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Family's Sword Prodigy RAW novel - Chapter 343
343화. 무리안
‘예지?’
백우진이 눈을 부릅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예지라니, 긴장으로 심장이 울렁거렸다.
‘또 린덴 성인가?’
어둑한 시야가 밝아지며 린덴 성의 모습이 드러난다.
드워프의 망치가 닿은 굳건한 성벽과 성문, 그리고 허리를 쫙 편 병사들이 전방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매일 봐 왔던 익숙한 모습. 하지만 그 장면은 불을 깜빡이듯 순식간에 전환되었다.
콰아아아아!
새하얀 빛에 성문이 날아가고, 성벽이 무너졌다.
압도적인 빛의 기둥 앞에서 병사들은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갑옷째로 터져 나갔다.
린덴 성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뻘건 피가 강이 되어 흐른다.
린덴 성 다음은 라인 숲이다. 세계수의 결계가 터지고, 숲 전체가 백화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푸름이 녹아내리고, 엘프들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결국 세계수가 반으로 꺾이고 모든 것이 하얀 빛에 잠겼다.
“허억!”
백우진이 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떴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냐. 뭘 본 건데!
‘리, 린덴 성이 무너지고, 라인 숲이 불타올랐어.’
흑암에게 불완전 예지로 본 장면을 알려주었다.
-또?
‘그때와는 달라.’
이전에 본 건 성문과 성벽이 깨지는 장면이었지만, 이번엔 모든 것이 무너지고 불타는 장면이었다.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지독한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불포르.”
“예?”
“한 명은 이동할 수 있다고 말했지?”
“그, 그렇습니다.”
“위치는?”
“최대로 설정해도 로렝 마을 근처입니다. 린덴 성과는 반나절 정도 떨어져 있는데….”
“그 정도면 됐어.”
백우진이 떨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님?”
“스승님. 혼자 가시게요?”
데플과 실비아가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
“급한 일입니다.”
불완전 예지는 분명 미래지만, 언제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다.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여야 했다.
“당장 차원문을 열어!”
**
린덴 성의 성벽을 지키는 경비대장 토도는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씨 한번 좋군.’
기온은 조금 낮지만, 구름이 없어 따스한 태양 빛을 그대로 즐길 수 있었다.
“날 좋다고 방심하지 마라. 위기는 언제 올지 모르는 법이야.”
“예!”
자세가 흐트러졌던 병사들이 창을 바로 쥐며 허리를 쫙 폈다.
“난 순찰하고 올 테니….”
토도가 만족스러운 고갯짓을 하며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우우우웅.
성벽 앞 들판이 둥글게 일그러진다. 강렬한 백색 스파크가 터지며 공간이 쫙 찢어졌다.
갈라진 공간 속에서 금발의 청년이 나타났다. 금색 수실이 그려진 백색 장포를 둘렀고, 손목과 목에는 금색의 장신구를 착용했다.
복장은 어딘가의 신관 같았지만, 그의 육체는 무인이라도 된 듯 완벽하게 단련되어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금색 눈동자가 지옥의 불길처럼 이글거렸다. 그 눈을 마주치니,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아….”
토도가 식은땀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성스러운 기운을 둘렀지만, 눈빛에선 숨을 옥죄이는 살기가 피어 나왔다. 호의를 가지고 온 자가 절대 아니었다.
“조, 종을 쳐.”
“예?”
“경종을 쳐라! 최고 비상 경계를 발동시켜!”
“아, 알겠습니다!”
목소리가 흔들리는 다급한 지시에 병사들이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땡! 땡! 땡! 땡! 땡!
성에 매어진 거대한 종이 다섯 번 울리며 휴식을 취하던 병사들이 성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저벅.
백의의 남자는 종을 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성을 향해 다가왔다.
“저, 정지! 그 이상 다가오면 쏜다!”
경고로 앞에 화살을 날렸지만,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멈추라고!”
“대, 대장님!”
“젠장! 쏴… 어?”
토도가 입술을 떨었다. 방금까지 눈앞에 있던 남자가 사라졌다.
“대, 대체 어디….”
“백우진은 이 안에 있나?”
