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8
018
쉴 새 없이 쌓이는 피의 업 때문에 토드의 눈이 돌아갔다.
대체 이스라가 무슨 짓을 벌이는지 여기서 확인할 길이 없지만, 바닥에 머무르던 업이 어느덧 천장까지 차올랐다.
그에 대한 반향으로 넉넉하게 남아있던 토드의 마력은 순식간에 줄어든다.
‘이러다 기절하겠어.’
황급히 의식을 침전한 토드는 축적된 업을 헤아렸다.
벌써 경지가 상승했다.
이번에도 3개의 대접이 놓여있었지만, 거두절미하고 마력 점유량과 관련된 보라색 대접을 받아들었다.
덕분에 여유가 생겼지만, 그럼에도 업이 쌓이는 속도는 여전히 심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통각을 느끼지 못하는 망자의 특성상, 자잘한 피해를 준다 한들 저들이 이스라를 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 대포를 쏴 맞히면 이스라도 산산이 조각나겠지만, 그걸 감안해 성채 내부로 적들을 끌어들인 상황.
이리공이라 하더라도 수하에 「소환물 거부」를 낭송할 마법사나 「장엄 구마」를 행사할 주교는 없을 테니.
죽음의 기사를 들이는데 다소 무리하긴 했지만, 이 정도면 빌드를 당겨 쓴 값은 톡톡히 메꿨다고 봐도 무방했다.
안에서 소동을 피우는 이스라를 인지했는지, 예비대로 남겨둔 병력이 줄줄이 성채로 들어간다.
슬슬 뒤를 교란할 때가 왔다.
품에서 향로를 꺼내든 토드는 단검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주먹을 쥐어, 뚜껑을 연 향로 위에 핏물을 짜낸다.
“피로 하여금 호명한다. 이름 없는 사자. 구천을 배회하는 길 잃은 혼백. 사망의 골짜기에 매몰된 몽중혼.”
낭송하는 와중에 토드는 낮고 긴 휘파람을 불었다.
흔히 노인들은 밤중이나 그늘진 곳에서 휘파람을 불지 말라 호통을 낸다. 뱀이 튀어나온다면서.
실은 휘파람이 뱀을 부르는 건 아니다.
다만 잠들어 있던 것들을 불러일으킬 뿐이지.
핏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불꽃이 점점 끈적하게 꿈틀거렸다. 흘러나온 불빛이 기어 나와, 천천히 토드의 팔을 휘감고 올라왔다.
휘파람을 멈추자, 어디선가 누군가의 작은 속삭임들이 들려왔다. 이에 토드는 품에서 방울을 꺼냈다. 흔들지 않은 방울이 절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딸랑, 딸랑. 딸랑!
청명한 방울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고, 가는 숨소리처럼 미약하던 소음이 점차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주 미세하게 조잘거리는 목소리. 벅차올라 흐느끼는 울음. 어미를 부르짖는 애절한 음성.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비명. 폐부에서 가래 끓는 소리. 이미 죽은 줄도 모르고 계속 살려달라고 비는 애원. 왜 나만 죽어야 하냐고 되묻는 원성.
하나하나가 평범한 영매라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사나운 영가들이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병사들은 대개 적개심이 강했다.
‘정신 차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입가에 피비린내가 감돌자 전신에서 흔들리던 마력을 겨우 가다듬었다.
사령술사가 고했다.
“연옥의 경계에서 잠 못 드는 그대를 내가 친히 일으켜 세우나니.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대를 괴롭게 하는 생전의 잔영으로부터 깨어나―”
이스라가 벌어오는 피의 업을 족족 사용하여 불러낸다.
다만 올가미를 씌우지 않고 풀어놓을 생각이기에, 일으키기만 하고 일일이 자신의 이름을 새기진 않았다.
“오롯이 일어서라. 무더기들이여.”
「무리소생」.
처음으로 시전해 본 광역 주문은 성공적이었다.
이지 없는 것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쳐든다.
되살아난 시체들의 숫자는 가뿐히 백을 넘었다.
【그으으···!】
사지를 비튼 망자들은 막연히 들판을 두리번거렸다. 저래선 전투가 끝날 때까지 헤매겠어.
어디, 저 굶주린 양들을 이끌 목자가 되어 보실까.
딸랑.
방울 소리에 망자들의 공허한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쏟아지는 시선에 토드도 간담이 서늘했다.
그대로 방울을 흔들며 벌판을 내려가자 망자들이 어기적거리며 뒤따랐다.
피리 부는 사나이의 심경이 이랬을까. 외줄을 타는 아슬아슬한 기분 같기도 하고.
