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knight in a fantasy novel RAW novel - Chapter 7
7. 평기사가 공작가 저택으로 가게 된 사정
‘뭔가 마가 낀 것이 분명해.’
정체불명의 시녀에 이어서 이번엔 정체불명의 귀부인이다.
‘굉장히 지적이면서 예쁘군. 어느 가문의 부인이지?’
근래 난처한 상황의 여자들이 내 주변에 몰리는 기분이다.
나름 여복이라면 여복이다.
‘부인이 아닌가? 반지가 없네? 괜히 실언을 한 게 아닌지 모르겠어.’
손수건은 아직 내 품에 안긴 여성의 발목에 묶여 있다.
‘외모는 대략 20대 중반? 근데 분위기 자체가 어른스럽단 말이지.’
한국이었다면 결혼은커녕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했을 나이.
알다시피 이 세계는 이제 막 중세에서 벗어난 시기다.
귀족이라도 빠르면 16세, 늦어도 20대 초반이 지나기 전까진 열에 아홉은 결혼하는 편이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가시면…….”
“네, 이쪽으로요?”
로니아드가 안은 귀부인의 얼굴이 귀 끝까지 빨개져 있다.
낯선 남자의 품에 안긴 상황이 당황스럽겠지.
그녀는 애써 전방을 보면서 길을 안내했다.
‘오, 이런 루트도 있었어?’
지금 귀부인이 안내하는 길은 굉장히 신기했다.
묘하게 당직과 순찰을 도는 루트와 어긋나게 되어 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다른 기사와 병사들과 마주치지 않았을 정도.
‘애초에 공작성에 근무하는 병력이 극히 적으니까 가능한 루트겠지만.’
보아하니 종종 이렇게 성에 방문하여 남편과 밀회를 가졌나 보다.
‘반지가 없는 걸 보면 남편이 아니라 불륜, 그런 것일 수도?’
뭔가 아찔한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려 했다.
“여기서, 여기서 내려 주세요.”
어느덧 귀부인이 말했던 저택 후문에 도착했다.
“후문에 근무 서는 병사를 불러오겠습니다.”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여기서부턴 저 혼자서 할게요. 지금쯤 여기로 누가 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요.”
마침 발목도 천천히 걸을 수 있을 만큼 호전됐는지 부기가 많이 가라앉았다.
‘불륜이 맞는가 보군.’
귀부인의 반응을 본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굉장히 지적이면서도 기품 있고 아름다운 여성.
결혼반지를 안 낀 지 제법 오래됐는지, 그녀의 손에는 반지 자국이 희미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네, 정말 감사했어요!”
‘이런 건 적당히 모른 척 넘어가 줘야지.’
절도 있게 기사식 경례를 올리고는 뒤로 돌아 성으로 가려 했다.
“저, 혹시 기사님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가려고 하는데 귀부인이 내 이름을 묻는 소리가 들렸다.
반쯤 몸을 돌린 다음에 말했다.
“렌슬렛 공작가의 평기사 로니아드 칸브라만입니다. 그럼.”
로니아드의 이름을 들은 귀부인의 두 눈이 커졌다. 하지만 로니아드는 몸을 바로 돌리느라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만나는 상대가 제법 높은 기사인가 보군. 이거, 잘하면 진급해서 저택으로 발령 나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
쿨하게 이름을 말해 주고 바로 미련 없이 뒤돌아 갈 길을 갔지만, 가슴속은 두근두근 흥분으로 가득 찼다.
‘오늘 일은 마가 낀 게 아니라 행운의 여신을 만난 거였어!’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지긋지긋해진 이 성을 떠나고 싶었다.
부디 저 귀부인께서 오늘 있던 일을 높으신 분께 잘 좀 말해 줬으면 좋겠다.
그 일이 있은 지 이틀 뒤, 나는 성에서 저택으로 발령받았다.
* * *
이 세계에서 기사가 하는 일은 굉장히 많다.
고위 귀족의 경호, 도시의 치안 관리, 전쟁 시 병사들의 지휘, 몬스터 토벌 시 중급 이상의 몬스터를 잡는 것도 기사들이 한다.
하다 못해 성과 저택의 경비도 기사가 관리한다.
거의 만능에 가까워야 했다.
이렇게 하는 일이 많으니 기사라는 직함에 권력이 몰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심지어 돈으로 기사가 된 서임 기사라 해도 일반 평민들에겐 무시할 수 없는 위엄을 지닌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사가 할 수 있는 많은 일들 중에 가장 각광받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고위 귀족의 저택과 왕족의 궁을 경비하고 더 나아가 그들을 근접 경호하는 근위대 업무다.
가장 명예로우면서도 가장 권력과 가깝다.
그래서 기사들 중에서 능력과 배경이 입증된 자들만이 선발된다.
“좋군.”
모든 것이 좋았다.
