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Married Man in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84)
이세계서 유부남된 썰-184화(184/235)
#184 용사 주환
#184 용사 주환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신없이 달려서 입구가 막 보였을 때였다. 근처에서 어수선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정화는 재빨리 근처의 방으로 몸을 숨겼다.
문을 아주 조금 열어놓은 채 밖을 살피자, 병사 몇 명이 무기를 쥐고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침입자들을 저지하기 위해 가는 건지, 아니면 도망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정화도 눈치챌 만큼 왕 주변의 병사 숫자는 점점 적어지고 있었다.
모두가 도망치고 있는 거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여도, 정화 역시 그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어쩌면 시녀도 상황을 알아본다는 핑계로 어디론가 가버린 건지 모른다.
숨을 죽이고 잠시 기다리자 병사들은 지나가고, 더 이상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화는 방에서 나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별궁의 뒤쪽 출입구로 빠져나가자, 후미진 곳에 숨듯이 마차 몇 대가 서 있었다.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게 항상 이곳에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마부석에는 아무도 없이 말만 묶여 있었다.
모두 침입자들 때문에 바쁜 모양이다.
정화는 그중 가장 작은 마차에 올랐다.
마부석에 올라가 늘어져 있는 고삐를 잡고 조금 흔들었다.
갑자기 말이 크게 울면서 움직인다.
깜짝 놀라는 순간,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말은 한 마리였지만, 생각보다 속도가 빠르다.
마차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뒷좌석에 타고 있을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문득 소리가 나 뒤를 돌아보자, 별궁 건물을 향해 달려가는 폭도가 멀리 보였다.
지저분한 옷차림을 한 남자와 여자들이다.
평민인 것 같다.
모두가 눈이 벌게져 손에 몽둥이와 도끼, 창 같은 걸 들고 있었다.
“마녀를 끌어내!”
“왕을 유혹한 타이론의 용사를 찾아라!”
폭도들이 소리친다.
모두 자신을 찾는 거다.
소름이 쫙 끼쳤다.
‘뭐야,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정화는 마차에 가려지도록 몸을 웅크리고 세차게 고삐를 흔들었다.
폭도는 아직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병사들이 정신없이 칼로 폭도를 베고 있었다.
몇몇 병사가 그녀를 본 것 같다.
정화는 더욱 세차게 고삐를 흔들었다.
몸이 심하게 위아래로 흔들리면서 엉덩이뼈가 아프다.
하지만 아픔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저 폭도들에게 잡히면.’
그렇게 생각하자 없던 힘도 나오는 것 같다.
정화는 더욱 세차게 고삐를 흔들어 말을 재촉했다.
당장이라도 마차 밖으로 떨어질 것처럼 몸 전체가 흔들렸다.
한참을 달린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왕궁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상태였다.
이놈의 왕궁은 왜 이렇게 큰 건지, 달려도 달려도 계속 궁 안이다.
이대로 가다 폭도들에게 다시 잡히면 어쩌나, 겁이 덜컥 났다.
‘어, 어쨌든….’
눈에 띄는 이 검은색 머리를 감춰야 한다.
정화는 말을 멈추기 위해 워워 소리를 냈지만 말에게는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달리게 하는 건 쉬웠는데, 멈추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소리를 크게 내며 고삐를 여러 번 당기는 것으로 겨우 말을 진정시키고, 서서히 마차가 멈췄다.
정화는 재빨리 가슴 윗부분을 가리고 있는 얇은 천을 끄집어냈다.
허둥지둥 스카프처럼 머리에 두른다.
검은색 머리카락을 감추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리고 다시 마차를 출발시키려고 할 때였다.
건물 뒤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이 나왔다.
신관들이다.
키가 큰 남자를 보호하는 것처럼, 신관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감싼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왕궁 안에도 작은 신전이 있어 왕족이나 귀족들이 사용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문득 안쪽에 있던 신관의 얼굴이 이쪽을 향했다.
“아!”
아는 사람이다.
신관장이라고 했던 것 같다.
가끔 왕에게 축복을 내리기 위해 찾아왔었다.
저 사람도 왕궁에 있다 상황이 험악해져서 나가지 못했던 걸까.
‘다행이다. 아는 사람이 있어.’
정화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신관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나는 용사예요. 계속 왕궁 안쪽에 갇혀 있었어요.”
조금 서툰 시모니 왕궁의 언어로 외치며 달려가자, 신관들이 신관장을 등 뒤에 둔 채 창을 내밀었다.
