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90
090
죽은 흑마법사들의 얼굴은 백지장 같았다.
‘잠시 노출된 것만으로도 즉사라.’
자신이 느끼기엔 조금 서늘한 선풍기 바람 정도였는데. 명계의 바람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것도 아니고, 일부를 담아온 것만으로도 살상력이 확실했다.
아쉽게도 거울의 표면은 아연실색한 일행과 토드를 비추고 있었다.
아무래도 바람의 특성상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걸 막진 못했는지, 일행의 낯빛도 창백했다.
가장 먼저 키레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엘프는 정신력이 뛰어나지. 역시 회복되는 속도가 제일 빨라.’
테렉과 와이스탄은 도통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육신의 강건함과는 크게 상관없나.
“어딜 갔다 온 거야?”
“루카스 씨 덕분에 좋은 곳 구경 좀하고 왔습니다.”
“그자는 어떻게 됐고?”
토드는 말없이 목을 그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키레가 한숨을 흘렸다.
“처리됐다면 다행이고.”
“다녀온 곳이 궁금하시진 않습니까?”
거울을 힐끔거린 키레는 몸서리쳤다.
“사령술사가 좋은 곳이라고 말해봤자, 뻔하지. 별로 궁금하진 않아.”
“그렇군요.”
키레가 테렉의 팔뚝에 꽂힌 화살을 뽑아주는 사이, 토드는 이스라를 살폈다.
“수고 많았습니다. 이스라.”
드물게 파멸의 기사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 사령술사. 요술쟁이다운 깜짝 등장이었네. 저 시커먼 놈들이 어찌나 몰려들던지.】
그녀의 갑옷과 검에는 온통 혈흔이 가득했다. 상태를 살핀 토드가 혀를 찼다.
“놈들이 집요할 정도로 관절 부위를 노렸군요.”
【처음에는 급소를 노리더니, 본인이 쓰러지지 않는 걸 보고 팔다리를 분지르려 하더군. 하지만 본인이 여기서 쓰러졌다간 나머지가 당하지 않겠나.】
“그렇겠지요.”
안광의 밝기가 줄어들었지만, 눈빛만은 선명하다.
【본인은 선봉을 지켰네.】
토드는 빙긋 웃으며 견갑을 두드렸다. 남아있던 주문의 여파로 손을 데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잘 해냈습니다. 이스라. 지극히 기사다운 행동이었군요.”
토드가 쓰러트린 흑마법사들 외에도 실험실에 널린 시체들은 수두룩했다. 이 숫자만으론 파멸의 기사를 죽일 순 없지만, 지켜야 하는 대상이 한두 명도 아니고 여럿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한 페널티를 안고도 훌륭하게 싸워낸 셈.
“위로 돌아가면 또 육신을 수복해야겠군요.”
【흠흠.】
“갑옷도 수선하고, 이음새도 재조립해야겠고. 부식된 각반과 팔꿈치도 고치고. 시에서 지정 작업장을 이용할 수 있게 해준다니, 이참에 마갑도 맞춰볼까요.”
【마갑이라! 검은색이면 좋겠군. 적들이 온통 흑색으로 차려입은 본인의 모습을 보곤 공포에 떨테니!】
“판가우 정도의 도시라면 좋은 말을 구하기도 어렵진 않을 겁니다.”
【물론이네! 하, 하! 하. 기대되는군!】
이스라는 투구의 눈가리개를 비볐다.
【헌데 유달리 눈이 무겁군. 망자가 된 이래로 잠기운을 느낀 적이 없었거늘. 이상한 일이야.】
“심력을 적잖게 소모한 까닭일 겁니다. 잠시 눈 좀 붙이시지요.”
【그래도 되겠나? 자네 곁을 본인이 지켜야 하는데. 아직 상황이 완전히 정리된 것인지도 모르겠고···.】
이스라는 건틀렛을 꼼지락거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크흠, 본인도 갑주를 찬 상태에선 꽤 무거운 편인지라, 손이 꽤 많이 필요할 텐데.】
토드는 건틀렛을 잡아주며 타일렀다.
