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7
017
이리공은 쫓기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쾨흘링 땅에서 보인 그의 기행을 설명할 수 없다.
당장 평원에서 토드와 카리나의 개입을 확인했음에도, 군대를 물리지 않는 것도 그러했다.
변경백이 수세에 몰린 김에 어떻게든 결착을 지으려고 공격을 준비하는 건 통상적인 제후간의 분쟁과는 양상이 매우 상이하다.
“보통 이쯤되면 협상을 요구하거나, 저명한 주교에게 중재를 요청하는게 일반적인 관례인데 말입니다.”
여태 사절이 한 번도 오간 적 없다고 한다.
이리공은 아예 변경백을 끝장낼 작정이다.
단순히 그의 핏줄 뿐만 아니라, 변경백의 기반이 되는 봉토와 신민들까지도.
분명 모종의 정치적 노림수가 엮여있는 건 틀림없었다.
다만 제국 내의 혼란스러운 정국에 대해선 토드도 문외한이었다.
그가 게임을 플레이할 때 큰 줄기가 되는 메인 스토리면 모를까, 한 줄도 등장하지 않는 뒷배경 캐릭터들의 정치적 이해관계까지 일일이 암기하진 않았으니.
“···역시 비박은 예나 지금이나 할 게 못되군요.”
낮게 중얼거린 토드가 망토 자락을 추슬렀다.
쾨흘링의 밤바람은 제법 쌀쌀했다.
“이제 9월 말엽인데 새벽에 서리가 내리다니. 참 고약한 동네입니다. 제가 돌아다녔던 남부의 땅은 대체로 날씨가 온난했던지라, 이런 곳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건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
“삶이란 참 경이롭지 않습니까? 어디서나 피어나고, 풍파를 견디며 자라납니다.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뿌리 뽑히는 것도 한순간이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자리를 다시 무성하게 채우더군요.”
“······.”
“지금 보니 아래턱이 발달하셨군요. 듣기론 멜다비어 주의 사람들은 수렵으로 생계를 이어간다던데, 먹거리가 부족하진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
“거긴 춥지 않으신가요? 저는 꽤 춥군요. 고향에 계속 계셨다면 지금쯤 따끈한 솥단지에 토끼나 멧비둘기를 끓이고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쪽이나 저나 이게 뭔 고생인지.”
“······.”
주절주절 떠드는 토드와 달리, 그의 말벗은 답이 없다.
“돌아가신 분들은 대개 과묵하더군요. 그래서 재미가 없습니다.”
토드 앞에 쓰러진 사내의 하반신은 진흙에 파묻혀 있었다. 눈살을 찌푸린 토드가 되물었다.
“혹시 저만 이렇게 떠드는 게 궁상맞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런데 제가 살아보니 입 꾹 다물고 있는 것보단, 저라도 어떻게든 소리를 내어 말을 하는게 낫더군요. 그렇지 않으면 죽은 자들이 말을 걸어오니까요.”
오래된 버릇이다. 예전같으면 이렇게 붙잡아놓고 1시간은 떠들어댈 수 있을 텐데, 최근들어 대화 할당량을 넉넉하게 채워서 그런지 내키진 않는다.
킁.
코를 벌름거린 토드가 미간을 좁혔다.
주변에서 흙냄새가 난다.
곧 비가 온다는 징조.
대포를 운용하기에 썩 좋은 날씨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카리나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받겠지만.
“적의 물자 이동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는데, 과연 오늘밤 이리공이 공성을 개시할까요?”
성채에 남은 변경백의 병력 중에 중상자를 제외하고 실질적으로 싸울수 있는 인원은 천명이 못된다.
이리공이 진정 바라는게 변경백의 완전한 파멸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절호의 기회다.
여기서 1시간만 더 기다려볼 생각이었다. 시체 구덩이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건 아무리 송장에 익숙해진 토드라고 하더라도 견디기 어려운 고역이었다.
오로지 풀벌레 우는 소리와 파리, 딱정벌레 따위의 요란한 날갯짓만이 들려오는 벌판.
부패해가는 것들의 합창 속에 미세한 소음이 끼어든다.
‘왔다.’
숨죽인 토드는 겨드랑이에 창을 끼워넣는 디테일을 잊지 않았다.
