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knight in a fantasy novel RAW novel - Chapter 65
65. 검은 선행
여왕 에르카네는 홀로 왕궁에 있었다.
왕궁에서 수도의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발코니. 에르카네는 그곳에 앉았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 그럼에도 수도 테오스카의 야경은 꺼질 줄 모른다.
“왜 벌써 온 것이지?”
에르카네가 시선을 야경에 고정시키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너무 어리지도 그렇다고 성인이라고 보기엔 힘든 체격.
연갈색 머리카락에 청염을 품은 듯한 녹색 눈동자. 로지스트였다.
“일이 생겨서 한 달까진 못 기다릴 거 같다.”
로지스트는 그렇게 말하곤 검을 뽑았다. 그의 검이 달빛을 받아 차갑게 빛난다.
“정 그러면 10년 전 이야기를 해 드리죠. 그리고 굳이 저를 죽이지 않아도 돼요.”
어느덧 여왕은 로지스트에게 존대하고 있었다.
과거 마누스의 혈통에게 예를 표했던 것처럼.
“힘이 많이 약해져서 아마 로니아드 경에게 부탁해도 되니까.”
“로니아드? 아스카가 아니라?”
로지스트의 말에 에르카네가 흠칫했다.
“……알고 있었군요?”
“아스카에게서 내 누이와 같은 냄새가 났다. 그 여자, 마법 인형 같은 게 아니더군.”
그의 말에 여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애절한 눈으로 로지스트에게 말했다.
아스카에게 끝까지 전승하지 않았던 진실.
“맞아요. 타르타트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 아이는 제가 낳은 아이입니다. 하지만 순수한 마족은 아니에요.”
“아스카 공주는 아직 모르는 눈치던데? 용케도 이 사실은 전승하지 않았나 보군. 하아…… 아버지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거지?”
아스카가 여왕이 직접 낳은 아이라면 분명 씨를 뿌린 상대도 있다.
그리고 그 상대는 로지스트의 아버지 라이오스일 테고.
“라이오스는 잘못 없어요. 그저 제가 간절히 원했죠.”
라이오스를 떠올리는 에르카네의 눈에 그리움이 가득했다.
유일하게 자신에게 현혹되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호의를 베풀어준 사람.
‘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했나 보군.’
서큐버스가 진정한 사랑을 바칠 정도라니…….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아버지지만, 참으로 대단하다고 로지는 생각했다.
“마법 인형이니, 인격을 가졌니, 같은 소리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경험과 힘을 물려주는 것도 일부 마족들이 혈족에게 하는 전승 의식이었어.”
에르카네는 처음으로 간절한 어조로 부탁했다.
“신성 시대가 지났지만 여전히 마족이 살기엔 위험한 세상이죠. 차라리 자신을 인형으로 알고 사는 게 나을 정도로. 당신이 마족에게 큰 증오심을 가졌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아스카의 피 중 절반은 당신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어요.”
에르카네가 그렇게 얘기했어도 로지스트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그런 로지를 에르카네가 말없이 보더니,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펠리오인가요? 역겨울 정도로 발이 넓은 상인 군주군요.”
“…….”
여왕의 물음에 로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공주 얘기는 없었다. 그저 에르카네 여왕만 죽여 달라는 의뢰야. 로니아드가 퍼트린 소문이 도움이 됐다.”
로지가 아스카는 건들지 않겠다고 말하자, 여왕의 얼굴이 환해졌다.
“제가 흑마법의 저주에 걸렸다가 풀려났다는 소문이요? 거기다 아스카는 전승하기 전까지만 해도 철이 너무 없었으니…….”
펠리오가 무슨 의도로 이런 의뢰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단순히 돈 때문에 펠리오의 의뢰를 받진 않았겠죠?”
“뭐, 그렇지.”
에르카네는 한숨을 쉬고는 로지에게 책을 하나 건넸다.
“자, 여기 있어요. 10년 전, 아르미다츠 왕궁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했던 일기장이에요.”
“일기?”
“매일은 아니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기록한 일기장이에요.”
“혹시 아스카에게 이 기억을 전승했나?”
“안 했지요. 그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
그녀의 말에 로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너도 그 장소에 있었나?”
“예전엔 교단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용의 적통들과 대대로 모임을 가졌었죠. 다들 마법의 대가들이라 자기 몸 하나 공간 이동시키는 건 가능하거든요.”
그러던 중, 주변에서 시끄러운 인기척이 들렸다.
“침입자의 흔적이 있다!”
“여왕님을 지켜라!”
병사와 기사들의 군화 소리가 왕궁 밖을 울렸다.
“여왕님! 계십니까?!”
“여왕 폐하!!”
쾅쾅쾅!
여왕이 있는 방의 문을 기사와 병사들이 세게 두들겼다.
“문에 마법이 걸렸어!”
“궁정 마법사를 데려와!”
하지만 로지가 들어오면서 마법을 걸어 뒀는지, 쉽게 열리지도, 부서지지도 않는다.
“시간이 없으니 슬슬 마무리 짓지.”
“한 달 정도는 엄마 노릇을 해 주고 싶었는데…….”
