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knight in a fantasy novel RAW novel - Chapter 20
20. 각자의 사정 (1)
공작의 다음 방문에 대한 대비는 원작을 아는 내 입장에선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바로 율카네스라는 존재 때문이다.
“일단, 그 변태 국왕 같은 경우엔 내가 처리하지. 감히 일개 왕국의 국왕 따위가 내 제자를 탐하다니!”
어떤 방법을 쓰는지는 원작에서도 자세히 나와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주문 몇 마디로 상급 기사를 개구리로 만드는 마도사다.
어련히 잘해 줄 것이다.
“문제는 국왕이 아니에요.”
가장 큰 문제였던 국왕 문제가 율카네스라는 치트 키로 해결되자, 이노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이노의 말에 조심히 물었다.
“렌슬렛 공작, 하이든을 말하시는 겁니까? 하이든이야 국왕만 해결하면 자동으로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정 안 되면 공작이야 내가 죽이면 된다.
공작이 기습 방문하지 않고 연말에 방문했다면 상황을 봐서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이었다.
‘그랬던 것이 국왕이 끼면서 꼬여 버린 것이지. 무능 그 자체인 하이든은 귀찮은 화장실 청소 같은 거니깐.’
암살이 제일 편하다. 정체가 탄로 나도 그냥 기사물에서 용병물로 장르가 바뀐다고 생각하면 됐다.
어차피 정통성을 제외하면 이미 모든 인망을 잃은 공작이다.
최근 어린 아리아를 국왕에게 바치려 한 데다 영지를 버리고 새 영지를 받으려 한 것이 알려져, 그나마 남아 있던 공작령의 공작파도 와해됐다.
유일한 유족인 이노도 내 편이니, 추격받을 일도 없고.
“공작은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의미심장한 말에 이노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하이든도 국왕도, 이 문제의 궁극적인 배후가 아니에요.”
이노의 말에 나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원작의 내용을 토대로 추측했다.
그리고 이내 그것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폰테임 후작가를 말하는 것입니까? 하지만 거긴 지금 왕실보다도 세가 더 강한 곳입니다.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긴 하죠. 하지만 폰테임을 해결하지 않으면 렌슬렛을 향한 그들의 음모는 계속될 거예요. 그들이 하이든과 국왕에 이어서 또 어떤 것으로 이 공작령을 탐낼지 모르니…….”
이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당장 나와 이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정정! 없는 건 아닌데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솔직히 저 욕심 많은 노친네가 본격적으로 나서 준다면 폰테임도 문제가 아니잖아. 하지만 저렇게 침묵하는 걸 보면 딱히 도와줄 거 같지도 않고.’
폰테임 후작가는 오래전부터 렌슬렛의 잠재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반정 이후부터 현 국왕 체스카드에게 렌슬렛 공작령을 달라고 수차례 요청했다.
하지만 아무리 변태 국왕이라도 머리가 장식은 아니었나 보다.
“불허하오!”
가뜩이나 강세한 폰테임에게 렌슬렛까지 허용한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기에, 이 요청은 늘 묵살되었다.
‘하지만 결국 원작에서 렌슬렛은 이노의 죽음과 함께 사실상 폰테임의 손에 들어간다. 훗날 성장한 아리아가 렌슬렛을 되찾기 전까지.’
물론 대놓고 폰테임이 먹지는 않았다.
원작에서 국왕은 아리아에게 욕심을 품은 죄로 율카네스에게 털린다.
그리고 율카네스에게 멘털이 터진 국왕을 대신하여 폰테임 후작이 얼마간 섭정을 했다.
그는 몇 개월간 섭정하면서 자신에게 충성하는 영지가 없는 작위 귀족들에게 렌슬렛의 영지들을 하사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실상 이 왕국은 두 개의 나라로 양분되었다.
‘나로 인해 원작의 줄기가 바뀌게 된 것인가?’
원작에선 이노의 죽음을 이용해 아리아의 각성을 유도한 율카네스의 방관 덕분에, 폰테임이 렌슬렛을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율카네스 공께서 국왕에게 하려는 것처럼, 폰테임에게 한마디 해 줄 수는 없겠습니까?”
“국왕은 내 제자를 건드렸네. 마법사에게 사제 관계를 건드리는 것은 굉장한 모욕이지. 그러니 이건 내가 직접 나서도 명분이 서네. 만약 국왕이 나를 적으로 선포하는 순간, 체스카드 왕실은 대륙의 모든 마법사들을 적으로 두게 될 것일세. 명분이란 이렇게 허상 같으면서도 결정적인 것이야.”
