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50
150
결투 재판!
신 앞에 명예를 걸고 정의를 겨루는 유서 깊은 관습인가, 옛 종교에서 파생된 야만적인 유산에 불과한가.
아무래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대다수 국가에선 사양되는 추세가 강했으나, 유달리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제국에선 희미하게나마 명맥은 남아 있었다.
“빌어먹을 놈, 사실상 사문화된 것이나 다름없는 권리를 들먹이다니···.”
하이젠베르크 대주교가 이를 갈았다. 그의 지적대로 정식 공판이 결투 재판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황제의 권력이 건실했던 때만 하더라도 제국궁정원과 그를 지지하는 제국의회가 정상적으로 기능했으므로, 사적 무력행사가 제재되고 법적 절차에 의해 분쟁을 중재했다.
그러나 구주께서 침묵하고, 황실마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지 오래.
법정 공방을 벌일 필요 없이 변방 제후들은 무력을 동원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추세에 토드의 요청은 오래된 제국법을 절묘하게 파고든 묘수였다.
대주교들이 어물쩍대자 베르나드 공왕이 외쳤다.
“프라이헤어 셰우드의 요청은 정당하오! 그는 비록 사령술사이나 엄연히 제국의 일원이지 않소!”
순록대공 역시 동조하고 나섰다.
“올렌부르크 공의 말이 맞소. 본 공판이 비록 민사나 형사 절차는 아니나, 구주의 이름을 대행하여 개최된 법정이지 않소.”
흑마술 혐의를 규탄하는 마녀재판, 혹은 특별 재판은 달리 말해 신명 재판의 연장선에 있다.
“필멸자가 아닌 거룩한 분 앞에서 죄의 유무를 가리는 것은 가른슈타드 공의회에서 보장하는 제국민의 권리요.”
하이젠베르크 대주교와 콘라트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사령술사를 몰아세우며 내세운 것이 신의 뜻이니만큼, 이를 부정했다간 법정을 개최한 대의 자체가 어그러진다.
시도우 대주교가 입을 열었다.
“···승인한다.”
“움슈타트 공···!”
콘라트가 그를 죽일 듯이 노려봤으나, 대주교는 개의치 않고 법봉을 내리쳤다.
땅, 땅!!
“제국의 관습법에 의하여 피고의 결투에 의한 심리 요청은 유효하다. 그러나 본 공판이 흑마술 혐의로 인한 이단 심문이므로, 피고에 대한 결투 재판 또한 마땅히 시죄법(試罪法)에 명시된 소명 절차를 따라야 합당하다.”
이스라의 안광이 가늘어졌다. 그녀가 의념으로 물었다.
【시죄법이라니? 저게 무슨 소린가?】
‘결투 재판과 마찬가지로 몇 안 되는 제국의 오랜 자랑거리죠.’
이른바 흑마술사로 고발된 자가 거치는 재판─을 빙자한 고문에 가깝지만─이다.
시죄법에서 거치는 절차는 마침 우연찮게 토드에게 부여된 죄목과 마찬가지로 다섯 개.
1. 축성된 물속에 들어가 가라앉으면 무죄, 떠오르면 유죄.
2. 불타는 창 위를 걷게 하여 살아나오면 무죄.
3. 끓는 기름에 손을 담그고 화상을 입지 않으면 무죄.
4. 독을 바른 콩을 먹어 살아남으면 무죄.
5. 사흘간 단식한 뒤 마른 빵을 먹어 삼키면 무죄. 사레가 들리거나, 먹뱉을 시도하면 유죄.
토드의 설명을 전해 들은 파멸의 기사는 고개를 기울였다.
【사실상 죽으라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놀랍게도 실력 있는 마법사 중엔 두세 가지 정도는 통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하더군요.’
여긴 요술과 신비가 실재하는 세계니, 저런 말도 안 되는 절차를 끝끝내 통과하는 기인들이 있다곤 한다.
그럼에도 고된 마녀재판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
【이해하기 어렵군. 그럼 결투를 가마솥에 손 담그기나, 마른 빵 집어먹기 따위로 행한단 말인가?】
이스라라면 아마 축성된 물에 들어가는 시련 외에 나머지 4개는 식은 죽 먹기일 거다.
파멸의 기사는 어지간해서 잘 죽지 않는 고위 망자이니.
“···따라서 피고 토드 셰우드는 각 시죄법의 시련을 상징하는 다섯 대전사를 상대하여만 한다!”
