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knight in a fantasy novel RAW novel - Chapter 67
67. 인연은 엉키면서 운명이란 옷감을 만드네
“오랜만입니다, 제인.”
내가 그녀를 왕녀가 아닌 제인으로 반기자, 제인 또한 기뻐했다.
오랜만에 본 제인은 여러 가지로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 비해 많이 여유로워지고 밝아진 느낌. 외모도 그새 더더욱 성숙해진 것 같다.
“원래라면 좀 더 제대로 인사를 해야 하는데, 상황이 애매하군요.”
내 말에, 제인은 율카네스와 아스카를 보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둘 다 진심을 싸울 생각은 없어 보여요. 뭐랄까…… 고양이끼리 서로 기 싸움 하는 정도?”
“그것도 마누스의 적통에게 이어지는 능력입니까?”
“그럴 거예요. 근래 더더욱 활성화된 거 같기도 하고요. 그나저나…….”
나를 보던 제인의 시선이 아스카에게로 향했다.
“저 아스카 여왕, 굉장히 익숙한 냄새? 같은 게 나요. 뭐랄까, 로지의 냄새처럼 엄청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뭐, 얼마 전까지 로지스트와 함께 있긴 했지요.”
‘심지어 둘이 썸도 탔어요’라고 덧붙이려다 관뒀다.
괜히 멋대로 오버하는 거 같았고, 무엇보다 로지는 지금 에르나케를 죽인 용의자니깐.
“흐음? 단순히 함께 있었다고 느껴지는 냄새는 아닌데…….”
냄새라, 용족의 피를 이으면 후각도 발전하는 걸까?
“로지는 잘 컸던가요?”
제인이 동생 로지에 대해 물었다. 로지가 저지른 일이 있고 장소가 장소다 보니 왕녀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네, 제인과 똑같은 연갈색 머리와 청염의 눈동자가 인상적이더군요. 얼굴도 굉장히 잘생겼고요. 키도 멀리서 보면 성인처럼 보일 정도로 컸습니다.”
“키가 큰 걸 보니, 그래도 밥은 제때 먹었나 보네요.”
내 말에 제인의 얼굴에 착잡함이 드리운다.
수년 만에 동생과의 상봉을 한껏 기대했을 텐데, 도착하니 동생이라는 놈은 대형 사고를 치고 튀어 버렸으니…….
“그랬군요. 하아, 그 아이가 왜 그런 짓을 벌였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따 아스카 여왕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엄두도 안 나네요.”
“아스카는 괜찮을 겁니다.”
저렇게 율카네스와 빼액거리는 걸 보면 좀 못 미덥지만, 예전처럼 공과 사를 구분 못 하는 철부지는 아니다. ……아닐 것이다.
나와 제인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제인과 함께 병풍처럼 있던 이스가 심심했는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나저나 로니, 제르다의 화신? 테오스의 재림? 번개 검 용병왕? 그 칭호가 다 너 맞아?”
이스는 여전해 보였다.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내 말에, 이스가 조심스러운 눈치로 물었다.
“……진짜로 계시를 받은 거야?”
이스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받았겠냐?”
“와…… 나는 율카네스 님보다 네가 더 대단해 보여.”
“나도 그래.”
“……?!”
내가 이스의 말을 너무 쉽게 인정하자, 오히려 그가 당황한다.
‘생각해 보니, 별별 일들이 다 있었네. 책을 한 권 만들어도 될 만큼.’
오스카로 와서 했던 일들을 돌이켜 보니, 나도 나 자신이 대단해 보였다.
“여공작께서는 잘 지내시고?”
자연스레 이스에게 이노의 안부를 물었다.
“정신없이 바쁘시지. 어찌 보면 네 생각을 안 하려고 더욱 일에 몰두하시는 거 같기도 하고.”
이스의 말에 씁쓸함을 느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노 그녀가 선택한 운명이다.
“덕분에 렌슬렛 공작령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 중이야. 네가 렌슬렛을 떠난 지 몇 달 사이에 엄청 바뀌었어. 마치 일주일이 1년 같다니까.”
“그래? 빨리 가 보고 싶다.”
‘하긴 이젠 열몬침 하이든도 없으니.’
“이대로 가면, 10년 내로 공국으로 독립할 수도 있을 거 같아.”
이스가 나만 들으라는 식으로 작게 말한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
이노의 야망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지만, 부디 훗날 로지와 이노가 갈등을 겪지 않길 바랄 뿐이다.
아스카와 율카네스 두 사람은. 서로 하악질하는 고양이처럼 몸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입으로는 초등학생도 하지 않을 유치한 빵꾸똥꾸스러운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그렇게 5분 정도 시간이 더 흘렀을까?
“에휴! 내가 증손녀뻘 되는 애랑 뭐 하는 짓인지!!”
먼저 물러난 사람은 놀랍게도 율카네스였다.
“흥! 나이를 먹었으니 기력이 허하겠지. 이따 가기 전에 보약이나 하나 포장해 주마.”
“아오!!”
기 싸움에서는 율카네스가 유리했다.
