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206
206
이 땅에서 괴롭고 고리타분한 것들은 위로부터 왔다.
질서, 정직함, 규칙, 약속, 의무.
반면 손아귀에서 녹아내릴 듯한 즐거움은 바닥에서 비롯되었으니.
혼란, 해이함, 탐미, 기만, 욕구.
결국 무저갱은 물질계의 탁류가 귀결되는 종착지이다. 거기서 탄생한 그룸다즈 역시 밑바닥에서 떠도는 소식을 불신했다.
‘누구보다도 허풍 떨기를 좋아하고, 혓바닥에 독과 속임수를 발라놓는 무저갱 놈들.’
지옥에 신뢰란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령술사가 인간치곤 썩 난 놈이라곤 하나, 동족들을 보이는 대로 잡아 죽인다는 악명은 과장된 게 틀림없노라고 생각했다.
성벽 아래 새까맣게 몰려온 무리를 보곤 부리부리한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시체들이라더니 제법 반듯하게 서 있는데?’
정교하게 늘어선 대형이 제법 빡빡하다.
이내 대략적인 무장을 가늠해본 그룸다즈가 낄낄거렸다.
─으하핫! 순 골동품들을 끌고 왔군!
군병들이 쥔 장창과 방패는 한눈에 봐도 둔중하고 낡아빠진 것들이었다. 당장 일주일 전에 인근 귀족들이 끌고 온 병사들도 돼지 도살하듯 잡아들였는데, 세월을 역행한 구닥다리들이 대거 몰려왔으니 우스울 수밖에 없었다.
─저 애잔한 미물들의 머리 위로 지옥불을 쏟아부어라.
그룸다즈의 명령에 사역마들이 무저갱에서 끌고 온 병기들을 앞세웠다. 묵직한 솥이 고꾸라질 때마다 찢어지는 비명과 동시에 뱀처럼 날름대는 화염이 반파된 성벽 아래로 쏟아졌다.
성채를 향해 거침없이 진군하던 집정관이 목청을 높인다.
【방패!!】
쿵-
땅바닥을 내려찍은 방패가 단단히 뿌리를 내린다. 지휘관의 호령에 맞춰 수백의 병사들이 순식간에 단단한 방벽을 구축했다.
붉은 쇳물이 방패를 녹이지 못하고 웅덩이를 이루는 모습에 그룸다즈의 눈자위가 휘둥그레졌다.
─용골···! 그걸 한 명도 아니고, 전부 무장시켰다고.
번들거리는 방패 위로 검붉은 광채가 아른거리는 것만으로 재질을 알아볼 수 있었다.
용의 분골이 섞인 장비들은 지옥의 겁화조차 거뜬히 견뎌냈다.
용암뿐만 아니라 온갖 주문 다발과 사역마들이 불똥을 던져댔음에도 방패벽이 차곡차곡 쌓인다. 연신 으르렁대던 사역마들이 용암을 타고 대형에 뛰어들자, 틈새에서 창이 튀어나온다.
콰직!
단숨에 목을 꿰뚫린 사역마는 맥빠지는 단말마를 흘리며 쓰러졌다. 대형을 흩트려 놓으려 제법 덩치 큰 녀석들이 뛰어내렸음에도 죄다 고깃덩어리로 분쇄되었다.
점점 망자들의 대형이 가까워지자 그룸다즈가 소리쳤다.
─재갈을 풀어라. 분쇄마들을 내보내!
가뜩이나 동족들의 피 냄새에 철창을 긁어대던 마수들은 구속구가 풀리자 즉각 주변의 흑마법사들부터 찢어발겼다.
‘저저, 들개 새끼들. 추종자들 영혼 하나하나가 아까운 마당에.’
온몸에 가시돌기가 돋아난 분쇄마들은 대악마들조차 통제하기 까다로운 짐승들이었다. 비교적 깊고 정제된 사념으로부터 조형된 악마들과 달리, 저들은 한층 탁하고 불안정한 표층에서 잉태된 부산물들.
