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42
042
노략꾼들과 밀수꾼, 해적, 부랑자들이 모여드는 거처. 판가우는 북부에서 제일가는 항만이었다.
소금기 가득한 갯벌 위에 세워진 도시가 토드 일행 앞에 그 위용을 드러낼 무렵, 창밖을 응시하던 야만전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좋아, 이쯤에서 마차를 세워줘.】
쇠렌이 그를 부축하며 인상을 벅벅 썼다.
“그냥 이렇게 된 거 고향까지 가지 그러쇼. 부득불 여기서 관짝에 들어가겠다니, 원.”
【닥쳐, 이놈아. 이 낯으론 죽어도 못 간다니깐.】
“이미 뒈진 마당에! 뭐, 가릴 게 있다고! 그놈의 똥고집은!”
야만전사의 덩치 탓에 옮기는 게 여의치 않아 보였다. 이스라가 오른편에서 그를 받쳐줬다.
적당히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을 찾다 보니, 마침 죽은 고목의 밑동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몸을 뉜 티르핑을 향해 이스라가 말했다.
【여기서 묻히기엔 그대의 실력이 다소 아깝군. 바르바로이.】
【흐, 진작 내 소임은 끝났소. 잠이나 자고 싶어.】
여전히 미련이 맺힌 자신과 달리, 홀연히 떠나려는 자의 심정이 어떤진 이스라는 아직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군.】
비틀대며 몸을 일으킨 티르핑은 제 손으로 삽을 집어 들었다. 묫자리를 퍼내는 손길이 힘차다.
【음, 적당히 축축하고, 따스하군. 한 달 내로 구더기들이 살은 다 파먹겠어.】
피에트와 토드가 합심하여 마차에서 관을 내렸다. 야만전사는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특별히 제일 큰 관을 준비했음에도, 남는 공간이 없었다.
낮게 신음하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쇠렌. 이해해달란 소리는 안 하마.】
“당연한 소릴. 쇠똥밭에 나자빠져도, 이승이 훨 낫지. 난 형님을 죽어도 납득할 수 없소.”
【때론, 죽은 것만도 못한 채, 연명하는 놈들도 많다. 마침표가, 이미 찍혔는데··· 그걸 굳이 이어나가는 것만큼 미련한 짓이 없어.】
쇠렌은 팔짱을 낀 채로 대꾸했다.
“잠이나 얼른 주무쇼. 언제 따라갈진 모르겠소. 내는 아직 창창하니까.”
【싹수없는 놈. 그래! 내 도끼나 내와 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도낏자루를 부러트리곤, 날에 썩은 피로 룬 문양을 그렸다.
【은행 2번 창구에 가서 이걸 보여주고, ‘바람까마구 대가리 뿔개졌다’라고 말해. 그럼 내 금고를 열어줄 거야.】
도끼날을 챙긴 쇠렌이 퉁명스럽게 굴었다.
“어으, 내 손발.”
【저저, 감수성 없는 놈 같으니라고. 네가 진정 스칼바냐르 사람 맞냐?】
“그놈의 아무 데나 시구 갖다 붙이는 버릇은 10살 때 졸업했소.”
【잘 났다, 이놈아.】
잡담은 그걸로 끝이었다. 뒤로 물러선 쇠렌은 슬며시 눈가를 훔쳤다.
관 앞에 선 사령술사가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티르핑. 그대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
히죽 웃은 야만전사는 손을 내저었다.
【후단께서 불멸의 투쟁을 약속하셨는데, 뭣 하러 마다하겠나. 난 이제 병들고 노쇠한 육신을 벗고, 전사들의 전당에서 다시 살아날 것이다.】
어깨를 들썩인 티르핑이 관뚜껑을 부여잡았다.
【이제 끝내줘. 이런 몸으로 사는 건 전사에게 형벌이다.】
“그대의 바람대로.”
토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선 산시아가 방울을 흔들었다. 방울 소리가 울릴 때마다 점차 야만전사의 눈에 맺힌 안광이 희미해졌다.
좌우로 흔들리던 방울이 멈췄다.
사령술사와 그의 제자가 관을 닫고, 그 위로 토양을 덮었다. 가지런히 손을 모은 산시아가 방울을 거두는 것으로 매장은 마무리되었다.
“젠장, 갈 길도 바빠죽겠는데. 이게 뭔 생고생이람. 어여들 갑시다!”
