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21
121
카타콤에 뿌려둔 망자들의 시야가 하나둘씩 꺼진다.
처음엔 함정에 애를 먹는가 싶었는데, 돌파하는 간격이 빨라지고 있었다.
토드는 가늘게 한숨을 흘렸다.
레벨 99가 온다.
온몸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그와 대조적으로 마력은 침전한다.
피식자가 포식자로부터 살아남으려면 결정적인 순간을 위한 비수를 잘 숨겨둬야 하는 법.
사령술사는 나직이 바닥에 피워놓은 향로를 응시했다.
녹색 불꽃이 은은하게 흔들리다가, 점점 세차게 타오른다. 적이 가까이 왔다.
“후···.”
불이 꺼지고, 토드는 연기가 드리워진 뒤편으로 모습을 감췄다.
콰앙!
천장이 부서지더니 날렵해 보이는 인영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즉각 암살자는 주변을 살폈다.
좁은 밀실.
사방에 자욱한 연기.
분명 놈은 여기 숨어있다.
시체들로부터 이어지는 마력을 쫓아온 게 해답이었다. 거미줄처럼 뻗어 나간 자취의 발원지는 이곳.
문득 그녀가 코를 씰룩였다.
‘이건 향내잖아.’
라노는 자신의 감각을 맹신하지 않았다.
저 연기에 또 무슨 술수가 숨어있을지 모를 일.
그녀는 허공을 향해 힘껏 단검을 내질렀다.
후웅—!
칼날에 실은 검풍이 연기를 걷어낸 순간,
섬광이 쇄도한다.
“···씁.”
재빨리 망고슈를 세워 맞받아쳤다.
카앙!!
불의의 일격을 받아낸 라노는 반대편의 스틸레토를 찔러넣었다.
카카카캉!!
찰나에 네 번의 일격. 회색 갑주에서 불똥이 세차게 튀어 올랐다.
심문관의 몸이 휘청이자, 라노는 몸을 틀어 대번에 뒤를 점했다. 예리한 칼날이 팔꿈치 사이의 틈에 파고든다.
콰직.
‘얼레.’
라노의 눈이 가늘어졌다.
살갗을 가르는 감각이 선연하다. 이놈은 여태껏 마주쳤던 놈들과 달리, 안에 뼈로만 들어차지 않았다.
‘나름 다른 개체라는 건가.’
조금 질긴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오히려 피육을 토대로 움직이는 놈이라면 나쁠 것 없지. 그녀는 굳이 스틸레토를 회수하지 않고 손을 놓았다.
심문관이 수직으로 장검을 내리그었다. 다소 뻔한 검로.
가볍게 발을 비트는 것만으로 라노는 궤적에서 벗어났다.
쩡!!
분쇄된 파편들이 요란하게 튀긴다. 마치 검이 아니라, 철퇴를 휘두르는 듯한 둔중한 일격.
하지만 적중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벽면에 오른 라노가 그를 향해 도약했다.
【크으!】
심문관은 급히 팔을 들어 목을 보호했다.
카가가각——!
이빨도 안들 단검이 판갑을 가르고 지나갔다. 착지와 동시에 암살자의 검이 하단을 찔렀다.
날렵하게 빠져나가는 모습에 마르커스가 분개했다.
【쥐새끼처럼 간교하기만 하구나!】
조소를 흘린 라노는 벨트에서 추가로 단검을 휘어잡았다.
“넌 죽은 지 얼마 안 된 녀석이구나? 보아하니 심문관 같은데. 왜 사령술사를 따르는 거야?”
겨드랑이에 박힌 스틸레토를 뽑아낸 마르커스는 칼날을 짓밟으며 으르렁거렸다.
【나라고 원해서···.】
마르커스가 움켜쥔 장검에 화염이 넘실거린다.
【놈을 따르는 게 아니다!!】
그는 정면을 향해 장검에 맺힌 신성을 투사했다. 부채꼴로 쏟아진 화염이 묘소의 벽면을 녹여버렸다.