“물러서라! 가까이 오면 죽이겠다.”
“나는 용사예요. 저 뒤에 있는 사람이 내 얼굴을 알아. 신관장 님! 저예요. 용사 이정화에요.”
정화가 소리쳤지만 신관들은 창을 물리지 않았다. 오히려 몇 걸음 앞으로 나오며 창을 내밀었다.
정화는 초조해하며 머리에 감고 있던 스카프를 풀었다.
“보세요. 이 검은 머리. 나는 용사예요. 신관장 님! 저 알잖아요.”
신관들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지며 창을 막 내밀려는 순간이었다.
신관장이 손을 들어 신관을 막은 뒤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역시, 이 사람은 나를 안다. 기억하고 있었어. 그렇게 생각하자 겨우 안심이 되었다.
“물론 그대의 얼굴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죠? 기억하시죠? 아, 다행이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너무 무서웠어요.”
신관장에게 한 발 앞으로 다가가려고 했지만 신관들은 여전히 창을 거두지 않았다.
신관 한 명이 멈추라는 듯 창끝을 정화의 어깨에 가까이 댔다.
“뭐야, 신관장 님하고 얘기하는 거 봤잖아. 왜 막는 거예요?”
정화가 눈썹을 올렸지만 신관들의 얼굴 표정은 험악하기만 했다.
‘소중한 용사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화가 났지만 정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괜히 인상을 나쁘게 할 필요는 없다.
신관장이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그대는 뭔가 착각을 하고 있군요. 그냥 가려고 했지만… 이대로 비틀어진 생각을 그냥 놔두는 건 당신을 위해서도 좋지 않으니.”
“….”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정화는 고개를 들어 신관장의 얼굴을 보고, 그제야 이 사람의 눈동자가 굉장히 차갑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하다. 뭔가 잘못되었다.
신관장이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말했다.
“당신은 우리의 용사가 아닙니다.”
“뭐? 무슨 말이에요? 당신들이 나를 용사라고 부르며 이곳으로 데려왔잖아.”
“당신을 데려온 것은 폐하, 국왕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용사라고 부른 것이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도 나를 용사라고 불렀잖아요.”
정화의 말에 신관장이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
“그래요. 용사라고 했죠.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우리의 용사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당신은 타이론의 용사. 우리 시모니의 용사님은 다른 분입니다.”
“하, 하지만, 왕이, 폐하가 그랬어요. 내가 이 나라의 용사라는 건 신전에서 국민들에게 말해주고 있다고….”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신전을 찾아오는 모든 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관장이 부드럽게 웃었다. 눈만이 차갑게 빛나는 것이 왠지 오싹했다.
“왕께서 용사님을 데려오셨다고요. 그리고 사람들이 돌아갈 무렵에는 반드시 이렇게 덧붙였지요. 우리의 용사님도 빨리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뭐….”
말장난이다.
정화가 뭔가 말하려고 입을 뻐끔거리는데, 신관장이 무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갑시다. 아무리 신의 축복을 몸에 두르고 있는 우리라도, 더 이상 이 자 옆에 머물면 부정을 탑니다.”
“부정…?”
마치 자신을 더러운 벌레나 세균처럼 말하고 있다.
“….”
정화는 신관이나 무녀들이 자신에게 했던 행동을 머릿속에서 되풀이했다.
생각해 보면, 그들은 항상 자신에게서 약간 거리를 두었다.
무녀가 시녀로 왔을 때도 몸이 접하는 것은 최소한이었다.
옷을 입히고 목욕 시중을 들어줄 때도 맨손이 피부를 건드리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 모습을, 정화는 신전에서 자신에게 보이는 존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달랐던 거다.
이 사람들은 자신을 세균 덩어리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뭐야, 뭐야, 내가 뭘 어쨌다고….”
머릿속이 빨갛게 변하는 것 같다.
신관장이 흠칫한 얼굴로 외쳤다.
“뭔가 이상하다. 피해라! 서둘러.”
마치 사람을 발견하고 도망치는 바퀴벌레처럼, 순식간에 신관들이 그녀에게서 떨어져 달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안개처럼 뿌옇게 변했다.
모르겠어. 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런 취급을 받고 있는지. 자신들 마음대로 끌고 와 강제로 왕의 첩으로 만들고, 휘두르고, 이래라저래라 말하고, 자신을 가장 아껴주던 남자 태형과도 찢어놓았다. 모두 이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기억과 생각이 실제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정화는 깨닫지 못했다.
그저 분노와 실망, 원한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왜….”
