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knight in a fantasy novel RAW novel - Chapter 38
38. 공주님 안기 2.0
솔직히 유혹이 심하다.
마음이 안 흔들릴 수가 없다.
그리고 오히려 거절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다.
전쟁이 일상인 땅이다 보니 마을마다 젊은 남자가 씨가 말랐다.
마을의 존속을 위해선 이렇게라도 인구를 유지해야 한다.
용병이든, 모험가든, 심지어 사제라도 상관없다.
‘나도 잘할 수 있는데!’
하지만.
나는 마을 구석에 서 있는 아스카를 보았다.
공중에 붕 뜬 것 같이 조용히 서 있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낯선 모습이다.
용병들은 물론, 그 잘난 기사들마저도 당장의 쾌락에 빠져 있다.
몬스터와 전쟁으로 남자의 씨가 마른 마을의 처녀들. 그리고 혈기 왕성한 남정네들이 서로에게 눈이 팔려 있다.
이 자리의 그 누구도 백금발의 소녀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아스카는 그저 멍하니 쓸쓸하게 서 있었다.
‘꼭 이런 순간에 납치나 암살이 이뤄지지.’
정말 아쉬웠다. 나도 쟤네들처럼 풀고 싶었다!
“미안하지만, 챙겨 줘야 할 사람이 있어서.”
마을 처녀는 내 시선이 가 있는 곳을 보았다.
그리고 굉장히 부럽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어쩔 수 없지요.”
이내 근처에 있던 필립에게 향했다.
“아저씨, 되게 중년미 있으시다~.”
저 여자, 돈 냄새는 잘 맡는 거 같다.
“어? 그, 그래! 내가 좀 매력이 있지.”
나는 필립에게 돈 아껴 쓰라는 눈치를 주고는 아스카에게 향했다.
“공주님, 뭘 그리 멍 때리고 있어?”
“그, 그냥 천한 것들의 생활상을 보고 있었다. 역시 교양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구나.”
내가 다가가자 아스카는 잠깐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이내 평소대로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용병대장 네놈도 저기서 천박하게 놀지 여긴 뭐 하러 왔느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볼이 상기되어 있다.
은근히 내가 온 게 기쁜 모양이다.
“나까지 저기서 헥헥거리고 있으면 공주님은 누가 지켜 주고?”
“흐읍!”
내 말에 아스카가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상기되었던 얼굴이 진하게 빨개졌다.
‘갑자기 이렇게 훅 들어오다니! 역시 만만치 않은 놈이다. 저런 자이니 내 순정을 짓밟을 수 있었지. 으음! 인정한다.’
아스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빨개진 얼굴로 나를 봤다.
“그럼 남은 시간 동안 뭘 할 것이냐?”
“흐음, 딱히 생각한 건 없는데? 공주님은 뭐 해 보고 싶은 거 있어? 어차피 쉬는 거 내가 도와주지.”
“해, 해, 해 보고 싶은 거?!”
모처럼의 친절이 과했나?
렌슬렛에서 제인이나 이노를 상대할 때 보였던 성격을 아스카에게 갑자기 쓰니, 얘가 영 적응을 못 한다.
‘이건 데이트다! 데이트 신청이야!’
숱한 사랑 소설에서 보았던, 기사와 레이디의 데이트 장면.
아스카의 머릿속에서 지금까지 읽었던 사랑 소설의 뜨거운 장면들이 펼쳐졌다.
소설 속의 그들도 지금처럼 정체를 숨기고 데이트를 했지.
아스카의 영혼이 또다시 망상의 12차원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데이트를 한다. 늦은 밤이 된다. 달빛과 함께 춤을 춘다. 키스를 하고, 키스를 하고…… 옷깃을 풀고…… 그리고, 그렇게……!’
중얼중얼중얼중얼.
아스카의 붉은 눈이 몽롱해졌다. 오만하고 도도한 표정은 강아지처럼 풀렸으며, 입은 벌어진 상태로 침을 흘린다.
“이봐! 공주님?! 피곤해? 머리는 왜 또 뜨거운 거야?”
내가 아스카의 볼과 이마를 만졌다.
“더워서 그렇다! 더워서!”
아스카는 망상의 12차원에서 간신히 복귀했다.
“덥기는 개뿔. 이거 몸살이네. 안 되겠다. 여관에서 몸부터 씻자.”
“여관에서?! 씻기까지!! 진도가 너무 빠르다!”
“뭐라는 거야?”
나는 이상한 소리나 해 대는 아스카를 번쩍 들어 안았다.
“으게겍!”
