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1
011
후미에 바짝 붙은 구울의 무리에 병사들이 기겁했다.
급히 부사관의 호령에 창대를 세운다.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주춤거렸겠지만, 망자들에게 두려움은 없다.
구울들은 거리낌 없이 고슴도치 같은 방진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콰직! 콱!
내던져진 몸뚱이가 하나의 덩어리로 뒤엉킨다. 몇 마리는 그대로 몸이 꿰였다.
축 늘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거세게 발버둥쳤다.
【키야-가아악!!】
등 뒤를 뚫고 나온 상태에서 구울이 버둥대자, 핏물이 거세게 튀겼다.
찌지지직-!!
구울은 뱃가죽이 찢어지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밀고 들어온다.
숙련된 병사조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공포였다.
“허, 허헉!”
당혹스러운 비명을 흘린 순간, 놈이 코앞에 있었다.
발톱이 번뜩이고, 병사의 얼굴이 찢어졌다.
곳곳에서 흐트러진 균열을 파고든 구울들이 틈바구니에서 날뛴다.
상대적으로 무장이 빈약한 병사들의 가죽 갑옷을 날카로운 발톱이 헤집었다.
“아아악!!”
무차별적으로 날뛰는 구울들의 발치에서 쓰러진 병사들이 망자가 되어 일어선다.
【그으으···!】
사방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자 병사들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구울들은 병사와 망자를 가리지 않고 발톱을 휘둘러댔다. 둔해 빠진 망자들은 영문도 모르고 머리통이 휙휙 날아다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토드가 이마를 짚었다.
아직 효과적으로 운용하기엔 무리가 있겠어.
그래도 일행에게 접근하던 병력은 발이 묶였다. 간당간당한 마력을 가늠해본 토드는 추가로 구울 무리를 일으켰다.
저쪽은 됐고.
그의 손끝이 퇴각 준비에 여념 없는 드워프 포병대를 향한다.
저돌적으로 달려오는 구울 떼를 발견한 예비대가 어김없이 사격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저들은 속도를 올리면 선회가 어려운 군마가 아니다.
토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파바바박-!!
구울들은 기예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몸을 틀었다.
얻어맞아 바닥에 나동그라진 개체가 몇 놈 있긴 했어도, 대부분의 총탄은 애꿎은 땅바닥을 두들겼다.
【끼야아악!!】
저들이 보유한 장총은 아직 저열했다. 재장전을 위해 꽂을대를 집어들기도 전에, 이미 구울들이 코앞에 있었다.
“온다! 온다!!”
포반을 지키던 예비대가 걷잡을 수 없이 휘말렸다. 그대로 구울들이 기세등등하게 밀고 들어간다.
그런데 막상 야포를 지키던 드워프들은 토드의 예상과 달리, 육박전에서 구울을 압도했다.
도끼나 망치 따위의 묵직한 연장에 역으로 시체들의 썩은 머리통이 깨져나갔다.
자세히 보니 장갑이나 어깨에 두른 띠에서 푸른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저 숏다리들을 부리는 건 다음 기회에 노려봐야 할 것 같다.
‘쯧. 드워프들은 망자로 살려놔도 꼬장꼬장하게 굴지, 아닐지 궁금했는데.’
그래도 포대반을 무력화한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토드와 카리나의 난입으로 인해 예상치못한 피해를 입은 이리공도 추격을 지속하는건 무리라 판단했는지, 퇴각 나팔이 울려 퍼졌다.
어느새 해가 능선의 어깨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승리의 여신은 어느 진영에도 미소짓지 않았다.
웃을 수 있는 건 성대한 만찬을 고대하는 청소부들 뿐.
한숨을 흘린 토드가 방울을 거둬들였다.
추격대를 물어뜯던 망자들이 일제히 실 풀린 인형처럼 쓰러졌지만 멀리 떨어진 구울들은 여전히 울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저것들까지 수습할 여유가 없었다.
한편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두 필부는 여러 감정의 소용돌이에 잠겨 있었다.
그중 주된 정서는 경외감, 그리고 두려움이었다.
단 두 명.
명백히 전세가 기운 전장을 휘저은 건 2인의 초월적인 힘이었다.
특히 쇠렌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좀 전에 개인의 무력으로는 전장을 주름잡는 시대는 졌노라고 자신만만하게 떠들었는데, 그걸 듣던 이가 얼마나 우습게 여겼을까.
