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Family's Sword Prodigy RAW novel - Chapter 367
367화. 카바론 (6)
어둡다.
시야의 대부분이 백지 같은 하얀 공간이었지만, 어둡다는 감각만 가득했다.
손발이 두꺼운 밧줄에 묶인 채 물속에 처박힌 느낌이다. 손가락조차 움직이질 않았다.
아무것도 못 하는 답답함에 짜증을 내려 할 때 허공에 뚫린 미세한 틈을 통해 외부 상황이 보였다.
‘백우진!’
흑암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백우진이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살 떨릴 정도의 검격이군.’
빈털터리로 연무장을 달리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건만, 검격에 초월에 닿은 의지가 어렸다. 자신의 무에 비해 조금도 모자라지 않았다.
많은 도움이 있었다고는 해도 저 나이에 초월의 중급을 넘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카렌….’
시야가 돌아가며 양손을 꼭 부여잡은 카렌이 비쳤다. 가장 친한 친구의 동생이자, 친동생처럼 아꼈던 카렌의 모습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했다.
생기 가득했던 붉은 뺨은 며칠을 굶은 것처럼 움푹 파였고, 눈 아래에는 먹처럼 진한 다크써클이 내려앉았으며, 전신은 뼈가 그대로 보일 정도로 말랐다.
신의 저주에 걸렸을 때보다 더 심각한 상태였다.
‘백우진과 나 때문이겠지.’
카렌은 백우진에게 많은 것들을 지원해 주느라 무리해서 저런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으….’
시스템을 만나자마자 뒤통수를 후려칠 생각뿐이었는데, 그게 카렌이었으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이 녀석은 누구랑 싸우는 거지?’
카바론이 가만히 있는 걸 보면 놈과 싸우는 건 아니다. 백우진이 대체 누구와 검을 겨루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
흑암이 혀를 씹었다. 조금 늘어난 시야를 통해 누군가가 검을 내리치는 손이 보였다. 그 검격의 흐름을 보자, 백우진이 누구와 싸우고 있었던 건지 알 수 있었다.
‘나였어….’
백우진이 싸우는 건 적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카바론! 이 망할 놈이 끝까지!’
이제야 카바론의 술수에 말려들어 정신을 잃었던 게 기억났다.
좌측의 틈을 통해 카바론이 자신과 백우진을 비웃는 게 보였다.
누구보다 선하고 신실했던 친구가 저런 모습이 된 것에 속이 쓰리다 못해 아프다. 최대한 빨리 녀석에게 안식을 주고 싶었다.
‘백우진! 뭐 하는 거냐! 빨리 날 제압하고 저놈을 막으라고!’라는 말은 필요 없었다. 백우진은 정말 죽일 기세로 자신을 공격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백우진의 칼에 찔리고, 뒤통수를 얻어맞았음에도 정신이 깨어나질 못했다.
백색 공간이 찢어지며 외부를 더 자세히 볼 수 있고, 아주 잠깐 신체의 움직임을 막을 수 있을 뿐이었다.
‘젠장! 어떻게 해야 깨어나는 거지?’
백우진의 검, 자신의 검, 카렌, 그리고 카바론을 본 덕분에 정신이 들고 있긴 하지만, 정작 몸의 주도권을 가질 수는 없었다.
‘무언가가 부족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백우진이 다가왔다.
“흑암.”
방금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인지 백우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귀에 들려왔다.
“네가 마지막으로 본 드라마가 오빠의 유혹이었지?”
그건 맞는데, 그걸 왜 지금 이야기하는 거냐?
“그거 여주인공의 친엄마가 남주인공의 엄마고, 남주인공의 친아빠가 여주인공의 아빠다. 네가 보지 못한 18화에 나오는 내용이지. 그리고 여주인공의 할머니가 사실 아저씨….”
백우진의 말을 듣자, 이성을 잃는다는 표현 그대로 머릿속의 끈이 뚝 끊어졌다.
‘저 망할 새끼가 왜 스포를 하고 지랄이야!’
세상이 망할지도 모르는 심각한 상황이지만,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스포당하니,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너 이 새끼 나가기만 하면 뒤통수를 터트려 버릴 거다!’
분노를 폭발시키는 순간 시야를 덮은 백광이 녹아내리고, 백우진의 얄미운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어?’
**
“후려 패도 안 일어나던 놈이 정신을 차리다니, 너 진짜 드라마 좋아했구나.”
백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닥쳐! 이 자식아!”
흑암이 백우진의 멱살을 쥐고 밤나무 털듯 흔들었다.
“내가 스포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 드라마 후반부 엄청 기대했다고!”
“미안하지만, 그게 유일한 방법이었어.”