부드럽게 웃어주던 태형이 보고 싶다.
그 사람이라면 분명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그녀를 안아줄 텐데.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돌아가고 싶어. 태형에게로 돌아가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멀리에서 병사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왕의 목소리도 거기에 섞여 있는 것 같다.
‘끔찍해.’
다시 그 더럽고 추악한 남자의 품에 안겨야 하는 건가.
싫다, 싫다, 싫다. 너무 싫다.
그렇게 생각하고 정처 없이 뛰기 시작했지만, 어느새 그녀는 병사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용사님! 폐하께서 걱정하셨습니다.”
“폭도는 모두 처리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제 도망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용사님! 어째서 이런…. 발이 엉망이에요.”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어느새 시녀가 흐트러진 머리를 한 채 서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정화는 왕의 가슴에 안겨 있었다.
“정화! 괜찮으냐.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왕의 목소리가 마치 끈적끈적한 뱀의 혓바닥 같다.
‘싫어.’
이딴 세상 싫다.
이렇게 내가 불행한데 어딘가에서는 웃고 있는 사람이 있겠지.
모두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모든 사람이 나처럼 비참하고 괴롭고 고통스러웠으면 좋겠어.
왕의 더러운 손이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만지며 무사를 확인하는 동안, 정화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 * * * * * * * * *
호위 정도의 수준이라면 모를까.
상당한 병력을 데리고 다른 귀족의 영지를 지날 때는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절차가 복잡하고 어려운 편이다.
창칼을 든 병력이 자신의 영지를 지나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변경백은 군대가 다른 영지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관리를 보내, 귀하의 영지를 통과하고 싶다는 취지의 연락과 협상을 마쳐 놓았다.
속내가 어떻든, 변경백 정도의 신분을 가진 귀족이 청하는 걸 거부할 자는 별로 없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저 영지를 통과해 지나갈 뿐이라는 확증을 주고 통행료를 넉넉히 지불하는 것으로 일은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그리하여 주환은 처음으로 다른 지역에 발을 디뎠다.
“맙소사.”
주환은 보이는 광경에 말을 잃었다.
주환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이 나라는 기껏해야 변경백령의 영지뿐이다.
처음 이 세계에 와서 리지와 만나고 여행을 하고, 그러는 동안 많은 사람이 헐벗고 고통받는 것을 보았다.
참혹하다,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나마 변경백령의 사정은 나았다는 것을 지금에야 알았다.
‘이 정도로 사정이 나빠져 있을 거라고는….’
가뭄이 심하다는 말은 들어왔다.
하지만 여기까지 심각하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버려진 듯 잡풀이 무성한 밭.
거북등처럼 갈라진 땅바닥.
지나는 마을마다 보이는 것은 뼈가 드러날 만큼 비쩍 마른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한눈에도 알만큼 턱없이 적은 아이와 노인의 숫자.
“….”
아이와 노인의 수가 적은 이유는 아마 버려지거나 일찍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희망이 없다는 말은 아마 이럴 때 쓰는 거겠지.’
이곳이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라고 해도 심하다.
이대로라면 내년에는 그야말로 물이 없어 말라죽는 사람이 생기고 만다.
‘악신의 저주는 이렇게도 강한 거였나.’
주환은 길게 한숨을 쉬고, 자신의 몸에 스며있는 악신의 눈물을 조금씩 풀어놓았다.
리지는 주환이 비를 내릴 때마다 악신임을 들킬까 두려워하지만, 이런 참상을 보고 그냥 지나갈 수는 없다.
악신의 눈물은 평범한 비와 달라서 땅의 정기를 북돋아준다.
악신이 지니고 있던 마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약간의 눈물로도 공기 중에 있는 습기를 잡아냈다.
단시일 내에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한 번 악신의 눈물을 뿌려놓으면 그 뒤에는 다소 쉽게 비가 내릴 것이다.
군대 행렬이 지나가는 뒤편에서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보고,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비다!”
“… 비, 비가 내리고 있잖아….”
“맙소사, 대체 얼마 만에 보는 비인지….”
조금 멀리에까지 비를 내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악신의 눈물은 시야에서 약간 벗어나는 지점까지면 몰라도 그 이상은 무리다.
아쉽지만 이 비는 주환이 떠나면 머지않아 그치게 된다.
조금이라도 길게 비를 내릴 생각으로, 주환은 긴 행렬의 가장 뒤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가 희미해지면서, 점차 마을의 모습도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높이 떠있던 해가 조금씩 낮아지고 열기가 점차 식어가는 오후 시간이 될 무렵, 또 하나의 작은 마을을 만났다.
