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19
119
녹슨 투구를 부여잡은 성전군 기사가 자신의 팔다리를 매만졌다.
【씨···불, 근데 왜 이리 삭신이 쑤시는 겨?】
그의 불평에 옆에 있던 해골이 턱뼈를 부딪치며 달그락댔다.
망자들은 남은 시신의 부위를 매개로 의념을 전하는데, 그만한 여력도 남아 있지 않은지 턱뼈 부딪치는 소리만 났다.
그럼에도 용케 알아들은 성전군 기사가 안광을 부라렸다.
【옘병할···! 나이를··· 먹어서 그렇게 된 거라고? 이게 무슨 귀신 밀알 까먹는 소리여! 나는 아직, 팔팔하다고···!】
그의 항변과 달리, 뼈만 남은 성전군 기사의 관절은 불안하게 삐거덕댔다.
대주교로 보이는 유해가 재차 그를 타박했다.
【이 어린놈의 자식아. 관절뼈는 이미 다 삭았는디, 목청만 안 썩었더냐? 아직 여기 잠들어있는 영감들 많다. 정숙해라.】
―달그락, 달그락.
안광을 구긴 성전군 기사가 투덜댔다.
【망할 노괴들 같으니.】
얼핏 망자들의 촌극이 우스워 보일지 몰라도, 이들을 일으키는 것만으로 여태껏 토드가 모아온 눈물의 업이 모두 거덜 났다.
심지어 업이 부족한 탓에 일부 유해들은 여전히 잠든 채 관에 누워 있었다.
‘하나하나가 상위 망자에 필적한다.’
아니, 오히려 더 강할지도.
토드는 침을 삼켰다.
나직이 대주교의 유해가 입을 열었다.
【헌디 아직 구주께서 약속하신 도래의 때가 오기엔 너무 이르거늘. 우리를 부른 게 뉘고?】
어둠 속에서도 안광이 선명하게 아른거린다.
토드는 예를 갖춰 화답했다.
“고귀하신 분들. 저는 사령술사 토드라고 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일으켰습니다.”
안광을 번뜩인 대주교의 유해가 탄식했다.
【사령술사라고. 허면 흑색 학파의 하수인이렷다? 오호라. 어찌 불경한 자가 거룩한 묘소를 침범한 걸로도 모자라, 잠든 이들을 희롱하는가.】
성전군 기사 역시 철퇴를 부여잡은 채 중얼거렸다.
【내 80대 팔팔한··· 청년인데! 우리 동년배들은 이교도 놈들이라면 치가 떨린다···!】
역시 반응이 그리 호의적이진 않다.
엄연히 이들은 토드의 수준으론 강제로 억압하여 일으킬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닐뿐더러, 생전에 교회에서 사역한 종교인들이므로 마땅한 원한도 남아 있지 않다.
비록 잔재만이 남은 유해들이라 할지라도, 사령술사의 부름에 화답하는 데 거부감이 상당할 터.
‘그래도 이들은 내 부름에 응답했어.’
이들도 지상의 소동을 들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의식을 갖추고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불완전한 상태.
지금은 불경한 외침을 감수하고 일어설 정도의 불가피한 상황임을 일깨워줘야 한다.
“비록 여러분이 보시기에 저는 불결한 외경자이나, 안식에 이른 분들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 결례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대주교가 지팡이를 거머쥐었다.
【알면서도 불의를 행하는 것만큼이나 더한 죄악은 없는 고로.】
【캬악··· 퉷! 이 이단 놈의 자슥, 사형이다! 사형이여!】
―달그락···.
자칫 입을 잘못 놀렸다간 도리어 토드가 공격받을 수도 있다. 사령술사는 손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허나 상황이 원체 위급하여 여러분의 조력이 절실했습니다. 위에서 아빠티사 기젤라께서 맞서고 있는 상대가 누군지 아십니까?”
‘암살자’도 사령술사와 마찬가지로 교회와 썩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는데, 은신이나 행운의 권능을 내려주는 주체 때문이다.
“···그늘에서 조소하는 자, 니힐다르가 총애하는 무희입니다. 그가 지금 수도원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즉각 대주교의 안광이 가늘어졌다.
