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knight in a fantasy novel RAW novel - Chapter 69
69. 각자의 시작
올리비아를 재우고, 로지는 식탁에 멍하니 앉았다.
따듯한 음식이 올라왔던 아까와 다르게, 차가운 적막감이 식탁 위에 차려졌다.
로지에게 11년 전의 그 일은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당시 그와 누이는 다행히도 왕궁 외곽에서 놀고 있어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했다.
덩치 큰 어떤 남성이 자신과 누이를 다급히 안고 왕궁 밖으로 탈출하던 장면.
그리핀을 타고 날아다니던 근위 기사와 거대한 거신병이 얼핏 보였던 거 같다.
훗날 자신을 안고 급히 탈출했던 남자는 왕실 시종장이라고 했고.
그는 자신과 누이를 어떤 작은 영지에 맡겼다.
‘로니아드 칸브라만…….’
아주 어렸을 적이다.
마누스의 적통인 로지 또한 정확히 기억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얼핏 그때 만났던 남자는 기억했다. 남색 머리에 붉은색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던 사람.
어린 자신의 누이가 오빠처럼 따랐던 청년.
이름까진 기억 못 했지만, 펜템에서 처음 로니아드를 봤을 때, 로지는 그가 그때의 그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 당시와 비교해서 하나도 늙지 않았던 남자.
로지가 로니아드를 그토록 경계하고 믿지 않았던 이유기도 했다.
‘에르카네를 괜히 죽였어.’
하지만 지금 로지는 어느 때보다 두 사람의 도움이 간절했다.
‘내 과오다. 내 탓이야.’
내가 멍청하고 어리석었다.
로지는 식탁에 일기장을 꺼냈다.
에르카네가 마지막에 건네줬던 일기장. 11년 전의 일을 가장 가까이서 본 존재의 기록이다.
지금까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열어보지 못했다.
‘어쩌면 여기에 올리비아의 저주를 풀 방법이 있을지도.’
로지는 심호흡을 하고는 일기장을 열었다.
우우웅.
일기장에는 강한 보안 마법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로지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 보안 마법의 파훼 방법은 잘 알았다.
‘평범한 인간은 보지 못하게 해 놨군. 용의 피와 마족, 천족의 피를 이은 자만이 열 수 있게 해놨어.’
로지에겐 장애 요소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일기장에 나타난 마법진에 자신의 힘을 불어넣었다.
“……”
5분이 흘렀다. 10분이 흘렀다.
그 이상이 흘렀다.
하지만 일기장의 보안은 풀리지 않았다.
‘각성해야만 볼 수 있는 것인가?’
로지의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흘렀다.
“허억, 허억.”
그의 숨이 격한 운동을 한 것처럼 거칠다.
일기장의 보안 마법이 그의 힘이 한참 모자르다며 비웃는 듯했다.
아직 로지는 용의 힘을 제대로 각성하지 못했다.
보통 용의 힘을 각성하는 나이는 성인이 된 열일곱.
이거까진 아마 에르카네도 고려하지 못한 듯했다.
에르카네는 로지의 힘을 과대평가 했던 것이 분명하다.
“빌어먹을…….”
로지는 치밀어오는 무력감에 치를 떨었다.
* * *
‘원작에서 로지는 펠리오와 큰 연관이 없었어. 도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바뀐 거지?’
과거 렌슬렛에서 정리해 놨던 원작 정리집을 펼쳤다. 나는 그 정리집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빌어먹을 작가 새끼는 설명충인 주제에 꼭 필요한 설정은 언급조차 안 해서…….’
그 생각 중 절반은 원작 작가에 대한 쌍욕이었지만.
“뭘 그렇게 보고 있어요?”
제인의 목소리가 내 상념을 깨뜨린다.
“아아, 그냥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 중이었어요.”
“흐응~ 그렇구나.”
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보고 있던 원작집을 슬쩍 본다.
“무슨 문자로 쓴 거예요? 처음 보는 문자인데?”
원작집은 한글로 쓰여 있다. 그녀가 못 알아보는 것이 정상.
“동방의 문자 중 하나입니다.”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동방의 문자요? 대단하세요! 동반의 언어와 문자를 전부터 공부하고 싶었는데, 나중에 가르쳐 줄 수 있을까요?”
“그, 그렇게 하지요, 하하하…….”
일이 귀찮게 됐다. 이계인에게 졸지에 한글을 알려 줄지도 모르게 생겼다.
“떠날 준비는 다 되었나요?”
나는 어서 다른 주제로 전환하기 위해 말을 돌렸다.
“예, 어차피 몸만 왔으니까요.”
제인이 환하게 웃으며 답한다.
제인의 웃음이 오늘따라 상큼하게 보였다.
그러다가 그녀의 웃음이 상큼함에서 부끄러운 웃음으로 변한다.
그리고 갑자기 내게 아주 가까이 다가와 속삭인다.
“사실 저는, 로지보다 로니아드 경을 보기 위해 온 거예요.”
‘에?’
제인은 내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는 품에서 뭔가를 꺼낸다.