이곳도 사정은 비슷한 것 같다.
그나마 먼저 마을보다는 나으려나.
메마른 땅 일부에 힘들게 물을 대 살려놓은 밭이 있었다.
그 마을에도 비를 뿌리면서, 변경백령군의 행렬이 지나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물이 바닥에만 겨우 남아있는 하천을 만나자 군대의 행렬이 멈췄다.
어느새 해는 붉은 노을에 감싸여 땅에 붙어 있었다.
변경백령에서 나와 처음으로 맞는 밤이다.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여 천막을 치고, 여기저기에 모닥불이 피워졌다.
군대 행렬에 붙어오던 상인들도 서둘러 허름한 가게를 세운다.
천막을 치는 상인도 있고 단지 수레에 있는 물건을 늘어놓는 상인도 있었다.
행렬 내내 조용하던 병사들이 겨우 왁자지껄 떠들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주환이 신전 마차 쪽으로 갔을 때 리지와 도로시는 무녀들에게 신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리지와 도로시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물들인다.
주환은 자신을 본 무녀와 신관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가락을 입술에 대 보인 뒤, 초라한 나무에 몸을 기댔다.
도로시의 삐죽삐죽한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기우뚱했다.
“무녀님, 왜 신은 우리하고 직접 말을 못 해요? 왜 무녀님한테만 말해?”
“그것은 신의 말을 우리 인간은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특별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죠. 게다가 신의 모습은 매우 특별하기 때문에 인간의 눈으로 보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무녀가 부드럽게 웃었다.
“우리 무녀 중에도 신의 말씀을 들어본 일이 없는 사람이 많아요. 신탁을 받는 이는 많지만, 대부분 직접 목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꿈을 통해서 계시를 받습니다. 현재 신을 직접 뵐 수 있는 분은 대무녀뿐이죠.”
“대무녀님은 어떻게 신을 만나요? 대무녀님이 부르는 거예요?”
“아니, 그런 일은 없습니다. 신은 인간이 부른다고 말씀을 내리지 않아요. 신이 원할 때, 그럴 때만 대무녀도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상한 것 같아.”
도로시에게는 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신이 무슨 이웃집 아줌마 아저씨쯤 되는 걸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늘에 살고 있는 이웃집 아줌마 정도로.
하늘에 걸려있던 해가 어느새 짙은 보라색 빛만 남기고 사라졌다.
이제 슬슬 무녀를 아이에게서 해방시켜줄 시간이다.
주환은 나무에서 몸을 일으키고 무녀와 가족이 한데 앉아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환이 막 도로시의 바로 뒤쪽에 접근하고, 리지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도로시의 상대를 하고 있던 무녀가 별안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녀의 어깨와 목에서 힘이 빠진다.
무녀는 털썩 소리가 나도록 무릎을 바닥에 대고 반쯤 몸을 일으켰다.
무녀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꿈꾸는 것처럼 바라본다.
무녀 뒤쪽에 서 있던 신관이 사방을 향해 재빨리 입을 열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모두 조용히 해주세요. 신탁을 받는 중입니다.”
병사들이 웅성웅성 무녀 주위로 몰려든다.
모두가 무릎을 꿇고, 어떤 이는 땅바닥에 엎드렸다.
시끄럽던 사방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무녀가 멍하니 하늘을 보다 벙긋 벙긋 입을 열었다.
[내 사랑하는 아이들아, 불쌍한 이 땅의 인간아, 용사를 영접하라. 이 땅의 부정한 것들을 정화하도록 용사가 내려왔으니, 그를 맞아라. 용사 주환이 그대들의 고통을 살라 평화와 번영으로 인도하리라.]도로시가 벌떡 일어나더니 조용한 가운데 소리쳤다.
“주환? 우리 아빠 이름이잖아!”
“….”
아니, 아니, 잠깐만. 이건 룰 위반이겠지.
주환은 문득 하늘을 보았다.
신과 악신의 싸움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를 토막 내 봉인하고 지구로 보낸 것은 분명 이 땅에서 신이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들이 보낸 신의 용사라고 포장하는 건 좀….
설마 지금 싸움 거는 건가.
아니면 화해하자는 제스처?
그것도 아니면 주환이 악신의 잔재를 처리하려고 나서니까 은근슬쩍 거기에 묻어가려는 건가?
어쨌든 신이라고 스스로를 칭하면서 이러는 거 아니다.
왠지 기분 더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