소매를 걷어붙인 쇠렌은 훌쩍 마차에 올라탔다. 마부석에 앉아있던 피에트가 조심스레 그의 안색을 살폈다.
“자네, 괜찮은가?”
“안 괜찮소.”
쇠렌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마차는 다시 덜컹거리며 나아간다.
야만전사가 품고 있던 눈물의 업이 반절가량 스며든다. 아마 나머지는 그의 유지가 전달되면 들어올 것이다.
대로에 접어들면서 다른 짐마차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판가우의 성문 앞에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물길이 삼각주 형태로 갈라지는 지형이 유독 눈에 익어 자세히 보니 여긴 북부에서 시작한 플레이어가 제국으로 들어올 때 거치는 관문이 틀림없었다.
그땐 판가우라는 이름도 없었다. 황량한 갯벌에 나루터만 덩그러니 있었는데, 이런 부두가 들어설 줄은 몰랐다.
토드는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창밖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이 일대가 이렇게 될 줄이야.’
바람에 실려 오는 생선 비린내가 짙다.
한겨울 초, 정오의 부둣가는 유달리 부산스러웠다. 판자를 덧댄 뗏목들이 오가고, 한계까지 짐을 실은 바지선이 위태로운 모양새로 나아갔다. 배들과 뗏목이 어찌나 바짝 붙어 있던지, 충돌 사고가 안 나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관문에 이르러 경비병들이 마차를 멈춰 세웠지만, 실상 검문은 핑계고 통행세 흥정을 위한 절차에 불과했다.
피에트가 요령 좋게 은화를 건네자, 경비병들은 마차 안을 들여다보는 시늉만 했다.
“통과.”
괜히 무법자들의 도시가 아니라는 건가. 대강 내부의 치안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안색과 옷차림을 살핀 토드가 코웃음 쳤다.
‘어째 부패하는 것들로 가득하다는 점에선 막상 크게 달라지진 않았네.’
대로 양옆의 하굿둑에서 시커먼 물이 쏟아지는 탓에 도로는 진흙탕이었고, 대충 쌓아 올린 지붕과 지저분한 오물에 변색된 회벽, 곰팡이 핀 좌판에 깔아놓은 생선에 파리가 꼬여 난장판이었다.
가뜩이나 먼지와 구정물로 가득한 길거리임에도 누구 하나 위생에 신경 쓰지 않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도시의 풍경은 토드의 마음에 쏙 들었다. 진흙탕에서 돼지와 주정뱅이가 동시에 뒹굴고 있는 꼬라지도 호감이었다.
“근처에 내가 아는 여관이 있소. 거기에 묵읍시다. 마침 마구간도 가까우니.”
“그러시죠.”
쇠렌의 제안에 따라 외진 골목길에 접어든 마차는 모퉁이의 마구간에서 멈춰섰다.
다소 경쾌한 걸음으로 내리는 토드와 달리, 산시아의 안색은 창백했다. 도시의 지나친 불결함에 그녀가 몸서리쳤다.
“이런 곳에 어떻게 사람이 사는 걸까요···.”
뒤이어 내린 이스라도 정평을 내렸다.
【음, 인간 하수구가 따로 없군.】
“어허, 그럴 수도 있죠. 현지인들이 상처받을 수 있으니, 둘 다 발언에 자중하세요.”
한편 마구간 지기에게 돈을 내고 나온 쇠렌이 투덜거렸다.
“말을 맡기는데 동화 열 닢이라니. 여긴 물가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소.”
“어차피 가급적 오늘 안에 스칼바냐르로 떠나는 배편을 잡을 텐데, 말을 맡겨두는 게 의미가 있겠습니까?”
“영영 거기 머무를 생각은 아니잖소. 언젠가 돌아와야지.”
그렇게 마구간을 빠져나온 토드 일행은 골목길의 온갖 군상과 마주쳤다.
거들먹거리며 시끄럽게 소리치는 왈패들, 누더기를 걸친 비렁뱅이들이 불구자 행세를 하며 무릎으로 기어 다닌다. 심지어 길거리에서 대놓고 호객행위를 하는 늙은 작부도 있었다.
그녀는 대뜸 쇠렌의 팔뚝을 부여잡고 아양을 부렸다.
“총각! 싸게 해줄게! 푹 쉬고 가!”
화들짝 놀란 쇠렌이 가뜩이나 험악한 인상을 구겼다.