나가떨어진 카리나와 마찬가지로 토드 역시 상태가 영 좋진 않은 듯, 비틀거렸다.
그럼에도 그는 방울을 흔들며 천천히 고요에 잠긴 들판을 누볐다.
워낙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라 내용을 알아듣기 어려웠으나, 분명 사자를 애도하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유년기에 들었던 자장가와 교회에서 울리던 장송곡의 곡조를 반반 섞어놓은 듯했다.
해가 질 때까지 한참 동안 들판을 누비던 토드가 돌아왔다.
그는 말없이 카리나 곁을 지키던 두 명을 바라봤다.
피에트가 먼저 선수를 쳤다.
“자네를 따라가겠네. 토드.”
“저는 변경백을 도울 생각입니다.”
“자네가 합세한다면, 어떠한 군주라도 능히 싸움을 이겨낼걸세.”
사내의 주름진 눈은 확신으로 차 있었다. 망자를 부리는 불결한 힘을 목도하고도, 저런 신뢰를 보내는 까닭은 무엇일까. 신앙이 독실하진 않더라도, 나름 빛을 신봉하는 자가.
하기야 셈을 두들기는 이들에겐 선행하는 가치가 다른 법이지. 갈등하던 쇠렌 역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에스터리츠 양을 마차에 태우고, 이만 움직입시다.”
“내 기억하기로 근처에 프론지 요새가 있네. 변경백이라면 필히 그곳으로 퇴각하여 군영을 가다듬을 걸세.”
피에트의 제안에 토드는 눈매를 좁히고 들판 너머를 응시했다.
“흠··· 변경백한테 가기 전에, 모시고 갈 분이 계십니다.”
“데려갈 사람이 있다고? 여기서 건져내도 살아남을 것 같진 않은데.”
쇠렌의 의문에 토드가 미소지었다.
“살아있는 분이라고 한 적은 없는 거 같은데요.”
장물아비는 입을 다물었다.
숲에서 까마귀들이 일제히 날아오른다. 못해도 수백에 달하는 새까만 물결이 들판에 쏟아졌다.
곳곳에 깊게 팬 웅덩이가 사방에 가득해서 한 발자국을 내딛는 것조차 버겁다. 자칫 헛디뎠다간 끝장이다.
앞서걷는 토드가 향로를 흔들면서 연신 애도문을 읊는 것과 달리, 뒤따르는 쇠렌은 반짝이는게 보일 때마다 슬그머니 주워 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캬, 고놈 묵직한 거 보소. 이게 몇 돈이야.”
그가 금가락지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며 히죽이자, 결국 참다못한 피에트가 인상을 구겼다.
“이보게. 망자에 대한 애도는 못 해줄망정, 유품을 그렇게 전리품 챙기듯 털어가는 게 사람된 자의 도리인가?”
“아니, 아깝잖소. 요 금반지도 기껏 빤짝거리는거 뽐내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건데. 이 수렁에 영영 처박혀 있으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이 사람도 그걸 바라진 않았을 거요.”
“이 사람이 글쎄, 토드군을 보고도 주둥아리에서 그런 말이 나오나? 자네는 망자의 원한이 두렵지도 않나?”
후, 바람을 불은 쇠렌이 자신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거, 내가 언제 영영 가진다고 했나. 나중에 이 가락지 알아보는 사람 있으면, 그때가서 돌려줘도 되는 거고. 그럼 죽은 사람도 만족하고. 대충 원한이니, 뭐니,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거 아뇨? 잉? 그렇지 않나? 장의사 양반.”
쇠렌의 넉살에 토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찬찬히 허리를 굽힌 그가 지면을 샅샅이 훑었다. 죽은 이들의 복장은 가지각색이었다. 피로 얼룩진 외투, 구겨진 견갑 위에서 파리들과 각다귀가 윙윙댄다.
분명 이 언저리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토드의 귀에는 분명히 들린다.
아직 잠들기를 거부하는 사자의 아우성이.
좌우로 향로를 흔든 사령술사는 희미한 목소리를 쫓아갔다.
땅거미가 완연히 내려앉았을 무렵, 비로소 토드가 구부정한 몸을 일으켰다.
“···찾았다.”