그만큼 저열하나 호전성만은 무저갱에서 손꼽힐 정도다. 그룸다즈는 불길에 휩싸인 채찍을 휘두르며 놈들을 독촉했다.
─이 머저리들! 물어뜯을 것들은 여기보다 저 앞에 널려있다!
으르렁거리던 놈들은 눈을 까뒤집은 채 성벽 밖으로 몸을 날렸다. 전열 위로 떨어진 분쇄마들은 앞발을 내지르며 방패를 헤집었으나, 발톱이 통하질 않자 힘껏 몸을 부풀렸다.
콰콰콱!!
산탄처럼 비산하는 가시에 일부 용아병들이 견디지 못하고 부서진다. 곳곳에 발생한 균열을 틈타 분쇄마들이 파고들자 견고하던 대형이 점점 흔들렸다.
채찍을 거머쥔 그룸다즈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흘렸다.
‘흐흐, 저 쐐기는 증오의 대장간에서 주조한 철판조차 뚫어내지. 아무리 용의 뼈를 덧대봐야, 지상의 무른 쇠론 막는 것도 한계가···’
“전우의 뼈를 딛고 나아가라.”
으스러진 병사의 잔해가 다른 용아병에게 옮겨붙는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토드는 재차 용골 지팡이를 흔들었다.
“아직 쓰러트릴 적이 이토록 많은데, 어찌 눈을 감을쏘냐.”
파손된 두개골은 투구를 단단하게 감싸고, 늑골은 흉갑의 취약한 부위를 촘촘히 덧댄다. 토드의 호령에 따라 날아오른 척추뼈들은 등허리에 들러붙어 일체화된 외골격처럼 자리 잡았다.
활용하기엔 너무 파손된 뼛조각들은 날카롭게 벼려 단창과 스파타에 덧댄다.
용아병이 쓰러질수록, 남은 개체들은 더 강해진다. 잔잔하게 일렁이던 용아병들의 안광이 이글거리는 용암보다도 격렬하게 타올랐다.
속절없이 나가떨어지던 놈들이 돌변하여 달려드니 뒤집혔던 분쇄마들의 눈동자에 차츰 빛이 돌아왔다.
발톱을 휘둘러 쳐낸 분쇄마가 급히 가시를 쏟아냈다.
코앞에서 가시가 폭발했음에도 용아병은 방패를 들어 막는 대신, 장검을 쥐고 나아갔다.
전신을 보강한 골갑에 가시가 틀어박혔다. 그것만으론 용아병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노병의 검이 악마의 가슴팍을 가른다.
캬아악!!
핏물을 토해내며 발버둥 치던 분쇄마는 뒤이어 등판에 창이 꽂히자 비로소 침묵했다.
졸지에 백병전에서조차 밀린 분쇄마들이 하나둘씩 꼬치 신세로 전락한다.
이를 지켜보던 흑마법사들이 술렁였다.
“아무리 시체라도 어떻게 무저갱의 광견을?”
“평범한 인간이 아냐. 저 방패 문양을 보고도 모르겠어? 저건 고대 제국의 근위대라고!”
생명체의 부정적 사념을 양분 삼는 악마인 만큼 그룸다즈는 공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동요하지 마라. 저놈들은 둔중하다! 여기서 농성하면 어차피 성문을 넘지 못해!
그러나 사령술사가 거느린 하수인은 용아병에 그치지 않았다.
부우우-!!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나팔 소리와 함께 위태롭게 견디던 성곽이 무너졌다. 어느새 액상화된 토양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더니, 땅 밑에서 엑토플라즘들이 솟구쳤다.
느긋하게 진녹색 몸뚱이를 이완시킨 점액질 덩어리들은 주변의 흑마법사들과 사역마들을 덥석 삼켰다.
꿀꺽.
“꺄아아악!!”
눈앞에서 동료가 산 채로 소화되는 모습에 흑마법사들이 재빨리 낭송을 시도했으나.
