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Married Man in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95)
이세계서 유부남된 썰-95화(95/235)
#095 스며든 독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남자는.
아네트는 눈을 껌벅거렸다. 머리가 약간 멍해졌다.
카일의 목소리가 낯설다. 두 사람이 연인이었을 때, 저런 목소리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마치 길드 안의 사이 나쁜 직원이 업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목소리도, 분위기도 그렇다.
두 사람 사이에 애정이나 사랑, 육체적인 관계 같은 것은 전혀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뭐…”
설마, 이 남자와의 관계 때문에 그녀의 인생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는데, 정작 카일은 죄책감 따위는 전혀 없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이렇게 태연하게 말을 걸고, 제안이라는 단어 따위를 입에 올리는 거 아니야?
만일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생각하면, 그녀의 얼굴을 오랜만에 봤을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말은 저런 것이 아닐 것이다.
미안하다든가, 사랑했다든가, 아니면 용서해달라는 말이 먼저 나와야 한다.
멀쩡한 여자의 인생을 망쳐놨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믿을 수가 없었다. 저 남자에게는 양심이라는 것 자체가 없거나….
“미친 거 아냐?”
자기도 모르게 말이 나갔다. 소리로 내놓고 난 뒤에야 자기가 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일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힐끔 그녀를 본다. 몸이 저절로 움찔했다.
귀족이었을 때도 그녀는 항상 약한 입장이었다. 지금은 더욱더 보잘것없는 평민이다.
잊으려고 애쓰던 옛날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남편한테 머리채를 잡혀 쫓겨날 때, 친정에 찾아가 어머니에게 아버지에게 뺨을 맞았을 때, 하인들에게 질질 끌려 저택을 쫓겨 나올 때….
카일이 눈을 가늘게 뜬다. 어딘가의 흐린 빛을 받아 카일의 눈동자가 조금 반짝거렸다.
이 남자, 이런 눈을 가지고 있었던가.
갑자기 무서워졌다.
몸을 움츠리고, 아네트는 몸을 돌렸다.
저 사람과 함께 있고 싶지 않다. 이제 됐어. 옛날 일들은 다 잊어버리자. 원망도 서러움도, 이제는 과거가 됐다.
‘간신히 자리 잡았어.’
겨우 먹고살게 되었다. 비록 임대료는 자주 밀리지만 몸 누일 방이 있고, 입에 넣을 음식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것마저 잃게 되면 정말 끝장이야.’
원래 있던 대독자를 밀어내고 들어간 터라, 길드에서의 처음은 정말 힘들었다.
텃세도 심했지만, 모험가와 직원들의 희롱은 더욱 괴로웠다.
가슴이나 엉덩이를 더듬는 건 예사고, 강제로 치마를 들추는 사람도 있었다.
마스터와 수다쟁이 덕분에 그런 일은 서서히 줄어들었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업무 면에서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일이라는 것 자체를 처음 해보는 거라, 지금 생각하면 정말 멍청한 실수도 많이 했다. 어느 정도 일이 손에 익을 때까지 실수의 연속이었다.
욕먹는 건 일상이고, 때로는 제대로 일을 못하겠으면 몸으로라도 보상하라는 말도 들었다.
퇴근할 때는 길드의 남자 직원, 질 나쁜 모험가가 집까지 뒤를 쫓아왔다.
지금처럼 친한 동료가 생기고, 그녀는 절대 몸을 팔지 않는다는 인식이 박힐 때까지, 수도 없이 울어야 했었다.
‘저 사람이랑 더 이상 엮이면 안 돼.’
무엇 때문에 왔는지는 몰라도 상관하지 말자. 지금의 위치를 무너뜨릴 일은 해서는 안 돼. 아네트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등 뒤에서 던져진 말 한마디에, 아네트의 걸음이 멈췄다.
“아들이랑 오래 못 만났지? 만나게 해 줄 수 있다면 어때? 생각 있어?”
“….”
수없이 생각했다. 언젠가 아들의 모습을 몰래라도 한 번 볼 수 있다면, 정말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아이가 자신을 몰라도 상관없다. 마주 보지 않아도, 말 한마디 해보지 못한다 해도 좋다. 그저 한 번, 얼굴만 볼 수 있다면….
“당신이 주환이라는 마법사의 가정교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그 사람하고 부인에게 문자를 가르친다고.”
“….”
천천히 몸을 돌리자, 카일이 모양 좋은 입술을 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 사람은 부인을 굉장히 아낀다며? 아네트, 당신은 아직 젊지. 혼자 늙어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나이야.”
“…나더러.”
아네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억지로 말을 쥐어짜 낸다.
“그 남자를 유혹하라는 거예요? 창관의 여자처럼 몸을 팔라고?”
분노가 치밀어왔다.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사이였는데, 아니, 사랑이 아니었어도 인간이라면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안았던 여자한테 다른 남자를 유혹하라고….