꽁무니에 시체 떼를 대동한 채로 토드는 이리공의 후방을 향했다.
【으으, 으어!】
‘저기에 휩쓸리면 뼈도 못 추리겠는걸.’
망자가 앓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자 발걸음이 조금 빨라진 건 기분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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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에 대기하고 있던 용병 중 귀가 밝은 녀석이 중얼거렸다.
“방울 소리.”
“뭐?”
“방울 소리가 들린다.”
“성채에 틀어박힌 놈들 인생 종 치는 소리겠지. 어차피 알아서 다 죽을 텐데, 신경 꺼.”
“아냐. 이 멍청한 새끼야. 분명히 방울 소리가 들렸다고.”
“옘병을 하네. 웬 방울 소리? 아무리 우리 고용주가 이리공이라지만, 설마 목에다 방울을 매달고 다니시겠냐.”
인상을 찌푸린 용병이 몸을 비틀었다.
“어차피 다 이긴 싸움이야. 우린 괜히 나댈 필요 없이 여기 짱박혀서 돈이나 받으면 그만···”
딸랑···.
분명하게 들렸다.
즉각 도리깨를 움켜쥔 용병이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의 시야에 황급히 달려오는 인영이 보였다.
“뭐야, 너!”
대기하고 있던 사격수가 쇠뇌를 당기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 시체들입니다! 시체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뛰어오는 놈은 가죽조끼에 창을 들고 있었다. 숨이 찬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어설퍼 보였다.
인상을 구긴 용병이 냅다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 새끼, 여태 뭐하다가 그쪽에서 왜 뛰어와?”
“켁, 백인장님이 들판 쪽을 감시하라고 전해놔서, 여태 거기 있었습죠! 가, 갑자기 놈들이 일어났습니다요!”
변경후가 사령술사를 끌어들였다는 소문은 파다해서, 시신들이 널린 들판을 감시했다는 명령이 이상하진 않았다.
다만 저 녀석이 영락없이 미숙한 병사의 행세를 하고 있음에도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뒤에서 그를 유심히 살피던 용병이 물었다.
“그걸 누가 명했는데? 백인장 이름 대봐.”
“배, 백인장―”
더듬거린 얼뜨기가 말문을 잇기 전에,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크으으···!】
용병의 손아귀에 들려있던 병사가 펄쩍 뛰어올랐다.
“히익! 와, 왔다! 놈들이 왔어!”
하도 요란을 피워서 인상을 구긴 용병이 그를 내던졌다.
“아, 이 모자란 놈. 저 새끼 잘 봐둬!”
저 얼간이가 이리공 소속만 아니었어도 흠씬 두들겨 패줬을 텐데. 콧김을 흘린 용병이 자세를 다잡았다.
‘송장이 걸어 다닌다고 해봐야, 패 죽이면 그만이지.’
도리깨와 방패를 거머쥔 용병의 얼굴은 자신만만했다. 그는 여태 살인을 서슴지 않고 저지른 무법자였다.
범죄를 사면해준다는 이리공의 공언이 있어 분쟁에 참전했기에, 어차피 살아있는 놈이나 송장이나 어차피 골통을 부수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점차 사방에서 앓는 소리가 가까워지자, 용병의 얼굴이 하얘졌다.
“이런, 썅. 이게 뭐야.”
많다.
너무 많다.
어둠 속에서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형체가 아른거렸다.
“뭐이리, 시발! 많아!”
일선에서 부딪친 용병들은 할버드와 도리깨로 응수했다. 얻어맞은 망자들이 맥없이 나가떨어진다.
그나마 교전에 익숙한 용병들답게 분투했지만, 한 명당 거의 다섯 구 이상이 들러붙었다.
“아악!! 내 다리, 내 다리!! 떼줘, 떼어내!”
제아무리 방어구를 갖췄더라도 힘에 밀려 바닥에 쓰러지면 끝장이었다.
“씨발! 종 쳐! 종 치라고!”
다급한 외침에 물러나있던 녀석이 종을 울려댔지만, 오히려 망자들을 자극하는 계기였다.
용병들이 망자들과 뒤엉킨 틈을 타, 예의 풋내기 병사 행세를 하던 토드는 재빨리 안쪽으로 침투했다.
이리공의 군영 내부는 혼란스러웠다. 연신 울려 퍼지는 포성에 귀가 떨어질 지경인데, 후방에서 망자들이 일으키는 소란까지 겹치니 아수라장이었다.
사방에서 십인장들이 고함치고, 병사들이 정신없이 오갔다.
슬쩍 성채 쪽을 살펴보니 이스라의 활약 덕분에 꽤 많은 숫자가 쏠려 있었다. 거기다 후방에 망자들이 들이닥치자 예비대가 덩달아 그쪽으로 이동한다.
