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55
055
‘기사다.’
스칼바냐르에 전사들이 있다면, 남부 놈들에겐 기사가 있다.
군장치곤 비교적 젊은 나이임에도 올비르가 이 자리까지 오른 것은 상대의 기량을 가늠하는 눈썰미 덕택이었다.
공성을 앞두고 저 투사가 굳이 내려온 건,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대한 방증일 터.
다만 제국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 올비르는 자신의 부관을 불러들였다.
“거니슨, 저자가 뭐라는 것이냐.”
“자신과 단둘이 대결하여 명예를 입증할 전사를 찾고 있습니다.”
“하! 명예?”
낄낄댄 올비르가 자신의 도끼를 어루만졌다.
“명예의 결투라···. 남쪽 놈치곤 뭘 좀 아는구나.”
덩달아 올비르의 진영도 술렁였다.
“결투를 원한다고?”
“남부인치곤 꽤 큰 검을 쓰는데. 강한 전사가 틀림없어.”
“아냐. 내가 제국 놈들을 잘 아는데, 그놈들은 괜히 갑옷이나 검을 그럴싸하게 꾸밀 줄만 알뿐, 싸움은 시원치 않아.”
공성을 앞두고 벌어진 상황에 전사들이 흥미를 보였다. 이런 분위기가 탐탁치않았는지, 주술사들이 올비르를 다그쳤다.
“올비르! 이럴 시간이 없네! 서둘러 공격을 진행하지 않고 뭘 꾸물대는가!”
“뭐하러 서두를 필요가 있나.”
“그 배신자가 깨어나면 모든 게 끝장이다!”
“적어도 나흘 안엔 회복할 수 없는 부상이라며. 설마 내가 그 안에 저 도시를 함락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뭐하러 우리가 저놈의 요청을 들어줄 필요가 있냔 말이야. 서둘러 전사들을 보내 목을 치고, 이 도시의 인간들을 모두 제물로 바쳐 다시 소환 의식을 행해야 하거늘!”
올비르가 혀를 찼다.
“점쟁이 놈들이란. 명예를 모르는군. 저 전사는 명예의 결투를 요청했다.”
도끼를 틀어쥔 올비르가 주술사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우리는 스칼바냐르의 전사다. 전사로서 명예를 증명할 기회는 절대 피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시간이 촉박한데 저놈들의 뻔히 보이는 수작에 어울려 주겠다고?”
“시끄럽다. 제깟 놈들이 수작을 부려봤자, 어차피 저 도시는 오늘 안에 함락된다. 시시한 싸움이 될 게 뻔한데, 이 정도 여흥은 있어야 재밌지.”
그러자 다른 주술사가 따지고 들었다.
“여흥이라니! 지금 우리가 어떤 숭고한 대의 하에 움직이는지 알면서, 그깟···”
후웅-!
어느새 도끼날이 주술사의 코앞에 놓여 있었다. 그를 향해 올비르가 속삭였다.
“점쟁이. 난 너희들이 제국에서 기어들어온 요술쟁이들과 협력하고 있다는 걸 뻔히 알아. 이번 공격이 오드람 그놈을 완전히 몰락시키기 위함이란 것도. 솔직히 네놈들이 우리의 땅에서 마귀들을 불러내는 것도 존나 마음에 안 들어.”
도끼날을 거둔 올비르는 콧김을 흘렸다.
“그럼에도 내가 구태여 네놈들과 어울려 준 건 피와 돈맛을 보기 위함이었다고. 내가 아니었다면 이만한 전사가 모였으리라 생각하나?”
그의 주변에 있는 전사들도 흉흉한 눈빛으로 주술사들을 쏘아봤다. 주술사들은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장담하지. 어차피 저놈 모가지까지 따주면, 성벽 위에 있는 놈들은 그나마 남은 저항 의지마저 꺾인다. 그럼 오늘 태양이 지기 전에 번제를 올릴 수 있을 거라고.”
“그럼 누가 저 전사와 싸웁니까?”
올비르가 도끼를 거머쥔 채로 히죽 웃었다.
“그냥 내가 나서지, 뭐. 우리 중에 나보다 강한 전사가 있던가?”
