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26
126
라노는 목걸이를 들어 보이며 항의했다.
“그 새끼가 지니고 있을 때, 이건 부활을 시켜주는 개사기 아이템이었다고! 근데 왜 내 손에 들어왔을 땐 이 지랄인데?”
고개를 기울인 광대가 되묻는다.
—이상하네, 나름 여기서 살 만큼 살지 않았어? 그럼 주인 있는 물건을 가로채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진 알고 있을 텐데?
“여태껏 저주나 권능이 실린 물건 따위를 훔쳐본 게 한두 번인 줄 알아?! 성물까지 팔아넘겼는데, 솔마르 정도의 강력한 신조차 내게 직접적인 위해를 끼치지 못했어.
목걸이는 으레 신들이 내려주는 하사품치곤 아무런 특색이 없었다. 끝에 걸린 연녹색 보석이 흐릿하게 일렁이는 것 외엔.
“하물며 사령술사가 섬기는 신은 이미 오래전에 몰락해서 신도도 없는데, 그런 힘을 발휘한다는 게 말이 돼?”
익살스럽게 어깨를 흔든 광대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네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신들의 권능은 교단의 위세에 비례하지 않아. 애초에 죽음은 본원적인 개념인데, 굳이 필멸자들의 숭배가 필요할 거라 생각해?
“시발···.”
라노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예의 죽음의 신이 니힐다르보다 상위의 신격에 해당한다는 걸까. 그럼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교회에 익명으로 기부해서 축복 성사라도 받아야 하나?
거기까지 꿰뚫어 봤는지 광대가 입꼬리를 느물거렸다.
—피조물의 잣대로 불멸자들을 재단하려 하지 마. 신들 간에는 우열이 무의미해. 각자 관장하는 분야가 있을 뿐이지. 그건 태양신도 어찌할 바가 없을걸?
“왜 나한테만 이런 거지 같은 상황이.”
가면이 돌아가더니, 수염 달린 여인의 모습으로 돌변한다. 목걸이를 굽어보던 광대가 손뼉을 쳤다.
—그건 너와 사령술사의 특수한 관계 때문이야. 원래 이런 부류의 은혜는 영혼에 속박되거든? 목걸이가 보기에 영혼은 동일한데, 정작 자격은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계속 시험을 내리는 거지.
“···그럼 언젠가 나도 이걸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건가?”
이에 광대가 딱 잘라 말했다.
—아니. 이제 와서 네가 사령술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어림도 없는 소리야. 히히.
반대면 모를까. 광대의 눈가가 휘어졌다.
“시발! 그러면 점수만 떼어가는 혹 덩어리잖아!”
머리를 쥐어뜯던 라노는 목걸이를 거칠게 내팽개쳤다.
—물리적으로 떼어내더라도 의미 없어. 아마 목걸이는 계속 너를 따라올 거야. 이미 너는 저걸 획득했어.
라노는 광대의 멱살을 부여잡은 채 흔들어댔다.
“어떻게 해야 저걸 떼어낼 수 있는데? 해결 방법이나 말해봐! 너도 내가 이 빌어먹을 것에 휘둘리느라 공양물이 줄어드는 걸 바라진 않을 거 아냐!”
광대의 가면은 어느새 폭소하는 얼굴로 변모했다.
—글쎄? 난 생각보다 마음에 드는걸? 혼란스럽지 않아?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 판을 바꿀 변수! 극적인 전개! 히히, 히!
얼굴을 일그러트린 라노가 스틸레토를 휘어잡았다.
“이, 개새끼가!”
사악—!
단검은 허공을 갈랐다.
어느새 라노의 손아귀를 빠져나간 광대가 그늘에서 낄낄거렸다.
고개를 떨군 라노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 새끼부터 죽여야겠어. 길드를 재정비해서,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도록 계획을···”
—정말 죽인다고 끝날까?
광대의 언질에 라노가 입을 다물었다.
—그 목걸이는 죽음을 거스르는 성물. 그 주인이 쓰러지면, 소유자의 대가를 거둬가 죽음을 유예하지.