그러나 암살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심문관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군화에 신성을 실어 내리찍었다.
그러자 단검을 쥐고 있는 그림자의 형상이 탄로 났다.
마르커스가 잔상을 향해 검을 휘둘렀으나, 얄궂게도 흐릿한 신형은 미끄러지듯 회피했다.
환영이 샐쭉한 미소를 흘렸다.
“이건 어떻게 알았대?”
【너같은 놈들이 부리는 속임수야 뻔하지.】
“흐, 네 주인님이 미리 귀띔해준 건 아니고?”
라노의 빈정거림에 마르커스가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가 장검을 치켜들자 눈부신 백광이 온통 묘실을 밝혔다.
【구주께서 굽어살피신다! 네 기교는 여기서 통하지 않는다!】
빛으로 이루어진 거룩한 문구들이 마르커스의 육신에 새겨지고, 동시에 라노가 새겨넣었던 부상은 말끔히 걷혀나갔다.
가만히 그를 노려보던 라노는 입술을 훑었다.
언데드가 자힐은 그렇다 치고, 축복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라 여러모로 황당무계했다.
백광에 휩싸인 심문관이 흉흉한 기세를 발산했다. 그를 가늠해보던 라노는 주머니에서 풀잎을 꺼내 씹었다.
잇몸 사이에서 아릿한 감각이 치며 오를 즈음, 그녀가 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신성력 쓰는 언데드라니. 대체 뭔 생각으로 이딴 성가신 걸 만든 거니.”
달려오는 마르커스를 바라보며 라노는 날을 바짝 세웠다. 그녀는 비스듬히 몸을 기울이다가, 정면으로 심문관과 맞부딪쳤다.
타타탕—!!
수차례 총성이 터지듯 둘 사이에서 섬광이 일었다. 마르커스가 일으킨 신성이 갈퀴처럼 묘소에 묵은 먼지들을 쓸어냈다.
심문관의 검에 맺힌 빛이 워낙 선명해서, 얼핏 라노를 압도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반대였다.
【이, 이···!】
일그러지는 마르커스의 얼굴과 대조적으로, 라노의 입가엔 비웃음이 맺혀 있었다.
“칼질이 영 별론데. 자칭 심문관.”
라노는 마르커스가 휘두르는 검격을 모조리 쳐내고 있었다.
심문관이 검을 내지르고 회수하는 간격 사이사이, 암살자는 목, 정광, 치부, 오금을 찌르고, 헤집었다.
비좁은 밀실에서 맞붙고 있음에도 라노는 특유의 날랜 발재간으로 번번이 코너를 벗어났다. 도리어 구석에 몰리는 건 마르커스였다.
사방에서 빗발치는 날붙이가 갑주를 난타한다. 점점 찢겨나간 판갑이 덜렁이다가, 급기야 가슴팍을 잇는 사슬이 끊어졌다.
수세에 몰린 마르커스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구주께서—】
기도문이 완성되기 전에 라노가 손목을 걷어찼다.
카앙!
묵직한 충격에 장검이 그의 손을 떠나 공중에 떠올랐다.
마르커스의 시선이 거기 쏠린 사이, 어느새 암살자가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콱—.
묵직한 소리에 심문관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내 사뿐히 내려앉은 암살자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피는 조금 썩었네. 거기까진 방부 처리가 안 되나 봐?”
목을 잃은 심문관의 몸뚱이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머리통은 눈을 부릅뜬 채 미동하지 않았다.
괜히 의심이 들어 명치에 단검을 쑤셔 넣어봤는데, 몸통은 축 늘어질 뿐,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라노는 마르커스를 뒤로했다.
그녀가 묘실의 안쪽으로 발걸음을 내디디려던 차였다.
콰르릉—!!
돌연 벽이 무너지고, 검녹색 칼과 더불어 검은 갑옷을 입은 거구가 들이닥친다.
【안녕하신가—!!】
터엉!!