“이런 씨팔, 밥맛 떨어지게! 썩 꺼져!”
어느 때보다도 쇠렌의 표정은 엄격하고 근엄했다. 이번엔 으슥한 곳에서 곱상한 청년들이 추파를 던졌다.
“형, 은화 두 닢, 어때요? 나 잘해.”
대번에 쇠렌의 입꼬리가 흐물흐물해진다.
“그래? 흠흠, 두 닢 정도면 괜찮은데···.”
토드는 실소를 흘렸다.
‘야만전사 출신이 아니라, 아라짓 전사였군.’
비위가 상했는지 인상을 구긴 피에트가 팔꿈치로 쇠렌을 후렸다.
정신을 차린 쇠렌이 외쳤다.
“미안하지만, 내가 지금은 바빠서! 나중에 보자고!”
유독 쇠렌에게만 음험한 마수가 미쳤는데, 저들이 보기에도 이런 향락을 즐길 만한 인상인 모양이었다.
모퉁이를 빠져나오자 쇠렌이 손을 들었다.
“저기야.”
입구부터 심상치 않았다.
‘독수리의 눈 여관.’
상호만 적힌 간판 위에 눈을 부릅뜬 독수리 박제가 강조된 형태였다. 독수리는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로 이쪽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름이 좀 불길한데요.”
쇠렌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오래 묵기엔 최악이지만, 하룻밤 정도면 여기만큼 싼 곳이 없지. 겸사겸사 배편도 구하고.”
확실히 주변에 사공으로 보이는 자들이 많아 보였다.
축축한 경첩을 밀어젖히니 곰팡이와 물때로 미끈거리는 바닥이 토드 일행을 맞이했다. 특히나 쇠구두를 신은 이스라는 균형을 잡느라 애를 먹었다.
널찍한 여관 내부는 사람으로 북적여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일행은 적당히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쇠렌이 히죽 웃었다.
“어때, 분위기 죽여주지 않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저 씨팔 새끼, 오크통에 묶어 던져버려!”
“강둑에 처박아라!”
주정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피범벅이 된 사내를 둘러업고 여관을 나갔다.
여관 중앙의 화로에는 묵직한 솥단지가 걸려있었는데, 뚜껑과 손잡이에 끓어 넘친 건더기들이 굳은 채 눌어붙어 있었다.
어깨를 으쓱인 토드가 답했다.
“좋군요.”
환경이 매우 비위생적이고, 주인장은 졸고 있는데, 종업원들은 팔에 해골 문신이 선명하고 불친절해요. 별점 다섯 개. 분위기 고증 만족스러움. 재방문 의향 있음.
일행을 둘러보던 쇠렌이 휙휙 손가락을 넘겼다.
“식사랑 마실 건 4인분으로 시키면 될라나. 그쪽 기사 나리는···.”
【본인은 괜찮네.】
“흠, 그. 아가씨는 술 좀 드쇼?”
“저는 물로 부탁해요.”
쇠렌이 카운터 쪽으로 주문을 하러 간 사이, 토드는 여관을 살폈다.
“독수리 부리는 왜 노랄까···.”
술에 취해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래! 이 갈대비룡의 뼈는 완벽하군! 그걸 내게 준다면 약속대로 대가를 지불하지!”
“이런 썅, 이런 쓰레기 주문서를 주겠다고? 지금 나랑 장난해?”
“아니, 진정하게! 일단 비전학에 통달하려면 이-글부터 봐야···”
저쪽도 그리 영양가는 없어 보였다. 다른 쪽에 감각을 기울인다.
“조만간 상인 조합에서 원정을 준비한다던데.”
“확실해?”
“저번에 징집관이 광장이랑 이발사 거리에서 사람을 모집하더라고.”
“듣기론 쾨흘링 쪽에 분쟁이 있다며? 거기로 보내려고 하나.”
“아냐. 뭐하러 제후들 싸움에 장사치들이 껴들겠어. 요즘 북부 야만인 놈들 동향이 심상치 않잖아. 보나 마나 반란 진압이겠지.”
“스칼바냐르로 가는 뱃길은 다 막혔을 텐데. 무슨 수로 병력을 보내겠대?”
“낸들 알겠냐. 알아서 하겠지. 여기 에일 2잔 더!”
뱃길이 막혔다고. 이건 영 좋지 못한 소식인데.