바로 옆에서 보석이 울리는 듯한 청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억!”
기겁하며 옆으로 물러났다. 아래에 있던 백의의 남자가 어느새 옆에 나타나 있었다.
‘이, 이자….’
토도가 멈추려던 숨을 억지로 붙잡았다.
‘괴물이다.’
남자의 존재감이 끝없이 타오른다. 얼마 전 보았던 백우진도 이 정도 기운은 아니었다.
‘그래도….’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다른 사람들이 대비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게 바로 자신들의 임무니까.
“침입자다! 쳐라!”
토도가 검을 뽑으며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눈치 빠른 조장과 병사들이 함께 움직여 창과 검을 내질렀다.
“버러지 따위가.”
남자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터져라.”
살기 어린 낮은 목소리. 어떠한 행동도 없이 그 낮은 목소리 하나에 성벽의 병사와 기사들이 공기를 가득 채운 풍선처럼 터져 버렸다.
투두둑.
인간의 살점과 갑옷이었던 쇳덩이들이 비가 되어 떨어져 내린다.
서쪽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의 온기는 한 줌 핏물이 되어 바닥에 뿌려졌다.
“아….”
토도는 남자와 가장 가까이에 있었으면서도 죽지 않았다. 피해서? 아니다. 남자가 자신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우진은 어디 있지?”
‘무, 무리안!’
백우진을 찾는 행동과 방금 보았던 언령으로 이 남자의 이름이 생각났다.
카렌 제국의 부신관장 무리안. 백우진은 혹시라도 놈이 나타나면 무조건 도망치라 말했었다.
그 말 그대로다. 이길 수 없다. 아니, 이기기는커녕 상대할 수조차 없었다.
“이, 이놈 무리안이다! 모두 대피… 컥!”
목숨을 바쳐 모두를 도망치게 하려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심장은 갈기갈기 찢어진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어억….”
토도는 마지막 말도 뱉지 못한 채 차가운 성벽으로 쓰러졌다.
콰아아아앙!
무리안은 죽어 가는 토도를 벌레처럼 보다가 손을 내저었다. 파리를 쫓는 듯한 가벼운 손짓이었건만 성문이 터지고, 성벽이 가루가 되어 무너진다.
“아아….”
“세, 세상에….”
린덴 성의 종족들은 그 압도적인 힘에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고오오오!
무리안은 허공에 뜬 채로 린덴 성의 모든 것을 굽어보았다. 피의 비가 내렸음에도 그의 백의에는 자그마한 핏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백우진을 데려와라.”
그 말과 함께 왼손을 펼쳤다.
콰아아아앙!
그의 손에서 터진 백광이 좌측의 병사들을 휩쓸었다. 한 수에 수십 명의 인간이 녹아내렸다.
남은 건 붉은 피다. 피가 강이 되어 흐른다는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우우웅!
이번에는 오른손을 들어 올린다. 그 손 아래에 놓인 사람들이 무기를 떨어뜨리고 벌벌 떨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다시 백광이 터지려 할 때 동쪽 성벽에서 흑색의 섬광이 치솟았다.
펄럭!
거대한 묵빛 아래로 검은 코트가 펄럭인다. 밤보다 검은 오러를 두른 백우진이 하늘을 향해 설영검을 세우고 있었다.
“무리안!”
백우진이 아니, 그의 모습으로 화한 문주영이 무리안의 이름을 외쳤다.
“난 여기에 있다!”
**
‘괴물….’
문주영이 이를 악물었다. 다른 단어는 필요 없다. 저건 그야말로 괴물이다.
‘가주님과 싸울 때보다 더 강해졌어.’
이 먼 거리에서 숨을 쉴 수 없는 압박이 느껴지고, 전신의 솜털이 곤두선다.
무리안은 차원 속에서 백우진과 싸울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막대한 기운을 피워 내고 있었다.
“백.우.진.”
차분해 보였던 놈의 눈동자가 차디찬 기운으로 가라앉았다.
“모두 라인 숲으로 들어가라! 저놈은 내가 맡는다!”