자신과 검을 나눠도 깨지 않고, 카렌이나 카바론을 보아도 일어나지 않는데 뭘 어쩌겠는가.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반전이라도 스포해야지.
“그, 근데 진짜냐?”
“뭐가?”
“그 내용 진짜냐고.”
“당연히 진짜지.”
“무슨 전개가 그따위야!”
“그래서 막장이라 불리는 거겠지.”
문주영에게 받은 스포를 읽을 때 너무 어이가 없어서 인터넷에 검색해 봤을 정도였다.
“으으, 얌생이 같은 놈….”
“괜찮아?”
백우진이 고개 숙인 흑암의 어깨를 잡았다. 진동 온 핸드폰을 잡은 듯 손에 떨림이 일었다. 녀석은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다만 그건 드라마 스포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쓰러진 카바론에 대한 감정인 것 같았다.
“하아….”
흑암은 한참 동안 카바론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봐야겠다. 이제 내 몸도 있으니, 돌아가면….”
[카인….]
흑암이 억지로 밝은 척을 할 때 카렌이 다가왔다. 그녀의 눈가엔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괜찮아? 저, 정말 풀린 거야?] “그래.”흑암은 몸을 돌려 카렌과 눈을 마주쳤다. 녀석은 민망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표정을 보니, 모든 기억이 돌아온 것 같았다.
“오랜만이구나. 카렌.”
[카인!]
카렌은 글썽이던 눈물을 떨구며 흑암의 품에 달려들었다.
“이제 괜찮아. 다 끝났어.”
[흐으윽….]
“그간 수고 많았다. 카렌.”
“흑암. 너 시스템 만나면 뒤통수 깨 버린다고 하지 않았냐? 대가리가 마요네즈로 가득 찼다는 말도….”
“넌 좀 닥쳐! 낄끼빠빠 모르냐고!”
흑암이 인상을 팍 찡그리며 자신을 밀어 버렸다.
“하여튼.”
백우진은 뒤로 물러나서 두 사람이 부둥켜 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기에 저 둘이 만나는 것만 봐도 미소가 지어졌다.
[그동안 숨겨서 미안해. 정보가 빠지거나, 기억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서….] “그런 건 괜찮다. 근데 몸이 왜 이렇게 마른 거야!”흑암과 카렌은 그간 만나지 못한 한을 풀 듯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럼 뒷정리는 내가 해 놓을까.’
오랜만에 만난 둘이 회포를 풀도록 놔두고 카바론의 시체를 살폈다.
‘확실히 죽었군.’
놈에겐 숨결도, 신성력이나, 마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공간을 차단하던 백색의 막이 깨진 걸 보면 죽은 게 분명했다.
“그럼 다 끝… 어?”
백우진이 고개를 들어 올리다 말고 신음을 흘렸다. 백색의 막은 깨졌지만, 그 위에 뜬 바늘은 아직 돌아가고 있었다.
“흑암! 위험….”
백우진이 흑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위험하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진흙 깊은 곳에 갇혀 꼼짝도 못 하게 된 감각이다.
“어?”
[아!]
흑암과 카렌 역시 움직이지 못하는 듯 몸이 굳어 버렸다.
치이이이잉!
카바론의 시체가 있는 반대편에서 백광의 유성우가 떨어진다. 지금까지 겪었던 그 어떤 기운보다 쾌속하면서도 강맹했다.
‘젠장!’
유만부터 흑암, 카바론까지 이어진 전투 때문에 남은 의념과 오러가 그리 많지 않았다.
우우우웅!
북명신공으로 자연의 마나를 흡수하면서 의념을 끌어 올려 카바론의 억제를 끊었다. 심장을 향해 짓쳐 드는 하얀 유성을 향해 흑왕탄을 내질렀다.
콰아아아앙!
카바론이 쏘아 낸 백광을 지워 버리고 흑암 쪽으로 움직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크헉!”
[꺄아악!]
하지만 이미 늦었다. 흑암은 카렌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던져 빛살을 막아 냈다.
푸카악!
흑암의 가슴과 복부에서 시뻘건 피가 솟구쳤다.
‘그나마 다행이야.’
흑암의 재생 능력은 압도적이다. 저 정도 상처라면 금방 나을 수 있다.
“으음….”
백우진이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돌렸다. 유성으로 떠올랐던 장소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치솟았다.
콰아아아!
갈라진 대지에서 광대한 빛이 타오르며 완벽한 상태의 카바론이 나타났다.
“인간의 검 따위가 내게 통하리라 생각한 거냐.”
그에게선 이전과 격이 다른 기운이 뿜어졌고, 샛노란 눈동자엔 분노만이 가득했다.