시체의 둔덕 너머, 요즘 보기 드문 전신 갑주가 놓여 있었다. 본래 찬란한 은색이었을 갑옷은 진흙과 핏물 범벅에 그을리고, 깨져서 엉망진창이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만남이었다.
죽은 기사 앞에 예를 갖춘 토드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자연히 뒤로 물러난 피에트와 쇠렌은 숨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치익!
향로에 불을 붙이고, 사령술사가 나직이 읊조린다.
“내가 잠든 그대를 부르노라. 안갯속에서 꿈꾸는 망혼, 미련 품고 스러진 잔영이시여.”
어디선가 싸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왁자지껄하게 포식을 만끽하던 큰 까마귀들의 울음이 그쳤다.
시끄럽게 날아다니던 파리들도, 요란하게 발발대던 쥐들도, 살점 속에서 사각거리던 구더기들의 불협화음도 멈췄다.
향로에 맺힌 불꽃이 선명한 녹색으로 물든다. 희미하게 흘러나오던 연기가 점차 고리의 형태가 되어 토드와 죽은 기사의 유해를 맴돌았다.
“나는 사령술사, 토드다. 나는 그대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인임을 안다. 그러나 아직 못다 이룬 소명이 그대를 여기에 잡아두고 있나니.”
덜걱, 절그럭···!
뒤로 꺾인 건틀렛이 요동친다.
“내가 여기 왔노라. 나를 섬기는 대가로 그대가 생전에 이루지 못한 한을 풀어주기 위해 내가 여기 왔노라.”
향로에 맺힌 불꽃이 사납게 번뜩인다. 덩달아 그에 비친 토드의 눈동자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불꽃에 드러난 그의 표정은 두려움과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사령술사의 흐릿한 눈에는 미약한 흥분과 기묘한 빛이 흘러넘쳤다.
”한 많은 기사여. 내 부름에 응하겠는가?”
사이한 바람이 휘몰아친다. 꿈틀거리던 기사의 시신이 심하게 요동쳤다. 향로에 맺혀있던 진녹색 아지랑이가 갑주의 이음새로 새어들어가더니, 이윽고 갑주가 덜컥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익숙해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만, 시체가 멀쩡히 돌아다녀도 눈 하나 깜짝안하던 쇠렌이었다. 어차피 토드의 통제 하에 있다는 믿음이 있었으므로. 그런데 이건 경우가 조금 달랐다.
범상치않은 기운에 쇠렌은 거친 숨을 흘리며 벌벌 떨었고, 피에트는 아예 기절초풍하기 직전이었다.
여태 토드가 일으켜 세운 망자들과 궤를 달리하는 존재다.
마치 관절 인형이 어색하게 움직이듯, 도저히 인간이라 보기에 어려운, 기괴한 모양새.
이윽고 완전무장을 한 기사가 고개를 들어올린다.
토드는 일련의 과정을 묵묵히 지켜볼뿐.
얼굴을 가리는 바이저 아래로 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죽었나.】
목소리의 톤이 꽤 높다. 역시 노련한 기사는 아니었다. 더욱이 젊은 나이에 죽은 전사일수록, 망자가 품은 미련이 깊을 수밖에.
토드가 공손히 답했다.
“예. 사망의 충격으로 인해 아마 생전의 기억은 대부분 상실하셨을 겁니다. 다만 귀하가 제 부름에 응하신걸 보면, 생전에 충족되지 않은 무언가···”
딸랑.
“그 한(恨)만큼은 분명히 기억할 테죠.”
기사는 묵묵히 토드를 바라보다가, 전투가 마무리된 들판을 다시금 돌아봤다.
명백히 패전의 징후가 역력했다.
피로 얼룩진 장갑을 내려다보던 기사가 중얼거렸다.
【나는··· 부활한 것인가?】
여기서부터 입을 잘 털어야한다. 토드는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던 보험상담원들의 말씨를 상기했다.
친절. 사랑. 봉사. 첫 고객!
“완전한 소생은 아닙니다. 그대가 선택할 계약의 여하에 따라선 얼마든지 다시 영면에 들 수 있습니다. 제가 사령술사로서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귀하의 뜻을 전적으로 존중하겠습니다.”