부웅―!
그들의 머리는 미처 주문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바닥을 굴렀다. 느닷없이 까마득해지는 의식 속에서 흑마법사들이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는 호방한 광소였다.
【하, 하! 하. 요술쟁이들! 많이도 모였구나!】
장정에 필적하는 대검을 거둔 검은 기사는 성채에 득실거리는 무리를 보곤 안광을 번뜩였다.
【네놈들의 파멸께서 여기 왕림하셨다!】
대검이 폭풍우를 만난 풍차처럼 돌아간다. 필멸자가 쉽사리 당해내기 어려운 마수들이 맷돌 갈리듯 쓸려나가는 모습에 사역마들이 달아났다.
몇몇 눈먼 주문들이 이스라를 타격했으나, 그녀는 꿈쩍하지 않고 성채를 휘저었다.
“즉발 주문이 막힌다! 저주를 걸어!”
그마저도 뒤이은 빛무리에 저지되었다. 망자들을 이끌고 합세한 마르커스가 성검을 내비쳤다.
【이곳에선 모든 해악과 사술을 금하노라.】
애써 겹겹이 씌워놨던 저주가 단번에 씻겨나간다. 축복에 힘입은 파멸의 기사는 격앙된 어조로 거들었다.
【그렇다! 어림도~ 없노라! 암!】
덤덤히 마수를 베어 넘기던 마르커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경건한 기도문을 그렇게 경박하게 따라 하지 마라.】
당연하지만 파멸의 기사가 들어먹을 리 만무했다. 못마땅하긴 해도 마르커스의 착실한 보조 하에 이스라는 좌측 회랑을 온통 핏물로 물들였다.
대강 위협적인 흑마법사들이 정리되니 백골 근위병과 살점 거인, 심지어 유령들까지 성채에 난입했다.
선봉에 나선 용아병 부대는 상대의 이목을 끌기 위한 눈속임이었을 뿐.
적을 타격하는 주력은 이쪽이다.
사방에서 쏟아져나오는 망자들에 그룸다즈는 후일을 위해 애지중지하던 마수들을 죄다 풀어놓았다.
조련사라는 별칭답게 무저갱의 온갖 흉악한 짐승들은 토드의 중급 망자들과 제법 대등하게 맞붙었다.
‘충분히 밀어낼 수 있다! 내가 이놈들을 끌고 오려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데···!’
그러나 진귀한 짐승을 부리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 이내 성곽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뼈만 남은 용이 고고히 떠 있었다.
초월적 존재가 지상을 아우르는 시선에 거침없이 날뛰던 짐승들조차 뻣뻣하게 굳었다.
마수들을 훑어본 유해룡은 불쾌하다는 듯 안와를 구겼다.
─죄다 흉측하게 생겼노라. 무저갱의 존재들은 하나같이 아름답지 않아!
지글거리는 독기가 뼈대만 남은 입가에 응집된다. 일대의 공기가 뒤틀리고, 연녹빛 섬광이 번뜩였다.
─너흰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 죽어라.
구태여 숨결을 쏟아낼 가치조차 없다고 판단했다. 아즈트룽엔이 투명한 날개를 휘두르자, 느릿하게 번져나간 역풍이 마귀들을 휩쓸었다.
화로에서 달군 것처럼 벌겋게 익은 몸뚱이가 대번에 가라앉는다. 무저갱 태생의 존재들은 생전 느껴본 적 없는 한기에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갔다.
성채 위를 활공한 아즈트룽엔은 성벽에 설치되었던 병기들을 날려버리거나, 가뿐히 짓뭉갰다. 날개 달린 마수들이 저지하려 시도해도 꼬리치기에 얻어맞곤 산산조각나기 일쑤.
대응할 수 있는 모든 가짓수가 막혔다.
도무지 답이 없다.
─귀, 귀염둥이! 이리 온!