【뭣이라. 어릿광대의 끄나풀이 구주의 전당에 침입했다고?】
【에잉, 쯧쯧! 이래서··· 요즘 것들은 안된다니까! 기강이··· 단단히 빠졌어! 그 미치광이 잡놈이··· 이 신성한 곳에서 칼부림을 벌여?! 내 살아있을 적엔 상상도 못 하던 일이여!】
―달그락, 달그락!!
니힐다르는 도둑, 불한당, 사기꾼 등 하나같이 교회에서 꺼리는 것들을 비호하는 신이다. 토드가 암살자의 배경을 알고 있는 것이 유효했다.
대주교가 천장을 향해 지팡이를 들어 올렸는데, 흐릿한 장막 같은 것이 희미하게 너울을 일으켰다.
【과연. 기만자의 장막이 이 일대에 펼쳐진 고로.】
문득 안광을 좁힌 성전군 기사는 토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다 한들, 여기 들어와선 안 되는 건 저놈도 마찬가지 아녀!】
대주교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지팡이를 내렸다.
【···그 또한 옳지. 어찌 악에 경중이 있으리오.】
상황이 위급하지만, 조바심을 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이들을 잘 타일러야 불필요한 분쟁을 피할 수 있다.
“여러분이 저를 의심하시는 건 지극히 타당한 일입니다. 그간 태양 교단은 오래도록 흑색 학파와 대척점에 놓여 있었으니까요.”
가슴팍에 손을 얹은 토드는 공손히 조아렸다.
“다만 소생은 수녀원장이 직접 초청하여 이곳에 당도했습니다. 신들께 맹세코, 교단에 위해를 끼칠 의도는 없습니다.”
【그걸 어찌 믿으라는··· 것이여! 시커먼 놈들 특징이, 말은 번지르르하게 늘어놓는 건데!】
아직 기젤라가 걸어준 버프가 걸려 있지. 말을 늘어놓느니, 직접 보여주자.
“정 의심되시면 저를 직접 관조해보시지요.”
의심스러운 눈길로 토드를 살피던 대주교가 손을 뻗었다. 그는 사령술사에게서 희미한 광휘를 찾아냈다.
【허어, 이건 틀림없이 기젤라, 그 기특한 아이의 성사거늘. 으음···.】
막상 증거를 확인하니 망자들도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쿵―!!
마침 울려 퍼지는 육중한 굉음. 카타콤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이렇게 논쟁을 벌일 시간이 없습니다. 저를 여기서 쓰러트리시면, 수녀원장을 도울 방법도 요원해집니다!】
토드의 엄포에 성전군 기사는 거미줄이 들러붙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씨···불! 미치겠구먼. 잠에서 깨보니 이런 꼴로 일어난 것도 혼란스러운데.】
그러자 여태껏 입을 다물고 있던 해골이 요란하게 턱뼈를 놀렸다.
―달그락, 달그락.
【아무렴···! 나도 기젤라, 그 녀석은 잘 알지! 저번에도 내 관짝을··· 세심하게 닦아주더라고!】
―달그락. 달각.
【내 살아생전··· 평생토록 이단자들과 사교도들과 싸워왔는데··· 아무리 그래도 사령술사··· 놈이랑 협력하라니! 난 죽어도 그렇겐 못 하겠다!】
위아래로 부딪치는 턱뼈가 점점 빨라진다.
―달각, 딸깍, 딱··· 딱.
【으잉···? 그쪽이 대체 언제적 사람인진 모르겠는데, 우리 꼴 좀 보라고! 저놈은 시체 부리는 놈, 소위 삿된 마법사여!】
―따닥, 딱, 딱! 달그락!
【떽! 어찌 저런 종자가···! 같은 만신전에 속한 신을 모시는 사제라는 거여! 이리도 불경한 소릴! 늙어도 곱게 늙어야지, 노망이 단단히 들었구먼!】
―딱!!
분개한 해골이 성전군 기사의 머리통에 올라가더니, 억센 이빨로 두개골을 마구 물어뜯기 시작했다.
