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89
089
공포의 영향에서 벗어난 루카스의 대응은 신속했다. 즉각 거리를 벌린 흑마법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위협적인 주문을 쏟아부었다.
여태껏 토드와 벌였던 공방은 장난이었다는 듯, 발치에서 가시가 솟구치고, 코앞의 허공이 일그러진다.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일격이었지만, 그림 리퍼는 일일이 대응하지 않았다. 흑마법사의 주문은 사신의 옷자락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이따금 토드를 향해 주문이 튈 때만 낫을 휘둘러 응수할 뿐.
“하···!”
궁지에 몰린 루카스는 거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와라, 전부!”
요동치는 거울 너머로 쇠사슬을 잡아당긴다.
딸려 나온 사슬엔 넋을 잃은 표정의 혼령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그가 마력을 실어 흔들자 혼령들이 제각기 검, 철퇴, 지팡이 따위의 무기를 다잡았다.
혼령들은 목을 옥죄는 사슬에 괴로워하면서도 루카스의 명에 따라 그림 리퍼를 향해 내달렸다.
낫질 한 번.
토드는 육안으로 일련의 동작을 따라가지도 못하고, 그저 망토 자락이 펄럭이는 것만 목격했다.
푸르스름한 유령들의 목이 일거에 떨어지고, 형상이 점차 연기처럼 희미해졌다. 와해된 유령들의 잔재가 그림 리퍼의 손아귀에 빨려 들어가는 것만큼은 생생하게 보였다.
“이럴 순 없어! 난 아직 끌려갈 수 없다!”
마법사로 보이는 유령들이 그림 리퍼를 향해 주문을 낭송했다. 각 마탑을 순회하면서 희생자들을 모았는지, 다양한 학파의 주문들이었다.
불꽃이 일고, 끓어오른 쇳물이 하늘에서 쏟아지며, 발치에서 썩은 나뭇가지가 토드를 노리고 자라난다.
그림 리퍼는 그들을 향해 손을 올렸다.
【쉿···.】
주문이 모두 취소되었다. 시끄럽게 떠벌리던 마법사 혼령들은 입을 다물었다.
【정숙. 이곳은 영가들이 지나가는 길임.】
낭송이 끊긴 반향은 고스란히 시전자와 그들을 사역하는 주인에게로 돌아간다.
―아, 아아!!
―마침내. 해방이다···.
유령들은 고통에 찬 비명을 쏟아내면서도 희열이 섞인 한마디를 남겼다.
루카스가 쥐고 있던 사슬은 끊어졌다.
덩달아 바닥에 엎드린 흑마법사도 각혈을 해댔다.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 된 루카스가 토드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부른 거지? 한 줌짜리 마력에. 마땅한 수사도 없는 낭송문도 곁들이지 않고, 고작. 휘파람 따위로.”
사신이 그를 향해 낫을 잡아끌었다.
【이리로 올 것.】
루카스에겐 대항할 마력이 더 이상 없었다. 무형의 기운에 끌려온 흑마법사는 어느새 낫 밑에 머리가 놓여 있었다.
허공에서 두루마리를 펼친 그림 리퍼가 속삭였다.
【인간 루카스. 죄목··· 헤아릴 수 없이 많음. 변론의 여지 없음.】
낫에 놓인 그가 소리쳤다.
“나보다 더한 놈들도 더 있어! 왜 하필 나냐! 아직도 연구할 게 널려있고, 마무리 짓지 못한 일지들이 산더미 같이 남아있는데···!”
그 대목에선 토드가 흥미를 느꼈다.
“잠시. 일지를 기록하셨다고요?”
“그래! 나, 나는 살면서 무수한 흑마술과 실전된 유물, 마법 지식들에 대한 저서를 기록해왔다!”
혹시라도 살아날 수 있겠다는 희망을 본 걸까. 루카스는 눈이 돌아간 채로 황급히 덧붙였다.