땅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커진다.
발맞춰 걷는 장병들의 장병기들이 절그럭대며 위협적으로 시위를 보낸다.
드워프 용병대가 끌고온 황소들이 우짖고, 그 뒤를 마차 여러 대가 뒤따랐다.
‘이번에는 포병 뒤에 마차로 벽을 세우겠다는건가? 철두철미하시군.’
다분히 토드를 의식한 움직임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토드가 누워있는 평원을 일부 병사들이 순찰했다.
코앞에서 횃불이 아른거리자 토드는 눈을 감았다.
“우웩, 냄새 한번 기가 막히네. 정말 시체가 일어났답니까?”
“나야 그때 예비대에 있었으니 모르지. 땅딸보 놈들이 직접 구울을 마주쳤다고 떠들던데.”
코를 부여잡은 병사가 창으로 시신을 찔렀다.
“그 자라다 만 놈들은 금화를 한푼이라도 뜯어낼 수 있으면 별 말도 안되는 걸로 트집을 잡는 족속들입죠. 제 불알을 걸고 그 새끼들 분명 구라치는게 분명합니다.”
“네 불알이래봐야 없어져봤자 싸구려 창녀들도 슬퍼하지 않을걸.”
창에 찔린 시신이 꿈틀거릴 때마다 송장 특유의 썩은 내가 물씬 올라왔다.
“제기랄, 그냥 여따가 불 질러놓고 다 태워버리면 안된답니까? 이것들이 송장인지, 허깨비인지 일일이 어떻게 다 확인하죠?”
“더크, 너 군대에 들어온 건 처음이랬나? 좋은 병사는 잘 싸우는 칼잡이가 아니라, 아가리 닥치고 시키는 거나 잘하는 종놈이라고. 그래야 봉급을 오래 타먹을 수 있는 거야.”
푹. 푹!
“경험담입니까?”
“연장자의 지혜라고 생각해라. 저쪽이나 확인해.”
푹-!
창이 토드 바로 옆에 있는 시신을 꿰뚫었다.
토드 역시 원체 안색이 창백한지라, 틈바구니에 누워있어도 위화감이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기가 막힌 위장 덕분에 병사가 그를 향해 창을 치켜들고 있었지만.
목덜미에 식은 땀이 흐른다.
그냥 한번 찔려줄까?
죽은 척하기에 일가견이 있는 토드였지만, 창에 꿰뚫리는건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잘하면 여기서 목걸이가 발동될 수도 있는데, 여기서 낭비하기엔 아까웠다.
그렇다고 들키면 작계가 수틀릴 지도 모른다.
찰나의 순간, 무수한 고민이 오가던 차였다.
뿌우우―···!
나팔 소리가 울려퍼지자 들판을 서성이던 병사들이 물러났다.
“퉤! 여기서 송장들 뒤적이느니, 차라리 앞에서 창대 붙잡고 있는게 낫지.”
발소리가 멀어지자 비로소 토드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어느새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사방에 만연한 습기가 무색하게, 요란한 뇌성이 울려퍼졌다.
슬그머니 구덩이를 빠져나온 토드는 연기에 휘감긴 성채를 응시했다.
낡은 성곽은 얼마 버티지 못할게 자명했다. 무슨 원리인지 몰라도, 포탄이 두들긴 자리에 거미줄처럼 새파란 균열이 번뜩인다.
금간 부위를 연이어 두들기니 화염과 함께 성벽 일부가 폭삭 내려앉았다.
20분 정도 버텼나. 유적지나 다름없던 내부를 감안하면 나름 분전이다.
곳곳에서 깃발이 치켜올라가고, 돌격 나팔이 시끄럽게 울렸다.
어떻게든 진입을 저지하려 화살을 쏘고, 돌을 떨궈보지만 방패를 세운 병사들은 빠르게 파고든다.
대포에서 피어오른 포연 때문에 시야가 잘 보이진 않았지만, 선두에서 이리공의 병력들이 돌파하고, 뒤따른 용병들이 난입해 뒤엉키는 양상이었다.
하지만 아직 모든 병력이 성채 안으로 들어간건 아니다. 여전히 절반 남짓한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다.