“다음엔 확실히 죽이고, 되살아나면 또 죽이면 그만이야.”
조소를 흘린 광대가 벽을 기어오르며 되물었다.
—그럼 지금 되살아나는 주인은 누구고, 대가를 지불할 소유자는 누굴까?
라노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언뜻 조잘거리는 속삭임이 들렸다. 목걸이를 내려다보던 암살자가 뒷걸음질 쳤다.
유독 짙게 드리워진 골목의 응달에서 목걸이만큼은 선명하게 반짝거렸다.
“그럼 그 새끼가 뒤질 때마다 덤터기는 내가 써야 한다고?”
바닥에 내려온 광대가 속삭였다.
—목걸이를 상실했으니 사령술사가 예전처럼 되살아나진 않아. 다만 목걸이가 가까워지면··· 제 원래 주인을 인지하겠지?
가면 속 입꼬리는 웃는 듯, 우는 듯, 속내를 알 수 없는 모호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라노 양은 계속해서 공양물을 빼앗기겠지? 그렇다고 사령술사에게 접근해서 목숨을 거두려니, 대가가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입술을 떨던 라노가 겨우 답했다.
“그, 그 녀석도 여태껏 살아왔잖아. 분명 대가가 대단치 않을 거야. 한 번쯤은 위협을 감수할 만한 정도일 거라고.”
—사령술사는 오르카사의 하수인이니 치러야 하는 값도 공정하지. 너도 나를 따르지 않는 자가 함부로 내 물건을 썼다가 어떤 꼴을 당하는지 본 적 있잖아.
“신이랍시고 거들먹대는 것들이 옹졸하긴···”
낄낄댄 광대가 어깨동무하며 지껄였다.
—닥치는 대로 피조물들에게 은혜를 내릴 순 없잖아. 그랬다간 누구나 권능을 남발해댈 테니, 세상이 어지러워질걸?
“넌 누구보다도 그걸 바라는 게 아니었어?”
씨익 웃은 광대가 라노의 볼을 꼬집었다. 라노가 단검을 휘두르니 광대의 신형이 잽싸게 빠져나간다.
—오, 그런 상황도 나쁘진 않아! 보는 맛은 있겠는데?
가면을 바꾼 광대가 낮게 읊조렸다.
—하지만 나도 세상의 근간을 이루는 규칙은 지켜야만 해. 안 그러면 판 자체가 깨져버리거든. 그건 재미없으니까 지양해야지. 때론 일시적인 여흥보다 길~게 이어지는 여운이 즐거운 법이거든.
니힐다르는 주체할 수 없는 혼란, 특유의 변덕스러움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성물에 따라 터무니없는 권능을 발휘할 수도 있지만, 요구하는 대가에 비해 쓸모없는 쓰레기를 내려주는 일도 빈번하다.
누구보다도 운의 본질 자체에 가까운 존재.
그래서 도박꾼과 도둑들이 그들을 숭상한다.
턱을 짚은 광대가 중얼거렸다.
—하여간 상황이 복잡해졌어. 화신들이 이렇게 엮일 줄이야. 오르카사가 여기까지 의도했다면 정말 교묘한 수인걸.
“뜬 소리 집어치우고, 해결 방법이나 말해봐. 그놈을 죽여서도 해결되지 못하는 거라면, 내가 이 저주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데.”
고개를 빙글 돌린 광대가 덧붙였다.
—오옹? 난 죽여서 해결 안 되는 거라고 한 적은 없다? 대가가 혹독할 거라고만 했지!
“그걸, 시발! 말이라고!”
입술을 곱씹던 라노는 묘안을 떠올렸다.
“성물을 팔아치웠던 것처럼, 저 목걸이를 그냥 넘겨버린다면 어때. 그것도 소유권의 개념을 양도하는 개념 아니야?”
—불가능해. 저건 널 따라올 거야. 말했잖아? 네게 걸린 주박이라고. 너와 사령술사처럼 얽힌 관계가 아닌 이상, 소유권이 넘어가지 않아.