공작성과 달리 사방에서 햇빛이 비치고 어여쁜 시녀들과 심심치 않게 눈을 마주친다.
‘확실히 그때 도움 준 귀부인…… 크흠! 그 대상이 높은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해!’
나비가 정원의 꽃을 따라 날아다니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감미롭다.
‘교대 시간이다~!’
공작가 저택은 정말 굉장했다.
교대 시간이 되자 후문 기둥에 걸린 마법 시계가 감미로운 피리 소리를 내며 교대를 알렸다.
“총원, 차렷!”
이미 교대 시간 5분 전에 다음 당직 기사와 병사 들이 집결해 있었다.
그들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당직 교대식을 시작했다.
“경례!!”
처억, 척!
절도 있는 동작으로 서로 간에 경례가 오갔다.
오른 주먹을 왼쪽 심장 쪽에 대어 경례했다.
나는 지휘봉을 다음 당직 기사에게 건네줬다.
“수고했네.”
지휘봉을 받은 선임 기사는 형식적이지만 내 노고를 치하했다.
이 선임 기사의 기사 제복에는 나처럼 금 단추가 달려 있다.
금 단추의 문양을 보니 수료한 아카데미의 문장이 그려져 있다.
즉, 아카데미 출신의 엘리트 기사님이시다.
“감사합니다.”
나는 짧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고, 함께 당직을 선 병사들 또한 절도 있는 동작으로 교대를 한다.
공작가 저택 정문과 후문에서는 이렇게 교대식이 매일 이뤄진다.
이 멋진 장면은 구경하던 시녀와 레이디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 충분했다.
“다들 수고 많았다. 10인대장은 병사들을 인솔하여 병영으로 가도록.”
“기사님도 노고 많으셨습니다.”
저택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은 공작령에서도 정예 중에 정예다.
그들의 복장과 태도 또한 단정하고 절도 있다.
나는 문득 병사 뒤에 보이는 공작성을 보았다.
걸어서 얼마 걸리지 않는 거리.
하지만 저택의 근무 환경과 저택 밖의 근무 환경은 차원이 다르다.
‘이 병사들이 치안대로 가면 아마 기사로 대우받을지도?’
기사 제복만 입지 않았을 뿐이지 매너와 실력, 장비 모두 치안대의 평기사와 비슷했다.
병사가 이럴진대 저택에서 근무하는 기사들은 더 좋다.
다들 화려하고 최상의 성능을 가진 기사 제복을 입고 있었다.
황금 단추가 꼼꼼히 달려 있는 것은 기본이다.
당장 내가 입고 있는 기사 제복만 해도 저택으로 오면서 전부 새로 지급받은 것이다.
전에 입던 기사 제복보다 무려 네 매듭이나 더 인챈트가 부여된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기사 제복에는 체온 조절, 청결, 치유, 해독 마법이 방어 마법과 함께 걸려 있었다.
‘훈련까지는 두 시간 정도 남았으니 가볍게 검이나 휘둘러야지.’
기사들의 하루 브이로그를 보자면 그때그때 다르지만, 보통은 당직, 근무, 훈련의 반복이다.
병사들은 여기에 작업이 추가되어 있을 뿐.
그렇게 지내다가 가끔 일어나는 토벌이나 결투 때 훈련으로 키운 실력을 뽐낸다.
그리고 그 기회를 이용해 진급하고 더 나은 근무지로 옮기는 것이 기사들의 숙명이다.
공작가의 저택은 왕궁과 큰 차이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렇게 큰 공작가에는 여러 연무장이 있었고, 나는 후문에서 가장 가까운 연무장에 도착했다.
‘다들 장난 아니네.’
연무장은 시간에 관계없이 늘 훈련하는 기사들로 붐볐다.
언제나 한산했던 치안대와 공작성의 연무장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다.
‘흐읍!’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는 검을 휘둘렀다.
이 로니아드라는 놈의 몸과 기억엔 특별히 가르침 받은 검술 같은 건 없었다.
단지 타고난 신체로 횡 베기와 종 베기 그리고 찌르기를 남들보다 월등히 잘할 뿐이다.
내가 든 검이 위에서 아래로, 옆에서 옆으로, 뒤에서 앞으로 움직일 때마다 인근의 공기가 터지듯이 울었다.
마나를 몸에 배분하기도 전인데도 이렇다.
‘운동은 아주 질색했던 나였는데.’
지구에서의 비루한 몸은 조금만 움직여도 허리가 아프고 근육통이 왔다. 늘 야근에 특근으로 운동할 시간도 거의 없었고.
그러다 이 세계로 넘어오니 검을 휘두르는 것이 재밌었다.
월등한 신체는 아무리 격하게 움직여도 지치지 않았고 오히려 개운하고 스트레스가 풀렸다.