문주영은 요동치는 심장을 필사적으로 가라앉히며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라인 숲으로 이동하라!”
포효와도 같은 지시에 정신을 차린 사람들과 엘프, 드워프가 숲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반대로 가야 해!’
저 괴물을 사람들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했다. 백우진이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버틸 수 있도록.
“너답지 않군.”
“뭐?”
“그때처럼 바로 달려들지 않는구나.”
무리안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도망치는 사람들을 향해 오른손을 펼쳤다. 그의 손아귀에서 백광이 일렁였다.
“네놈이 그리 나온다면….”
“이그니스!”
문주영의 간절한 부름에 라인 숲의 중앙에서 붉은 화염을 두른 화룡이 솟구쳤다.
[크오오오오!]이그니스는 유성처럼 떨어져 내리며 겁화를 쏘아 냈다.
화아아아아!
소용돌이치는 뻘건 불길이 무리안을 휘감았다.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무리안은 피식 웃고서 오른손에서 일렁이던 백광을 그대로 뿜어냈다.
퍼어어엉!
백광은 겁화를 뚫어 버리고, 이그니스의 우측 날개와 어깨를 찢어 버렸다.
[크르륵!]모든 것을 태운다는 불길이 사그라지고, 이그니스는 성벽을 무너뜨리며 추락했다.
뿌드드득!
무리안은 백색으로 번쩍이는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허연 스파크들이 이그니스의 전신을 뒤덮었다.
[크어어어어!]이그니스는 살점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고통에 잠긴 비명을 내질렀다.
“무리안!”
문주영이 참지 못하고 무리안을 향해 뛰어올랐다.
콰아아앙!
낙일참이 하얀 칼날에서 피어났다. 기운은 부족하지만, 기예는 완벽에 가까웠다.
쩌엉!
무리안은 손가락 하나로 자신의 검격을 완벽하게 막아 냈다.
“역시 넌 백우진이 아니군. 아아, 그래.”
그가 비웃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기운 느낀 적이 있다. 차원의 틈에 있던 놈이야.”
“으윽!”
문주영이 입술을 깨물며 물러섰다.
‘이렇게 빨리!’
들킬 거라는 건 알았지만, 너무 빨랐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강기조차 쓰지 못하는 자신이 무리안을 막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시간을 끌어야 한다.
우우우웅!
문주영이 땅을 박차고 검을 내리쳤다. 태산 같은 무게가 어린 무령참이 그의 검에서 풀려나왔다.
“백우진은 이곳에 없는 건가?”
“내가 백우진이다!”
“버러지가.”
무리안이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겨누었다.
퍼어어엉!
풍선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고통이 오른팔에 작렬했다.
“끄아아아악!”
오른팔이 있어야 할 어깨에는 붉은 핏물밖에 남지 않았다. 말 그대로 오른팔이 날아갔다. 지독한 통증에 순간 정신이 날아갈 것 같았다.
“잘됐어.”
무리안이 고개를 틀며 서늘한 미소를 그렸다.
“네놈은 백우진의 하인이겠지? 놈이 올 때까지 그 모습으로 살려 두마. 그러면….”
“우, 웃기지 마라.”
문주영이 떨어진 검을 왼손으로 쥐었다. 당장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과 공포를 참으며 일어섰다.
‘그분이라면….’
백우진이라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다. 그는 죽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사람이다.
“내가 백우진이다!”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무리안에게 검을 겨누었다.
“네놈….”
무리안의 표정에 처음으로 균열이 일어났다. 그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손가락을 튕겼다.
퍼어억!
문주영이 다시 뒤로 넘어갔다.
“크아아아악!”
이번에는 복부다. 보지도 못했건만, 배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고, 살벌한 양의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흐으읍!”
자연스레 흐르는 눈물을 참으며 오러를 불태워 출혈을 막았다. 다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인지 머리가 멍해지고, 세상이 둘로 보인다.
‘그래도….’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백우진이 떠오른다.
그는 누구의 인정도 받지 못한 밑바닥에서 백가를 바꾸겠다고 선언했고, 그 선언을 현실로 만들었다.