콰직!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그녀가 쥐고 있던 스틸레토의 손잡이가 으스러졌다.
—이제 판단하는 건 네 몫이야. 라노.
어릿광대의 육신은 해체되었다. 그의 형체는 골목가를 누비는 부랑자와 싸구려 추파를 던지는 창부들과 뒤섞여 경계가 모호해졌다.
—고뇌하고, 갈등하고, 괴로워해라. 나의 무희야.
골목의 사방에서 낄낄거리는 조소가 울려 퍼진다.
—혼란 속에서 네가 빚어내는 발버둥이 곧 내 즐거움일 지어니.
웃음이 멎자 라노는 신경질적으로 목걸이를 걷어찼다. 주사위 굴리는 소리와 함께 암살자의 신형이 사라지고, 골목길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귀퉁이에 버려진 목걸이는 흐릿하게 빛을 발하더니, 이내 번쩍이며 모습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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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드 일행은 그라워볼프 공작가의 본거지였던 슈피어슐로트 성채에 도달했다.
이리공이 죽은 지 불과 1년 정도가 지났지만, 이전의 모습이 무색하게 성채는 완벽한 폐허로 전락했다.
“음, 보아하니 다들 잘 지내고 있던 것 같군요.”
성채에는 토드가 모아둔 망자들이 거닐고 있었다.
【우워, 사령술사. 금방 돌아온다고 했다. 너무 오래 걸렸다. 심심해 죽는 줄 알았다!】
살점 거인은 뭉개진 얼굴을 이리저리 구기며 심통을 부렸다. 여기저기 잔해로 쌓은 돌탑이 가득했는데, 그간의 무료함을 저런 방식으로 달랜 모양이었다.
“기다리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별일은 없었죠?”
거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암! 난 대자악이다! 대작은 사령술사 기대, 저버리지 않는다! 대작은 심심해도 잘 기다렸다. 난 대작이니까!】
팔짱을 낀 채 거들먹거리던 살점 거인은 성채를 배회하는 망자들을 가리키며 고자질을 늘어놓았다.
【근데 저놈들, 말 안 듣는다! 대작은 똑똑한데, 저놈들은 아니다! 대작처럼 못 기다린다! 자꾸 밖으로 기어나가려고 해서 한 대씩 때려줬다! 그 뒤론 대작 말, 잘 들었다!】
이따금 성채의 흉벽엔 뭉개진 자국이 있었는데, 부패가 진행되어 으스러진 뼈 무더기만 널려 있었다.
아무리 봐도 가볍게 때린 수준은 아니었지만, 나름 살점 거인이 하위 망자들을 상대로 통제력을 체득했다는 점은 흥미로웠다.
‘하위 개체들을 통솔한다는 건 상위 망자로 거듭날 자격이 갖춰졌다는 의미지.’
기젤이 넘겨준 「견진의 축가」는 하수인 커스터마이징과 관련되어 있다.
당초엔 성장이 한계에 달한 이스라의 육성에만 몰두할 생각이었는데, 살점 거인에게도 신경 쓸 여지가 생겼다.
토드는 빙긋 웃으며 살점 거인을 치하했다.
“잘 했습니다! 역시 제가 만든 대작이군요! 기대를 훨씬 웃도는 모습, 창조주로서 흡족하군요.”
신이 난 살점 거인은 양손을 쥔 채 떠벌렸다.
【그러냐! 역시 난 대자악이었어! 우하하!!】
그들을 지켜보던 마르커스가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얼간이들 같으니라고. 차마 눈에 담기도 불경한 피조물과, 그를 지배하는 사악한 주인답다.】
마르커스의 비난에 이스라가 대꾸했다.
【하, 하! 하. 뭐 어떤가. 본인이 보기에 훈훈한 광경이거늘. 자네는 저들의 교류로부터 연대감이 보이지 않나?】
미간을 좁힌 마르커스가 살점 거인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네놈이 보기엔 저 흉물에게서 연대가 느껴지나?】
처음엔 여러 인간의 몸뚱이를 아무렇게나 뭉쳐 만든 단백질 덩어리였으나, 신기하게도 살점 거인은 자아가 명확해진 뒤론 하나의 확고한 형체로 굳어졌다.