이스라가 코웃음 쳤다.
【흥! 다섯이나 상대하란 소리를 복잡하게 돌려 말하는군.】
‘제가 관습에 의한 절차를 요청했으니, 마찬가지로 저쪽도 관습에 따른 절차로 시행하겠다는 거죠.’
시도우 대주교의 선언에 베르나드가 항의했다.
“대전사를 다섯이나 상대하라니! 이따위 불공정한 결투는 들어본 적 없소!”
“허면 불경자가 제국의 관습을 들먹이며 결투를 요청한 전례는 들어본 적 있소이까? 공께선 여러 법률과 관습을 들어 피고에 대해 지극히 합당한 선고를 내리신 게요!”
사령술사는 존재만으로 교회법에 기소당하는 중죄인이니 이만한 처사로도 감사히 여겨라.
황소대공이나 대주교들로선 가뜩이나 제국 내에서 입지를 다져가는 사령술사가 눈엣가시나 다름없을 터.
저렇게 추하게 억지를 부려서라도 어떻게든 자신을 매장할 작정이겠지.
토드가 의사를 묻기도 전에, 망자의 안광이 휘었다.
【언제까지고 대등한 상대와 싸워봤자 사람들에게 기억될 수 없겠지···.】
파멸의 기사는 어느 때보다도 열의에 찬 모습이었다.
【홀로 다섯이나 싸워서 이겨낸다면, 분명 오래도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이야기로 전해질 터.】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다. 내게 있어 고난은 도리어 즐거움에 지나지 않는다.
1:5로 맞서야 하는 부당한 상황이 파멸의 기사에겐 도리어 불타오르는 상황인 것이다.
역사와 신화에 남으려는 자는 온당 자신에게 처한 모든 불합리와 불의에 맞서야 하는 법.
【기사된 자로서, 본인이 섬기는 주인에게 처한 불의를 외면하지 않겠네.】
파멸의 기사는 안광을 선명하게 이글거리며 속삭였다.
【토드. 본인은 준비되었다.】
사령술사는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저래야 내 하수인이지.’
토드는 자신이 애지중지 키운 기사가 당당히 다섯 명을 결투로 쓸어버리는 광경을 기꺼이 원했다.
어차피 불리한 제안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이 결투에서 승리하면 다섯 구의 질 좋은 시체까지 들어오는 셈이니, 나쁠 것도 없지.
당연히 콘라트도 최고의 전사들을 내보낼 테니, 겸사겸사 전력도 빼 올 수 있고.
“지엄한 법정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신의 이름을 내걸고 전사의 목숨으로 증명하는 공양제.
뫼를렌푸르트 전체가 느닷없는 열기에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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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술사의 대전사는 죽음의 기사라 들었소. 이미 죽은 자를 어떻게 다시 죽인단 말이오?”
하이젠베르크 대주교의 우려에 대공은 차분히 답했다.
“불경한 마법으로 다시 일어선 존재라 하더라도, 엄연히 기반이 되는 육신을 베면 무너지는 법이오. 게다가 칼이 들지 않는 허깨비도 아니잖소.”
“소문에 따르면 그 기사는 쾨흘링에서 디트마흐와 겨뤄 이겼다더군. 그뿐 아니라 북부에선 거인을 살해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정말 인간이 대적할 수 있는 상대긴 한 거요?”
그는 손을 모은 채 읊조렸다.
“공명정대한 결투를 위해 법궤가 사용될 거요. 죽은 자가 제아무리 대단한 싸움꾼이라 하더라도, 엄연히 사령술사의 졸개.”
대공의 눈이 번뜩였다.
“제 주인의 조력이 없다면 그저 인형에 지나지 않을 거요.”
침음을 흘린 하이젠베르크 대주교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베르나드 공왕과 순록공 고다프리드는 대전사 선임을 거부했으니, 우리 가운데 기사들을 추려내야겠소.”
그러자 대공 곁에 있던 수행원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전하, 듣기론 그 검은 기사가 쾨흘링에서 그라워볼프 공작의 병사들을 상대했었다 들었습니다.”
중년의 기사가 검집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소인의 조카가 전투 중 그자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부디 원수를 갚게 해주소서.”
“저자는···?”
대주교의 물음에 대공은 수염을 쓸어내렸다.
“내 기병대를 이끄는 근위대장, 블라인다프 가문의 베르트람 백작이오. 26년 전 발스트리드 공방전에서 단신으로 30인의 기수를 쓰러트린 백전노장이지.”