오만방자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전사들은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주술사가 극구 반대했다.
“안돼! 결투에 응하더라도, 올비르 자네가 나서서는 안 돼!”
“지금 내 힘을 의심하는가?”
“자네는 분명 강맹한 전사가 틀림없지만, 지금 자네는 전사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야! 그에 비하면 저놈은 아무런 자격도 없지 않나. 내가 한발 물러서서 전사들의 관습까진 존중하더라도, 적어도 자네는 자신의 지위에 걸맞은 책임과 처신을 보여야 해! 여기서까지 내 조언을 따르지 않겠다면, 우리는 물러나고 약속한 금화도 주지 않겠다.”
설령 기사가 여기서 쓰러지더라도 적은 사기가 꺾이는 정도지, 결정적이진 않을 거다. 반면 군장이 쓰러진다면 위험 부담이 지나쳤다.
올비르의 부관, 거니슨이 거들었다.
“지금은 그의 말이 맞습니다. 기껏해야 물고기를 낚는데 비늘 정도면 충분하지, 고래잡이 작살까지 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의 설득에 올비르는 김이 샌 듯, 혀를 찼다.
“젠장. 이래서 군장 자린 해 먹기 귀찮아서 싫었는데.”
가장 높은 자리에만 오르겠다는 일념 아래 살아왔는데, 오히려 올라와 보니 거추장스러운 것들만 늘어나는 기분이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작정인가! 스칼바냐르엔 순 겁쟁이들 뿐인가?!】
이스라의 외침은 따로 거니슨이 통역할 필요는 없었다. 대강 눈치껏 알아들은 전사들이 너도나도 나서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올비르! 내가 싸우겠소!”
“아냐! 나다! 어젯밤 꿈에 발키리가 나타나 내일 큰 영예가 있을 거라 하셨다!”
“지랄하네, 저새낀 순 뻥쟁이야! 날 보내줘! 올비르!”
신중하게 전사들을 돌아보던 올비르가 손을 들어 지목했다.
“스코리!”
그의 선택을 받지 못한 전사들이 탄식했다.
스코리는 올비르 못지않게 체격이 육중한 전사였다. 그는 망치와 방패를 쥐고 걸어 나왔다.
올비르가 그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놈들의 갑주는 날이 잘 들지 않지만, 네 망치라면 철판을 구부리고, 살을 뭉갤 수 있을 거다.”
스코리가 콧김을 흘렸다.
“뭉개버리고 오겠습니다!”
이스라 역시 스코리를 바라보다가 지면에 박힌 츠바이헨더를 뽑아냈다.
그녀는 티르핑과 대련을 거듭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스칼바냐르인들은 수백 년 동안 제국과 싸워왔다. 자연히 갑옷을 입은 상대로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도록 여러 전투 기술을 연마했지.’
티르핑은 과거 후스카를에 소속되었던 만큼, 단기간에 전수할 수 있는 내용을 가르쳤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몸싸움을 유도하자는 거다. 너희들의 검법은 상대와의 간격을 준수하지? 대체로 스칼바냐르인의 체격이 제국인보다 우수하므로, 바짝 붙어서 자세를 무너뜨리고 단검으로 틈새를 쑤시거나 둔기로 갑옷째 뭉개버리는 거지.’
망자가 되면서 오감은 무뎌졌지만, 산 자의 영혼이 타오르는 것만큼은 똑똑히 보였다.
이스라는 자신의 앞에 선 전사와 마주 봤다.
영혼의 불꽃이 세차게 타오르고 있다.
‘그래서 전사들은 단번에 거리를 좁히기 위해 다양한 자세를 연마한다. 어깨와 허리, 장딴지, 발의 위치만 보더라도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할 수 있지.’
스코리가 망치로 방패를 두들기며 위협을 가했다. 더불어 전사들 역시 함성을 지르며 호응했다.
“죽여버려! 스코리!”
“머리를 으깨!”
전사가 죽음의 기사를 향해 고함쳤다.
“나는 골통분쇄자 스코리다! 도나르께서 이 명예로운 전투를 주시하시길!”