“괜찮을 겁니다. 어차피 일꾼으로 부릴 자들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염려 마시고 잠시 쉬시지요.”
바닥에 널브러진 흑마법사들을 훑어보던 이스라는 눈을 좁혔다.
【에잉, 쯧. 저 비쩍 마른 놈들이 손이나 거들 수 있겠냐마는. 별수 없군. 그래도 정 위급하면 속히 깨우게나!】
토드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투구 속 안광이 꺼진다.
···잔다.
서늘한 돌바닥이었음에도 파멸의 기사는 금세 곯아떨어졌다.
평소의 언행을 돌이켜보면 코골이도 호탕하게 할 것만 같은데, 투구 안쪽에서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망자에겐 잠이 없지.’
그만큼 이스라에게도 이번 상황은 쉽지 않았다는 것.
그렇지 않아도 어지럽던 실험실 내부는 온통 부서진 자재와 유리 파편이 가득했다. 수조에 담겨있던 실험체까지 끄집어낼 정도의 사투였다.
토드는 향로를 흔들었다.
“내가 그대들을 부르노라. 사도의 길을 걷는 어리석은 이들아.”
엎어져 있던 몸뚱이들이 들썩인다. 비틀린 사지를 일으킨 망자들이 토드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대들의 악행으로 쌓은 악업은 내가 거둘지어니. 이제 나의 인도 아래에 움직이라.”
마력이 조금 빠듯하다. 쓸만해 보이는 놈만 추려내 세웠음에도 정신이 조금 아찔했다.
흑마법사들을 일으켜 세우는 모습에 키레가 넌지시 물었다.
“저 녀석들, 데려갈 생각이야?”
“잠시 부리기엔 쓸만한 녀석들이지 않습니까. 라즐 씨가 이미 시신 인도에 대해선 동의한 거로 알고 있는데요.”
망자가 된 흑마법사들을 돌아보던 키레가 작게 신음했다.
“가급적이면 밖에서 대놓고 보이진 않는 게 좋을 거야. 판가우에 흑마법사들이 은거한다는 건 공공연한 소문이지만, 저렇게 줄줄이 끌고 다녔다간···.”
괜히 마르커스를 데려오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흑마법사들을 망자로 되살려 사역하는 모습을 봤다간, 그가 거품을 물면서 발작했을 거다.
“저도 대외적인 시선은 고려하죠. 수하에 거둔 이상, 표면상으론 물의를 빚을 일은 없을 겁니다.”
표면상으론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곤 했지만, 물밑에선 이들을 데리고 뭔가 일을 벌이겠다는 선언.
그런 뻔뻔함도 지금은 눈감아줄 수밖에 없다. 당초에 약속했던 내용이었으므로.
키레가 한숨을 흘렸다.
“네가 그렇다면야. 알아서 처신해. 공식적으론 메아리의 추종자들은 여기서 완전히 토벌된 거니까.”
토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 키레 씨. 추가로 확인할 게 있습니다만. 여기 있는 노획물들에 대한 배분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키레는 바닥에 떨군 단검을 주워들었다.
“어차피 우리 보수는 라즐이 지급해줘. 여기 남은 것들이야 네가 알아서 해. 어차피 안 가져가면 시의회에서 처리반이 올 테니. 아마 흑마법사들의 은닉품이라면 대부분은 소각되거나 암시장에 팔리니까.”
“알겠습니다.”
척.
우선 바닥에 가득한 유리 조각들을 줍는 것부터 시작이다.
“수레가 있으면 끌고 오세요. 일지는 순서대로 나누어서 쌓고, 처분하지 못한 기록, 세무 정보는 따로 분류해서 여기 담고···.”
일단 활자가 적혀있기만 하면 몽땅 쓸어 가는 모습에 키레는 혀를 내둘렀다.
루카스의 연구실에서 발견된 것들은 검게 변색된 혈청, 엑토플라즘을 만드는 데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는 용기, 그리고 선반에 즐비한 정체불명의 재료들이었다.