투구의 눈가리개 너머 흐릿한 사금빛의 안광이 일렁인다. 덕분에 투구 속에 있던 눈이 일부 드러났는데, 긴 눈꺼풀 아래 깊은 눈동자가 자리잡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남자답게 호방한 인상보다는 선이 가는 느낌. 그걸 지켜보던 토드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기사치곤 좀 곱상한데. 혹시 기사가 아니라 종자가 주인의 갑옷을 차고 기사 행세를 한 건가?
간혹 기사들 중에는 전장에 미동을 대동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만약 패전의 기미가 짙어져서, 종자를 대신 출전시키고 기사는 튀었다면?
아니, 그렇다기엔 갑주의 질이 지나치게 훌륭하다. 사뭇 풍기는 기세도 예사롭지 않았고. 조금 미심쩍긴 했는데, 이어지는 기사의 말에 토드는 의혹을 접어뒀다.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다시 이 속에 누워있어야겠군.】
“그렇습니다.”
사뭇 안광이 가늘어진다.
【헌데 만약 본인이 귀하의 제안을 거부하고, 당장 여길 벗어난다면. 누군가를 섬길 필요없이 다시 지상을 활보할 수 있는게 아닌가?】
제법 날카로운 지적이다.
목덜미를 타고 식은 땀이 흘렀지만, 토드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물론 가능은 합니다. 다만 사령술사의 보조가 없다면 점차 육신이 부패할테고, 다시는 태양 아래서 거닐지 못하게 되실 겁니다.”
아, 고객님 그렇게 하시면 저희 상조회사가 제공하는 A/S 서비스도 못 받으시고, 이용에 불편이 생길 수도 있으세요···
토드는 향로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잔잔한 어조로 속삭였다.
“마지막 날에, 주께서 영화로운 빛을 쬐어 장차 악인들은 갈대처럼 바스러지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친절한 비유에 기사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댔다.
【누구보다 불경한 사령술사가 경전의 내용을 인용하다니! 우습군.】
토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죽은 이가 되살아나는 것도 피차일반 아니겠습니까. 망자가 되살아났다고 누군가에게 얘기하면 누구나 비웃을 테죠.”
기사는 투구를 주억거렸다.
【그 또한 옳다.】
어느 정도 마음이 기운 게 확실해 보였다.
이 기사는 망자로 전락했음에도 간절히 바라는 원념이 있다. 아직 그게 무엇인진 자세히 모르지만.
토드는 사람 좋아보이는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3년.”
기사의 안광이 일렁인다.
“3년만 나를 따르면, 그동안 귀하가 생전에 간절히 바랬던 바를 이룰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제법 관대한 조항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기사가 코웃음치더니, 싸늘하게 대꾸했다.
【3년. 3년이라.】
“예. 3년입니다. 여기 동의한다고 뭐, 영혼이 지옥에 끌려간다거나 그런 우려는 안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업은 제가 대신 지고 가는 것이고, 귀하는 마음 편히···”
기사가 다짜고짜 토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우악스러운 힘에 붙잡힌 토드의 몸이 공중에 들리고, 비로소 정면에서 둘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기사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3년?! 고작 3년만으로 본인의 숙원을 풀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당연하지만 토드는 사령술사. 몸 쓰는 일과 거리가 멀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생전에 기량이 뛰어난 기사였는지,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기사가 나름 말이 통하는 상대라고 여긴 게 오산이었다.
당황한 쇠렌이 단검을 집어던지려 하자, 토드가 손을 내저어 만류했다.
【내 숙원이 뭔 줄 알고 손을 내민 건가, 사령술사.】
“예? 아뇨. 저는 당연히 모르지요.”
투구 속 얼굴은 가늘게 미소짓고 있었다.
【분명 본인이 누구였는지, 당장 어떻게 죽었는 지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똑똑히 기억한다.】
섬뜩한 안광이 샛노랗게 이글거린다.
고위 망자가 퍼뜨리는 기운에 쇠렌은 단검을 놓쳤다. 누구도 사지 하나 꼼짝할 수 없다.
【본인은 한 명의 무인으로서, 길이 남을 위명을 날리는 것이 평생의 소명이었다! 철저히 그 소명만을 위해 살아왔고, 아마 그걸 이루기 위해 몸을 내던졌거늘, 끝내 이루지 못한 것이 분하여 네놈의 부름에 응했다―!】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포효에 토드의 입가가 찢어졌다.
손발이 벌벌 떨리고, 오싹하다. 역시 고위 망자가 풍기는 기세란.
