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Law School Genius RAW novel - Chapter (83)
천재 로스쿨생이 되었다 83화(83/159)
천재 로스쿨생이 되었다 83화
중간고사 때처럼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첫날 민법 1의 시험장에 들어서면서는 내심 기대하긴 했다.
저번에는 뜬금없이 모든 과목의 출제 유형이 사법시험 스타일로 회귀하는 바람에 큰 이익을 보지 않았던가.
혹시 시험의 방향성을 아주 바꾸기로 한 게 아닐까 했는데,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문1-1. 갑이 을에 대하여 토지의 임료 상당액의 부당이득을 반환하라는 소를 제기하였다. 법원은 갑의 청구에 대하여 어떻게 판결하여야 하는가?]‘다시 쟁점 하나씩 쪼개는 방식으로 돌아왔어.’
요즘의 로스쿨생들에게 익숙한, 물어보는 쟁점을 명확히 가르쳐 주고 판단의 근거와 결론을 서술하라고 요구하는 문제.
그렇다고 해서 더 ‘쉽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당장 기말고사의 첫 타자로 등장한 이 문제부터가 악질적인 함정을 군데군데 숨겨 놓은 문제였다.
‘부당이득은 이번 시험 범위가 아니잖아.’
부당이득은 채권각론의 말미쯤에서 배우는 개념.
이제 1학기가 끝나가는 이 시점에선 아직 가르치지도 않은 법리였다.
물론 나나 몇몇 상위권 학생들은 이미 개인적으로 공부를 끝마치긴 했지만, 그렇다고 얼씨구나 하면서 신나게 부당이득에 관한 내용을 답안지에다 서술하고 있으면 함정에 걸려들게 된다.
‘이건 사실 갑의 계약해제권 행사가 가능한지 묻는 문제야. 계약이 해제되지 않았다면 부당이득이 아니라 정당한 사용이 되니까.’
그렇다면 시험 범위에 있는 이행지체나, 계약해제 같은 개념들만으로도 답지를 충분히 구성할 수 있다.
부당이득은 한 줄짜리 판례 결론만 떼 와서 언급하면 된다.
분량 분배를 거꾸로 하면 점수가 뭉텅이로 갈려 나갈 것이다.
정직한 문제들만으로는 최상위권 학생들을 변별할 수 없으니, 두 번 세 번씩 꼬아서 내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었다.
‘뭐, 내 눈에는 뻔히 보이지만 말이야.’
이 정도 트릭에 걸려 넘어질 만큼 내가 호락호락한 놈은 아니었다.
민법 I 시험이 끝나면 잠시 집으로 돌아가 눈을 붙이고, 컨디션을 회복한 뒤 다음 날에 있을 형법 I 시험을 대비한다.
그다음엔 민법 III, 헌법과 선택법 과목인 국제거래법이 차례대로 기다리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밥 먹는 순간에도 정리 노트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시험장에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출제될 만한 판례들을 입속말로 되뇌면서 긴장을 풀었다.
하루하루 누적된 피로 탓에 몸 이곳저곳이 고장을 호소하는 강행군이었다.
몇 장이고 답안지를 빽빽하게 채워 내느라 손목은 시큰거리지, 머리는 뜨겁지, 뻑뻑해진 눈알은 제발 잠 좀 자라며 주인에게 호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 정도도 견디지 못해서야 법학도라고 불릴 자격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모든 고생에는 결국 끝이란 게 있는 법이니까.
“끝, 났다……!”
마지막 날, 국제거래법 시험을 치른 나는 복도로 구르듯이 튀어 나갔다.
충혈된 눈에 비척거리는 걸음걸이가 꼭 좀비 같은 몰골이었지만,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와 함께 복도로 쏟아져 나온 다른 학생들 역시 꼬락서니가 대체로 비슷했다.
“으, 으으…….”
“야. 19번 문제 O냐, X냐?”
“저리 꺼져. 지금만큼은 시험에 관한 어떤 생각도 하기 싫으니까……!”