로지의 태도에 에르카네가 씁쓸히 웃는다.
“어차피 너의 영혼도 지금 한계 아닌가? 여기에 오래 있을수록 고통스러울 텐데?”
“……티가 많이 났나요?”
“간신히 육체를 유지하는 모습이 보는 내가 불편할 정도야.”
“역시 마누스의 적통이군요. 용의 피를 이은 자는 영혼을 볼 수 있다고 하더니만.”
“정확히는 냄새를 맡는 것이다.”
에르카네는 이내 포기하고는 몸에 힘을 뺐다.
“아스카에게 작별 인사도 못하고 가는군요…….”
거의 무표정을 유지하던 로지의 표정이 살짝 흐트러졌다.
“내 이복 누이에게 좀 미안하군.”
그런 로지의 말을 들은 에르카네가 마찬가지로 씁쓸히 말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일부로 정을 주지 않았던 것이죠. 힘을 잃은 마지막에는 결국 못 참고 약간의 정을 줘 버렸지만.”
“그대는 비록 마족이지만…… 유감을 표한다.”
로지스트가 검을 들었다.
“참고로.”
그의 검에서 용의 마나가 느껴지자, 에르카네가 말했다.
“로니아드, 그자를 믿지 마세요.”
“알고 있다.”
그 말을 끝으로 에르카네가 눈을 감았다.
서걱―.
에르카네의 목이 잘렸다.
그날, 오스카 왕국의 여왕이 죽었다.
사인은 암살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을 지나 정오에 가까운 시간, 나는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말캉, 말캉.
팔에 물컹한 것이 닿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브리기트가 세상 행복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들어 있는 브리기트를 보면서 살짝 갈등했지만, 이내 제복을 입고서 1층으로 내려왔다.
점심 식사분까지 어제 미리 계산했다.
막 일어나서 그런지 입맛이 없어 그냥 여관을 나왔다.
이 고급 여관은 왕궁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브리기트 혼자 둬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점심까지 함께 있어 주고 싶지만……. 그래 봤자 희망 고문이지.’
괜히 헛된 희망만 심어 줄 바엔, 일어났을 때 옆에 없는 것이 그녀에게 좋을 거다.
여관을 나선 나는 곧장 왕궁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지?”
그런데 왕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도저히 축제 다음 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왕궁 내의 경비가 삼엄했다.
“무슨 일이 있나?”
왕궁 입구를 지키는 근위 기사에게 물었다.
나를 본 기사가 내 얼굴을 알아봤다.
“아, 로니 님이시군요.”
제르다의 화신이자, 테오스의 재림이며, 새로운 용병왕 칭호를 가진 나다.
사람들에겐 로니아드가 아닌, 로니라는 이름으로만 알려져 있다.
“아스카 여왕님께서 새벽부터 애타게 찾으셨습니다.”
아스카 여왕? 아직까진 공주일 텐데?
내 의아한 표정을 모르는지 기사는 말을 이었다.
“자세한 얘기는 왕궁으로 가서 들으시면 됩니다. 어서 가시지요. 찰리! 로니 님을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안내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기사는 옆에 있던 경비병에게 안내를 맡겼다.
나는 병사의 안내를 받아 왕궁 중심에 위치한 알현실로 향했다.
“왔군.”
“도대체 어디 있다가 이제 오신 겁니까?”
알현실에는 나를 제외한 모두가 모여 있었다.
시종장 필립, 루키엘, 패가스를 비롯한 부사관급 용병들, 팔라딘 아고르, 프리미오 공작 등.
카디나도 어느새 기사 제복을 입고는 아스카 곁에 서 있었다.
“많이 늦었구나. 한참 찾았다.”
그리고 여왕의 왕좌에 앉은 아스카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스카의 얼굴은 하룻밤 사이에 무척이나 수척해져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지금까지 어디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내 어리둥절한 모습을 본 프리미오 공작이 입을 열었다.
“밤사이, 에르카네 여왕께서 서거하셨네.”
프리미오 공작의 무거운 어조에, 나는 그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내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사인은 암살이네. 범인은 로지스트 그자고.”
“?!”
여전히 이 모든 상황이 와 닿지 않았지만, 언제까지 멍해 있을 수도 없다.
왕좌에 앉은 수척한 소녀가 보였다. 지금 어느 누구보다도 떨고 있을 소녀가.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벅, 저벅.
나는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스카에게 다가갔다.
누구도 나의 걸음을 막지 않았다.
아스카 앞에 섰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울어도 돼, 아스카.”
무표정했던 아스카의 표정이 금이 가듯 깨졌다.
그녀의 붉은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흐윽…… 흐으으으.”
그녀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최대한 소리 죽여 흐느꼈다.
밤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나를 애타게 찾았을 것이다. 의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슬픔을 목놓아 내뱉기 위해서, 애타게.
나는 말없이 아스카의 어깨와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줬다.
여왕의 부고가 활기를 되찾던 오스카 왕국 전역에 퍼졌다.
다행히 머리카락은 빠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로지가 그런 행동을 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는 것인데?’
아스카를 안정시키고 여왕의 부고를 공표했다.