냄새를 맡아본 토드는 손끝에서 바슬거리는 감촉을 확인했다.
‘질산염. 소나무 숯. 산화철은 아마 황 대용일 거고.’
토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틀림없어. 이 녀석들은 여기서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단순히 암살이나 시설물 파괴를 위한 음모였다면, 이만한 분량의 흑색 화약이 필요하지도 않다. 연구실 창고에만 수레 다섯 대 분량은 넉넉하게 채울 만한 양이 발견되었다.
망자들은 착실히 공간을 치우고 있던 실험체들의 육신도 걷어냈다.
‘쾨흘링에서 만들던 늑대인간. 이번 판가우에선 흡혈귀.’
여기서 치운 잡종 흡혈귀 송장만 다섯 구.
앞서 쾨흘링에서도 불완전한 형태의 늑대인간들을 양산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들은 인간이 아닌 병사들을 양성하길 원한다.
‘라즐은 시의회의 대변인이야. 그는 판가우가 중립을 원한다고 했었다.’
그래도 직접적으로 시의회에서 흑마법사들을 토벌했다간, 이들의 배후에 있는 자와 마찰을 빚을 게 뻔하니 자신을 끼워 넣은 거겠지.
언제나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는 건 교활한 정치인들의 덕목이니.
‘이 시대에 마땅히 필요한 생존 방법일지도.’
하지만 자신은 처지가 다르다.
비록 시의회에선 판가우에 있는 한,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명목상 말해주긴 했다. 언제까지 저들이 약속을 지킬진 의문이고.
‘내 신분은 켄젤슐리텐 일가가 보장하고 있지. 변경백 가문이 정치적으로 실각하면 자연히 내 입지도 흔들려.’
마지막으로 보았던 변경백은 병상에서 쉬이 일어나질 못했다. 이미 나이도 꽤 있고, 이리공이 남긴 부상은 죽지 않은 게 천운일 정도였으니까.
유력 계승자였던 하인리히는 자신이 친히 치워줬지만, 후에 크뤼거가 작위 상속을 원활히 마쳤을진 의문이다.
‘쾨흘링 땅을 비롯해 동부 일대는 여전히 교통의 요충지야. 그 넓은 봉토를 변경백이 모두 차지했으니, 황위를 둘러싼 전쟁이 발발하면 어느 쪽이든 간에 참전을 강요받겠지.’
지금으로선 어느 편을 고를지, 토드도 섣불리 정하기 어렵다. 여태껏 토드가 숱하게 흑마법사들을 방해한 걸 생각해보면,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대공이 토드의 존재를 탐탁지 않게 여기리란 것만은 분명했다.
‘일단 그때가 오기 전까진··· 당분간 판가우에서 준비를 해야겠지.’
어차피 남은 화약은 부피만 차지하므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토드는 하수인들더러 오로지 루카스가 남긴 일지와 그가 수집한 서적들만 챙기도록 지시했다.
루카스는 사령술사 지망생을 꿈꿨던 흑마법사답게, 집념이 느껴질 정도의 꼼꼼한 기록을 남겼다.
눈대중으로 살피던 토드가 인상 깊게 본 연구 내용은 명계와 관련된 일지였다.
―명계의 바람은 영혼에 사무치는 한기를 일으킨다. 어지간한 심상으로는 10초 이상 버티기 어려우며, 수련을 거듭한 창색 마탑의 마지스터조차 굴복했다. ······
하여 나는 여러 오래된 흑색 학파의 고문헌을 탐독한 끝에, 명계의 바람을 견뎌낼 방법을 터득해냈다. 의도적으로 영혼을 파편화하여, 언데드와 같은 상태를 유도하는 것이다.
마침 나에겐 넋의 거울이 있었고, 실험체의 육신에 내 의지를 관철할 뿐만 아니라, 내 영혼을 분리하여 심을 수 있는 권능까지 익힐 수 있었다.