【아아악!! 이 고대의 망령이 기어코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성전군 기사도 사뭇 풍기는 기세가 만만치 않은 망자였는데, 고작 해골 하나를 떼어내지 못하고 허우적댔다. 머리 위에 올라선 해골은 그를 가볍게 제압하곤 마치 훈계를 늘어놓듯, 쉬지 않고 턱뼈를 부딪쳤다.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의문이었으나 그토록 완강해 보이던 성전군 기사가 굴복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일단 그 머저리 놈을 잡고, 자초지종을 들어보자고···!】
―따닥.
경쾌하게 이빨을 튕긴 해골은 성전군 기사의 머리에서 풀쩍 내려오더니, 앞장서서 카타콤의 복도를 데굴데굴 굴러갔다.
토드는 아연실색하고 있는 로이니스를 향해 턱짓했다.
“뭘 그리 멍하니 계십니까. 어서 가세요!”
“어, 아. 예···!”
잠들어있던 성인들이 사령술사에 의해 깨어났는데, 그들이 순순히 따른다?
이걸 기적의 발현이라고 봐야 할지, 불경스러운 신성 모독의 현장을 목격한 건지 의문이었다.
이스라가 가만히 천장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좀 전부터 지상이 조용해졌군. 어쩌면 늦었을지도 모르네.】
“아뇨. 기젤은 살아있을 겁니다. 아직까지는요.”
대강 온전한 상태는 아닐 것이라는 암시에 이스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으음, 확신할 수 있겠나?】
토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상대는 자신을 부르고 있다.
패턴을 가늠해보는 거다.
달아나는지, 돌아와서 맞서는지.
어차피 여길 벗어나더라도 지정 의뢰가 들어온 이상, 암살자는 계속 자신을 쫓아올 것이다.
그게 암살자를 플레이할 때 정한 규칙이었으니.
‘여기서 죽이는 건 불가능하겠지.’
힘의 우위가 명확하다.
‘죽이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반년은 회복하지 못할 중상은 입힐 수 있다.’
이쪽은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레벨 50 이상의 격차를 감안하면 썩 나쁜 조건은 아니지 않나.
문득 마르커스가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맞서려는 거냐? 기젤 님과 인연이 있다곤 하나, 네놈이 승산 없는 싸움에 무모하게 덤벼들 성미는 아닌 것 같았는데.】
“자칫 기젤이 여기서 죽으면, 제가 비밀리에 다녀갔다는 소문과 맞물려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네놈의 행보를 돌이켜보면 평판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는데.】
토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명성이든, 악명이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주의긴 합니다만. 점진적으로 교단과의 관계를 개선할 생각이니까요. 기껏 먼 걸음했는데, 수포로 돌아가는 건 성가시지 않습니까.”
심문관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걸 위해 목숨도 걸 수 있단 말인가?】
여태껏 목숨을 걸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던가.
사령술사가 냉소를 흘렸다.
“그럼 저는 그것밖에 안 되는 정도겠죠. 매번 이렇게 도망칠 순 없습니다. 앞으로의 대의를 위해서라도.”
토드의 각오에 파멸의 기사가 안광을 이글거렸다.
【하, 하! 하. 오히려 좋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 귀찮은 혹을 여기서 떼버리세! 제아무리 전설적인 살수라 한들, 기사도의 가르침을 모르는 시정잡배가 어찌 검술로 본인을 당해낼 수 있으랴!】
산시아 역시 읊조렸다.
“이게 흑색 학파를 위한 길이라면. 따르겠습니다. 스승님.”
일행을 돌아보던 마르커스도 입을 열었다.
【······좋아. 이번만큼은 내 검이 네놈과 함께할 것이다. 비록 영락했으나, 여전히 구주를 섬기는 신실한 하인으로서, 신의 회당을 공격하는 행태는 용납할 수 없다.】
고개를 끄덕인 토드는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풀어헤쳤다.
“···밤손님. 잡으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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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아 든 칼날에서 핏방울이 떨어진다. 여드름 무성한 볼을 긁적인 보그가 중얼거렸다.
“라노. 빨리 쫓아가야 하는 거 아냐? 안 그래도 여기 있는 놈들은 다 몰려왔을 텐데.”
“아직 장막 시간은 남았어.”
사브르를 휘어잡은 보그는 이리저리 칼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돌아보며 말했다.