그 와중에 눈치 없이 답을 맞춰 보겠답시고 주변을 건드리는 놈들도 더러 있었지만, 더 이상 두뇌를 사용하고 싶지 않은 동기들에게 입을 틀어막혀 질질 끌려 나갈 뿐이었다.
‘X 아닌가? 계약체결 당시엔 미국에 있었으니까 미국법으로 판단해야지.’
그 와중에 반사적으로 답을 떠올린 나로서는 내 교우관계가 그리 넓지 않다는 데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저 무리에 있었다면 정답의 해설을 참지 못했을 테고, 그랬다간 끌려 나간 녀석과 함께 뭇매를 맞았을 테니까.
이윽고 각자 선택법을 마치고 복도로 나온 스터디원들과 조우했다.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인사를 건네는 유예슬은 비교적 멀쩡한 몰골이었다.
남녀노소 늘어진 트레이닝복을 뒤집어쓰고 모자로 떡진 머리를 감춘 행색인데, 혼자만 정갈한 블라우스에 화장까지 제대로 한 상태라 눈에 튀었다.
“넌 왜 안 고생한 것 같은 비주얼이냐.”
“저는 성적이랑 진로가 별 상관이 없으니까요. 오히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게 더 마이너스라, 이럴 때일수록 더 신경을 쓰는 거죠.”
“와, 이게 법수저?”
대형로펌 대표의 딸은 시험으로부터도 자유롭단 말인가.
정작 유예슬은 ‘당신이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지만, 강창수 원장이든 박건이든 내 진로에는 털끝만큼도 힘을 실어 줄 생각이 없으니 난 당당하다.
애초에 생각이 있다 해도 내 쪽에서 안 받을 테고.
“그래도 한번 해 봤다고 중간 때보단 나은 듯.”
“맞아. 요령이 좀 생긴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다만 이하루와 한설도 그렇게까지 컨디션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유태운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그럭저럭 여유가 있어 보였다.
중간고사야 단기간에 압도적인 학습량을 강요하는 법학 시험을 처음 겪어 봐서 유난히 힘들었지만, 이제는 조금이나마 경험치가 쌓인 느낌이었다.
물리적으로 몸이 삐걱대긴 해도 마음은 아직 버틸 만하다는 이야기.
나 역시 수험 구력이 있다 보니 정신만큼은 멀쩡한 상태였다.
일반적인 학생들은 죽어나는데, 공부를 잘하는 치들일수록 시험이 끝나고도 쌩쌩한 기현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 내게 한설이 물었다.
“너는 어때? 이번 시험, 잘 본 것 같아?”
“……확신은 못 하겠는데.”
“또, 또. 이거 겸손 떠는 척하고 1등 하는 초식임. 내가 봄.”
“아니, 진짜로. 나름 열심히 풀긴 했는데, 중간고사 때만큼 자신이 있지는 않아.”
이하루와 한설이 도끼눈을 떴지만, 과한 겸손 같은 게 아니라 솔직한 진심이었다.
중간고사 당시에는 내가 제일 잘 쓴 것 같다는 강렬한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로서도 막히거나 고민해야 했던 문제들이 꽤 있었던 것이다.
“가령 민법 III때 8문의 3 같은 거. 마지막까지 쓰고 나니까 1분밖에 안 남아 있더라. 하마터면 내지도 못할 뻔했다니까. 나도 아직 멀었다는 걸 새삼 느꼈어.”
그렇게 반성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어째 주변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걸…… 다 썼다고요……?”
병풍처럼 조용히 서 있던 김승필이 망연히 중얼거렸다.
“그야 당연히 다 쓰긴 했죠. 근데 시간이 부족해서 개념서술 생략한 부분도 많고, 마지막에 가서는 답안지가 부족해서 어거지로 내용을 구겨 넣느라 목차도 엉망…….”
“크아아악!”
별안간 유태운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성을 질렀다.
“그걸 시간 안에 다 썼다고? 나는 8문의 1 쓰다가 종 쳐서 냈다고, 이 미친 기만자 녀석아!”