토드는 다른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에 소란이 있었는데, ······와 간부들까지 싸그리 뒤졌다.”
“······ 누가 ······를 건드려? 미쳐도······”
워낙 말소리가 작은 데다, 주변의 소음 탓에 청음이 쉽지 않다.
“···겠어. ······ 그년이지. 지부가 어제 철수를······”
놈들은 말하면서도 수시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때마침 종업원이 수레를 끌고 왔다. 커다란 접시에 요리들이 한꺼번에 담겨 사람마다 따로 퍼주는 식이었다.
“주문하신 저녁 정식 4개, 흑맥주 3잔, 미드 1잔이오.”
“아니, 이 양반이. 물로 달라니깐.”
그러자 종업원이 코웃음 쳤다.
“판가우에서 물을 마시겠다고? 내가 장담하지. 똥구녕 찢어지기 싫으면 그게 나을 거요.”
잔에선 뜨끈뜨끈한 김이 올라왔다. 쇠렌은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종업원의 손바닥에 동전을 쥐여줬다.
“미안하군, 아가씨. 아무래도 여기서 신선한 물은 구할 형편이 아닌가 보오.”
“···괜찮아요.”
그녀는 조금 조심스러운 눈치로 술잔을 감쌌는데, 쇠렌이 먼저 잔을 들어 올렸다.
“건배사는, 장의사 양반이 하시나?”
어깨를 으쓱인 토드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의 여정도 무탈하기를.”
4인의 잔이 부딪치고, 거품이 출렁인다. 숟가락을 집어 든 쇠렌이 입맛을 다셨다.
“무난해서 재미없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모여있던 놈들은 어느새 자리를 비운 뒤였다.
토드는 앞서 들었던 대화를 토대로 키워드들을 조합해나갔다.
소란, 간부, 전멸, 그년, 지부, 어저께, 철수.
대공과 적대적인 흑마법사 집단.
판가우 지하에 있다는 하수구 연맹의 지부.
‘한발 늦었나.’
이런 음험한 놈들은 토드 외에도 쫓는 자가 있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
누군가 먼저 들쑤신 이상, 저런 비밀 조직들의 특성상 놈들은 당분간 바짝 몸을 엎드릴 게 분명했다.
비록 흑맥주는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으나, 목을 축이기엔 충분했다.
“주변 얘기를 대강 들어보니 스칼바냐르로 가는 뱃길들이 막혔다고 하더군요.”
쇠렌도 인상을 구긴 채로 닭 뼈를 분질러놨다.
“나도 마침 비슷한 얘기를 듣고 온 참이오. 최근에 북부에서 벌어진 반란 때문에 교역로가 죄다 봉쇄되었다더군.”
“이번 봉쇄령이 얼마나 지속될까요.”
“글쎄. 사실상 기약이 없다고 봐야지 않겠소? 아무래도 여기서 꼼짝없이 발목이 묶이게 생겼어.”
토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으음, 여기서 너무 시간을 지체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그러자 수염을 훔친 피에트가 입을 열었다.
“자네들, 여기가 원래 밀수꾼들의 은신처였던 건 아나?”
“그게 뭔 상관이요. 영감. 교역로가 다 막힌 마당에 배가 뜨겠소?”
목소리를 낮춘 그가 엄지와 검지를 말아 보였다.
“아마 나루터 쪽에 가보면 웃돈을 받고 야밤에 출발하는 상선들이 있을 걸세. 다소 돌아가는 항로를 택하겠지만.”
“허! 그런 건 또 어디서 알아온 거요?”
“보따리장수를 하다 보면 원치 않아도 전해 듣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네.”
쇠렌은 영 마뜩잖은 눈치였다.
“북해는 어지간하면 공인된 바닷길로만 다니는 게 나을 텐데···.”
“그렇다고 봉쇄령이 언제 풀릴지 아나.”
“끙, 뭐 어차피 결정은 장의사 양반이 하는 거 아니겠소.”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보니 제법 걸쭉하다. 맛있어 보이는데, 여전히 미각을 느끼지 못해 슬플 따름이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짐을 풀고, 내일 저와 이스라는 장비들을 사 오겠습니다. 피에트 씨는 나루터에서 배편을 수소문해주시고, 쇠렌 씨는 산시아와 더불어 은행에 가서 예금 비치와 유산을···”
쿵!!