저들을 성채 안으로 더 끌어들여야 한다.
눈을 감은 토드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의식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왜곡된 촉각을 더듬어 자신과 계약으로 묶인 줄을 흔든다.
그리고 잠든 이를 부른다.
‘이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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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기사가 눈을 떴다.
공간의 제약을 넘어, 계약을 매개로 의념이 전해진다.
【이제야 날 불렀군! 사령술사! 이대로 여기서 썩어문드러지는 줄 알았다-!】
이스라의 음성은 불만으로 가득차 보였다.
‘성채 안에 이리공의 병력들이 들어와있습니다. 그들을···’
【모조리 섬멸하면 되나?! 역시 그럴 줄 알았네. 암. 흉악한 사령술사인 자네가 포로를 살려둘리 없지. 어차피 다 죽여도 살려내면 그만이니!】
아무래도 사령술사에 대한 이스라의 인식은 정정해줄 필요가 있어 보였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최대한 적들을 성채 내부로 유인하세요. 적들이 쏠리면 아군의 마법사가 주문을 사용할테니, 그땐 적절하게 빠지셔야 합니다.’
【유인을 하라고? 음, 알겠네! 어차피 본인은 무적이니, 요술쟁이더러 괘념치말고 씨부리라 전해주게!】
‘아뇨. 데스 나이트라고 하더라도 화염 주문에는―’
쾅-!!
굉음과 함께 관 뚜껑이 튕겨져나갔다.
벌떡 몸을 일으킨 이스라는 대번에 성채 내부의 전경을 훑어내렸다.
빗줄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젖은 군화가 찰박거리고, 날붙이들 부딪칠 때마다 섬광이 번뜩인다. 서로를 향해 쏟아내는 악다구니, 악의 가득한 저주.
그토록 갈망하던 전투다.
죽음의 기사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이리도 좋은 것이다.
투구 속 안광이 번뜩였다.
【하, 하하! 좋다, 좋아! 쓰러트릴 적이 아주 많군!】
무인이라면 자신의 몸에 민감하다.
이스라는 생전에 느껴본 적 없는 고양감이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장검을 뽑아든 기사는 곧장 내리막을 내달려 병사들이 뒤엉킨 곳으로 향했다.
어떻게 막아세울 틈도 없었다.
빽빽하게 장창이 밀집된 곳을 향해 이스라는 저돌적으로 몸을 내던졌다.
콰직-!
전차에 치인 것처럼 병사들이 우르르 쓰러진다.
이스라는 장검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바닥에 뒹구는 적병들을 쓸어넘겼다.
느닷없이 중무장한 기사가 난입해 무아지경으로 날뛰자 백부장들이 당황했다.
“저놈은 뭐야!”
“창대로 막아세워!”
어깨받이를 창날로 찔렀음에도, 이스라는 도리어 창대를 뺏어 병사를 끌어당겼다.
졸지에 끌려온 병사가 기사를 올려다봤다.
“아, 아아···!”
투구 속에서 연녹색 안광이 이글거린다.
영락없는 사신의 시선이다.
묵직한 건틀렛이 병사의 안면을 강타했다.
우직.
양동이처럼 구겨진 병사가 바닥을 뒹굴었다. 압도적인 무력의 투사에 거침없이 진입하던 병사들이 주춤댔다.
누군가 화살을 쏘아 투구를 맞추자, 안광이 휘번득댔다. 화살이 날아온 궤적을 좇은 이스라는 거리낌없이 발을 내디뎠다.
족히 열댓 명이 창으로 찌르고, 둔기로 두들겼다. 제아무리 판금을 걸쳤다고 하더라도 충격이 가기 마련인데, 비틀대는 기색도 없었다.
기어코 전열을 휘저은 이스라는 화살을 쏜 놈을 찾아내 등판에 칼을 꽂았다.
뽑아낸 칼날을 허공에 휘두르자 핏물이 세차게 튀긴다.
【여긴 순 잔챙이들 뿐이군! 내 이름을 높일 적수는 어디있는가-!】
이스라의 호령에 오히려 병사들이 뒷걸음질쳤다. 본능적으로 죽은 자가 흘리는 노호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불길해 보이는 흑색 갑옷.