이스라 역시 어깨에 칼날을 걸친 채로 대꾸했다.
【본인은 이스라다. 뭐라는 진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그대를 기억하겠네! 전사여!】
망치를 거둔 상대가 오른 다리를 뒤로 뺀다. 방패를 맨 왼손은 붙였는데, 망치를 쥔 오른손은 늘어트렸다.
‘웅크린 늑대 자세로군.’
티르핑이 평가한 바로는 순간적인 가속력은 우수하나, 무게 중심이 급격히 앞으로 쏠리는 경향이 강함.
이스라는 손잡이를 강하게 틀어쥐었다.
“붙을 생각인가! 사거리 차이가 있을 텐데?”
“어차피 선공은 방패로 막고, 손목이나 투구만 때려도 끝이다!”
지면을 박찬 스코리가 힘껏 뛰쳐나갔다.
흥분한 전사들의 외침이 극에 달했다.
콰직!
거짓말처럼 함성이 멎었다.
이스라가 대검을 거두자 방패와 더불어 스코리의 몸이 사선으로 갈라졌다.
한 합.
아니, 힘을 겨뤄보지도 못하고 전사는 허망하게 죽었다.
죽음의 기사는 당당하게 칼에 묻은 피를 뿌리곤, 다시 지면에 검날을 꽂았다.
사뭇 의연해 보이는 태도에 전사들의 눈이 벌게졌다.
토드의 머릿속에 이스라의 광소가 울려 퍼졌다.
【하, 하! 하. 보았나! 토드! 한 번에 베었네! 방패까지! 본인의 솜씨가 어떤가!!】
성벽 밑에선 말없이 무게를 잡고 있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오두방정을 떨고 있었다.
‘잘했습니다. 상대도 안 되는군요.’
【저들의 표정을 보게!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군!】
전사들의 술렁임이 거세지다가 사슴 가죽을 뒤집어쓴 이가 뛰쳐나왔다.
“난 올비르의 후스카를, 쓰로드 오베이그손이다!”
이스라가 반색하며 검날을 뽑아 들었다.
【오, 또 다른 도전자인가! 부디 그대는 더 오래 버텨줬으면 좋겠군!】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올비르가 거니슨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뭐라 지껄인 건가?”
“쓰로드더러 더 오래 버텨줬으면 한다는군요.”
“크하핫, 그래?”
입가를 씰룩인 올비르는 팔짱을 낀 채로 둘을 지켜봤다.
“아마 쓰로드도 버티지 못할 거다. 저 전사는 강해.”
“그럼 지금이라도 싸움을 물리는 게···.”
올비르가 눈을 번뜩였다.
“물리긴! 훌륭한 전사가 죽으면 도나르의 전당으로 간다. 이 또한 신께서 바라시는 일이지.”
둘의 대치가 이어지던 중에, 이번에 먼저 나선 건 이스라였다.
그녀가 달려들자 쓰로드는 자신이 쥐고 있던 창을 던졌다.
어깨에 얻어맞은 이스라의 몸이 휘청였지만, 돌진을 멈추진 않았다. 그녀가 내지른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후웅-!
놀랍게도 사슴 가죽을 눌러쓴 전사는 몸집치곤 기이할 정도의 날렵한 몸놀림을 보였다. 이스라도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놈이 거슬렸던지, 거칠게 검을 휘둘러댔지만, 동작이 원체 커서 그런지 잘 닿지 않는다.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아 든 쓰로드는 요리조리 칼날을 피하면서 연신 반격을 가했다.
그걸 지켜보던 토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민첩 바바라고?’
그래. 갑옷을 상대하기 위한 런들 대거까진 그렇다 치자. 무장은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쓸 수 있는 거니깐.
근데 야만전사를 골라놓고 민첩을 찍을 거면 그냥 암살자를 할 것이지, 왜 저렇게 효율 떨어지는 빌드를 쓴단 말인가?
이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넌 그냥 나가라.’
토드는 손에 끼고 있던 서리 반지를 쓸어내렸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칼날이 애꿎은 허공만 가르자, 쓰로드가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됐다. 오금 쪽에 있는 이음새가 상대적으로 헐렁하니, 한 번만 더 피해서 뒤를 점한다.’