베르트람은 중후한 인상이 강했으나, 여전히 몸집이 다부지고 강인했다.
“동방 원정에 참여하고도 살아남은 관록이라면 죽음의 기사를 상대할 선봉장으로도 부족함이 없겠군!”
하이젠베르크 대주교의 칭찬에 베르트람은 굵직하게 답했다.
“되살아난 시체라는 건, 이미 죽어본 놈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소인은 아직 죽음을 모릅니다.”
선제후들 앞에서 베테랑 기사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일렁였다.
“죽은 자는 계속 무덤에 누워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불경한 마법사의 하수인에게 구주의 섭리를 알려주고 오겠습니다.”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른 무형의 투기가 아지랑이처럼 넘실거리며 군막을 밝힌 촛불을 흔들어 놓았다.
단박에 그가 범상치 않은 경지의 무인임을 알아본 대주교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옳은 말이네. 베르트람 경. 구주께서 자네의 용맹을 치하하기를!”
다섯 대전사 중 선봉장으로 나설 섭식의 기사로는 베르트람이 내정되었다.
베르트람이 나선다는 말에 기병대 병사들은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렇지 않아도 경께서 1년 내내 아침마다 쇳돌을 가셨는데, 그 검을 받을 상대가 뫼를렌푸르트에 있을 줄이야.”
이미 베르트람에 대한 이야기는 부대 내에서 유명했다. 콘라트 휘하에서 전쟁터만 누볐던 베르트람이라, 자식이 없던 그는 유달리 쾨흘링에 있는 조카를 아꼈다고 한다.
“베르트람 경이 원정을 나설 땐 군마와 갑옷, 조카가 보낸 편지를 담은 상자만 챙기신다더군. 그토록 유별나신 분이었는데 오죽하겠어.”
“그 조카란 양반도 블라인다프 가문의 사람이라면 제법 강했을 텐데···.”
“변방 제후의 천인장이었다며. 그럼 베르트람 경에겐 못 미치지. 경께선 10대 때부터 전하와 더불어 전장을 누비셨는데.”
동이 트기 전, 병사들은 불가에 둘러앉아 시시덕거렸다.
“선봉장이 베르트람 경이라고? 생각보다 싱겁게 끝나겠네. 다섯이나 나올 필요가 있겠나.”
“아무렴. 우리 연대에서 경한테 돈 건 놈이 대다수야. 좆도 모르는 용병대 놈들이나 흑기사한테 좀 걸었다던데.”
척, 척.
병사들은 발맞춰 걸어가는 고지대 용병들을 보곤 침을 뱉었다.
“호구 새끼들이 배당을 올려주니 좋구만. 그래 봐야 푼돈이겠지만, 이걸로 간만에 계집이나 안아야지. 뫼를렌푸르트 년들은 살집이 통통하다던데.”
비척비척 몸을 일으킨 병사가 너스레를 떨었다.
“니미럴, 옘병에 걸렸을지도 모르는데? 거시기만 썩는 게 아니라, 몸이 썩는다고 병신아.”
“씨팔, 알 게 뭐야! 어차피 사령술사가 지면 다 태워죽일 텐데. 그 전에 맛이나 보고 불 피워놓으면 그때 가랑이도 좀 소각하지, 뭐.”
“푸히히. 이거 순 미친 놈일세.”
둥! 둥! 둥!
고조되는 북소리가 다가올 제전을 알린다.
병사들은 하나둘씩 투구를 부여잡고 무대로 나아갔다.
결판이 난 이후에 병사들은 대공으로부터 뫼를렌푸르트의 부역자들을 처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내기로 받을 동전은 화대가 아닌 노잣돈으로 던져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야 적어도 자신의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거라 믿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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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피해를 받지 않은 뫼를렌푸르트의 성 요제프 광장에서 첫 번째 결투 재판이 개최되었다.
다섯 선제후를 상징하는 깃발이 결투장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그 곁으로 그들이 대동한 수십 명의 휘하 귀족, 대사, 기사와 용병대의 휘장이 펄럭였다.
넌지시 상대측을 응시한 토드가 중얼거렸다.
“노련한 기사군요. 드러나는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스라는 군중의 시선이 의식되는지, 평소보다 몸이 조금 뻣뻣한 느낌이었다.