“정말 그놈이 올 거라고 확신해? 널 피하려고 여기까지 도망쳐온 놈인데.”
히죽 웃은 라노는 무릎을 굽히며 속삭였다.
“놈은 반드시 올 거야. 난 누구보다도 그놈을 잘 알거든. 너도 그렇고. 그치?”
“······.”
기젤은 가늘게 헐떡였다.
그녀의 백발은 웅덩이에 잠겨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퍄··· 진짜 개꼴리네. 진짜 곱다 고와. 괜히 성녀 보정이 아닌가? 아니면 스텟이 높아서 육신도 영향을 받는 걸까.”
라노는 태연히 기젤의 볼을 찌르며 시시덕댔다. 발치에 짓눌린 상태에서도 기젤은 투명한 눈동자를 치켜뜨고 있었다. 그녀를 들여다보던 라노가 조소했다.
“왜 굳이 그런 거야? 정말 걔가 같다고 생각해? 이렇게 목숨까지 던져가면서 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
침묵으로 일관하자 라노는 등에 꽂힌 칼자루를 비틀며 뽑아냈다. 짧게 허덕이는 소리에 라노의 눈매가 휘어졌다.
“넌 속은 거야. 기젤. 그 녀석은 너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해. 그놈뿐만 아니라, 이미 다른 놈들은 전부 실패했어.”
“······흐으.”
미약한 쇳소리에 라노는 손가락을 휘저었다. 견갑골에 꿰여있던 스틸레토가 반대편에서 빠져나온다.
“아직도 모르겠어? 가장 목표에 근접한 게 나라는 걸. 너희들의 신이 예견한 종점에 도달할 건 나야. 내가 진짜고, 다른 놈들은 가짜에 불과하다고.”
“······.”
라노는 바닥에 엎드린 채 기젤의 코앞에 대고 속삭였다.
“날 도와. 그럼 너희가 바라는 걸 이뤄줄게. 이 세상에 도래할 멸망의 운명을 막는 것. 그걸 위해서 이렇게 필사적인 거잖아.”
이마를 부딪친 라노가 히죽 웃었다.
“그 녀석은 내 상대가 안 돼. 여태껏 도망쳐다니고, 숨어지내던 놈이야. 그 전까지 내 의뢰 목록에 올라오지 않았으니, 이전의 생애가 어땠을진 뻔해. 쥐새끼처럼 숨어다니고, 비굴하게 연명하는··· 버러지라고.”
“···흐, 으으!!”
양볼을 부여잡은 암살자의 눈이 사이하게 일렁인다.
“너도 그놈이 널 구하러 올 줄 알잖아. 그놈은 네가 허구의 매체로 재현된 존재였더라도, 진심으로 몰입해서 동행했던 동료였어. 안톤이었던 시절, 앙가툼 원정 때도 너만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잖아.”
“······.”
“기분 나쁘지만, 가짜라도 이전의 기억을 공유하는 열화판이니 어쩔 수 없지. 네 눈앞에서 그놈이 토막나는 꼴 보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날 돕겠다고 말해. 그럼 여기서 물러날게. 어차피 대공도 걜 죽이라고 날 보낸 건 아니니까.”
기젤의 눈동자가 흔들리다가, 이내 감긴다.
그녀는 연신 입에서 핏물을 흘리며 희미하게 속삭였다.
“바, 라는··· 흐으, 대로···”
라노의 얼굴이 일그러지려던 찰나, 단원들이 일제히 붕괴된 회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것 봐라?”
몸을 일으킨 라노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웬 누더기를 걸친 해골이 절뚝절뚝 걸어온다.
단검을 치켜든 라노가 익살스럽게 외쳤다.
“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멈춰선 해골은 유유히 라노를 응시했다. 그녀는 칼날을 겨눈 채 미소를 흘렸다.
“하나같이 티를 내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알아달라고 애원하는 이름이더라? 내가 그쪽을 뭐라고 불러드릴까? 변경백의 수하, 토드 하워드? 판가우의 이름 높은 장의사 코지마?”
해골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사령술사 토드. 토드로 족합니다.】
낄낄거린 라노는 기젤의 머리를 지르밟았다.
