 남자가 있을까?
‘내가 인간은 아닐 수 있어도, 남자인 것은 확실하단 말이지.’
앨리스는 굉장히 예뻤다.
엘프들이 가득한 도시에서도 그녀의 외모는 엘프들과 비교해 부족함이 없을 정도.
“사랑해요, 로니아드.”
고백하는 앨리스의 푸른색 눈동자.
두 눈동자의 사파이어가 달빛을 받으니 더더욱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