그래, 명분과 명예 좋지.
거기에 좀 더 힘을 써서 내 영역 좀 건들지 말라고 후작놈에게 협박해 달라니까?
“물론 마법사의 사제 관계보단 못하겠지만, 여기 렌슬렛에도 율카네스 님의 권리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폰테임의 욕심 많은 후작은 지금처럼 율카네스 님의 권리를 순순히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최근 영약과 관련된 권리를 우회적으로 첨부하여 이 마도사를 설득했다.
저 노인네가 6을 요구했을 때 순순히 양보했던 것에는 이러한 이유도 있었다.
“나는 속세에 크게 관심이 없네. 지금 이 권리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정도야. 이런 명분 가지고 후작 정도 되는 대귀족을 협박할 수는 없어. 무엇보다 후작 정도 되는 대귀족이 마도사의 얼마 안 되는 이권을 탐내서 멍청한 짓을 할 것 같진 않군.”
한마디로 귀찮다는 것이다.
국왕과 달리 후작은 아직 자신의 이권을 직접적으로 욕심낸 적은 없다.
‘이 노인네가 후작한테 몸캠이라도 찍혔나?’
마도사의 뻔뻔함에 나는 속으로 욕을 했다.
‘마법사들은 아카데미에서 뻔뻔함을 기본 소양으로 배우나 보지?’
그래도 원작보단 이노에게 모든 상황이 많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다.
적어도 지금 율카네스에겐 하이든이 이노를 죽이게끔 부추기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폰테임과 관련해선 도와주지도, 방해하지도 않고 중립을 지키겠다는 것이겠지?’
일단은 이 정도라도 어딘가?
아마 그 영약이 가장 크게 영향을 줬을 것이다.
“일단은 체스카드 국왕은 율카네스 님께서 담당해 주시는 것으로 하고, 하이든은 저와 공작 부인이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폰테임은 일단 지금 덮쳐 오는 파도부터 넘긴 후에 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수고했어요, 로니아드 경.”
이 이상 회의를 진행해도 크게 의미가 없을 것으로 봤기에, 나와 이노 그리고 율카네스 세 사람의 비밀회의가 끝났다.
그것이 내가 몬스터를 토벌하러 가기 전에 했던 마지막 비밀회의이기도 했다.
* * *
몬스터를 토벌 후 렌슬렛 대저택으로 돌아오니, 어느덧 초겨울을 향하고 있었다.
11월 초, 아리아의 생일인 12월 21일에서 한 달하고도 보름 조금 넘게 남은 때였다.
“북방에서 토벌하느라 노고 많으셨습니다, 로니아드 비서관님.”
그런 나를 반겨 주는 사람은 이노가 아닌 시녀 제인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제인은 과연 왕녀답게 품위 있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기 전에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어봤다.
“공작 부인과 영애는 어디에 계시죠?”
내 물음에 제인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은 레미앙 백작 부부께서 방문하셔서 남쪽 저택에 계십니다.”
“레미앙 백작 부부라면 공작 부인님의 부모 되시는?”
“네, 맞습니다.”
‘뭐지? 하필이면 이 시국에?’
“공작 부인께선 저에게 별말씀은 없으셨고요?”
“네, 비서관님께서 생각보다 일찍 오셔서 지금 저택에 계신 줄도 모를 겁니다.”
살짝 불길한 의문이 들었지만, 특별한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제인과 함께 대기했다.
‘그러고 보니 제인과 단둘이 있는 것도 오랜만이군.’
몇 달 전, 피크닉을 준비하면서 잠깐 단둘이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 후론 이노와 아리아에게 신경을 쓰느라 제인에게 집중할 여유가 없었지.’
이쯤 되면 뭔가 미연시 게임을 하는 느낌이 들지만, 기분 탓이려니 했다.
“아! 토벌을 하러 가셨을 때, 샤인 가문의 여식이 방문했습니다.”
“샤인 가문의 여식? 그게 누구죠?”
“음? 모르는 가문입니까? 여식 말로는 비서관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셨는데.”
뭐지? 로니아드 녀석이 8년간 싸돌아다니면서 만든 인연 중 하나인가?
하지만 딱히 기억에 없는 이름인데.
“글쎄요, 기억이 잘 안 나는군요. 그 샤인 가문의 여식은 아직 계십니까?”