주변에 날아다니던 파리들이 모조리 바닥에 떨어졌다.
【턱없이 짧다. 3년으론 부족하다. 사령술사! 기한을 재고해라.】
협상의 여지는 없다는 듯, 단호한 음성에 토드의 머리에 부하가 걸렸다.
“5년···?”
절레절레.
“7년?”
점점 건틀렛에 힘이 들어간다.
“10년!”
끼기긱-···!
덧씌워진 투구가 돌아가며 불쾌한 쇳소리를 냈다.
【사령술사. 지금 본인과 장난치자는 건가?】
아니, 나러러 어쩌라는 거야.
눈물로 발동한 「사자소생」은 강제로 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상호합의에 의한 계약이다.
조건과 햇수가 길어질수록, 토드야 나쁠 게 없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그, 그럼 50년?”
순간 토드도 뱉고 나서 아차 싶었다. 너무 과한 숫자를 부른 게 아닌가 싶어 조마조마하던 차에, 기사가 크게 웃었다.
【하, 하하하, 하. 하! 하, 하―!】
소름끼치는 광소에 쇠렌은 정신줄을 놓았고, 피에트는 이미 혼절한 뒤였다.
기사는 토드를 내려놓고는, 그의 손을 억세게 부여잡았다.
꽈드득.
손이 압축 프레스기에 들어간 느낌이다.
【그래! 그래야 사특한 사령술사답지! 네놈은 죽음을 거스르는 힘을 지녔으니, 필시 다니는 곳마다 죽음을 부르고 다닐 터!】
기사의 안광이 요사스럽게 타오른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낀 채로 토드의 앞에 섰다.
【50년. 본인은 기꺼이 그대가 휘두르는 무력의 대리자가 되겠다. 대신, 모든 투쟁에 내가 반드시 선봉장으로 서야 할 것이다. 이 약속이 준수되지 않는다면···】
무시무시한 눈길에 토드조차 침을 삼켰다.
“물론입니다. 한 맺힌 기사여.”
문득 향로를 흔들려던 토드가 멈춰섰다.
“그런데,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계약 절차상 필요한 항목인데······.”
잠시 턱을 괴고 고민하던 기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군. 말을 타는 법, 검을 쥐는 손가락과 버릇들은 기억난다. 그러나 이외의 것들은 하얗게 지워진 느낌이다.】
기사는 토드를 향해 턱짓했다.
【그대가 내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게. 보다시피 본인은 생자와 거리가 먼 몸이며, 이전의 기억도 상실했지. 사실상 다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으니, 마땅히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사령술사인 그대가 적격이 아닌가 싶네만.】
당신은 누구기에 이 변경까지 와서 죽었는가.
생전에 어떤 가치를 숭상했으며, 이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명예에 목을 매어 종래에 파멸했는가.
허나 부질없도다.
자신의 이름마저 잃어버린 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리오.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사령술사가 나지막이 입을 떼었다.
“이스라. 이스라는 어떻습니까?”
【이스라··· 좋다. 앞으로 본인의 이름은 이스라로 하겠다! 사령술사 토드.】
방울 소리. 그리고 바람.
향로에서 새어나온 연기가 동시에 기사와 토드를 옭아맨다.
기사의 안광이 잠시 멎는가 싶더니, 치켜뜬 안광은 토드의 눈동자 색과 비슷한 황록색으로 물들었다.
토드가 향로를 집어넣자, 기사가 그의 앞에 무릎 꿇었다.
사령술사는 친히 허리를 숙여 하수인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일어나시게.”
사령술사는 자신의 첫 번째 수족을 거둬들였다. 대개 소환수를 다루는 클래스들의 첫 난관은 어느 정도 급이 있는 지정 사역마를 받아들이는 순간까지다.
소위 폐사 구간이라 불리는 이 단계를 넘어가면 게임 운영이 풀린다지만, 사령술사의 난이도는 [전설적].
하물며 이제 여긴 게임도 아니며, 여전히 무수한 적들과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이제 비로소 첫 걸음을 뗀 것에 불과했다.
그래봤자 알게 뭐람.
토드가 그런걸 일일이 신경쓰면서 전전긍긍하는 인간이었다면, 결코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령술사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걸렸다.
“내··· 죽음의 기사여.”
데스 나이트.
성장형 하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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