대악마의 애타는 부름에 고르곤은 나직이 투레질 쳤다. 직접 목에 걸린 인장을 떼어내자 황소를 닮은 마수는 불길 섞인 콧김을 뿜었다.
─일찍이 어디에서도 네 응시를 견딘 놈들은 없었지!
미약한 새끼였을 때부터 그룸다즈가 직접 키워낸 녀석이다. 노려보는 것만으로 상대방을 죽이는 권능은 무저갱의 저명한 투사들조차 두려워할 정도였다.
무저갱의 조련사로서 필생의 자부심이 담긴 역작이다. 이제 믿을 건 고르곤밖에 없었다.
흉흉한 기운을 뿌리며 기세 좋게 달려나가던 마수는 곧장 강적과 맞닥뜨렸다.
【멧돼지! 짱 큰 돼지다아!!】
살점 거인은 작은 눈을 반짝이며 고르곤을 훑어내렸다. 여태껏 쪼매난 놈들만 밟아 죽이다가 제법 비등한 개체를 마주치려니 괜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온통 피범벅이 된 얼굴로 히죽히죽 웃고 있으니 고르곤도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본능적으로 만만치 않은 놈이라는 걸 직감했는지 앞발로 지면을 긁은 마수는 보랏빛 눈동자를 부라렸다.
필사의 응시가 거체를 훑고 지나간다. 분명 즉시 쓰러졌어야 할 놈인데, 시선에 노출된 거인은 태연히 고르곤과 맞서고 있었다.
거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 눈을 이상하게 뜬다.】
─뭐야. 어떻게 서 있을 수 있는 거지?
고르곤이 힘껏 뿔을 들이받았으나, 두꺼운 살집만 출렁인다.
거인이 두툼한 햄주먹을 불끈 쥐었다.
【돼지! 덩치는 마음에 들지만, 너무 사납다!】
쾅!
바윗덩어리만 한 주먹이 마수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어찌나 힘이 강한지 황동으로 만들어진 몸체가 일부 구겨질 정도였다.
【사나운 동물은 때리면 착해진다! 그건 대작도 잘 알고 있다! 역시 대작은 똑똑하다!】
한눈에 봐도 어딘가 모자란 놈이라는 건 알겠다. 그런 놈한테 전설적인 마수가 복날 돼지처럼 두들겨 맞고 있었다. 심지어 외형상 돼지도 아닌데.
급기야 고르곤을 패대기친 살점 거인은 성벽에 깔아뭉개놓곤 뿔까지 뽑아버렸다.
애완동물의 처절한 비명에도 불구하고 그룸자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게··· 일개 필멸자가 부릴 수 있는 힘이라고?
물질계에 강림한 뒤 무너뜨린 성채만 다섯. 일주일 전엔 나름 공작이랍시고 뻗대던 놈의 군대는 분쇄마들의 먹이로 던져줄 정도였다.
놈과 관련된 소문들이 잉걸불 대의회가 내건 현상금을 독차지하기 위한 모략꾼들의 수작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미 죽은 자들을 또 죽일 순 없는 법이죠.”
유해룡의 등에서 내려온 이가 속삭였다. 눈자위를 번뜩인 그룸다즈는 그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지옥의 조련사라···. 그래서 수중에 별난 짐승들이 많았군요? 저도 이따금 희귀한 동물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답니다.”
토드는 유들유들한 미소를 흘렸다.
“어쩌면 우린 상호 간에 이해할 만한 여지가 있겠는데요?”
─인간이, 무저갱의 존재를 감히 이해한다고!
어차피 놈만 쳐 죽이면 권능에 속박된 하수인들도 무력화된다. 단번에 거리를 좁힐 요량으로 대악마가 날개를 펼쳤다.
그를 바라보던 토드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동시에 도약하려던 그룸다즈의 등 뒤에서 인영이 번뜩인다.
─······!!
날개가 부러지고, 어깨를 잇는 관절 부위가 죄다 끊어진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추락한 그룸다즈는 전신이 마비된 채 지면을 뒹굴었다.