이번엔 파고들어 무릎 뒤를 쑤신 다음, 곧바로 목을 딴다. 그렇게 생각하고 쓰로드가 발을 구르려던 차였다.
사가각···!
어느새인가 발목에 하얀 서리가 자라나 있었다. 땅바닥에서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발에 전사가 비명을 터뜨렸다.
“뭐!”
토드의 의념이 새어 들어온다.
‘이스라. 저자도 불사의 권능이 있습니다. 동작하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끝장내세요.’
죽음의 기사는 제 주인의 지시에 충실했다.
칼날에 녹색 휘광이 맺힌다.
수직으로 내리그은 칼날은 두개골부터 척추뼈까지 단숨에 찢어발기고 나와 땅바닥을 때렸다.
고개를 들어 올린 이스라는 짧게 침음을 흘렸다.
【흠.】
자신을 바라보는 무수한 전사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강렬한 적개심, 경악, 두려움 따위가 한데 어우러져 세차게 타오르고 있었다.
원래라면 미칠 듯 뛰어야 할 심장은 죽은 몸이라 그런지 고요하다.
비록 피는 차갑게 식었지만, 죽음의 기사는 여전히 투쟁을 갈구했다.
【본인을 상대할 자는 더 없는가!!】
앞줄에 있던 전사들은 이스라의 포효를 듣곤 무의식중에 뒷걸음질 쳤다.
그토록 시끄럽던 진영이 고요해진 가운데, 나직이 올비르가 손뼉을 쳤다.
“대단한 솜씨였다. 외지에서 온 전사여.”
그의 옆에 선 거니슨이 고스란히 말을 옮겼다.
“이제 네 진영으로 돌아가라. 네가 3번째로 상대할 투사는 내가 될 것이니.”
【그렇다면 여기서 붙을 것이지, 본인더러 왜 올라가라는 것이더냐!】
이스라의 말을 전해 들은 올비르가 호탕하게 웃었다.
“용맹하구나! 그랬다간 저기 있는 점쟁이 늙은이들이 성화를 부릴 게 뻔하니, 곧 있을 전투에서 너를 상대하겠노라.”
주술사들을 응시하던 이스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어딜 가도 요술쟁이들이 문제로군. 어쩔 수 없지.】
마술사 혐오로 기사와 전사가 공감대를 형성하는 순간이었다.
대검을 어깨에 걸친 이스라는 올비르를 향해 자신의 투구를 두들겨 보였다.
【자네, 투구가 꽤 마음에 드는군! 자네가 성벽 위로 기어 올라오면, 목은 내버리고, 투구는 본인이 취하겠네!】
거니슨이 번역을 하기도 전에, 올비르는 눈치껏 알아듣곤 곧바로 대꾸했다.
“나는 네 갑옷이 마음에 든다! 네가 쓰러지면, 그 갑옷은 내 궁전의 장식장에 걸어두마!”
올비르는 돌아가는 이스라를 순순히 보내줬다. 당연히 주술사들이 거세게 항의했지만, 올비르는 가차 없이 묵살했다.
성문이 내려앉고, 올비르가 턱을 까딱였다.
“전투 나팔을 불어라.”
부우우우―!
수천 명의 전사가 내지르는 함성에 솜털 하나하나가 곤두설 정도였다.
망루에서 지켜보던 토드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래 봤자 이놈들은 대포도 없어서 성벽을 무너뜨리진 못해. 야만전사들이 많다고 한들, 이만한 성벽을 넘으려면 적어도 1만은 끌고 왔어야지.’
그런데 숲 곳곳이 들썩이더니, 육중한 발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이 고꾸라지더니 족히 6m가 넘는 거구들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거인?’
당혹스러운 감정보다도 토드는 기억을 더듬는 데 집중했다.
‘분명 「살점 거인」 해금 조건이 대형 개체의 시체 확보였나?’
어보미네이션.
비교적 이른 중반부 시점에서 확보할 수 있는 대형 망자였다.
알아서 재료가 찾아와주네?
대번에 토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거인들이 집채만 한 바위를 하나둘씩 집어 들기 전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