“거기엔 넋의 거울을 포함해 흑색 학파와 관련된 지식도 여럿 있지. 사령술의 기원에 대해 궁금하지 않나? 태초의 사령술사는 어떤 힘을 부렸던지도? 죽은 용을 되살려 하수인으로 일으키는 방법은?”
“그건 좀 솔깃하군요.”
루카스가 입꼬리를 찢으며 사정했다.
“그렇지! 누구보다도 자네라면 탐낼 법한 지식들이야! 나, 날 살려주게. 자비를 베풀어 주게!!”
토드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로 대꾸했다.
“당신이 기록한 일지들은 제가 잘 챙겨가겠습니다. 흑색 학파의 복원에 중요한 참고 자료들이 되겠군요.”
돌연 낫의 무게가 루카스를 짓누른다.
“하지만 그게 당신을 살려둬야 할 이유가 됩니까?”
“내, 내가 아니라면 누구도 그걸 이해할 수 없어. 나만큼이나 이 분야를 연구한 학자도 없다고. 자네는 나를 꼭 살려야 하네.”
“글쎄요. 딱히 당신이 필요할 것 같진 않군요. 저는 흑색 학파의 구성원입니다. 직접적으로 연관된 당사자가 있는데, 어찌 학파의 외인보다 이해력이 떨어지겠습니까? 실전된 지식이었다 하더라도, 읽어보면 금방 알겠죠.”
낫에 스며든 한기가 살갗에 저며든다.
무수한 영혼들을 거둬온 날이 목 위에 있었다.
“제발! 제발! 솔직히 말하겠네! 난 사령술을 선망했어! 흑마법사는 악마들에게 영혼을 저당 잡혀 경지를 올릴 뿐이야! 나는 그런 세태를 경멸했고, 사후 세계와 필멸자들에게 금지된 지식, 당신들이 치르던 비밀 의식이 궁금했어!”
사령술사를 선망하는 흑마법사라.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 수명을 바쳐서 연구에 전념하더라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네. 당연히 내가 치른 죄는 알아! 안다고!”
사신의 낫 밑에서 저렇게 지껄이는 것도 나름 배짱이다.
“난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아. 날 살려주게. 날 살려준다면 자네를 스승으로 모시겠네! 내가 가진 지식과 힘을 모두 나누고,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겠소! 제발, 제발···.”
나름 메아리의 추종자들이라는 단체의 수장임에도, 저렇게 목숨을 애원하다니. 토드는 그를 추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간절함이야말로 인간다운 속성이지.
사령술사가 물었다.
“루카스. 몇 살인가?”
“뭐···?”
“그 비루한 삶을 잇기 위해 얼마나 몸뚱이를 갈아치워 왔냐고 묻는 걸세.”
토드는 일그러진 노인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그는 주름진 볼을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죽음은 결코 가볍지 않네. 루카스. 계약으로 속박하여 망자들을 일으키는 사령술사조차, 죽음을 피할 수 없지.”
“하지만 당신들도 백골화하여 죽음을 거스르는 방법을 얼마든지···”
“학파의 뜻이나 필요에 따라 유예할 수는 있지. 그러나 영영 이 땅에 머물러서는 안 돼. 그런 자들은 마땅히 솎아내야만 한다네. 적어도 내가 흑색 학파를 이끄는 이상, 죽음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는 자들은 묵인될 수 없어.”
녹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일렁였다.
“내가 보기에 너는 단순히 지식욕에만 매몰되어 있지, 사령술사가 져야 하는 무게나 책임, 규율 따위를 준수할 것처럼 보이진 않아.”
경멸어린 빛으로 루카스를 내다보던 토드는 그의 코를 두드리며 히죽였다.
“아무리 오래 살더라도, 아이와 다르지 않지. 언제까지고 투정만 부릴 줄 아는.”
“안돼···!”
“그대가 진 죄업을 받아들여라. 루카스.”