다소 거칠게 착지한 대악마와 달리, 사뿐히 내려앉은 라노가 가볍게 샴쉬르를 갈무리했다.
“악마치곤 좀 약한 것 같은데?”
“저래 보여도 나름 90레벨짜리입니다. 저처럼 다수의 사역마를 다루는 종류라, 본신의 무력 자체는 약한 것 같기도 하고요.”
인상을 쓴 암살자는 검지로 송곳니를 걷어내곤 괜히 대악마의 뒤통수를 후려찼다.
“퉤, 아으. 이 자식들은 피에서도 계란 썩은 내가 나네. 좀 씻고 다녀! 털북숭이 새끼야!”
반대로 흡혈귀 특성까지 보유한 라노의 한 방이 꽤 강한 걸지도 모르겠다.
계집 따위에게 얻어맞는 수모에 그룸다즈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게 정녕 끝이라고 생각 마라! 사령술사! 이미 무저갱의 문은 열렸고, 나는 반드시 돌아와 네놈에게 진정 지옥을 보여주겠다!
“동포분들도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빙긋 웃은 토드는 대악마의 면전에 대고 넋의 거울을 흔들었다.
“다시는 지상에 마실 나오듯이 올 수 없도록, 한 번 반성의 방에서 참회의 시간을 가져봅시다.”
일렁이는 거울을 목격한 그룸다즈가 이를 갈았다.
─네 알량한 의식계에 날 가두겠다고! 날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난 무저갱의 조련사다! 필멸자 따위가 구축한 사념에 날 들여보내 주면 도리어 네 영혼이 조각날···
세계가 뒤집힌다.
어느새 그룸다즈의 의식은 외딴 세계에 도달해있었다.
급히 고개를 치켜든 대악마의 눈자위가 좌우로 요동쳤다.
‘여긴 뭐냐.’
물질계에서 사망한 악마는 무저갱으로 퇴출된다.
그래서인지 이런 생태를 이해하는 필멸자들 중엔 간혹 악마를 영영 잡아두겠답시고 설치는 놈들이 있다. 그들의 열등한 의식 체계론 정신적으로 우월한 존재들을 가둘만한 공간을 구현하지 못한다.
악마들은 무의식의 밑바닥으로부터 주조된 사념체. 제아무리 영적 세계를 관조한 영매나 사제라 하더라도 종래엔 타락하여 사념체들의 숙주나 꼭두각시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청명한 물단지라도 진득한 먹물 한 방울을 떨구면 어쩔 도리없이 혼탁해지는 것처럼.
‘이런 곳이··· 기저에 있을 수 있다고?’
그러나 한 방울만으론 바다를 물들일 수 없다.
그룸다즈는 심해에 떨어졌다.
정처 없이 공허한 모래사장을 거닐던 대악마는 뜻밖에도 익숙한 얼굴과 조우했다.
─그룸다즈! 지금만큼이나 네놈이 반가울 수 없구나!
계몽자 아볼루온. 일찍이 무저갱에서도 돌연변이와 기이한 권능으로 이름이 높은 대악마였다.
무저갱에서 마주쳤던 때의 위용이 무색할 정도로 으레 머리에 걸치고 다니던 황금관과 장신구들은 온데간데없고, 빵빵하던 주둥이는 바싹 곪아 있었다. 이건 악마가 아니라 웬 굶주린 똥파리가 따로 없었다.
놈은 감격한 표정으로 그룸다즈를 붙들고 늘어졌다.
─드디어 우리를 구하러 무저갱이 제대로 된 동포를 보냈는가!
그룸다즈가 되물었다.
─우리···?
그를 뒤흔든 아볼루온이 비명을 질렀다.
─비 내리는 임푸트레카도 여기 갇혀있다! 심지어 그 녀석은 기름이 많아 보인다며 내내 화로를 밝히는 장작으로 쓰였다고! 난 그렇게 지낼 수 없다. 빨리 날 여기서 내보내다오!
진정한 지옥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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