【흠. 얼핏 보기엔 좀 징그럽긴 하다만, 그래도 나름 둥글둥글하니 귀엽지 않나?】
이스라의 평가에 마르커스가 질색했다.
【사령술사의 충견 아니랄까. 과연 제 주인 못지않게 뒤틀린 심미안이로군. 되었다! 네놈에게 제대로 된 판단을 기대한 내가 어리석은 놈이지.】
그는 토드 일행과 멀리 떨어진 잔해에 자리를 잡곤, 경전을 펼쳐둔 채 기도문을 읊조렸다.
어깨를 으쓱인 이스라는 낮게 중얼거렸다.
【하여간 일관된 친구로군. 역시 고지식한 성전사답도다.】
와중에 마르커스의 말을 들었는지, 살점 거인은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소심하게 물었다.
【기사. 내가 정말 그렇게 못생겼나?】
화들짝 놀란 이스라의 안광이 흔들렸다.
【못생겼다니! 심문관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네.】
【하지만 나더러 흉물이라고 했다. 그건 못생겼다는 게 아닌가.】
여태껏 이스라는 내심 살점 거인을 순수하지만, 지성이 낮은, 다소 둔한 하수인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흉물이라는 어휘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파멸의 기사는 머리를 쥐어 짜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 녀석에게 상처 주지 않고 설명해줄 수 있을꼬.’
하지만 자신은 사령술사와 달리, 그다지 말솜씨가 뛰어나진 않은 편이다.
이럴 때 답은 기사도 전집이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여태껏 훑고 지나갔던 무수한 기사도 전집의 구절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중에서 가장 적합한 농담과 어휘 중에 적당한 표현을 추려낸다.
【그게 아니라, 생김새가 개성 있다는 뜻이라네!】
생소한 어휘에 살점 거인의 작은 눈이 반짝인다.
【개성 있다? 그건 무슨 뜻이냐?】
에헴, 기침한 이스라는 우둔한 하수인을 위해 친히 풀이해줬다.
【개성이 있다는 것은, 남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점이 있다는 걸세! 가령 얼굴이라던가, 말씨, 잘하는 것이라던가!】
【그럼 대작은 못생긴 게 아니라, 개성 있게 생겼다는 거냐?!】
【그렇다! 넌 못생긴 게 아니다! 단지 남들과 다르게 생겼을 뿐!】
그게 못생긴 게 아닌가?! 막상 뱉어놓고 이스라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아마 죽지 않았다면 지금쯤 식은땀이 흐르지 않았을까.
다행히도 살점 거인의 개성 있는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남들과 다른 거!! 마음에 든다! 대작은 다르다! 우워어! 대작은 저 멍청한 녀석들과는 다르다! 개성이 있다!】
가슴을 두들긴 살점 거인이 포효했다.
【하, 하! 하.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로군. 아주 좋은 마음가짐이로다. 하수인!】
이스라는 안도했다. 역시 평소에 기사도 전집을 즐겨보길 잘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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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소란스러운 성채 밖과 달리, 산시아는 기울어진 성채 내부를 돌아봤다.
【크으으···!】
이따금 그녀와 마주친 망자들이 이빨을 드러내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꽁지를 말고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
복도를 거닐던 산시아는 바닥에 떨어진 초상화를 응시했다.
집채만 한 늑대를 쓰러트린 채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사내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초상화에 쌓인 먼지를 쓸어내곤, 조심스레 초상화를 들어 벽 아래에 세워뒀다.
그녀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초상화를 바라봤다.
‘아버지.’
영지는 몰락했고, 그토록 강성하던 성채는 폐허로 변모했다. 진정 아버지가 바라던 게 이런 결말이었을까.
초상화 속 사내의 눈매는 날카롭게 서 있었다.