“왜 하필 나란 말이오?! 다른 놈들도 많소! 흑마법사들! 부정한 술수로 수명을 연명한 자들은 얼마든지 널렸다오! 그들의 이름과 위치를 불 테니, 날 살려주시오!”
“걱정 마시게. 차차 그들도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야. 흑색 학파가 돌아온 이상, 생과 사의 질서를 어지럽힌 자들은 모조리 단죄할 테니.”
품에서 단검을 꺼내든 토드가 읊조렸다.
“순번이 먼저인 건, 하필 이 도시에 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차 흑색 학파는 판가우를 거점 삼아, 세력을 확대해나갈 거다. 그대가 남긴 지식은 내가 요긴하게 사용하겠네.”
콰직.
“끄, 그르르끄극···!”
피거품을 문 흑마법사의 몸이 요동친다. 사령술사는 무심하게 그의 최후를 관찰했다.
핏발선 눈동자에 토드를 향한 증오가 가득했다. 저주라도 남길 작정이었는지, 입을 우물거리던 루카스는 사령술사의 눈동자를 마주 봤다.
“끄아각···.”
깊게 가라앉은 동공 너머. 유유히 실을 자아내는 손가락들이 보인다. 헤아릴 수 없는 심연 아래로. 그녀가 루카스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격렬하게 끓어오르던 흑마법사의 동공이 멎었다.
토드가 몸을 일으키자 그림 리퍼는 낫을 휘둘렀다. 그는 잘려나간 머리통을 들고는 만족스러운 투로 중얼거렸다.
【수확. 알참.】
“그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죄의 무게··· 무거움. 심연에서··· 24가지 형벌 대기 중···. 수감 기간, 5세기 이상 예상됨.】
토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 다들 숙제는 미루지 말고, 진작에 해둘 것이지. 마냥 미뤄둔다고 능사가 아닌데, 왜 그러고 사는지들 모르겠다니까요.”
【동감함.】
그림 리퍼는 토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 대가. 지불의 시간임.】
그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토드의 목에서 목걸이가 끌려 나왔다.
훙-.
대뜸 낫이 스치고 지나간다. 몸을 뚫고 사라지는 모습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겨우참았다.
그 뒤론 아무런 변화가 없어, 이게 끝인가 싶었던 순간이었다.
“쿨럭.”
돌연 기침이 나와 입가를 훔쳐보니 핏자국이 묻어났다. 영혼 목걸이에 맺혀있던 빛도 어느새 꺼져 있었다.
‘여분의 목숨을 이렇게 거둬가시는군.’
그림 리퍼는 낫에 걸린 빛을 걷어내고는, 얼굴 쪽의 뚫린 부분으로 빨아들였다.
“그나저나 지상에 저런 자들이 넘쳐나는데, 어찌 명계에선 직접 전령들을 파견하지 않고, 제가 일일이 잡아들여야 하는 겁니까?”
그림 리퍼는 음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명계··· 상시 과잉 업무.】
토드는 주변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여긴 온통 한가해 보이는데요? 어디에 일이 많다는 겁니까?”
그러자 그림 리퍼는 낫을 치켜들어 허공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사아악···!
온통 회색, 청색으로 창백하던 명계의 일면이 찢어지고, 저 너머의 세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명계는 물질 법칙을 초월한 공간이었다.
토드와 루카스가 있던 곳은 단순히 지나가는 통로에 불과한 벌판.
【흉물들. 이곳을 통로로 이용함.】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악마들이 명계의 피조물들과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토드가 일전에 마주쳤던 놈과 엇비슷한 놈들부터, 생전 본 적 없는 형태의 기이한 존재들.
그림 리퍼는 손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지상의 영향. 우리는 개입하기 어려움.】
“흑마법사들이 준동하면서 지상으로 나오려는 악마들이 많아진 탓입니까?”
【복합적 원인. 전쟁. 혼란. 기근. 창궐.】
보는 것만으로도 토드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잠시 엿봤을 뿐인데, 그 사이 틈새를 눈치챈 일부 존재들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림 리퍼는 낫으로 찢어진 일면을 엮어 다시 덮어버렸다.