“이제 기다리지 않겠다! 모조리 죽여 주마!”
놈이 피워 낸 지독한 살기에 전신의 털이 곤두섰다.
“칫!”
백우진은 흑암에게 시간을 주기 위해서 땅을 박차고 카바론을 향해 돌진했다.
“주제를 알아라, 인간!”
“네 주제나 챙겨!”
카바론이 백색의 빛을 달빛처럼 얇게 펼쳐 냈다. 피부가 쓰라릴 정도의 강한 기운을 견디며 무령참을 내리쳤다.
쿠와아아앙!
의념이 어린 무령참을 내리쳤건만, 카바론이 쏘아 낸 백광은 갈라지지 않고 구겨지기만 했다.
“이젠 부수지도 못하는군. 지친 모양이지?”
카바론이 히죽이며 왼손을 뻗었다. 손안에서 거대한 빛의 창날이 솟구쳤다.
“크윽!”
설영검을 빠르게 휘돌려 광호섬을 내리쳤지만, 창날에 담긴 기운이 너무 강해 흘릴 수가 없었다.
키기기깅!
어쩔 수 없이 의념으로 창날을 꺾으며 물러났다.
‘회복의 호흡도 썼는데….’
정신력도, 오러도 바닥이다. 빨리 흑암이 일어나 줘야 했다.
“대체 언제까지 누워 있을 거… 어?”
뒤로 고개를 돌린 백우진이 눈을 부릅떴다. 재생되어야 할 흑암의 상처에선 끝없이 피가 솟구쳤고, 녀석은 눈을 감은 채 일어서지 못했다.
“흑암!”
[카, 카인이 일어서질 않아요!]
“크하하하!”
카바론이 기괴한 웃음을 흘리며 손가락을 휘적였다.
“적이 된 놈의 육체를 놔둘 거라고 생각했나? 놈은 이제 돌아올 수 없….”
“닥쳐!”
백우진이 급히 땅을 박차고 카바론의 머리 위에 신살을 내리쳤다.
콰아아아아!
전력을 다했음에도 놈이 펼친 백색의 막은 갈라지지 않았다.
의념을 발산할 정신은 너덜너덜했고, 가진 오러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더러운 목을 따 주마!”
그래도 멈춰선 안 된다. 밑바닥의 오러까지 끌어 올려 겁화겁형을 그었다.
캬아아앙!
여섯 번째 연환검 화륜익이 카바론의 방어막을 깨부쉈을 때 놈의 후광에서 무수한 숫자의 빛의 검이 솟구쳤다.
‘이런!’
백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광검이 노리는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그 칼날의 끝엔 카렌이 있었다.
“크윽!”
겁화검형을 억지로 멈춘 후 물러나서 카렌의 앞에 풍벽검흔을 쌓았다.
캬갸갸갸걍!
전방은 풍벽으로 막았지만, 광검이 좌우의 빈틈을 노렸기에 한발도 움직일 수 없었다.
“흑암의 반응은 없습니까?”
[아예 숨을 쉬질 않아요….]
“망할!”
카바론의 목을 당장에 꺾고 싶지만,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겹다. 정신은 점점 지쳐 가고, 몸의 상처가 늘어났다.
“언제까지 막고만 있을 거지? 네놈들에게 시간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크으!”
카바론이 쏘아 낸 백광을 가르며 하늘을 보았다. 바늘은 어느새 한 바퀴를 돌기 직전이었고, 반투명했던 지구도 거의 실체화되었다.
“너희들의 패배다! 버러지 따위가 발버둥 쳐 봐야 신에겐 닿을 수 없어!”
“너는 내가… 크헉!”
카바론에게 다가가려다가 복부에 구멍이 뚫렸다. 분노와 조급함 때문에 감각을 늦춘 최악의 실수였다.
“조급해졌군! 드디어 네놈의 얼굴에도 절망이 일어서는구나!”
놈의 말대로다.
흑암의 죽음, 실체화되는 지구, 죽어 가는 사람들, 상처의 고통, 카바론에 대한 분노 때문에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하는데….”
[우진 님.]
분노로 사고가 정지되려 할 때 청명한 음성이 머리를 울렸다.
[지금은 분노에 몸을 맡길 때가 아니에요.]슬쩍 뒤로 눈을 돌렸다. 흑암을 안은 카렌이 투명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녀의 정대한 목소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어그러지던 정신이 맑아졌다.
[지금의 제게 큰 힘은 없지만….]카렌이 일어서서 등에 손을 얹었다. 그 작은 손을 통해 따스한 기운들이 스며들어 온다.
그녀는 과하게 휘돌려 탁기로 가득 찬 정신을 정화시켜 준 후 손을 뗐다.