“……나도 8문의 2까지는 제대로 쓰긴 했는데, 8문의 3은 목차만 겨우 쓰고 냈어. 4문부터는 사실관계가 너무 복잡해지고 쟁점도 많아서 어쩔 수가 없더라.”
아니, 유태운은 그렇다 치고 한설조차 다 못 풀 정도였다고?
“……야, 들었냐? 한설은 8문의 2까지 다 썼대.”
“미친. 그게 가능한 거냐? 나는 8문 문제 읽기 시작하니까 종 치던데?”
“박유승은 아예 끝까지 풀었다는데?”
“사람 아니야…….”
혹시 이 녀석들이 나를 위로하려고 거짓말이라도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지나가는 동기들의 질린 듯한 눈과 주고받는 말들로 보아 아무래도 진짜인 모양이었다.
‘……그 정도였나?’
어렵긴 했지만 다 쓰지도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게 스터디원들이 기가 질린 듯한 시선을 보내와서, 머쓱하게 뒷목을 긁었다.
그렇게 시험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 오간 뒤.
“혹시 다들 기말 뒤풀이로 간단하게 회식 어떠십니까? 저기 학교 앞 골목에 곱창 기가 막히게 잘하는 집이 하나 있는데.”
뜻밖에도 김승필이 회식을 제안해 왔다.
그러고 보니 시험 기간에 뭘 제대로 챙겨 먹은 적이 없어서 배가 고프기는 했다.
중간고사와는 달리 다들 심적인 여유가 남아 있는 상황이다 보니,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한 학기를 마무리 지었다는 성취감이나 그간 함께 공부하면서 친밀감이 쌓인 것 역시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결국, 다 같이 곱창이나 먹으러 가는 걸로 이야기가 되었다.
“앗, 미안.”
한 사람만 빼고.
“나는 조금 어려울 것 같아. 부모님께서 부르셔서…….”
오늘도 한설은 곧장 돌아가야 하는 모양이었다. 과연 원작 내내 애를 닦달하며 몰아세운 어머니다웠다.
“재밌게 놀고. 다들 개강하면 만나요!”
한설은 언제나처럼 손을 흔들며 씩씩하게 작별 인사를 했다.
어쩐지 그 뒷모습이 오늘따라 묘하게 쓸쓸하게 느껴졌다.
‘괜찮으려나, 저 녀석.’
다만 나는 이를 내색하지는 않았다. 가정사란 본질적으로 프라이버시의 영역에 속했다.
내가 한설의 부모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원작을 읽었기 때문이지, 그녀가 따로 이야기해 준 적은 없었다.
직접 도움을 청해 오기 전까지는 걱정하는 것도 오지랖에 불과했다.
원작에서도 부모님의 간섭을 잘 견뎌 내고 목표를 성취해 나가던 한설이었으니, 알아서 잘 해낼 거라고 믿는 수밖에.
“…….”
그런 나를 이하루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으로 올려다봤지만, 결국 입을 열지는 않았다.
* * *
돌이켜보면 참 많은 것들이 변한 한 학기였다.
한설은 자기 객관화가 잘되는 편이었다.
자신의 암기력이나 성실성은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강점이었지만, 부족한 부분도 많았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 맞닥뜨리면 쉽게 당황한다.
본질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응용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익숙한 방식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크고 도전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지금의 한설은 조금 달라졌다.
생판 듣도 보도 못한 법에 대한 보고서를 써서 로펌 인턴도 붙고, 임기응변이 중요한 법정변론대회에서도 로스쿨 대표로 뽑혔다.
그 과정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스스로의 약점을 극복해 나가는 중이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역시…… 웬 망나니 녀석 덕분이었다.
–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해 봐야 해.
한설에게 공부란 언제나 기계적이고 수동적인 작업이었다.
주어진 목적에 따라 정보를 흡수하고, 문제를 맞닥뜨리면 알맞은 내용을 꺼내서 대답한다.
한 번도 그 과정에 흥미를 느껴 본 적은 없었다.
반면 박유승은 그렇지 않았다.