하지만 에르카네의 기억을 전승받은 아스카의 말싸움에 율카네스가 밀리고 만 듯했다.
‘와…… 아스카가 갑자기 엄청 위대해 보인다.’
다사다난했던 첫 조우가 끝나고, 급히 마련했지만 딱히 부족함 없는 만찬이 열렸다.
제인과 아스카는 같은 왕족이라 그런지 금세 친해진 듯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그때, 로니아드 경이 나타나서 나무에 걸린 제 옷을…….”
“어머, 어머.”
제인은 아스카에게 나와 그녀가 처음 만난 순간을 얘기하는 듯했다.
아스카는 그런 제인에게 평소 하던 하대가 아닌, 하오체로 대하고 있었다.
‘마치 자매 같군.’
제인이 에르카네를 죽인 로지의 누이라는 사실을 아스카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전승의 효과 때문인지 아스카는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율카네스 님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전대 탑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다른 한편에선 루키엘이 율카네스와 친목을 다지고 있었다.
“크흠, 꽤 재주가 많은 친구군. 어디 학파인고?”
“적염학파에 적을 두고 있는 루키엘이라 합니다.”
“적염? 혹시 더그레이를 아는가?”
“아! 그분이 제 스승 되십니다.”
“한때, 자네 스승 더그레이가 내게서 수학했지.”
“대스승님을 뵙습니다!”
둘은 몇 마디로 족보 정리를 했고, 루키엘은 조상님 제사 지내듯 율카네스를 깍듯이 모신다.
루키엘의 그런 모습에 율카네스가 모처럼 흡족한 얼굴이다.
“더그레이의 제자라면 내 제자이기도 하지. 그래, 그 녀석은 잘 지내나?”
“대스승님처럼 젊진 않지만 정정하십니다.”
“허허허, 이 친구, 말을 참 잘하는구만.”
평소 그는 렌슬렛의 마법사들에게도 차갑기로 유명하다. 그런 율카네스가 의외로 루키엘에겐 살갑다.
보아하니 루키엘의 스승이라던 더그레이와 꽤 친했던 모양이다.
‘원작에서도 루키엘이랑 율카네스가 이렇게 직접 만났던 적이 있던가? 언급된 부분만 봐서 잘 모르겠네…….’
원작에서 루키엘은 로지의 편은 아니지만, 아리아에게 사매 비슷한 의리로 여러 도움을 준 존재다.
‘아리아가 로지 못지않게 호감을 가졌던 인물이기도 했지.’
하지만 그런 루키엘도 중후반부에 아리아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는다.
루키엘이 죽자, 당시 아리아는 어머니를 잃은 이후로 처음으로 통곡했다.
‘루키엘 같은 인재가 원작처럼 허무하게 죽게 내버려 두지 말아야지.’
재능 있는 마법사는 귀하니까.
다른 쪽에선 이스와 패가스가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
“그 석궁 나도 볼 수 있을까?”
“예! 이따 식사가 끝나면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싸! 렌슬렛에 가면 여공작님께 졸라서 사 달라고 해야지~!”
열린 사고방식에 사교성이 뛰어난 이스는 어느새 패가스와 꽤 친해진 모양이다.
“정말 신박한데?! 아티팩트를 병사에게 줄 생각을 하다니……. 그래서 몬스터 웨이브 때 어떻게 했어?”
“어휴~ 그때 진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아티팩트랑 석궁을 들고 샹타페의 높은 건물에 올라가서…….”
이스는 패가스의 용병 이야기에 푹 빠진 듯하다.
그는 눈앞의 식사를 먹는 듯 마는 듯 패가스의 얘기를 들었다.
“참으로 평화롭지 않소? 이 얼마 만에 보는 화목함인지…….”
내 옆에 앉아 있던 프리미오 공작이 말한다.
그의 말에 나도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래 우울함 그 자체였던 아스카가 저렇게 소녀다운 모습을 보이니 마음이 놓였다.
“펠리오가 이딴 식으로 도발하지 않았다면, 본래 로니아드 경을 재상으로 천거하려 했소.”
“재상은 공작이 하시오. 난 아마 오스카에 평생 묶여 있지 못할 듯하니.”
프리미오의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본래라면 로지를 잡고서 율카네스에게 넘겨주면, 다음 히로인이 있을 제국으로 가려 했다.
“렌슬렛 여공작의 옛 비서관이 그렇게 뛰어나다고 들었소. 실제로 요즘 일선 아카데미에서는 렌슬렛 양식이라는 행정 서식이 퍼지고 있고.”
보면 볼수록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은 양반이다. 지구였으면 얼리어댑터 콘셉트로 유튜버가 됐을 것이다.
“정 재상직이 그렇다면, 나중에 행정학에 대해 한 수 부탁하네. 테오스카에도 유서 깊은 아카데미가 있으니, 거기서 강의를 해 줘도 좋고.”
“이거 책이라도 하나 내야겠군.”
“그럼 더 좋지! 바로 구매해 보겠네. 아니, 후원을 하지! 친필서명이나 미리 부탁할까?”