급히 칼날을 세워 빗겨냈으나, 실린 힘이 사뭇 다르다. 라노의 몸이 미끄러지듯 밀려났다.
가까스로 자세를 다잡은 암살자는 스틸레토의 날이 산산이 조각났음을 깨달았다.
황당한 표정으로 깨진 단검을 내던진 라노가 벽에서 튀어나온 기사를 응시했다.
“씨발, 뭐야? 이건 또.”
장검을 다잡은 기사는 허리춤에 팔을 짚곤 호탕하게 웃었다.
【하, 하! 하. 누구냐고 묻는다면, 본인은 사령술사 토드를 섬기는 기사, 이스라라고 하네!】
신성 쓰는 언데드들이 나올 때부터 이상한 건 알고 있었는데, 점점 더 이상한 것들이 튀어나온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라노가 고개를 기울였다.
“···데스 나이트?”
【오, 자네는 망자들의 구분을 아는가? 아쉽지만 본인은 이제 어엿이 파멸의 기사로 거듭난 몸이라네!】
말투에서부터 느껴지는 비범함에 라노는 신중하게 간격을 유지했다.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투지가 심문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
‘죽음의 기사보다 상위 개체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못해도 레벨 60?’
저렇게 자아가 명확한 놈들은 대개 네임드 취급을 받는다.
게다가 몸에 걸친 흑색 갑주도 방어력이 상당해 보였다. 예의 심문관이 걸치고 있던 갑주와 달리, 명백히 유물에 해당하는 물건으로 보였다.
【자네는 제법 강한 것 같군. 본인의 상대로 부족함이 없겠어!】
투구 속 안광이 휘어진다.
【부디 명예로운 전투가 되기를 빌지.】
라노가 헛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야, 벽 뒤에서 갑자기 선공을 가해놓곤 명예 타령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이스라는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
【본인의 주인이 명한 위치였으니 어쩔 수 없었네. 다만 그대와 마르커스의 싸움을 보고 있자니 본인도 몸이 끓어오르더군!】
어깨에 장검을 걸친 파멸의 기사가 히죽 웃었다.
【그 일격을 받아내지 못하고 죽었다면, 자네는 그 정도에 지나지 않는 셈이겠지. 나름 본인의 시험이라고 해야 할까.】
라노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따라서 자네에겐 본인과 맞붙을 자격이 주어졌다네. 진심으로 축하하네!!】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쾌활한 음성이 라노의 성질을 긁었다.
고작 소환물 따위가 내 자격을 시험한다고?
암살자가 이리저리 어깨를 틀었다.
뚜둑, 뚝.
“···재밌네. 어쩜 그 주인에 그 애완동물이라고. 사람 빡돌게 만드는 아가리도 닮았담.”
【하, 하! 하. 칭찬 고맙네! 그래 봐야 뒷골목 시궁창 물을 머금은 듯한 자네 아가리만 하겠나!】
둘은 미소를 띤 채 서로를 응시하다가, 돌연 동시에 뛰쳐나갔다.
달려나가는 와중에 라노는 이스라를 훑어내렸다.
‘저만한 갑주라면 무게가 상당하지. 언데드들은 특성상 몸놀림이 둔중해. 어차피 느려터진 깡통이야.’
제아무리 귀한 갑주로 무장하고 있다 하더라도, 틈새는 있기 마련.
어차피 자신의 몸놀림은 어지간한 피조물의 인지 범위를 벗어났다. 라노는 한 번의 유효타도 허용하지 않고 저 갑옷을 무거운 관으로 만들어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순간.
돌연 심장이 얼어붙는 한기가 몸에 스며든다.
‘······?!’
그저 추상적인 감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의 몸이 얼어붙고 있었다.
어느새 검녹색 휘광이 눈앞까지 다다랐다.
카앙——!!
가까스로 검을 쳐내는 덴 어찌 성공했는데, 거기 실린 충격을 육신이 견디진 못했다.