“비서관님께서 몬스터 토벌을 갔다고 말하니 바로 돌아가셨습니다.”
“뭐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인연이 된다면 언젠가 다시 만나겠죠.”
인연이 되면 다시 만날 거라 생각하고선 기억의 한편에 묻어 두기로 했다.
“그나저나 제인 상급 시녀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네?”
제인과 단둘이 있는 얼마 안 되는 기회다 보니 이 기회를 이용해 제인의 진심을 물어봤다.
‘그래도 원작 주인공의 누이인데 뭔가 히든 정보쯤은 알지 않겠어?’
내 물음에 제인은 살짝 당황한 듯 보였다.
“그야 다른 시녀들처럼 시녀로 계속 있다가 나중에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지 않을까요?”
너무 정석적인 대답이다.
‘원작에서 이노가 죽은 후 제인은 별별 심한 고초를 겪다가 훗날 세력을 모은 로지스트에게 거둬져.’
유일한 배경이었던 이노가 죽은 뒤, 천한 출신의 예쁜 시녀의 운명은 뻔했다.
그나마 이상적인 것은, 상급 시종이나 기사 같은 괜찮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지만, 제인은 애초에 신분을 숨긴 왕족이다.
겉으로는 어여쁘기만 한 고아 출신 시녀고, 평범하게 결혼을 하기엔 애매한 위치의 아가씨였다.
예쁘지만 도도한데 배경이 없는 시녀, 그런 그녀를 귀족들이 그냥 놔뒀을까?
‘원작에선 귀족들에게 노예처럼 팔리고 팔려 로지스트에게 거둬질 때쯤엔 거의 폐인이 되었지. 그러다가 아리아에게 정신과 육체를 치료받은 후에, 주인공 진영의 내정을 관리하는 역할을 했고.’
이노의 옆에서 그녀가 하는 일들을 어깨너머로 배웠는지, 원작 후반에서 제인은 제법 행정가다운 내정 관리 스킬을 보여 주기도 했다.
“저…… 비서관님,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시죠?”
원작에 대한 생각에 잠깐 잠겨 있을 때, 제인이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시녀로 계속 지내거나 좋은 남편감을 만나 가정을 이룬다……. 과연 제인 시녀께서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 평범한 삶이라면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특히 좋은 남편감을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은…….”
제인은 뒷말을 흐리면서 로니아드를 힐끗 보았다.
공작성에서 병사들의 질 낮은 장난을 피해 넘길 때까지만 해도 결혼 같은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당시 그녀에게 남자란 피해야 할 화살 같은 대상이었다.
하지만.
‘로니아드 기사 같은 남자라면 괜찮을지도?’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자신을 처음 도와줬을 때? 그때는 경황도 없었고 단순한 감사함뿐이었다.
가장 크게 흔들렸던 것은 비서관이 된 로니아드가 공작 부인 이노를 챙겨 주고 달래 주고 도와주는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다.
‘하지만 로니아드 비서관은 마님과…….’
로니아드와 이노의 이야기(?)는 렌슬렛 대저택의 시녀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정작 두 사람은 잘 모르는 듯싶었지만,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 어지간한 로맨스 소설보다 흥미진진했다.
애초에 망나니 공작 하이든에 대한 시녀들의 평판은 바닥을 뚫고 지하 내핵까지 닿아 있다.
“부디 우리 불쌍한 마님께서 좋은 배필 만나서 몰래라도 행복했음 좋겠어요!”
이것이 렌슬렛 대저택 시녀들의 일치된 여론이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바람에 아주 적합한 남자가 어느 날 ‘짠!’ 하고 나타났으니, 바로 로니아드다.
그래서 대저택의 시녀들은 로니아드를 사모하면서 한편으론 이노와의 의리 때문에 어떤 시녀도 그를 유혹(?)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로니아드를 보면서 시녀들 또한 자신의 이상형에 로니아드 같은 남자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만약 그와 비슷한 남자가 또 나타난다면?
아마 렌슬렛 대저택의 모든 처녀들이 달려들 것이다.
‘하지만 로니아드 기사와 같은 남자가 과연 존재할까?’
이것이 제인의 심정이 원작과 많이 달라진 이유 중 하나였다.
‘뭐지? 내가 알던 제인은 이렇게 평범한 삶을 지향하던 인물이 아니었는데?’
괜히 제인의 진심을 물어봐서 그녀의 야심을 자극하려던 로니아드만 혼란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