짐승이다. 이 남자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야. 그나마 남아있던 작은 추억도 산산조각 나 바닥에 떨어졌다. 더럽다. 정말 더럽다.
주먹을 쥐고 바들바들 떠는데, 카일이 입을 열었다.
“그런 소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 만일 당신이 그런 걸 기꺼워할 여자였다면 이런 말도 꺼내지 않았을 거야.”
카일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사랑을 해, 아네트. 나 같은 놈 말고 그 남자와 사랑을 해.”
“뭐?”
“그 남자는 특별한 목적 없이 그냥 봐도 괜찮은 사람이야. 내가 알아본 바로는 그렇더군. 귀족은 아니지만 능력도, 성격도, 여자한테 상당히 매력적이지 않나? 내가 강요하지 않아도, 그냥 사랑에 빠질 만하지 않아?”
“말도 안 돼.”
궤변이다. 어떻게 바꾸어 말해도 결국엔 그 남자를 유혹하라는 거다. 아네트는 한껏 카일을 노려보았다.
“당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 아네트. 당신은 그냥 그 남자의 사랑을 받고 행복하게 살면 돼. 그러면 당신 아들을 볼 수 있을 거야.”
“….”
“내가 당신에게 돈을 주겠다는 것도 아니야. 오히려 그래서는 안 되지. 그러면 목적을 가지고 그 남자한테 접근하는 게 되니까.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야.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당신이 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오래도록 행복하게 사는 거야.”
믿을 수 없다. 그런 말, 누가 믿을까. 한때 사랑을 속삭이던 카일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말을 쏟아냈다.
“그 남자는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타입이야. 당신이 그 사람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면, 반드시 당신의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겠지. 당신이 아들을 만나고 싶어 한다면 그걸 위해 변경백작의 밑에서 일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카일이 히죽 웃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정말로 당신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행복해질 생각만 해. 아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도, 누군가와 사랑하는 것도, 전혀 나쁜 짓이 아니야. 당신은 유부녀도 아니고, 자유로운 상태잖아.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도 괜찮아.”
혼란스럽다.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일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 남자의 말이 맞는 걸까. 어떤 여자는 남자의 돈을 보고, 어떤 사람은 명성이나 가문을 본다. 아들을 만나기 위해서 남자를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아네트는 그렇게 생각하다 흠칫 놀라 고개를 저었다.
“만일 당신의 말이 맞다고 해도, 그 남자한테는 부인이 있어요. 게다가 부인밖에 보지 않아요.”
그게 바로 아네트가 가장 부러워했던 일이다.
길드에서 일하다 보면 많은 사람을 본다.
어쩌다가는 주환처럼 아내나 애인에게 다정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등급이 올라가고 돈을 벌게 되면 달라졌다. 힘들 때 옆에 있던 여자가 초라해 보이는 거다.
항상 조금 더 예쁘고 젊고 사랑스러운 여자한테 가버렸다.
그런 모습을 보고, 아네트는 언제나 실망하곤 했다. 남자는 모두 똑같다. 불성실한 동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환의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부인만 보고 부인에게 다정하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겠지 생각했지만, 그래도 정말 부러웠다.
돈이 생기면, 그만큼의 시간조차 사랑이 유지되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카일이 히죽 웃었다.
“그렇지. 그 사람은 정말 아내를 소중히 여기더군. 하지만 아네트, 그 두 사람은 너무 불균형이야. 그 사람은 지적인 남자지. 무식한 다른 모험가들하고는 틀려. 반면에 그의 아내는 정말 평범한 하층민 여자야. 교양이 있기는커녕 글자도 못 읽고 못 쓰지. 그 두 사람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
카일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카일이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리 예쁜 여자도 몇 달씩 붙어 있다 보면 지겨워지는 법이야. 하물며 미모가 뛰어난 것도 아닌데 대화조차 잘 통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한 달도 가지 못하고 지루해지겠지.”
카일이 한 발 다가왔다. 고개를 숙여서 작은 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인다.
“그 남자는 일부러 귀족의 말투를 배우는 사람이야. 지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지. 그리고 그런 건 절대로 그 사람 부인에게서는 얻을 수 없어. 당신이 파고들 부분은 거긴 거야, 아네트.”
카일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몸을 돌렸다.
“잘 생각해 봐.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스스로 알아서 결정해.”
“잠깐, 잠깐 기다려요. 그러면 내 아들 얘기는.”
막 걸음을 옮기려던 카일이 힐끔 그녀를 보았다.
“당신이 그 남자와 잘 연결된다면 아들을 보게 될 거야. 나한테 매달리거나 연락을 기다릴 필요도 없어. 그냥 그렇게 될 테니까. 오히려 당신이 그 남자와 연결됐을 때를 생각하면, 앞으로 우리는 절대 만나거나 이런 대화를 나눠서는 안 돼. 그 남자가 의심할 일을 하지 마.”