【사령술사. 약함. 정진할 것.】
“노력 중에 있습니다. 그래도 전보단 나아지지 않았습니까?”
그림 리퍼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부족함.】
“기준치가 꽤 높으시군요.”
낫을 거둔 그림 리퍼의 곁에 어느새 앙상한 말 한 필이 서 있었다. 이제 떠날 작정인지 미끄러지듯 올라탄 그림 리퍼는 말머리를 돌렸다.
“가시기 전에 잠깐! 여기서 어떻게 나가야 합니까?”
그림 리퍼는 돌아보지도 않고 거울을 가리켰다. 토드가 거울을 확인하던 사이, 사신은 홀연히 사라진 뒤였다.
“어지간히 바쁘긴 한가 보네.”
과잉 업무라고 할 정도라면야. 하긴, 그만한 숫자의 악마들이 우글거리고 있는데.
막상 떠나려고 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토드가 느끼기에 여긴 안락한 공간이었다.
적당히 조용하고, 나름의 정취도 있다.
‘이만한 곳도 없는데.’
루카스도 영멸한 이상, 이제 넋의 거울도 자신의 소유다. 아직 구체적인 사용법은 잘 모르지만, 아마 자유롭게 명계로 왕래하려면 숙련이 필요할 거다.
토드는 일렁이는 거울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거울 저편에 흑마법사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는 일행의 모습이 보였다.
‘이크. 남은 잔당들이 돌아왔구나.’
아마 명계에서 일으키는 망자들은 물질계로 데려가지 못할 확률이 높다. 업도, 염원도 없는 잔재들을 끌고 가봤자 형상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마력을 조금 채우긴 했어도, 딱히 전력에 도움이 되진 않는다. 이대로 나가봤자 일행에겐 지켜야 할 짐만 하나 더 생기는 셈.
휘오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토드의 망토 자락이 휘날렸다. 몸에 한기가 스며들지만, 도리어 기분 좋은 서늘함이었다.
‘돌이켜보면 루카스는 사령술사들도 명계의 기운을 견디지 못했다고 했었지.’
이유는 자기도 모른다. 플레이어라? 흑색 학파의 수장 특전인가?
어쨌거나 여기서 불어오는 기운을 담아서 가져갈 수만 있어도 바깥 존재들에겐 치명적인 유해 물질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예전에 콜롬비아였던가. 거기서 자기 동네 공기를 담아서 팔았던 사람도 있었다잖아.’
그렇다면 명계의 공기는 어떻게 담아가야 할까. 수중을 탈탈 털어본 토드의 눈에 향로가 들어왔다.
가만히 향로의 뚜껑을 여닫기를 반복하던 토드는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일으켰다.
그러곤 허공에 대고 향로를 대강 휙휙, 휘둘러대곤 급히 뚜껑을 닫았다.
‘제대로 담긴 건진 모르겠지만.’
슬슬 저쪽에 모인 놈들이 너무 많다. 테렉은 방패가 부서졌고, 일행은 궁지에 몰려있었다.
토드는 망설임 없이 거울 너머로 몸을 던졌다.
명계에 진입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세상이 뒤집히고, 사방에 투영된 상이 녹아내린다.
돌연 거울에서 토드의 형상이 튀어나오자, 일행이 기겁했다.
【사령술사! 돌아왔나!】
“다들 뒤로 물러나세요. 빨리.”
일행이 사선에서 피한 즉시, 토드는 향로를 열었다.
화아악-.
뒤로는 번지지 못하도록, 착실하게 탈탈 털면서 앞쪽으로만 흔들어댔다.
넋의 거울에서 나타난 것만으로도 모자라 느닷없이 벌이는 기행에 당황한 찰나, 흑마법사들이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향로를 닫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음. 역시 명계 공기가 신선하긴 한가 보네요. 다들 좋아 죽네.”
사령술사 앞에 서 있는 자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