요란한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산시아가 탁자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어느새 잔은 깔끔하게 비운 뒤였다.
“···산시아?”
그녀의 등을 두들겨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미약하게 몸이 들썩이는 걸로 보아, 숨은 붙어 있다.
【아까부터 자꾸만 홀짝대더니, 본인이 말릴 새도 없었네.】
벌꿀주가 생각 외로 도수가 높다지만 고작 한 잔인데.
그 와중에 접시는 깔끔하게 비웠네.
별수 없이 곯아떨어진 산시아는 토드가 들쳐멨다.
“일단 오늘은 자리를 파하고, 내일 다시 의논해봅시다.”
주머니가 넉넉한 덕분에 일행들은 각자 독방을 받았다. 혹시 몰라 산시아의 옆방에는 이스라를 넣어놨다. 어차피 그녀는 밤새도록 양초불을 켜놓고 소설책이나 읽고 있을 테니.
아직 시간은 이른 저녁이었지만, 초겨울이라 밖은 캄캄했다. 분명 몸은 고단한데, 잠자리가 편안하니 오히려 잠이 오질 않는다.
그렇게 토드는 한참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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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선은 창해를 가르고 나아간다.
이틀가량 수소문한 끝에 겨우 빙하 해협을 우회하는 밀수선을 얻어탈 수 있었다.
무사히 승선까진 했는데 일행 중 두 명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산시아는 어젯밤 먹은 벌꿀주의 여파가 여전히 있다 치더라도, 이스라까지 난간을 부여잡고 있었다.
“이스라. 당신은 하등 영향받을 일이 없지 않았습니까?”
격전 속에서도 세차게 타오르던 안광은 위태롭게 깜빡이고 있었다.
【우욱, 자고로 기사라면··· 땅에 당당히 두 발을, 붙이고 있는 법이네······.】
죽음의 기사는 파도가 몰아칠 때마다 절규했다.
【그냥 걸어가면 될 것을, 왜 이런 수병, 물개! 해적 놈들이나 할 고생을 자처한단 말인가-!】
아무래도 정식 교역로가 아닌, 우회로인 탓에 물살이 유독 거칠다. 범선의 몸체가 한바탕 들썩이자 죽음의 기사는 몸을 미역 줄기처럼 흐느적댔다.
‘뱃멀미하는 데스 나이트라니. 참.’
“이스라. 지금 당신이 겪는 현상은 일종의 허상입니다. 이미 신체 기능이 정지된 이상, 어지럼증을 느낄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환상통과 원리는 비슷해 보인다. 이미 망자의 육신이지만 인식은 감각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착각해서 괴리감이 발생한 셈.
【정신력으로!! 극복, 커헉, 해보겠네······.】
토드가 혀를 찼다.
망자들이 흐르는 물을 건너지 못하지만, 죽음의 기사는 그런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상급 망자다.
어쩌면 생전에 바다와 그리 친숙하지 않은 지역의 태생이라,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걸지도 모르겠다.
“등이라도 두드려드릴까요?”
【아니··· 본인에겐, 후, 고독한 수양의··· 우욱! 시간이 필요할 듯하네···.】
추태를 보이기 싫은 모양이었다. 혼자 두라니, 토드는 자리를 피해줬다.
선실로 돌아가려는 차에, 입술이 파리하게 질린 산시아와 마주쳤다.
“···스승님.”
그녀가 낮게 속삭였다.
“이 배, 어딘가 이상해요.”
눈웃음친 토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탔을 때부터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습니까? 더 정진해야겠군요.”
제자는 한숨을 흘렸다.
“···알고 타셨군요.”
배를 모는 선원들에게서 하나같이 짙은 피의 업이 느껴진다.
아마 이 범선 자체는 비교적 최근에 강탈한 거겠지.
“저들이 언제쯤 속셈을 드러낼 거라 보시나요.”
마침 갑판 쪽에서 요란한 소음과 더불어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령술사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우리도 가봅시다.”
어차피 이만한 범선에선 마땅히 숨을 곳도 없다.
갑판으로 가보니 쇠렌과 피에트를 비롯해, 언제 끌려왔는지 이스라까지 중앙에 모여있었다.
단창을 꼬나쥔 선원이 그들을 향해 일갈했다.
“그쪽도 승객이야? 여기 오라고.”
산시아가 말없이 소매를 걷으려 하자, 토드가 만류했다.
“···조금만 기다려봅시다.”