상대적으로 포병대 쪽의 인원에 공백이 발생한 상황.
비록 포대가 위치한 곳이 정확히 토드가 예상한 지점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근접했다.
한적한 곳에 몸을 웅크린 토드가 지면에 마력을 흘려보냈다.
“지금이다···!”
얕게 덮인 흙무더기 위로 백골만 남은 손이 솟아오른다.
몸을 일으킨 해골 병사 30구가 포격에 여념 없는 드워프들에게 접근했다.
질겁한 드워프들이 도끼와 망치를 들고 맞섰지만, 맨몸인 구울과 달리 이들은 무장이 단단했다.
장작을 패듯 팔다리를 찍어도 해골 병사들은 드워프를 몰아붙였다.
끝내 망자가 칼을 찔러넣자, 토드는 쾌재를 내질렀다.
드워프가 쓰러지자마자 즉각 마력을 불어넣어 봤지만, 땅딸보들의 몸뚱이는 꿈쩍도 안 했다.
‘역시 태생적으로 주문 저항력이 높아서 어림도 없나.’
그렇지 않아도 느려터진 망자들인데, 어차피 다리가 짧은 드워프들을 살려봤자 큰 전력이 되진 못할 거다.
다음 기회를 노려보자.
어쨌거나 해골 병사들의 난입으로 인해 보호를 받지 못한 드워프 포병들은 전부 사망했다.
그러나 아직 전황이 뒤집힌 건 아니다. 비록 망자들이 날뛰고 있어도 여전히 산발적인 소동에 불과했다.
일일이 육박전을 벌여 발생하는 사상자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적들을 완전히 패퇴시키려면 결정적인 피해가 필요했다.
지금으로선 카리나가 적절한 타이밍에 주문을 터뜨려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토드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무는 사이,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황급히 상자 뒤로 몸을 숨겼는데 사내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들판에 널린 시신들에 대하여 사후 경계를 하라 일렀거늘, 왜 아군의 후방이 공격받고 있는 건가!”
눈매가 사납게 치솟은 사내. 거리가 있었음에도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흉포한 기세가 느껴진다.
이리공 디트마흐였다.
“일전에 흑마법사가 일으켰던 시체가 채 서른 구가 되지 않았습니다. 설마 저리 많은 숫자를 부릴 거라곤 예상을···”
“변명은 필요 없네. 롤프! 남은 예비대를 투입하여 성채를 함락시키게!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켄젤슐리텐을 끝장내야 한다!”
“하오나 주군! 원체 성채의 규모가 작아서, 한 번에 투입할 수 있는 병사가 제한적입니다.”
눈을 부라린 이리공이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란 말인가. 놈을 다 잡은 마당에, 마탑의 적마법사로도 모자라 살아있는 시체들이라니!”
그의 곁에 있던 가신이 대꾸했다.
“주군, 대공이 우리를 속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분명 외부의 개입이 없을 거라 사전에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자가 임의로 분쟁에 개입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습니다.”
토드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대공? 개입?
예의 카리나가 언급했던 이리공의 후원자가 정체 모를 대공이란 말이지.
“허튼소리! 그는 전쟁을 앞두고 지지자들을 결집하고 있다. 나는 이미 그를 지지하기로 맹세했거늘, 뭐하러 대공이 우리의 분열을 꾀한단 말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저만한 힘을 지닌 흑마법사를 끌어들일 만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대공 의 수하에 사특한 자들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금지된 비술을 부리는 무리들이요!”
토드로선 실소를 금치 못할 내용이었다.
자신은 엄연히 이번 분쟁에서 갓 데뷔한 신인인데, 있지도 않은 경력을 멋대로 왜곡하고 있다.
그만큼 토드가 여태껏 행적을 철저히 감췄다는 방증이었고, 대공이라는 자의 슬하에 수상한 녀석들이 있다는 것도 중요한 정보였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나 외에 사령술사는 전멸한 거로 아는데.’
토드도 조금 궁금했다.
왜 사령술사는 이 땅에서 사라졌는지.
흑마법사들은 어떤 존재들이길래 사령술사와 더불어 뭉뚱그려 묶이는지.
아직은 내용이 너무 단편적이다.
토드가 최대한 유의 깊게 경청하려던 차였다.
성채 쪽에서 땅을 뒤흔드는 폭음이 울려 퍼졌다.
엄청난 소음에 토드는 황급히 귀를 틀어막았고, 이리공과 지휘관들도 비틀댔다.
겨우 고개를 들어보니 무너진 성곽에서 불기둥이 맴돌고 있었다.