백가 역사상 가장 강하고, 의로운 가주. 그 남자라면 저들을 구하기 위해 사지가 잘려도 끝까지 싸울 것이다.
“으아아아아!”
문주영이 포효를 내지르며 두 다리로 섰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아직이다! 난 아직 죽지 않았다!”
심장이 고동친다. 뭔지 알 수 없는 감정과 기운이 폭발하여 뇌리가 번쩍였다.
콰아아아아!
심장을 휘감은 오러가 스스로 움직인다. 전신을 휘도는 소용돌이를 만들며 검날 위로 유형화된 기운이 치솟았다.
‘강… 기?’
강기다. 그토록 바랐던 강기가 죽을 지경이 되어서, 그것도 왼손에서 일어섰다.
손은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건 마음이었다. 닮고 싶었던 그 남자를 따라 검을 세웠다.
“으아아아!”
문주영이 강기에 휘감긴 검을 겨누며 돌진했다. 그 움직임은 그 무엇보다 빨랐고, 그의 검은 그 어떤 때보다 강대한 빛을 뿜어냈다.
“깨져라.”
무리안은 손조차 들어 올리지 않았다. 그저 한마디의 말만을 내뱉었다.
파컁!
그 말에 담긴 무시무시한 힘이 강기에 덮인 검을 깨부수고, 문주영의 오른쪽 발을 터트려 버렸다.
퍼어억!
달려오던 문주영이 그대로 땅에 얼굴을 박았다.
“끄어어어억….”
오러로 간신히 막아 놓았던 상처들에서 다시 출혈이 일어났다. 팔과 복부, 다리에서 골수를 파헤치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우우웅!
오러가 새어 나가며 만변귀의 가면이 풀려 원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살려 두려 했지만, 백우진과 같은 그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아.”
“크큭! 사, 상관없다. 모두 빠져나갔으니, 내 할 일은 다 했어.”
문주영이 피를 토하며 웃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라인 숲으로 도망쳤다. 백우진이 돌아와도 할 말이 있었다.
“내가 저런 결계 따위도 못 부술 거라 생각한 거냐.”
무리안이 손바닥을 펼쳐 우측에 세워진 세계수의 결계를 겨누었다.
“부서져라.”
그 묵직한 목소리와 함께 라인 숲을 덮은 녹색 아우라가 일그러졌다.
파캬아아앙!
유리창이 깨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세계수의 결계가 갈기갈기 조각나 떨어져 내렸다.
“아아….”
“네놈의 주인이 돌아와도 남은 건 죽음뿐이다.”
결계를 바스러뜨린 무리안의 손이 문주영의 앞으로 향했다.
“죽어라.”
그 손아귀에서 빛이 일렁일 때 우측에서 푸른 바람이 일었다.
화아아아!
그 바람이 그쳤을 때 문주영은 사라졌고, 바닥에는 그가 흘린 핏물만 가득했다.
“이….”
무리안이 붉어진 눈으로 바람이 지나간 좌측을 노려보았다.
“벌레 놈들이!”
**
“시발! 시발!”
무영객이 끝없이 욕을 내뱉으며 문주영의 몸에 회복약을 뿌렸다. 상처들이 너무 커서 최상급 회복제임에도 지혈조차 되지 않았다.
“제기랄!”
“무, 무영객. 너….”
“입 닥쳐! 병신아!”
무영객이 문주영을 등으로 업은 채로 들판을 뛰기 시작했다.
“이 미친놈아. 저런 괴물에게 왜 덤비는 거야!”
“그, 그분께 약속드렸다.”
“뭐?”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 임무를 완수….”
문주영의 목소리가 뚝뚝 끊어져 간다.
“이 개새끼가 진짜! 임무고 지랄이고 일단 살아야 할 거 아니야!”
백의의 괴물은 재앙이다. 괴물이었던 놈이 재앙이 되어 나타났다.
저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재해. 문주영은 그 존재에게 정면으로 맞섰다. 자신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너, 너는 왜 날 구한 거냐. 홀로 도망쳤으면 사, 살 수….”
“나도 몰라! 그리고 닥치라고!”