토드는 히죽 웃으며 기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봤자 당신에겐 한참 못 미치지만요. 당신은 무려 라이칸스로프와 거인, 흑마법사, 대악마까지 무찌른 기사이지 않습니까!”
망자의 안광이 이글거렸다.
【그렇다! 본인이 여태껏 무찌른 적수들에 비하면 한낱 필멸자 따위가 본인을 쓰러트릴 순 없지!】
토드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가서 저들에게 확실히 보여주고 오세요. 사령술사 토드의 기사가 얼마나 강한지.”
【알겠네! 다녀오지!】
대번에 위축되었던 기세를 회복한 이스라는 씩씩하게 나아갔다.
태양교단의 사제들은 직접 법궤를 짊어지고 와서 양측의 대전사 앞에 바로 섰다.
몸을 일으킨 시도우 대주교가 입을 열었다.
“지엄하신 구주, 솔마르께서 이곳을 주시하나니. 우리는 사령술사 토드 셰우드의 죄를 판별하고자 하노라!”
와아아─!!
못해도 수천의 군중이 이곳에 운집했다.
하물며 저들에겐 교수형조차 구경거리인데, 각자의 대의를 내세운 전사들이 맞붙는 광경은 놓칠 수 없는 꼴이었다.
이스라는 지면이 울리는 듯한 함성에 전율이 일었다.
‘정말 대단하군!!’
망자의 안광이 반짝였다.
분명 심장의 고동은 멈췄을 텐데,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결투에 앞서, 각 전사는 구주께서 참관하시는 거룩한 대결에 일체의 요사스러운 기교나 불경한 주술 행위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여라.”
시도우 대주교의 말에 법궤를 훑어 내린 토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절차가 있었나? 저 유물은···’
솔마르는 광명, 생명과 동시에 계약을 관장하는 군신이다. 특히나 서약을 기반으로 한 맹세라면 고위 망자라 하더라도 그 이상의 구속력을 미친다.
‘일종의 광역 디스펠을 걸고 싸우는 건가. 콘라트 놈, 제법 머리를 썼는데.’
참관석에 앉은 콘라트는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이렇게 되면 토드가 사령술사로서 보유한 하수인 강화기들은 모두 무효화되고, 이스라도 고위 망자가 지닌 고유 오라나 패시브들이 모조리 차단된다.
일체의 권능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육체의 기량으로만 맞붙는 대결이라니.
자칫 이스라가 다칠 수도 있다.
설령 여기까지 끌고 온 안배가 무너지더라도, 여태껏 자신이 애지중지 육성한 하수인을 내어줄 순 없었다.
‘이스라! 이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결투를 물리는─’
【하, 하! 하. 마음에 드는군! 어떠한 주문이나 권능도 없이, 강철과 육신으로 겨루는 싸움이라!!】
음산하게 포효한 망자가 거룩한 법궤 위에 손을 올렸다.
【좋다!】
대공 측의 대전사로 나선 베르트람 역시 손을 올렸다.
법궤에서 흘러나온 빛이 두 전사를 휘감곤 사그라졌다. 사제들이 법궤를 들고 물러서자 대주교가 외쳤다.
“거룩한 아버지께서 이 자리에 당신의 뜻을 관철하시길!”
입술을 깨문 토드는 손을 모은 채 작게 중얼거렸다.
“어머니, 당신의 하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부우웅─!!
나팔이 울렸다.
양측의 투사들은 무기고에서 각자 자신에게 맞는 무기를 골랐다.
이스라와 베르트람, 양쪽 모두 장검을 쥐었다.
철컥, 철컥.
흑색 갑주를 걸친 파멸의 기사는 베르트람과 체고가 엇비슷했다. 더욱이 갑주가 풍기는 공포스러운 위용에 군중들도 숨을 들이켰으나, 베르트람은 태연히 그녀를 노려봤다.
“역겨운 존재가 걸어 다니며 죽은 자의 명예를 모독하는구나.”
파멸의 기사가 장검을 어깨에 걸친 채 되물었다.
【그러는 네놈은 명예를 아는가? 내 주인은 도시에 암약하던 흑마법사들을 소탕했으며, 무수한 희생자들을 양분 삼아 강림한 대악마를 무찌르고, 버려진 이들의 유해를 수습했다.】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딘 채, 이스라가 말을 이었다.
【누구보다도 뫼를렌푸르트에 부정할 수 없는 공을 세운 자이거늘, 어찌 부당한 트집을 일삼는 모략가의 사냥개가 본인 앞에서 명예를 논한단 말인가!】
불호령과 동시에 칼날이 튀어나갔다.