[흐으!]카렌은 말할 기운도 없는지, 격한 숨을 뱉으며 뒤로 주저앉았다.
“허….”
백우진은 카렌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나도 아직 멀었군.’
친오빠는 세계를 멸망시키겠다고 미쳐 날뛰고, 간신히 만난 흑암은 혼수 상태, 믿고 있던 자신마저 쓰러지기 직전이건만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가장 작고 여리면서도 주어진 책임을 다하려는 모습에 존경심이 솟구쳤다.
‘그래. 끝까지 해 봐야겠지.’
백우진이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고오오오!
방어에 소모되는 오러와 의념을 최소한으로 돌리며 카바론을 베고자 하는 의념과 오러를 따로 응축시켰다.
“이제 와서 준비해 봐야 늦었어. 너희의 죽음을 알릴 축포를 쏘아 주마!”
카바론이 쫙 펼친 양손을 모았다. 그 손아귀의 중심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솟구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갈려 나갈 극대의 섬광이었다.
‘이건 못 흘려!’
광호섬으로 막을 수 있는 크기가 아니다. 모아 둔 오러와 의념을 설영검에 담아 사선으로 내리쳤다.
콰아아아아!
만검의 묘리와 라사둠의 오러, 의념을 조화시켰지만, 카바론이 쏘아 낸 빛을 가를 수는 없었다.
“커헉!”
백광이 몸을 휩쓴다. 흑전호포의 흑찬석을 발동시키며 검을 끝까지 그으려 했지만,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온몸을 휘감았다.
죽음의 냄새가 난다.
지금까지 힘들지 않았던 전투가 없었지만, 이번엔 위험하다는 경종이 미친 듯이 울렸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살이 깎이고, 뼈가 녹는 고통을 견디며 북명신공으로 받아들인 자연의 마나를 순환시켰다.
“그만 뒤져라!”
카바론의 포효를 지르며 모은 손을 밀어냈다. 놈이 뿜어내는 기운이 한층 더 막강해졌다.
“크윽!”
그 웅대한 파동에 내상이 터지며 입에서 죽은 피가 흘러내렸다.
‘아직!’
죽음이 성큼 다가왔지만, 북명신공의 운공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 카인의 오러 연공법을 배울 때처럼 온 정신을 집중하여 마나와 호흡했다.
캬앙!
하지만 결국 한계가 찾아왔다. 부족한 오러에 손아귀가 찢어지며 설영검이 튕겨 나갔다.
“검을 놓치다니! 끝났어!”
카바론이 비웃음을 터트리며 양손을 펼치자, 광대한 빛이 사위를 휩쓸며 쇄도해 왔다.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콰아아아아!
모든 것을 녹이는 소멸의 빛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절망이 아닌, 의문이 들었다.
끝났다?
손에 검이 없다고 정말 끝난 걸까?
아니다. 설영검은 잘 드는 날붙이일 뿐.
그동안 쌓아 올린 검은 내 안에 어려 있었다. 지금이 그 검을 뽑을 때였다.
그 한 발의 깨달음이 주변에 가득했던 죽음의 악취를 걷어 낸다.
기이이잉!
북명신공의 흐름이 가속되며 시간이 멎었다.
끝까지 자신을 믿는 카렌도, 광기 어린 웃음을 흘리는 카바론도, 돌아가는 바늘도, 벽을 두드리는 문주영까지도 모든 게 흑백으로 물들었다.
빠지지직!
백회에서 치솟은 고양(高揚)이 벼락이 되어 용천에 닿았다.
상상을 불허하는 대자연의 마나가 밀려오고, 만검이 어우러지며 하나의 검을 세웠다.
그건 설명할 수도, 설명될 수도 없는 마음의 검. 그 누구도 펼칠 수 없는 오직 자신만의 검이다.
하나의 선이 보인다.
가장 멀면서, 가장 짧고, 가장 좁으며, 가장 넓은 길.
오롯이 자신만이 볼 수 있는 틈이 열리고, 그 끝에 선 카바론의 막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늘에 닿은 기파. 인간이 꺾을 수 없는 절대적인 기운이지만, 마음으로 벼린 검 앞에선 무의미했다.
마음의 검은 카바론의 기를 가르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채 흘러갈 뿐이다.
세계의 이치를 초월한 검이 카바론의 심장에 닿았다.
심즉살(心卽殺).
그 지고의 경지에 전율을 느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푸칵!
카바론의 입에서 시꺼먼 피가 터지며, 그가 뒤로 넘어간다.
캬아아앙!
하늘에 뜬 바늘이 마지막 회전을 이뤄 내지 못하고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