아스카는 참으로 공주님답지 않은 이상한 비명을 질렀다.
‘이거 어디서 본 데자뷔 같은데?’
나는 공주님을 공주님 안기로 안은 채, 여관으로 향했다.
* * *
여관 주인은 푸근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는 나와 아스카에게 2인실 방을 줬다. 침대도 커다란 2인용 침대 하나뿐이다.
“1인실은 하필이면 다~ 차 버렸네요~ 호호호!”
찡긋!
여관 주인이 내게 윙크를 하며 파이팅 제스처를 취한다. 응?
‘아주 엄청난 오해를 산 느낌이군.’
여관에서 가장 좋은 방인지, 옆에는 욕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드물게 마법 아티팩트로 지어진 욕실이다.
고급 참나무에 마법 처리를 한 욕조가 자리해 있다.
바로 위에는 마법 물항아리가 따듯한 물을 연신 생성해 내고 있다.
‘나쁘지 않군.’
합격이다.
여행 다니는 귀족들을 위한 방인 듯싶다.
나는 온몸이 붉어지다 못해 김이 나는 아스카를 보았다.
“공주님, 어서 욕실로 들어가.”
“가, 같이?!”
“……?”
이젠 얘가 나보고 목욕 시중을 들라고 하네?
혈기왕성한 남자에게 이토록 무방비라니! 나중에 이 부분도 교육을 해야겠다.
“여긴 시중드는 사람 없으니 알아서 씻고 나와.”
명색이 공주인데 시녀가 한 명도 없다.
‘그러게, 평소에 시녀들한테 잘 좀 대해 주지.’
이유는 일단, 폴라라스 남작령에 있던 시녀 중 누구도 아스카와 함께 사지로 가려 하지 않았고, 주교 또한 교육의 목적인지, 시녀를 일부러 아스카에게 붙여 주지 않았다.
‘근데 주교도 의외였어. 흔쾌히 시녀 한 명 없이 아스카를 보내 주다니. 설마 아스카를 포기한 건가?’
어떤 의미론 최대한 건전(?)하게 렌슬렛에서 일을 마친, 나에 대한 신뢰도 있을 것이다.
“그렇구나! 그래, 아무리 진도가 빨라도 벌써 같이 씻는 건 좀 그렇지. 금, 금방 씻고 나오겠다!”
아스카는 또 혼자 뭐라 중얼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공주, 갈아입을 옷은 챙겨야지!”
아스카는 내 말을 듣지 못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짐 마차에 공주의 옷이 있던가?”
생각해 보니 아스카의 짐은 전부 짐 마차에 있었다. 나야 아공간 가방이 있으니 상관없지만.
여관방으로 나가면서 슬쩍 욕실 문을 보았다.
첨벙첨벙 소리가 들리는 게 잘 씻고 있는 듯하다.
1층으로 내려오니 여관 주인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짧군.”
“……??”
뭔가 굉장히 기분 나쁜 한마디. 근데 왜 기분 나쁜지는 모르겠다.
찜찜한 기분을 뒤로하고 여관 밖으로 나왔다.
마을은 160여 명의 관광객들로 활기 그 자체였다.
좋게 말하면 활기가 넘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개판이었다.
지금 이 용병대에서 유일하게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은 내가 유일할 정도로.
“패가스 원사!”
양팔에 마을 처녀를 달고 길을 걷던 패가스를 보았다.
‘부럽다.’
아니지.
“넵, 기사, 아니, 아니, 대장님!”
“공주의 짐을 담은 마차는 어디에 뒀지?”
벌써 취했는지 제정신이 아니다.
저놈들에게 애초에 보안은 크게 기대 안 했다만, 너무 쉽게 퍼지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아! 짐 마차는 저어~기 마구간에 같이 뒀습니다. 돈이 좋긴 좋은가 봅니다. 임시 천막까지 세워 줘서 비가 와도 걱정 없습니다, 하하하!”
“알았다.”
나는 부러운 패가스는 보내고 마구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거리가 생각보다 멀었다.
‘여자들은 보통 오래 걸리니까 괜찮겠지.’
마을의 마구간 지기는 속이 뒤틀릴 지경이다.
“빌어먹을 놈들! 아주 신났군.”
그는 마을 중심부에서 벌어지는 광란의 파티를 보았다.
부러움, 시기, 증오, 비탄.
분노 무감증에 걸린 이세계 서민들과 달리 그의 가슴속엔 늘 답답함이 가득하다.
‘에밀리!’