자신의 기억 속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산, 샤. ···나는, 후회. 하지··· 않는다.’
정말로요?
영애는 반문했다.
그러나 답해줄 이는 남아 있지 않았다.
혹여 이 성채에 아버지의 원혼이 남아 있을까? 사령술의 힘을 빌린다면, 답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연 아버지는 사령술사가 되어버린 자신을 보고 어떤 말씀을 하실까.
혹여 자신과 선조들이 이룩한 터전을 사령술사들의 본당으로 재건하겠다는 걸 듣고, 책망하시진 않을까.
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 있었군요.”
사령술사의 나른한 목소리. 산시아가 화들짝 물러섰다.
“···스승님.”
느긋하게 걸어온 토드는 산시아의 옆에 바로 섰다. 그의 시선이 발치에 놓인 초상화에 닿았다.
초상화를 응시하는 토드의 눈빛은 건조했다.
그녀가 재빨리 변명을 늘어놓았다.
“제게 그라워볼프 가문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 없어요. 단지 값이 나갈 만한 물건을 병사들이 미처 수습하지 않고, 방치해둔 게 안타까워서···”
토드가 나직이 속삭였다.
“제 아버지는 엄하신 분이라, 늘 거리감이 있었습니다. 좀처럼 당신의 속내를 털어놓는 편은 아니셨죠.”
“······.”
“저를 호되게 질책하시고, 훈계하시는 게 말씀의 대부분이라, 저는 아버지를 무서워했답니다. 산시아도 그랬나요?”
“···스승님이 혼나셨다니.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이네요.”
쓴웃음을 흘린 토드가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 자식이 그릇된 방향으로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 같은 걸까요? 그땐 몰랐지만, 지금 와서는 조금이나마 이해가 가긴 합니다.”
“······.”
“아, 그렇다고 엄격한 아버지들의 훈육 방식을 두둔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래도 약간이나마 다정하게 대해주셨더라면 좀 더 좋았을 텐데요. 아이에게 부모는 자신이 아는 세계의 전부이지 않습니까.”
산시아가 아는 세상은 골짜기에 있는 고성, 온통 눈발로 가득한 대지, 하인들, 의사, 사제, 그리고 아버지였다.
그녀가 옅은 미소를 삼켰다.
“···그러게요.”
산시아를 바라보던 토드는 초상화를 굽어보며 중얼거렸다.
“혈육의 정이라고. 이따금 아버지가 그리울 때도 있는 법이죠.”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눈앞의 사내는 아버지의 원수다.
그러나 산시아가 보아온 바로, 사령술사는 어딘가 결핍된 인간이었다.
이런 인간관계로부터 초연하다고 해야 하나.
그도 자신이 내심 원한을 품고 있는 걸 알고 있음에도 제자로 들여 데리고 다니지 않았던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원수의 딸을 죽일지언정, 누구도 고치지 못했던 저주를 풀어주기 위해 가르치고, 노력을 기울이진 않을 거다.
여정 도중 얼마든지 자신이 그의 목숨을 노릴 기회도 많았다. 그럼에도 사령술사는 자신을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상한 사람.’
애초에 저런 인간에게 복수심을 품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건 오래전 깨달았다.
“그래도 여전히 흑색 학파에 입문하기 전의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린 건 제 잘못이에요. 이것의 처분은 스승님께 맡기겠습니다.”
토드가 고개를 기울였다.
“초상화는, 당신이 가져도 됩니다. 처분은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부친을 기억할 수 있는 기록이지 않습니까.”
“저는···”
복도를 돌아본 토드가 덧붙였다.
“더불어 이 성채도, 당신에겐 소중한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죠? 여긴 남겨두겠습니다.”
“하지만 스승님, 분명 사령술사들의 성채를 여기 세우신다고···.”
토드가 미소를 흘리며 답했다.
“계획이 바뀌었습니다.”
마침 살점 거인이 돌탑을 쌓는 걸 인상 깊게 보고 온 뒤인데, 제자의 표정까지 보고나니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