피칠갑을 하고도 쓰러지지 않는 기사.
되살아난 시체들이 아군을 공격했다는 소문.
비록 사령술사들은 오래 전 사라졌으나, 여전히 그들이 남긴 종적과 주인 없이 배회하는 망자들의 모습은 여러 전승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니.
자연스레 필멸자들의 무의식은 낡은 전설로만 여겼던, 공포의 존재를 연상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죽음의 기사다···!”
번개가 번뜩인다. 장검을 치켜든 기사의 신형이 선명하게 저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마치 그들의 불운한 파멸을 예고하듯, 우레가 낮게 으르렁거린다.
무수한 전투를 겪은 고참병도,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칼잡이들도 뼈에 사무치는 한기를 느꼈다.
【잡졸이라도 이백 남짓을 잡으면 나름의 전공일테지.】
병사들의 틈바구니에서 이스라는 거침없었다. 기세가 어찌나 사나운지 변경백의 병력은 끼어들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가 이스라의 폭주에 제동을 걸었다.
카앙-!
칼날이 사납게 요동친다.
사선 너머의 상대를 마주한 죽음의 기사가 감탄을 흘렸다.
【오호.】
비로소 해볼 만한 적수로다!
칼날을 갈무리한 이스라가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사슬 조끼를 걸친 사내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검을 맞댄 것만으로 손목이 시큰거린다.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나는 디트마흐 공작의 천인장, 울리히요.”
죽음의 기사가 화답하듯 검을 다잡았다.
【본인은 이스라다. 영광스러운 결투가 되길 빌지, 울리히 경!】
신중하게 간격을 가늠하던 울리히는 눈썹을 찌푸렸다.
“당신을 본 적 있소. 분명 당신은 이틀 전··· 죽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섬광이 번뜩였다.
후웅-!
무시무시한 파공음과 더불어 칼날이 파고든다.
황급히 고개를 숙여 피한 울리히는 내리긋는 칼날을 빗겨냈다.
코앞에서 망자의 안광이 선명하게 아른거렸다.
【되살아났다. 무릇 무인으로서 무위를 떨치지 못하고, 무용하게 죽었기에! 심연으로부터 돌아왔지-!】
이스라는 발을 내디디며 울리히를 몰아붙였다.
몸놀림이 날쌔진 않지만, 힘이 세고, 저돌적이었다.
“그 꼴이 되어서도 싸우겠다는 건가? 슈테판은 그 정도의 충정을 바칠 만한 위인은 아니오!”
절대 육박전으로 붙으면 안된다. 끊임없이 붙으려는 이스라와 떨쳐내려는 울리히의 공방이 이어졌다.
【본인은 변경백을 섬기지 않네. 울리히 경. 전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향할 뿐!】
다소 투박한 이스라와 달리, 울리히는 교묘했다. 이스라가 제대로된 유효타를 넣지 못한 반면에 울리히는 갑옷이 보호해주지 못하는 부위를 지속적으로 타격했다.
그러나 죽음의 기사가 퍼붓는 맹공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점점 울리히가 눈에 띄게 밀리고 있었다.
급기야 칼날이 쓸고 지나간 자리 위로 사슬이 끊어지고, 핏줄기가 솟았다.
‘제기랄!’
비틀대던 울리히를 눈여겨보던 이스라는 어깨로 칼을 맞아줬다. 그리고 발을 걸었다.
정강이받이에 부딪친 발목이 꺾였다. 눈을 부릅뜬 울리히가 바닥에 뒹굴자, 이스라가 검을 치켜들었다.
텅!
돌연 화살이 이스라의 투구를 두들겼다. 방해를 받은 죽음의 기사가 분통을 터뜨렸다.
【감히! 명예로운 대결에 훼방을-】
기회다.
눈을 부릅뜬 울리히가 득달같이 파고들었다.
그가 마지막까지 숨겨둔 비장의 한수를 발휘할 때였다.
무인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검을 놓쳐서는 안된다.
뼈가 부러지는 고통 속에도 울리히가 쥐고 있던 칼날의 끝에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희미하게 번뜩였다.
청색 궤적이 이스라의 목에 파고든다.
꽈드득-!!
확실하게 꿰뚫었다.