새 육신을 거듭할수록, 나는 진정 불멸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 뒤로는 루카스 자신의 비대한 자아에 대한 칭송과 미사여구로 가득한, 쓸데없는 내용뿐이었다.
책장을 덮은 토드에겐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아있었다.
‘그럼 난 왜 멀쩡한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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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똑똑.
“의원님. 접니다.”
“들어오게.”
사무실에는 온통 커튼을 드리워, 짙게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라즐이 랜턴에 불을 피우니 책상에 걸린 휘황찬란한 명패가 반짝거린다.
‘아이든 리켄베흐, 판가우 시 안전 보장 의원회장.’
“일은 잘 마쳤나?”
라즐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소탕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측 인원 손실은 없습니다.”
아이든이 흡족한 미소를 흘리며 술병을 따랐다.
“훌륭하군. 루키우스, 그 작자는 여간 보통내기가 아닌데 말이야.”
“하워드 씨는 이미 자신의 가치를 쾨흘링 분쟁에서 입증했습니다. 더군다나 에다리크에서 도시의 수호자로 명망을 떨치고 있고요.”
라즐이 덧붙였다.
“굳이 추가 검증이 필요했는지 의문입니다.”
“뜬 소문일지도 있지 않나. 루키우스를 죽였다면 그것만큼 확실한 보증 수표도 없지. 그렇지 않고서야 신앙청에서 예의주시하고 있는 특급 인물을, 도시에 들여놓는 위험을 감수하겠나.”
“중앙 교회는 여전히 내부 종파의 갈등으로 외부에 힘쓸 여력이 없어 보입니다.”
잔을 비운 아이든이 물었다.
“예의 저택에 있다는 그 성전사. 신원은 확인됐나?”
라즐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대외적으로 알려진 수도회 소속은 아닌 것 같습니다.”
“흠··· 잘하면 비밀 심문관일지도 모르겠는데.”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이 높죠.”
아이든은 낄낄거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간 큰 놈일세. 심문관을 잡아다가 망자로 살려놓곤, 부하로 부리고 있다니. 곱게 미친놈이 아니야. 제대로 돌았어.”
“그렇게까지 미쳤다면, 하워드 씨만큼 판가우에 어울리는 인물도 없죠.”
“딱이지. 어차피 우리는 이번 생에 주교후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엔 글러 먹었어. 그 작자들과는 지옥에서나 만나 뵙자고 전해주자고.”
쪼르르, 포도주 따르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랜턴에 비친 탓인지 몰라도 포도주가 유독 붉은 빛을 띤다.
“에킬손 의원님에 관한 보고도 들으시겠습니까?”
아이든이 고개를 저었다.
“들어볼 게 있나. 아스케틸은 너무 오래 산 게 화근이었어. 말년에 들어선 제 애인 놈과 영원히 살겠답시고 흑마법사들에게 손을 벌릴 줄은.”
“알겠습니다. 그럼 하워드 씨에 대한 감시도 지속할까요?”
“아니. 어차피 판가우 내에 있는 한, 우리의 시선을 피할 수 없다. 감시는 이만 거두고, 이번 의뢰에 대한 사례금과 시 지정 작업장에 대한 이용 허가증만 보내게.”
“그럼 빼낸 감시 인력은 어디에 배치할까요?”
“에베르호펜 쪽이 좋겠군. 그쪽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이 계속 들어오는 상황이니.”
에베르호펜은 켄젤슐리텐 변경백의 본거지였다. 요즘 들어 제국 내에서 불미스러운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 곳이다. 특히 그쪽 방면의 소문이라면, 그늘에 숨어들어 사는 족속들치고 귀 기울이지 않는 놈들이 없었다.
쾨흘링 분쟁에 이어 또 다른 분쟁의 기미가 보이는 상황이었으니.
“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의원님.”
랜턴에 불을 끈 라즐은 뒷걸음질 치며 문을 닫았다. 어두컴컴한 사무실과 달리, 밖은 햇살이 화창한 정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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