아무래도 밀수선을 얻어타려는 승객들이 으레 그렇듯, 고압적으로 군다고 고분고분하게 굴 리 없었다.
점점 불만 섞인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키 뒤편의 선장실이 벌컥 열렸다.
당당히 걸어 나온 사내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팔뚝에 칭칭 감긴 회중시계들이 치렁치렁 흔들렸다.
“제군들. 이 순간, 우리는 0시를 기해 판가우의 해역을 벗어났음을 엄숙히 선언하노라!”
그는 양팔을 펼치더니, 갑판에 모인 이들을 향해 고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내 배에 승선한 이상, 이 가련한 영혼들의 운명은 내 손에 달려있다는 거지.”
“그게 뭔 개소리야!”
“간단해. 얌전히 몸값을 내고? 다음 항구에서 내리거나. 야만인들 일꾼이 되거나. 이 김에 다카우에서 평생 고깃배를 타거나.”
이들은 해적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배를 고른 피에트의 안목도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돌연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냥 얌전히 보내주는 게 나을 거다.”
그러자 선장이 과장된 투로 손을 내저었다.
“오? 그쪽은?”
그는 허리춤에서 빠르게 장검을 뽑아 들었다. 칼날에 맺힌 새파란 기운이 선명하게 갑판을 밝힌다.
“나는 벨피어 결사대의 일원이다. 이 검광이 보이나? 여기 있는 모두가 덤벼들어도 나 혼자 상대할 수 있다.”
검기를 방출하는 검객 정도라면 충분히 일리가 있다. 어차피 닿기도 전에 전부 베어버릴 테니.
“젊은 나이에 대단하신 실력이야. 그래서?”
“이들을 다음 선착장에서 순순히 보내라. 그렇지 않으···”
타앙!
청년 검사의 이마에 구멍이 뚫렸다. 그의 몸이 기울어지더니, 갑판에 고꾸라졌다.
담대하게 나선 것치곤 허무한 죽음.
어느새 선장의 손엔 정교하게 세공된 수발총이 연기를 흘린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승객들이 조용해졌다.
‘진짜 총을 들고 왔네.’
쾨흘링에서 봤던 조잡한 장총들보다 훨씬 진보된 형태였다. 화려한 외형으로 보아 특수한 공방에서나 취급할 만한 물건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런 해적 나부랭이가 손에 넣었는지 의문이었다.
선장은 총구에 바람을 불었다.
“저놈부터 치워.”
그의 턱짓에 선원들이 잽싸게 죽은 검객을 배 밖으로 집어 던졌다. 토드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자, 승객분들! 일단 주머니는 다 털고, 출신지와 쓸만한 재주가 있으면 읊어주시게! 우리가 알아서 적합한 곳에 보내줄 테니 앞으론 거기가 고향이 될 거야.”
이스라는 여전히 몸을 가누지 못했다. 토드도 뭔가 수작을 벌이기엔 권총의 격발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
‘이걸 어떻게 풀어보실까···.’
고민하는 사이, 선원들이 누군가를 끌고 왔다.
“선장! 창고에 웬 놈이 몰래 숨어들어 술을 처먹고 있었습니다!”
다소 체구가 육중한 사내는 누더기에 가까운 모피를 걸치고 있었는데, 연신 딸꾹질을 하느라 두툼한 턱살이 흔들렸다. 멀리서 봐도 술 냄새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를 살핀 선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뭐야, 이런 놈을 태운 기억은 없는 거 같은데?”
가만히 상황을 관망하던 토드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기이할 정도로 낯이 익다.
불어터진 곰처럼 생긴 사내가 히죽 웃었다.
“꺼억, 안녕하신가.”
그는 태연히 소매에 묻은 자국을 핥았다.
“얼굴도장도 찍었으니, 난 이제 들어가서 자면 되나? 머리가 깨질 것 같아서 말이야.”
즉각 선원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미친놈 같습니다! 선장, 어쩔까요?”
“쯧, 총알이 아깝군. 이놈이 술병을 몇 개나 축냈지?”
“상자 세 개가 털렸습니다.”
인상을 와락 구긴 선장은 혀를 찼다.
“괘씸죄로 사형. 목 긋고, 던져넣어.”
그러자 바닥에 얼굴을 문댄 채로 사내가 중얼거렸다.
“이거 섭섭한데. 언제부터 스칼바냐르 민심이 이리 팍팍해졌나?”