칼날 너머 살갗을 파고드는 생생한 감각에 울리히는 승리를 직감했다.
15년 넘게 이리공의 무장으로서 무수한 적과 검을 맞댔지만, 이토록 무모한 상대는 처음이다.
아무리 강맹한 투사라 하더라도 본능적으로 자신의 안위를 신경쓰기 마련인데, 이 자는 거침이 없다.
마치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고 싸우는 것처럼.
그런 미련함 탓에 다시 죽음을 맞게 되었···
‘······?’
문득 울리히는 이유모를 불길함을 감지했다.
그가 검을 빼내려던 순간, 건틀렛이 울리히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훌륭하군. 철갑을 가르는 매서운 일격이었다. 마땅히 대가의 경지까지 한 발치 앞둔 전사답군.】
분명히 목을 찔렀다.
그럼에도 투구 속에서 경탄에 찬 음성이 울렸다.
망자는 성대로부터 말을 건네지 않는다. 보다 낮고,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울림이었다.
【허나 이것만으론 이제 날 죽일 수 없다.】
목에 박힌 칼날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린다.
울리히는 투구 너머의 안광을 마주했다.
녹색 안광은 명백히 휘어져 있었다.
【본인은 무적이다.】
“······이, 이. 사악한 괴물이.”
애석하게도 칼날에 맺혀있던 기운이 사그라든다.
전장을 누빈 천인장이 한계까지 쥐어짜낸 일격이었다.
목을 관통한 검을 더 밀어넣었지만, 죽음의 기사는 태연히 어깨를 들썩였다.
【자네를 기억하겠다. 울리히 경. 한 수 배웠네.】
이스라는 어느 때보다도 죽음의 기사가 된 것에 감사했다.
나약한 육신을 보전했더라면, 다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겠지.
계속해서 배우고, 싸울 수 있다.
그 사실을 몸소 체득하니 희열이 느껴졌다.
이스라는 상대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뿌드득.
목뼈가 부러진 울리히는 피거품을 흘리며 축 늘어졌다.
그를 놓아주자, 허수아비처럼 힘없이 바닥에 스러진다.
아아, 필멸자의 육신은 어찌나 나약한지.
상대는 노련한 투사였다.
평생을 수련하더라도, 이토록 허무하게 부서진단 말인가.
부질없도다.
이스라는 힘을 주어 자신의 목에 박힌 칼날을 뽑아냈다.
【좋은 검이군.】
이리저리 검을 둘러보던 죽음의 기사는 좀 전에 울리히가 보였던 자세와 호흡을 떠올렸다.
장검을 틀어쥔 손아귀에 힘을 주자, 청록색 기운이 희미하게 아른거리다가 흩어진다.
아쉽지만 아직은 성취가 미진한 모양이다.
어깨를 으쓱인 이스라의 머릿속에 다급한 상념이 울려퍼진다.
‘이스라, 방금 뭔짓을 한 겁니까? 갑자기 마력이 반절 이상···’
아하. 본인이 아닌, 주인 쪽의 힘을 빌려쓰는 식이었나!
이스라는 들뜬 어투로 되물었다.
【사령술사! 확인할 게 있네! 그대가 강해지면, 본인의 성취도 영향을 받나?】
‘예···.’
【그럼 반대로 본인의 성취가 그대의 경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건가?】
‘죽음의 기사가 거두는 영혼은 사령술사의 업이 되어 축적됩니다. 다만 방금 무슨 힘을 부렸는지 모르겠지만, 자중해주세요. 제 마력이 고갈되면 당신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이해하기 쉽군.
더 많이 죽일수록, 사령술사의 힘이 된다. 그럼 자연히 그가 부리는 자신도 강해진다.
고개를 치켜든 죽음의 기사가 눈앞의 적병을 응시했다.
망자는 생자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무수한 인간들의 영혼이 촛불처럼 흩날리는 듯했다.
빗속에서 가련하게 떨리는 불꽃들. 저들이 품은 공포와 두려움, 절망이 느껴진다.
마치 도축을 기다리는 가련한 가축들 같아 어엿브다.
저들을 거둬들이는 건 마땅히 본인의 몫일 테지.
피로 젖은 칼날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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