성채 안에 진입했던 부대가 전부 전멸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이리공이 소리쳤다.
“마법사! 성곽에 서 있는 놈이 아닌가? 포병대는 뭣 하고 있는 게야!”
“각하! 시체들이 중앙의 아군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드워프 용병들이 속수무책으로―”
쐐애액!! 쾅!
뒤이어 불덩이가 성채 앞에 진을 친 이리공의 군세 위로 날아들었다.
비록 주문이 적중하는 위치가 정교하진 않았지만, 워낙 위력이 강해 휩쓸리는 범위가 넓었다.
그 와중에 발생한 사상자는 끊임없이 토드가 망자로 불러일으켰다.
전방에선 불덩이가 번뜩이고, 후방에선 죽은 자들이 아군을 교란한다.
분명 승리를 확신하고 진군했지만, 어느새 사방이 아비규환이었다.
당초에 드워프들의 대포로 마법사를 요격하는 계획이 토드의 개입으로 어그러진 시점에서,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부- 부- 부우-!
프론지 성채 내에서 나팔이 울려 퍼졌다.
성벽 뒤에서 쏘아 올려진 불덩이 3개가 이리공의 진영을 휩쓸고, 동시에 성문이 열린다.
선두에 켄젤슐리텐을 상징하는 황백기.
그리고 무장한 슈테판 변경백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탉의 볏처럼 붉은 깃을 단 투구가 인상적이었다.
“이리와 빌어먹어 태어난, 이, 개 같은 개새끼들아! 이 땅의 정당한 주인이 간다!!”
화통을 삶아먹은 듯한 변경백의 고함은 토드가 숨어있는 통 속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는 휘하의 직할 기사단을 이끌고 다짜고짜 돌격을 감행했다.
십인장들이 허둥대며 병사들을 독촉했다.
“사수, 사수!!”
급히 화약 주머니를 손바닥에 털고, 꼬질대를 꽂아 넣기도 전에 기병대가 전열을 돌파했다.
콰지직!!
변경백의 기병들이 전방을 휘젓는 사이, 성에서 농성하던 보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와중에 잿더미나 다름없는 시체들이 또 일어나고, 시체와 사람을 구분하다 못해 미쳐버린 병사들이 서로 찌르는 광경까지 벌어졌다.
분명 병력의 숫자는 여전히 이쪽이 우위였으나, 아군의 전의가 완전히 박살 난 게 문제였다.
가신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각하, 퇴각하셔야 합니다.”
눈을 치켜뜬 이리공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여길 빠져나간다. 더불어 대공에게 보낼 파발도 준비해라.”
다 잡은 사냥감을 놓쳤다는 게 아쉬웠는지, 연신 성채를 뒤돌아보던 이리공은 군마에 올라탔다.
사방에서 퇴각 나팔이 울려 퍼지고, 병사들은 기껏 싣고 온 공성 물자도 내던진 채로 달아났다.
‘이크, 나도 이제 빠져나가야겠는걸.’
슬슬 망자들이 여기까지 몰아닥치고 있었다.
어차피 맹목적으로 산 자를 적대하는 놈들이라, 걸리면 토드조차 뼈도 못 추린다.
이리공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내줘야 하는 게 아쉽지만, 사령술사는 마땅히 다수를 묶어놓을 만한 수단이 없다.
마력도 거의 바닥난 마당에 여기서 달아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상자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온 토드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다들 토드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뒤돌아 성채 쪽으로 빠지기만 하면,
“병사!”
토드가 우뚝 멈춰섰다.
고개를 돌아보니 핏물을 뒤집어쓴 부사관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네는 뭐 하고 있나? 후퇴 지점은 반대쪽이다.”
토드는 재빨리 특유의 어벙한 미소를 가장했다.
“아, 정신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응시하는 사내의 눈길이 번들거린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업의 손아귀」를 쓰기엔 남은 마력이 마땅치 않다. 이렇게 많은 망자를 살려볼 기회가 없었던지라, 너무 흥을 낸 탓이었다.
“병사. 이름과 소속을 대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급조한 답변을 둘러댔다.
“하워드, 2보병단 소속입니다.”
부사관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토드를 훑어보던 그가 낮게 속삭였다.
“그런 부대는 없어. 누구냐, 넌.”
뭐, 맞출 거라고 기대도 안 했다.
입맛을 다신 토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남부에선 먹혔는데. 동부 촌놈들은 편제가 조금 다른가 봅니다.”
토드는 겉으론 태연함을 가장했다.
무릇 사령술사란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해야만 하므로.
그는 의념을 통해 자신의 수족을 호출했다.
‘이스라!’
도움, 도움.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