지구와 달리 오락거리가 거의 없는 세계다 보니, 할 게 없으면 이렇게 검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검술 말고도 할 게 많지만.’
자잘한 잡념과 함께 검을 휘두르는데, 주변으로부터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서 주위를 살피니, 어느새 연무장에서 훈련 중이던 기사들이 나를 힐끔 쳐다본다. 일부는 아주 대놓고 본다.
‘다음부턴 어디 정원 같은 데서 검을 휘둘러야겠군.’
나를 보는 시선의 이유야 너무 많으니 생각하기도 귀찮다.
“로니아드라고 했나? 이번에 성에서 전출 온.”
그렇게 검을 멈추고 연무장을 떠나려는데,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그렇습니다만?”
내게 말을 건 기사는 금발에 푸른 눈이 인상적인 훤칠한 인상의 젊은 기사였다.
왼손 검지에 루비가 박힌 반지를 낀 것을 보니 왕도의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한 엘리트 기사다.
“아아, 나도 말을 놨으니 그쪽도 말을 놔 줘. 어차피 나이대도, 기사등급도 비슷할 텐데.”
“그러지.”
잠깐의 대화지만 그리 나쁜 의도로 접근한 것 같진 않았다.
“내 이름은 이스트라 한 포퓰렘라고 해. 이스라고 불러도 좋아.”
“로니아드 칸브라만. 로니라고 불러도 돼.”
자신을 이스라고 소개한 기사는 나와 간단한 대화를 나눴다.
이스는 내게 저택 근무 중에 알아 두면 좋은 것들을 알려 줬고, 나는 대가로 치안대나 성에서 내가 했던 일들을 얘기해 줬다.
이스가 대놓고 내게 그런 얘기를 요청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화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런 얘기를 하게 되었다.
‘상당히 언변이 탁월한 기사야. 직종을 기사가 아닌 상인으로 해야 했을 정도로.’
나는 이스의 수법을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 줬다.
어차피 다들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정보다.
굳이 언급 안 해서 이상한 얘기가 퍼질 바에는, 이 자리에서 확실히 팩트 체크를 해 줄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시녀를 범하려던 기사가 먼저 검에 마나를 넣고 죽이려 해서…….”
물론 내 입장에 유리하게 좀 더 MSG를 뿌리긴 했지만.
‘억울하면 관 뚜껑 다시 열고 나와서 해명하든가.’
원래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와, 정말 대단해! 어쨌든 평기사가 중급 기사를 이긴 거잖아?! 비록 성에서 근무하는 기사라지만 그 기사는 10년 근속한 토너먼트 출신의 중급 기사였는데!”
이스는 나의 말에 감탄하며 적절한 리액션을 했다.
듣는 기술을 교육받은 엘리트라는 뜻이다.
“그나저나 그거 진짜 사실이야?”
“뭐가?”
한참 연무장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이어 가던 중, 이스가 내게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로니, 네가 사실 렌슬렛의 피를 이은 기사라는 소문이 있던데?”
짐작은 했지만 역시나였다.
나는 정색하고서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런 소문이 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렌슬렛과 어떤 관련도 없어.”
“정말?!”
“정말이다. 신께 맹세도 할 수 있어. 애초에 내가 그런 신분이었으면 토너먼트가 아닌 아카데미를 나왔겠지.”
“흐음, 그것도 그러네.”
나의 말을 들은 이스는 뭔가 납득이 되면서도 안 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으음, 그럼 신고식을 해도 되는 건가? 너 정말 빽 없는 거지?!”
“빽이 있었으면 서임 기사로 왔겠지! 그리고 뭔 신고식?!”
“아, 그게, 사실 원래 다른 곳에서 저택으로 전출 오면 환영식과 함께 신고식 같은 것도 해야 되거든. 렌슬렛 공작가의 역사가 길다 보니 이런저런 전통이 좀 있어.”
“지금까진 나한테 떠도는 소문 때문에 엄두를 못 냈던 거구만.”
“뭐, 그런 셈이지. 근데 그렇게 힘들거나 창피한 건 아니야! 나도 여기 처음 왔을 때 했던 거고.”
‘인간이 모인 곳은 어딜 가나 똑같구만.’
그렇게 예절을 따지던 조선 시대 선비들도 추잡한 신고식을 했다는 기록이 있지 않던가?
여기라고 다를까.
“도대체 뭘 어떻게 하는 건데?”
일단 들어나 보자는 취지로 물었는데, 이스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왜 그래?”
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러자 이스의 눈동자가 내 뒤쪽을 가리켰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충!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충!!”
연무장에 있던 모든 기사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경례를 올렸다.
기사들의 경례를 받은 공작 부인.
‘그때 그 귀부인이 공작 부인이었다고?! 이노 폰 레미앙 렌슬렛?!’
내가 지난번에 성에서 도와줬던 그 귀부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