“당신 말을 어떻게 믿어! 나중에 가서 다른 소리를 하게 되면.”
“이건 변경백님께도, 당신 전남편에게도 이미 동의를 받은 일이야. 믿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카일은 그렇게 말한 뒤 어두운 골목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어둠에 잠기는 것처럼 멀어지는 카일의 뒷모습을, 아네트는 멍하니 보았다.
귀족의 혼인은 왕의 허가가 필요하다.
농민은 영주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길드에 속한 모험가에게는 그런 절차가 필요 없다.
길드에서 사망 시 재산을 인수할 사람으로 부인과 자식 등 가족을 등록해 주지만, 부부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 외 공식적인 건 아무것도 없다.
그냥 함께 살면 부부고, 헤어지면 남이 된다.
그것은 주환과 리지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다면, 그냥 남일뿐이다.
주환을 리지에게 묶어두고 있는 건 오직 사랑과 가족으로서의 정 하나, 그게 끊어지면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도 죄가 되지 않는다.
‘내가 그 남자, 주환 씨의….’
리지에게는 미안하지만, 딱히 아네트뿐만이 아니었다. 주환의 옆을 노리는 여자는 벌써부터 몇 명이나 있다.
내년, 혹은 몇 년 뒤에는 다른 여자가 리지의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른다.
지금 그녀가 행동한다 해도, 그 미래의 언젠가가 조금 앞당겨지고 주환의 옆에 설 여자가 아네트가 되는 것뿐이다.
‘…맙소사. 미쳤어. 내가 정말 미쳤지.’
아네트는 머리를 저었다. 남의 남자를 욕심 내다니, 그런 일이야말로 자신이 전남편의 애인들을 보며 가장 증오하던 일이 아닌가.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네트는 몸을 움츠리고 걸음을 옮겼다.
어디에선가 남자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싸움이 난 것 같다.
골목 안 여기저기에서 오줌 찌든 냄새가 풍겨왔다.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여러 해 이곳에서 살고 있지만 이 악취는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지겨워. 정말 지겹다.
‘이곳에서 나가고 싶어.’
누군가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살고 싶다. 사랑받고 싶어. 단단한 팔 속에 안겨 안심한 채 잠들고 싶다.
“….”
리지는 매일 밤 남편에게 안겨 잠이 드는 걸까. 술 취한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면 남편이 막아주고, 누군가에게 욕을 들으면 남편이 위로해 주는, 그런 평온한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주환.’
그 남자가 아내를 쳐다보는 따뜻한 눈빛을 떠올리자, 심장이 조여왔다. 자신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 리지가 죽을 만큼 부러웠다.
“이러면 안 되는데.”
마음이 태풍 속에서 춤을 추는 것 같다. 이리저리 날리고 휩쓸려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다 쓰러져 가는 집에 도착하자, 집주인인 남자가 음흉한 시선으로 그녀의 몸을 쭉 훑었다. 옆에 서 있던 부인이 포악스러운 표정으로 아네트를 노려본다.
아네트는 두 사람의 시선을 피해 허둥지둥 이층으로 올라갔다. 침대 하나가 간신히 들어간 방에 들어서자 피곤이 우르르 몰려왔다.
침대 위에 쓰러지듯 엎드려, 아네트는 다시 주환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사람의 다정한 눈빛이 자신을 향한다면,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카일이 남기고 간 말이 서서히 그녀의 마음에 스며든다. 마치 느리게 퍼지는 독 같았다.
* * * * * * * * * *
드디어 마을에 도착했다.
베른 모험가 마을의 높은 벽이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마차를 가까이 몰아가자, 사람들이 몇 명씩 문으로 나와 이쪽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유니콘을 발견한 누군가가 벌써 안쪽에 이야기한 모양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사람들이 몰려와 유니콘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뿔토끼를 데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났을 때와는 반응이 많이 다르다. 불난 집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난리 법석이었다.
“맙소사, 저거 뭐야. 진짜야?”
“그냥 말에다 뿔을 붙인 거 아닌가?”
“내가 볼 때도 그런 것 같아. 거 왜 있잖아, 유랑 극단에서 묘기 부리는 말. 그런 거겠지.”
“아니, 아니, 저걸 봐. 저렇게 진짜 같은 뿔을 만들어 붙인다고? 움직이는 말한테?”
“저건 진짜 유니콘인 것 같아. 저 덩치를 좀 봐라. 웬만한 말의 두 배는 되잖아. 기사님들 말도 저렇게 크지는 않다구.”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마부석 가운데 앉아있던 도로시 코가 점점 높아졌다. 정신적으로 그렇다는 게 아니다. 실제로 도로시의 얼굴이 조금씩 기우뚱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주로 코 부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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