반쯤 농담으로 던진 말인데, 공작의 반응이 진지하다. 정말 책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 * *
폰테임 저택의 화려함을 월등히 능가하는 호화로움.
크진 않지만, 세상의 모든 부가 집결한 궁궐이다.
사실상 대저택에 가까운 건물 내부는 비단과 도자기가 가득하다.
하찮은 시종, 시녀, 병사까지 비단으로 만든 옷을 걸치고 있었고, 벽과 천장에는 동방 도자기가 빼곡히 진열되었다.
로지스트는 그곳에 있었다.
“수고하셨소, 왕세자.”
비단과 각종 보석을 치장한 남성이 로지를 치하했다.
그는 로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비록 몰락한 왕가지만 로지는 용의 피를 이은 마누스의 적통.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고귀한 존재 중 하나가 바로 로지스트였다.
그런 로지의 정체를 잘 알면서도 태연히 치하하는 자 또한 보통 존재가 아니다.
“여기 서약서요. 왕세자의 공훈의 대가로, 우리 펠리오는 훗날 전적으로 그대를 지원할 것이오.”
“고맙군, 상인 군주.”
펠리오의 상인 군주라는 칭호가 이름보다 유명한 크라운 하이어스.
“여기 비단궁으로 거처를 옮길 생각은 아직 없소? 내 왕족의 예우에 맞춰 귀빈으로 모시지. 어떤 요금도 청구하지 않겠소.”
상인 군주의 제안에 로지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단호히 거절했다.
“펠리오인의 호의를 무턱대고 받았다간, 10년이 고달파진다는 말이 있더군.”
“너무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이 없군. 뭐, 왕세자 놀이보다 현상금 사냥꾼 놀이가 마음에 드신다면야.”
로지의 거절에 크라운은 피식 웃었다.
그가 로지에게 비단에 금색 실로 수놓은 서약서를 건네려고 할 때, 문득 떠올랐다는 듯 크라운이 물었다.
“그나저나 왕세자, 왜 아스카 공주는 죽이지 않았지?”
그의 물음에 로지는 잠깐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분명 여왕을 죽이라는 의뢰였다. 공주를 죽이라는 얘기는 없었을 텐데?”
“이런, 이런~ 왕세자께서 이렇게 눈치가 없으면 안 되지. 여왕이 죽으면 공주가 여왕이 되겠지. 그럼 공주도 죽여야 하는 게 맞지 않겠소?”
‘이 새끼가……!’
크라운의 말장난 같은 억지.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갑은 상인 군주였다.
“그 멍청하고 군주의 자질도 없는 공주까지 죽일 필요가 있겠나? 어차피 폭정으로 말아먹을 텐데.”
“그 공주의 망나니짓이 연기였다면? 후환을 그런 식으로 두면 곤란하오, 왕세자.”
‘죽여 버릴까?’
속으로 상인 군주를 죽일 생각도 했다.
하지만 상인 군주가 걸치고 있는 각종 아티팩트가 로지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상인인 주제에 마법에도 소질이 있다고 하더니…….’
꿀꺽.
로지는 인내의 침을 삼켰다.
‘아스카를 죽이라고? 그게 가능하긴 할까?’
애초에 전대 여왕의 힘을 물려받은 아스카를 로지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일단 아스카의 실력과 정체는 숨겨야 한다.’
로지는 에르카네와 최소한의 의리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 공주 옆에는 로니라는 자가 있다.”
“로니? 그 제르다의 화신과 테오스의 재림 그리고 용병왕이라는 별별 칭호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자를 말하는 것이오?”
크라운의 물음에 로지스트는 무언으로 긍정을 표했다.
“그래 봤자, 체스카드에서 건너온 일개 방랑 기사 아니오? 유부녀와 사랑놀이에 빠져 쫓겨난 놈이 그리 강하오?”
“……지금 당장은 그와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
“지금 당장이란 말이라면, 나중엔 가능하다는 것이겠군? 하긴 왕세자는 아직 성년이 아니지.”
크라운은 그렇게 말하고는 로지에게 주려던 서약서를 다시 자신의 품 안에 넣었다.
“그럼, 이 서약도 나중에 하기로 하지.”
“…….”
크라운의 말에 로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왕세자가 성년이 되어 로니인지 뭔지 하는 놈을 죽이고 아스카 여왕도 죽여 준다면, 그때 다시 서약하겠소. 신성의 맹세도 그때 하지.”
“그래도 에르카네 여왕은 죽였다, 상인 군주.”
“그렇지. 의뢰의 절반은 수행했군. 헌데…… 세상 어느 병신이 의뢰의 절반만 수행했다고 약속한 보상을 주지? 보상 중 절반만 달라는 뜻인가? 왕세자, 여긴 펠리오네.”
상인 군주의 말에 로지스트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
말은 없었지만, 그의 몸에서 짙은 살기가 풀풀 풍긴다.
“거, 살기 좀 치우게! 그래도 왕세자니까, 내가 다른 보상을 하지.”
크라운은 말과 동시에 로지에게 뭔가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