손목이 뽑히는 듯한 격통 속에서 라노는 황급히 고개를 비틀었다.
후웅—
머리 위를 가르고 지나가는 파공음이 살벌했다.
‘개씹.’
다소 뻣뻣하던 심문관과 달리, 공격의 연계가 매끄럽게 이어진다. 망자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민하다.
동시에 거기 실린 힘은 인간을 아득히 웃돈다. 한 번이라도 맞으면 치명상이다.
급히 뒷걸음질 친 암살자는 눈을 치켜뜨고 파멸의 기사를 응시했다.
백색 기류가 기사의 건틀렛과 칼날에 어슴푸레 흐르고 있었다.
‘고유 오라인가? 빙결 종류?’
하필이면 기동성을 저해하는 군중 제어기다. 게다가 일정 반경에 영향을 미치는 오라라서, 피할 수도 없었다.
‘피해를 주려면 접근해야 하는데, 범위가 그리 넓진 않은 것 같은···’
생각을 갈무리하기도 전에, 이스라가 발을 떼었다. 바짝 거리를 좁힌 파멸의 기사는 암살자를 단숨에 짓이길 기세로 검격을 쏟아부었다.
연신 공기가 터져나가는 파공음이 묘실에 쉴 새 없이 울려 퍼지고, 이스라는 풍차 돌리듯 검자루를 회전시키며 쉬지 않고 라노를 몰아붙였다.
【하, 하! 하. 도둑년답게 제법 몸놀림이 재빠르도다!】
씨익 웃은 이스라가 안광을 불태웠다.
【허나 언제까지 그리 뛰어다닐 수 있겠는가?】
궁지에 몰린 라노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이··· 황소처럼 무식한 놈이···!”
이스라의 저돌적인 공세를 견디다 못한 라노가 천장으로 올라섰다. 그녀의 기예를 본 이스라가 감탄했다.
【오! 거기 매달린 게 마치 박쥐 같군! 허나 기사도 전집에 따르면 검객은 무릇 바닥에 발을 붙이고 있으라 가르치거늘!!】
이스라는 장검을 틀어쥐더니, 벽면을 통째로 갈아대며 뛰어올랐다.
【이리 내려오너라!! 도의라곤 모르는, 이 잡놈아!!】
검녹색 휘광이 묘실의 벽면과 천장을 가른다.
지탱하고 있던 공간이 무너지자, 라노는 기겁하며 바닥을 굴렀다.
“큭···!”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는 라노를 보곤 이스라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하, 하! 하. 구르는 꼴이 응당 좀도둑에게 맞는 이치로다.】
이스라를 노려보던 라노는 품에서 주사위 한 쌍을 던졌다.
달그락.
그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런 개 같은 기분,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데. 하긴, 원래 게임이나, 이 세상이나 그랬었지.”
오래전 음지에서 압도적인 절대자로 군림한 이후, 줄곧 자신에게 대적할 상대가 없었다.
청부업 길드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뒤론 적당히 의뢰를 수주하고, 보수를 받고, 향락이나 즐기는 삶의 연속이었다.
어차피 이대로면 클리어까지 순항할 거라 낙관했었다.
그간 해온 고생이 있으니, 이 개 같은 세상에서 분투해온 자신에게 보상한답시고 지나치게 해이해진 것이다.
라노가 입가를 비틀었다.
“재밌네. 간만에 재밌어졌어.”
이게 PVP의 참맛인 걸까.
진심으로, 그 사령술사 녀석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
그놈을 만나려면 우선 저 앞에 거슬리는 깡통부터 치워야겠지.
무릎을 굽힌 라노는 자신의 그림자에 대고 중얼거렸다.
“네 발치를 조심해라. 우리에게선 떠날 수 없고, 우리를 피할 수도 없으니.”
기울어진 환영이 그녀와 더불어 몸을 일으킨다. 그러자 이를 보곤 이스라가 활짝 웃었다.
【오! 벨 놈이 둘로 늘었군! 오히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