메서를 뽑아 든 선원들이 그에게 다가서는데, 돌연 사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곰 같은 힘이 내게 임한다.”
그는 맨손으로 선원의 팔을 뽑아버렸다.
허공에 핏물이 흩뿌려진 순간. 토드는 사내의 팔에 빼곡하게 새겨진 문신을 목격했다.
하르마 계열의 헥스.
이른바 변신술이다.
속도도 빠르고, 마력의 분배 역시 흠잡을데 없이 깔끔하다.
‘고수.’
그가 가볍게 선원의 따귀를 후려갈기자, 머리통이 갑판 아래로 떨어져 나갔다.
곧바로 거리를 벌린 선장이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굳센 고목의 껍질처럼 두텁게.”
콰직!!
턱에 부딪힌 납탄이 잘게 으스러져 튕긴다.
궤를 달리하는 초인들에겐 이마저도 장난감에 불과했다.
그가 다시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어느새 붉은 혈관들이 손가락에 감겨 있었다.
“뭐 이딴 개···”
쩍!!
여지없이 뺨을 올려붙이자, 선장의 안면이 뜯겨 나갔다. 다른 놈들이 붙기 전에 토드 역시 추가로 업의 손아귀를 낭송했다.
바닥에 튀긴 혈흔으로부터 힘줄들이 튀어나와 사내의 뒤에 접근하던 선원을 옭아맨다.
졸지에 걸려 넘어진 놈이 바닥에 뒹굴자, 사내가 가뿐히 등을 짓밟았다.
눈치를 살피던 쇠렌 역시 곁에 있던 선원의 턱을 올려붙이고는, 창대를 뺏어 들었다.
덩달아 분위기가 뒤집히자 다른 승객들도 일제히 가세해 해적들을 두들겨 팼다.
선상 난투극은 사내의 활약으로 곧장 종결되었다. 스치기만 해도 사지가 찢겨나가는 모습에 놈들은 전의를 잃었다.
그 와중에 이스라는 발을 질질 끌면서 난간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상황이 정리되자, 이마를 훔친 사내가 곧장 토드에게 걸어왔다.
“그쪽은 마법사요?”
상대방에게 축적된 업이 심상치 않다.
이 자는 토드가 아직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 존재다.
수상한 낌새가 보이는 즉시, 업의 손아귀로 사지를 묶고, 바닥에 널브러진 육편들로 가로막을 예정이었다.
토드는 바짝 긴장했다.
“변변찮은 재주가 있지만, 마법사라 칭할 정도로 거창하진 않습니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토드를 훑어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아까 고놈 방해한 거, 그쪽 솜씨 아뇨. 들키지 않도록 주문을 읊는 게 쉽진 않을 텐데. 도와줘서 고맙소.”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마지막까지 사자소생을 아낀 건 신의 한 수였다.
그와 별개로 피에서 일어나던 주문을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진 의문이었으나, 적어도 태도가 그리 적대적이진 않다.
만일의 사태까지 대비하면서 토드가 악수에 응했다.
“별말씀을.”
사내가 넉살좋게 웃었다.
“난 마드로라 하오. 마침 이 배가 스칼바냐르로 간다길래, 잽싸게 올라탔지.”
토드가 어색하게 웃었다.
왜 낯이 익나 했다.
아마 자신이 기억하던 모니터 속 외형에서 한 20년 정도 늙고, 살이 두둑하게 찐다면 지금의 모습이지 않을까.
“저는 장의사, 토드입니다.”
그의 소개에 마드로가 맞잡은 손을 두들겼다.
“장의사라고? 좋은 일 하시는구먼.”
『 ‘변절자’, 오드람: Lv.79 주술사. 』
토드는 식은땀을 흘렸다.
저 창이 상대에게도 보일까. 아니면 나한테만?
무슨 원리인지도 모르겠다.
이쪽의 정체를 들킨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쪽 이름은 마드로가 아니지 않습니까.
레벨이 79면 무슨 대비를 해도 의미없지 않나.
긴장감, 두려움, 의구심,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솟구쳤지만, 그중에서도 토드가 진정 묻고 싶은 내용이 불현듯 떠올랐다.
‘분명 만렙까지 찍었는데, 당신 왜 79렙따리야.’
토드의 입술이 비틀렸다.
자신의 과거, 아니.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를, 존재와의 조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