“자, 이제야 주네요.”
그녀가 품에서 꺼낸 것은 비단으로 된 손수건이었다.
제인이 내게 그 비단 손수건을 건넨다.
녹색 비단에 금실로 동방의 문양을 넣은 손수건이다.
딱 봐도 비싼 손수건.
전에 꼭 선물하겠다던 약속을 잊지 않은 것이다.
“정말 고마워요, 제인. 잘 쓸게요.”
제인이 준 손수건을 조심스레 만졌다. 나도 모르게 그녀가 준 손수건을 코끝에 댔다.
늘 품에 품고 다녔는지 손수건에서 제인의 냄새가 가득하다.
“손수건 쓸 때마다 저를 꼭 생각해 주세요.”
“물론이죠.”
다시 만난 제인은 정말 많이 변해 있었다. 더 밝아졌고 더 적극적이었다.
“제인~ 좀 더 있다 가면 안 돼?!”
나와 제인이 작별 인사를 하는 동안, 아스카가 제인에게 다가와 아쉽다는 듯 물었다.
아스카는 정말로 제인이 떠나는 게 아쉬운 모양이다.
“렌슬렛으로 가면, 꼭 마법 통신 할게.”
“꼭이야 제인!”
“당연하지. 아스카 너야말로 연락 자주 하고.”
“이따 저녁때부터 바로 할 거야!”
두 소녀는 그새 엄청 친해졌는지, 서로 손을 맞잡고 꺄꺄거리며 수다를 떤다.
“이만 떠날 것이다. 만약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마법 통신기로 얘기해라.”
율카네스가 나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보름간 만들어 주신 아티팩트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요.”
나는 율카네스가 개조해 준 휴대용 마법 통신기를 꺼내 보이며 답했다.
‘과연 세계관 최강자인가? 루키엘과 함께 보름 동안 만든 아티팩트들을 보면, 지구의 해군력이 부럽지 않을 정도야.’
만약 그를 계속 적대했다면?
상상하기도 싫었다.
“나야 뭐 크라운 고 녀석 버릇도 고쳐 줄 겸 하는 소일거리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율카네스는 자신이 만들었던 아티팩트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나도 많은 공부가 되었네. 자넨 도대체 어디서 이런 것들을 구상한 거지?”
“예전에 대륙을 떠돌 때, 승선 용병으로 2년 정도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도움이 됐지요.”
사실은 지구의 해군 상식을 많이 가져왔다.
그래도 빙의 전 로니아드의 기억과 경험도 도움이 된 건 맞다.
“흥! 거짓말 말게. 자네 말대로라면 지금 배밥 먹고 있는 놈들은 전부 무뇌아란 소리니까.”
율카네스는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하곤 내게서 몸을 돌렸다.
서둘러 렌슬렛에 가서 이번에 만든 아티팩트들을 좀 더 연구하고 싶은 모양이다.
“클클, 나중에 크라운 녀석을 만나면 안부나 전해 주게.”
율카네스는 클클 웃으며 마법진을 그렸다.
그의 손끝에서 강하게 압축된 마력이 레이저처럼 발사되더니, 바닥에 복잡한 마법진을 쓱쓱 그린다. 마치 레이저 프린트로 인쇄하는 모양새.
“다들 마법진으로 오시오!”
율카네스의 외침에 제인이 아스카와 포옹을 한 뒤, 마법진으로 갔다.
“드디어 가는구나!”
이스는 오히려 떠나는 게 반갑다는 듯 신나서 마법진으로 달렸다.
“그렇게 심심했냐?”
내가 마법진에 선 이스를 향해 핀잔하듯 물었다.
“너랑 용병들이랑 수다 떠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원래 왕녀님 호위로 왔는데 막상 호위할 일도 없고, 뻘쭘해서 혼났다고.”
이스는 그렇게 말하곤 내 뒤에 있던 누군가를 향해 손을 흔들며 외쳤다.
“카인 경! 대련해서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부탁하죠!”
“무, 물론이요, 이스트라 경!”
제인과 아스카가 친해지고 율카네스와 루키엘이 친해진 것처럼. 이스 또한 패가스와 카디나와 친분을 맺었다.
특히 카디나와는 매일 대련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친해진 모양이다.
물론 대련의 결과는 언제나 카디나의 승이었다.
‘이스는 끝내 카디나가 그때의 폰테임의 여기사란 걸 모르는군.’
애초에 그녀가 남장을 했다는 것도 눈치 못 챈 듯하다.
다른 건 눈치 빠르면서 이런 부분에선 둔한 것 같다.
“잘 가!”
“다음에 또 봐~!”
세 사람은 환한 빛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작 셋이었지만 그들이 떠나니 굉장히 허전했다.
홈 파티가 끝나고 모두가 떠난 빈집을 보는 기분이다.
“흐음~ 다시 조용한 것이 어색하구나.”
제인과 함께 있을 때만 해도, 또래 소녀처럼 꺄르르거리던 아스카가 원래(?)의 근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라버니는 언제쯤 떠날 것이냐?”