그가 늘 짝사랑하던 마을 처녀 에밀리가 저 용병 놈들 옆에 찰싹 붙어 있다. 자신에겐 한 번도 보이지 않던 눈웃음까지 보이며.
“왜 나는! 왜!”
물론 마구간 지기는 왜 그런지 너무나 이유를 잘 알았다.
그는 얼굴도 이상하고 등도 굽은 꼽추였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젊은 청년들을 전부 징병한 징병관도 그를 본 순간 인상을 찡그리며 내쫓았다.
독수공방에 밤마다 자위하는 마을 아낙네들도 배고프다고 똥을 먹냐며 자신을 거절한다.
아무리 젊은 남자가 부족한 마을의 처녀들도 곱추는 싫어했다. 배가 고프다고 똥을 어떻게 먹냐면서.
“빌어먹을! ×발!”
그렇게 마구간에서 말똥을 치우던 마구간 지기는 누군가가 이곳으로 오는 것을 느꼈다.
그 누군가를 본 순간. 그는 저녁임에도 마구간이 환해지는 것을 보았다.
‘잘생겼다!’
남색 머리에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 서서히 빛나는 두 달빛이 그를 비춘다.
달빛을 받은 붉은 눈동자는 어떤 자연경관보다 감탄스럽다.
“수고가 많군. 마구간 지기인가?”
“그렇습니다요!”
얼핏 들은 용병대장이란 자다.
굉장히 젊지만, 카리스마 있고 신사적이며 멋있다고 했다.
소문은 원래 과장되어야 하는데, 이번엔 일치했다.
벌써 마을 전체에 소문이 자자한 남자다.
에밀리를 포함해 마을의 한 미모 한다는 처녀들이 어떻게든 그의 눈에 들기 위해 안달이다.
“짐 마차는 어디다 두었지? 두고 온 것이 있다.”
“저, 저기 있습니다.”
마구간 지기는 고개를 바짝 숙이곤 짐 마차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아, 저깄군. 고맙네. 이건 수고비네.”
짤랑.
용병대장은 소문처럼 정말 신사적이고 관대했다.
“참, 아까 내 부하들이 주의를 줬겠지만, 용병대장인 내 허락이 있기 전엔 말 한 마리도 내줘선 안 되네.”
“명심하겠습니다요!”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생전 보지 못한 품격이 묻어 있었다.
저게 말로만 들었던 귀족의 품격 같은 것일까?
‘저렇게 우아한 분이 왜 용병 일을 하고 있을까?’
용병대장이 짐을 챙기고 떠나면서 그에게 은화 하나를 팁으로 주고 갔다.
마구간 지기는 용병대장이 준 은화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저런 남자라면 인정이야.’
에밀리가 굳이 사랑을 나눈다면, 저 정도 되는 남자라면 인정할 수 있었다.
“와 씨! 뭐야, 이 괴물은?!”
용병대장이 가고 얼마 안 돼, 사람이 또 찾아왔다.
“오텔 경, 아무리 천한 백성이라지만 그런 말은 자제하게. 그래도 좀 흉측하긴 하군.”
이번에 온 사람은 마구간 지기가 늘 대하는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아까 용병대장님과 느낌은 비슷한데 달라.’
마구간 지기를 찾아온 남자들은 10명. 하나같이 아까 용병대장처럼 말투와 행동이 우아하다.
하지만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마을 건달이랑 똑같았다.
“받아라!”
그들은 마구간 지기에게 은화가 담긴 주머니를 던졌다.
“이, 이걸 왜? 저에게?”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말과 짐 마차를 빼놓아라. 그건 수고비다.”
“그 돈이면 적어도 동정은 뗄 수 있을 것이야!”
“일을 잘 마무리하면 그것과 같은 액수의 돈을 한 번 더 하사하마.”
“그럼 두 번 떼는 건가?”
“차라리 도시에서 나이 든 성 노예를 사는 게 나을지도?”
“이봐~ 노예제가 폐지된 게 언젠데?”
“과연 그럴까~?!”
“크하하핫! 이렇게 천하고 흉측한 놈도 배려할 줄 알고, 우리가 너무 자상해진 거 아니오?”
“그게 다 방랑 기사놈 때문이잖소.”
“만약 제시간에 못 해내면 네놈은 우리 손에 죽는다!”
마구간 지기는 손에 쥔 돈주머니와 저 멀리 사라지는 남자들을 번갈아 봤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돈을 만진 적이 있던가?
이 돈에 추가로 받을 돈까지 합치면, 마구간 지기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될 것이다.
어쩌면 도시에 가서 이 저주받은 몸을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