항상 법학 그 자체가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이 굴고, 공부 이야기를 할 때만 표정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 눈부신 열정이 기억 속 망나니와 너무 달라서 한때는 의심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가 달라졌음을 안다.
‘무엇보다, 걔랑 공부하는 건…….’
즐거웠다.
법정변론대회도. 인턴도.
틀을 깨고, 할 수 없었던 것들에 도전해서 할 수 있게 되는 즐거움을 알게 되는 과정들이었다.
물론 박유승의 등장이 좋은 일만 가져다준 건 아니었다.
이제 그녀는 수석은커녕 아예 공동 3위라는 어정쩡한 타이틀로 밀려났으니까.
하지만 그게 프리로 때처럼 분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높은 등수라고 자인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경쟁하고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앞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즐거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목표를 이루기 위해 견뎌야 할 고통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래서인지, 최근의 한설은 조금 유해졌다.
다만…… 그걸 눈치챈 사람은 그녀 자신만이 아니었다.
“시험. 잘 봤니?”
현관에 발을 들이자마자 차가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한설의 어머니는 딸을 대하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사무적으로 물었다.
“……열심히 했어요.”
“열심히는 의미 없어. 결과가 중요하지.”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수도 없이 들어온 말이었다.
“시험지 다 꺼내. 답안 목차 복기해서 여기다 쓰고.”
어머니는 한설에게 종이 묶음을 내밀었다.
군말 없이 그것을 받아 든 한설은, 기말 시험지들을 바닥에 일렬로 펼쳐 놓고 제출했던 답안을 떠올려 종이에 다시 적어 나갔다.
법학 시험인 만큼 보통 분량이 아니었기에, 목차만 쓰더라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고된 시험 기간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아.”
툭, 하고 한설의 손에서 볼펜이 떨어져 땅을 굴렀다.
파르르 떨리는 손목을 그녀의 어머니가 무기질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엄마가 너 판사 만들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지.”
“……알아요.”
“로스쿨 가면 무조건 수석 해야 된다고, 어떤 변수도 없이 최고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기억하지.”
“……네.”
“근데 왜 못해?”
진심으로 기가 차고 억울하다는 투였다.
“공부하라고 돈 대줘, 커리큘럼 짜 줘. 남들처럼 흐트러지지 않게 시간 단위로 연락하면서 관리도 해 줘. 엄마가 이렇게 정성을 쏟는데 왜? 왜 못해?”
“…….”
“그 경찰대 나왔다는 애한테 진 건 이해해 주려고 했어. 걔는 학부부터 법 공부를 하다 온 애니까. 근데 어디서 굴러먹다 온 양아치한테까지 밀려? 이게 말이 되니? 네가 그러면 엄마가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녀?”
한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어머니는 젊었을 적 스스로 판사의 꿈을 꾸며 사법시험에 도전했지만, 수차례 낙방한 후 부모님의 압박에 떠밀리듯이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 인물이었다.
못다 이룬 꿈을 딸에게 투사하는 가엾은 사람.
한설은 그런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원망하는 법을 배우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부터 이런 상황에 길들여져 왔기에.
“죽어라고 공부만 해도 모자랄 판국에, 인턴이니 변론대회니 쓸데없는 일이나 벌리고.”
“그건 로클럭 선발을 위한 보험…….”
“변명하지 마. 애초에 성적으로 최고를 유지하면 되는데 보험이 왜 필요해?”
날 선 말들이 이어졌다.
“너 정말 방학 때 그것들 할 거면, 공부 시간 더 늘려. 잠 줄이면 되잖아. 수면시간 3시간으로 맞춰 놓은 자명종 줄 테니까 방학 땐 그만큼만 자. 얼마나 공부하는지 내가 매일 체크할 테니까.”
“……응, 알았어요.”
“엄마는 일이 있어서 나갔다 올 테니까, 그때까지 답안 복기본 다 써 놓고. 시험 끝났다고 공부도 끝난 것처럼 굴면 안 돼. 알았지?”
어머니는 한설을 지나쳐 그대로 문을 나섰다. 달칵 하고 소리를 내며 닫히는 현관문을 한설은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평범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