아스카가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저 앞뒤 안 맞는 이상한 말투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
“아스카, 그냥 편하게 제인에게 하던 것처럼 해.”
오라버니면 오라버니지, 뒤에다가 하대를 붙이니 영 이상하다.
“하지만 여왕의 위엄이…….”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아스카에게 딱밤을 약하게 놨다.
탁콩!
“끼앗!!”
아스카는 이마에 가해진 충격에 비명을 지르더니 입을 삐쭉 내밀었다.
“히잉~ 오라버니! 나도 이젠 여왕이다. 내 위엄을 지켜야 한다!”
“그럼, 아까처럼 ‘떠날 것이냐?’가 아닌 ‘떠날 거야?’로 다시 말해 봐.”
아스카가 딱밤 맞은 머리를 문지르며 다시 말했다.
“오라버니는 언제 떠날 거야?”
“그래, 앞으론 그렇게 말해.”
“아, 알았어…… 오라버니.”
애초에 오라버니도 신경 쓰이지만, 저거는 내가 적응하든가 해야지.
“언제 떠나냐고 물었지? 으음, 프리미오 공작이 배와 선원들을 모으고 있다고 하니까, 그게 끝나면 바로 떠나야지.”
내 말을 들은 아스카가 눈을 빛낸다.
“나도 함께 가고 싶다!”
배를 타고 자유롭게 여행하는 걸 꿈꾸는 듯했다.
딱콩!
“끼잇!”
당연히 아스카의 이마에는 2차 딱밤이 떨어진다.
“말이 되는 소릴 하세요, 여왕님. 여왕의 자리가 공석이면 펠리오놈들이 참 좋아하겠죠?”
“그건…… 브리기트 보고 대역을 시키면…….”
“쓰읍! 이게 벌써부터 빠져 가지고!”
간만에 예전처럼 아스카를 대했다.
학습의 결과물인지, 내 “쓰읍!”에 아스카가 움찔하더니 이내 포기한다.
율카네스에게도 밀리지 않던 그 여왕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풀이 살짝 죽은 아스카에게 미안함을 살짝 가졌지만, 이내 외면했다.
능력 있는 재상이 있다고 해도, 이제 막 재건에 들어간 나라에서 왕의 공석은 치명적이다.
“여기서 나라 잘 다스리고 있어. 카인이 나 대신 너를 감, 아니, 보좌할 거야.”
애초에 카디나의 실력으로 아스카를 잡는 건 무리.
하지만 사고 안 치게 감시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보름이라는 시간이 더 흘렀다.
“무운을 빕니다, 마스터.”
카디나가 내게 아쉬운 얼굴로 경례한다.
“아스카를 잘 부탁하지.”
“철저히 여왕님을 호위하겠습니다!”
내가 그녀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하자, 카디나가 군기 든 병사처럼 허리를 바짝 세운다.
‘그러고 보니, 카디나는 아스카의 힘에 대해 모르는구나.’
처음엔 나와 함께 배를 타려 했던 카디나였다.
하지만 내가 아스카의 호위(호위라 쓰고 감시라 읽는다)를 부탁하자 그녀는 큰 거부 의사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전에 아스카에게 한 짓이 걸리나 보다. 무엇보다 최근 어머니를 잃은 그녀에 대한 동정심도 있는 듯하고.
“출항하겠습니다!”
“그래, 가자.”
프리미오 공작이 구한 배는 연안선을 개조한 여객선이었다.
그 여객선을 전투에 적합하게 개조하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율카네스가 만든 각종 아티팩트들을 루키엘이 나서서 배에 설치했다.
‘루키엘이 고생을 많이 했지.’
그나마 엔티오 백작과 아스카가 도와줘서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었다.
“모두 탑승 완료입니다, 대장!”
패가스가 내게 경례를 올리며 보고했다.
레인저 용병대 중에 부사관급만 골라 전투원으로 태웠다.
배에서는 루키엘이 돛에 달린 부스터 아티팩트를 점검 중이다.
부두에 걸린 홋줄이 풀렸고 돛에 달린 아티팩트가 가동한다. 조타에 맞춰 배가 움직였다.
그렇게 모두의 환호를 받으며 ‘스카이호’가 마침내 출항했다.
* * *
로니아드도 스카이호를 타고 떠난 그날 밤.
아스카는 늦은 밤이 되도록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대부분은 프리미오 공작이 처리하지만, 아주 중요한 사안은 아스카가 직접 봐야 했다.
그렇게 마법 횃불을 켜고 서류를 보는 아스카의 모습은 전승의 효과 때문인지 너무나 기품 있어 보였다.
한창 서류를 읽고 결재 서명을 하던 아스카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그녀의 고개가 집무실 구석으로 향했다.
“쥐새끼 같군. 무슨 염치로 이렇게 기어 온 것이지?”
그녀의 말에 집무실 구석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왜? 어머니에 이어서 나도 죽이라고 크라운이 시키던가?”
연갈색 머리에 녹색 청염을 품은 눈동자, 로지스트였다.
그를 보는 아스카의 얼굴에 분노가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