국장이 치러지고 급히 대관식을 가졌다.
모두 한 달도 안 돼 벌어진 일이다.
우리가 이렇게 서두른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배후가 펠리오란 말입니까?”
“교단의 조사로는 그렇습니다.”
폴라라스의 남작이자, 튤페 항의 주교인 오르페스 주교가 말했다.
한 달 사이 오르페스 주교의 얼굴은 반쪽이 되었다. 아스카보다 더 상심한 모습이다.
‘에르카네 여왕을 짝사랑했던 건가?’
개판이군.
나는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그래서 세뇌당하지 않았음에도 그토록 여왕에게 협조적이었군.
“제르다의 화신이자, 남매 달의 붉은 장녀가 타락하다니…….”
“사악한 흑마법사의 사체를 처리하다가 당한 듯싶네. 아한-제르다.”
“오, 제르다시여!”
교단의 다른 팔라딘과 사제들이 충격을 받은 듯 성호를 긋는다.
‘뭐,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간신히 잡은 로지스트를 다시 잡아야 한다.
‘그나저나 어떻게 펠리오로 가서 로지를 잡아 오지?’
그리고 교단의 조사 결과, 로지는 지금 펠리오로 망명한 상황이다.
문제는 펠리오가 지금 대놓고 오스카에 선전포고를 한 상태라는 거다.
이미 국경에서는 크고 작은 국지전이 터지고 있다.
최근 오스카에서 독립한 두 공화국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아무리 나라도 지금 펠리오로 가는 것은 자살 행위다.
차라리 몬스터 웨이브를 한 번 번 더 겪고 말겠다.
“펠리오와 흑마법사 그리고 타락한 재림. 이쯤 되면 펠리오 왕국을 이단의 나라로 파면시킬 수 있지 않습니까?”
당장 오스카는 펠리오로 진군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
이럴 때는 외부의 힘을 빌려야 한다. 예를 들어 교국이라든가, 교국이거나, 교국 같은 외부의 힘을 말이다.
“그게…… 교국에서는 중립을 취하겠다고 합니다.”
내 말에 팔라딘 아고르가 수치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교국의 성녀께서는 오스카를 지지하셨네. 하지만 교황 성하께서는 중립을 지키자고 하셨고.”
오르페스 주교가 한숨을 쉬면서 추가 설명을 했다.
“추기경단에서도 펠리오의 파면에 부정적이네. 애초에 추기경들은 자네와 로지가 제르다의 화신이라는 사실 자체도 인정하지 않고 있네.”
오르페스의 말에 나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펠리오는 돈이 많으니까 그들 입장에선 어쩔 수 없겠죠.”
뭐, 교국의 입장도 이해한다.
막대한 부로 늘 어마무시한 헌금을 내는 펠리오와, 평소 마녀 의혹이 짙던 여왕의 나라 오스카가 있다.
둘 중에 선택하라 하면, 중립을 지킨 것만으로도 다행일 것이다.
“참으로 할 말이 없네…….”
“정말 부끄럽습니다. 우리 교단이 어쩌다 이토록 타락했는지…….”
오르페스와 아고르가 나라 잃은 애국자처럼 비참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군요.”
나는 팔짱을 끼며 고민에 빠졌다.
아스카가 옆에서 마찬가지로 생각에 잠겼다. 그녀 또한 에르카네의 복수를 하고 싶을 것이다.
‘오스카의 군사력을 동원할 수도 없다. 교단의 힘도 못 빌린다.’
내 눈은 어느덧 회의실 탁상에 올려진 북부 대륙 전도에 가 있었다.
‘다행히 펠리오 또한 육군이 강하지 않다. 펠리오는 동방 항로 때문에 대대로 해군이 강하다.’
이세계의 군함은 상선과 큰 차이가 없다.
배에 화물을 실으면 상선이고, 화물 대신 전투원을 실으면 군함이 된다.
그리고 펠리오는 동방무역으로 이카디아에서 가장 많은 선박을 보유하고 있다.
“오스카의 해군력은 얼마나 되오?”
나는 프리미오 공작을 향해 물었다.
공작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짧게 답했다.
“없소.”
내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프리미오가 부연 설명을 했다.
“상선과 여객선 그리고 어선은 조금 있소. 말 그대로 아주 조금. 원래 더 있었는데, 펠리오에게 야금야금 털리다 보니, 이 꼴이 되었지.”
공작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크게 실망하거나 낭패한 얼굴이 아니자, 이번엔 오히려 공작이 의아해 한다.
“어차피 기대도 안 했소.”
옆에서 듣고 있던 아스카의 얼굴이 부끄러움에 빨개졌다.
‘펠리오는 무역으로 유지되는 나라다. 북부 대륙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 식량이 늘 부족하지. 육군은 오스카를 칠 만큼 강하지 못해. 즉, 놈들의 무역만 막으면?’
이세계의 해전 개념은 아직 원시적인 단계다. 본격적인 대항해시대가 열린 지 20년도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펠리오는 하나의 완전한 나라가 아니야. 서로 사이가 안 좋은 도시국가 연합이지.’
펠리오를 말려 죽일 방법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