“아, 그래. 그래도 이름은 그럴싸한데, 하워드를 갖다 붙이니 좀 웃기더라. 어차피 다른 멍청이들이야 이해 못 하겠지만.”
【반쯤은. 그런 의도였습니다. 혹시 저 말고도 이 땅에 떨어진 분들이 계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흐, 뭐. 있다 치면, 찾아가서 담소라도 나눌 작정이었어?”
【안될 것도 없죠. 피차 졸지에 별천지로 떨어진 신세인데, 상호 간에 마음이 통하는 구석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개소리.”
몸을 숙인 라노는 피로 얼룩진 스틸레토를 집어 들었다.
“이 땅은 미치지 않고서야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야. 알잖아? 우리가 지내던 세상에 비하면 여기가 얼마나 시궁창 같은 곳인지. 맛 간 놈들끼리 만나봤자 뭘 하겠다고.”
새삼 현실이나 가상에서조차 친목질 못 하던 시절의 성미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저런 반골의 사고방식으로 또 용케 패거리 비스름한 집단을 꾸린 것도 재주라면 재주가 아닐까.
“너나, 나나 하필 재수가 지지리도 없어서 여기 처박혔지.”
고개를 기울인 해골이 반문했다.
【운이 없어서 여기 떨어졌다고요? 오히려 최고의 행운이 아니었는지요.】
귀를 후비적댄 라노가 뇌까렸다.
“쯧, 기젤. 저거 봐. 원래의 난 저렇게 대갈통에 꽃밭이 든 놈이 아니었어요. 네가 안톤을 봐서 대충 알겠지만, 세상을 삐뚤어진 시각으로 바라보는 놈이었다니깐? 쟤는 가짜야.”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해골의 어조는 열의에 차 있었다.
【그토록 취향에 맞아 즐기던 게임입니다. 그 세상이 실재가 되어 나타났는데, 이보다 더한 행운이 어디 있습니까?】
토드의 말을 전해 들은 라노가 폭소했다.
“프흐, 흐흐. 아주 예스맨이 다 되셨네. 그래, 그건 나도 인정해. 《유어 크로니클》, 갓겜이지. 나처럼 중세 판타지에 환장하는 힙스터 새끼들이라면 이만한 하드코어 RPG가 따로 없잖아. 흐흐.”
이 게임의 이름이 유어 크로니클이었던가.
처음 들었다. 좀 구린 것 같네.
문득 웃음을 뚝 그친 라노는 단검으로 자신의 몸을 쓸어내렸다.
“근데 씨팔, 다 좋은데. 하필이면 이 빌어먹을 몸뚱이에 갇혔잖아. 응? 난 분명 기집애가 아니거든. 맞지 않는 옷을 벗지도 못하고, 불편해 죽겠는데, 계속 껴입은 채 끌려다니는 것만 같단 말이야.”
그녀가 서슬 퍼런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게 얼마나 개좆같은 기분인지, 네가 알기나 해?”
비틀린 눈동자에서 적지 않은 한이 느껴졌다.
넌지시 라노를 응시하던 토드가 답했다.
【그렇다기엔 꽤 잘 지내시는 것 같던데요.】
대번에 어깨를 으쓱인 라노가 되물었다.
“생각난 김에 한 번 물어보자. 뭔 생각으로 남캐만 주구장창 해대던 놈이, 평소엔 하지도 않는 커스터마이징까지 하면서 여캐로 고른 거야?”
그리 어렵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야, RPG에서 도적은 여캐가 국룰이지 않습니까. 남캐로 도적을 할 거였으면 다른 게임을 했겠죠.】
라노는 실소했다.
“흐, 미친 컨셉충 새끼. 역시 너도 제정신은 아니구나.”
【잡담은 이게 다입니까?】
주변을 두리번거린 라노가 목을 꺾었다.
“음··· 그래야겠지? 장막도 영영 펼쳐둘 순 없는 노릇이고. 노가리만 까기엔 상황이 여유롭진 않네.”
【그럼, 한마디만 하지요.】
눈자위에 맺힌 안광이 번뜩였다.
【여기서 네 따까리들 데리고 당장 꺼져. 징징대는 거 들어주는 것도 개빡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