카앙!!
베르트람은 급히 크로스가드를 세워 가로막았다. 검에 실린 힘이 제법 묵직하다.
가까스로 밀어낸 베르트람이 대꾸했다.
“닥쳐라! 시체야! 네놈이 죽인 그라워볼프 공작의 천인장을 기억하느냐!”
장검이 이스라의 견갑을 긁고 지나갔다. 이 정돈 간지럽지도 않다.
피식 웃어넘긴 파멸의 기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리공의 부하를 말하는 건가? 글쎄. 본인이 벤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 잘 모르겠군.】
베르트람의 눈자위에서 불똥이 튀었다.
“본래 죽었어야 할 존재가 마땅한 필멸자의 섭리도 망각했으면서, 어찌 사자의 명예를 알까!”
이스라의 안광이 삐뚤어졌다.
“내가 똑똑히 알려주마! 블라인다프 가문의 울리히다! 내 누이의 아들이자, 자랑스런···”
어느새 단숨에 거리를 좁힌 파멸의 기사는 베르트람의 지척에 도달했다.
표범처럼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
베르트람은 황급히 반경에 들어온 이스라의 안면을 찌르려 했으나, 그녀는 동체 시력으로 어깨를 비틀어 검날을 피했다.
파멸의 기사는 칼날과 손잡이를 부여잡고 있었다.
터엉!!
백작의 견갑에 망치추와 같은 강맹한 일격이 들어갔다. 대번에 판갑이 축퇴할 정도였다.
휘청인 베르트람은 팔을 들어 칼날을 빗겨 세웠다.
사슬 찰랑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투구 너머, 연녹색 안광이 요사스럽게 넘실거린다. 명백한 조소에 백작이 이를 꽉 깨물었다.
콱!
그가 이스라를 힘껏 걷어찼지만, 파멸의 기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반대로 이스라가 힘을 실어 베르트람을 밀어냈다.
퍽!!
베르트람의 몸이 뒤로 쭉 빠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밀려나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황급히 몸을 일으킨 그가 칼날을 추켜올리며 응수했다.
나름 예리했던 찌르기.
그러나 이스라는 바닥을 쓸듯 가볍게 내질러 쳐냈다.
챙!
검을 쥐고 있던 손목이 시큰거린다.
눈을 부릅뜬 베르트람은 격통을 무릅쓰고 상대를 내려쳤다. 새까만 갑주를 훑고 지나가는 검로에 불꽃이 튀긴다.
검을 내지른 뒤에야 베르트람은 자신이 너무 힘을 실은 탓에 자세가 쏠려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스라는 장검으로 그의 머리를 올려쳤다.
터엉!!
베르트람의 시야가 하얘졌다.
이건, 인간의 힘이 아니다.
가히 오우거와 비견될 용력이 아닐까.
귓가에서 벌떼가 날갯짓하듯 윙윙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투구와 갑옷 사이에 서늘한 한기가 맞닿았다.
베르트람의 뒤를 점한 이스라가 속삭였다.
【사실 본인은 울리히 경을 기억하네.】
낫처럼 걸쳐진 검날을, 힘주어 당긴다.
콰직─.
파멸의 기사는 품에서 축 늘어진 베르트람을 내던졌다.
【베르트람이라고 했던가. 자네 역시 기억해 주지.】
어디까지나 도발이었을 뿐, 여태껏 베어냈던 자들이 최후에 지었던 표정, 단말마, 숨결마저 생생하게 기억한다.
자신의 생애마저 잊은 망자에게 타자의 죽음은 유달리 선명한 잔상을 새긴다.
무수한 상대가 죽는 걸 지켜봤다는 건, 곧 무수한 투쟁 속에서 자신은 살아남았음을 의미해서일까.
투쟁의 순간을 넘길 때마다, 이스라는 매번 자신이 살아있음을 체감한다.
우습게도 육신은 오래전 사망 선고를 받았음에도.
정강이받이에 핏자국을 닦아낸 이스라는 여유롭게 섰다.
결투장에 있던 모두가 호선을 그리는 안광을 목격했다.
【다음!】
망자의 광오한 외침에 열화와 같은 함성이 뒤따른다.
‘끝내주는군.’
투사는 관중들의 열렬한 호응을 한껏 만끽했다.
결투는 이제 서장이 시작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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