무영객이 고개를 저었다. 거기선 도망치는 게 맞다. 그 재앙 앞에서는 인간이 뭘 해도 소용이 없으니까.
다만 문주영의 눈에 죽음이 보였을 때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 어떤 보법보다 빠르게, 그 어떤 발놀림보다 기민하게 몸이 움직여졌다.
“어쨌든 이대로 쭉 가면… 끄아아!”
무영객이 발을 멈추고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등에서 느껴진 둔탁한 충격과 함께 복부에 구멍이 뚫려 피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우우웅!
눈앞에 하얀 빛이 번쩍이며 무리안이 나타났다. 순간이동인지, 보법인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
“벌레답게 재빠르기는 하구나.”
무리안이 손바닥을 펼쳤다. 그 안에서 공간을 뒤덮은 광대한 빛이 솟구쳤다.
“어차피 이리된 거 전부 지우는 게 좋겠어.”
“시, 시발!”
죽음. 성스러운 백광에서 죽음이 보인다. 자신의 끝이 이곳이라는 확신이 등골을 스쳤다.
“나, 날 버리고 도망쳐라. 네 발이라면 피할 수도 있….”
“너 좀 닥쳐!”
무영객이 문주영을 자신의 뒤로 던졌다.
“커헉!”
“자, 잘 들어라! 가이안의 행복, 라루쿤의 어둠, 렉스나의 희망이다.”
“무, 무영객 너 무슨….”
“내가 꼭 가지고 싶은 보석들이다! 나 대신 그거 꼭 챙겨서 내 무덤으로 들고 와라!”
무영객이 떨리는 눈동자로 문주영을 가렸다.
“무, 무영객!”
“너 따위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래 봬도 대도라서 말이야. 괜찮은 물건들이 있거든!”
자신 있게 말은 했지만, 출혈 때문에 머리가 아찔해진다. 당장 쓰러지고 싶었다.
“그렇다면 막아 봐라.”
무리안이 비웃음을 그리며 손에 머문 빛을 폭발시켰다.
“이이익!”
무영객이 양 팔목에 착용한 팔찌를 뜯어 버렸다.
파컁!
팔찌가 깨어지며 그의 앞으로 반투명한 막이 생성되었다.
뿌드드득!
반투명한 막은 무리안의 빛과 마주하자마자 거미줄 같은 금이 그어졌다.
“미친….”
레전더리 아이템을 부수면서까지 만들어 낸 보호막이 초 단위도 버티지 못했다. 놈의 말 그대로였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니 인간의 능력으로는 저 괴물의 한 수도 버틸 수 없다.
“무, 무영객. 물러나….”
“닥치란 말이다!”
무영객이 팔을 쫙 펼쳤다. 죽더라도 친우는 구하고 가겠다는 의지였다.
“으아아아아!”
새하얀 빛이 막을 완전히 녹여 버렸다. 그 아름다운 빛과는 어울리지 않는 역겨운 냄새가 코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쩌어어어억!
하늘에서 떨어지는 묵뢰가 무리안의 백광을 찢어발겼다.
사그라지는 빛 뒤로 검은 코트가 펄럭인다.
“거, 검사님.”
백우진이다. 수없이 보아온 그의 굳건한 등이 눈앞에 있었다. 다만 그의 기세는 평소와 달랐다. 여유도, 웃음도 아닌 분노만이 가득했다.
우우우웅!
백우진에게서 치솟은 묵빛이 천지를 어둠으로 물들인다. 장대한 태양 빛이 사그라지고, 칠흑의 밤이 찾아온다.
묵빛의 세계에서 감춰진 성혼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재능의 성혼 천랑이 번쩍이고, 죽음의 성혼이라는 천살이 광폭한 빛을 발한다.
무수한 성혼들이 명멸하며 자신의 힘을 내뿜었지만, 그 어떤 별도 그를 온전히 담을 수 없었다.
“거하게 저질렀구나.”
“백우진!”
어둠을 휘감은 백우진의 흑안이 서슬 퍼런 광채를 발하고, 무리안의 입에서 진한 증오가 터져 나왔다.
빛의 재앙과 어둠의 희망이 세계의 중심에서 마주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