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Family's Sword Prodigy RAW novel - Chapter 370
370화. 두 번째 귀환
“이 녀석과 제대로 붙어 보고 싶습니다.”
백우진이 멍하니 떠 있는 흑암을 가리켰다.
-어엉?
[붙는다고 하신다면….]
“당연히 결투죠. 흑암의 뒤통수를 후리고 싶은데, 녀석의 육체를 사람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까?”
흑암은 수천 년 전 카바론을 막을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누구보다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에게 육체를 주어 제대로 된 삶과 안식을 누리게 하고 싶었다.
-네 소원이나 빌어 이 애송아!
흑암이 검날을 꽈배기처럼 배배 꼬았다.
‘아직 똥오줌도 못 가리는 놈이….’
백우진은 결투라는 핑계를 대며 자신에게 몸을 주려 했다. 반신이 소원을 들어주겠다는데 남을 생각하다니, 여전히 바보 같은 놈이다.
[아, 역시.]카렌이 백우진을 올려보며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우진 님이라면 그 부탁을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만….] “네?”[그건 제가 해 주고 싶어요. 완벽한 육체는 아니더라도 카인이 만족스럽게 살 수 있는 육체를 줄 생각이에요.] -…….
그녀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고, 흑암은 검날을 조금 떨며 가만히 있었다.
“그럼 상관없네요. 전 흑암의 뒤통수만 뽀갤 수 있으면 뭐가 됐든 괜찮아요.”
[후후, 솔직하지 못하시네요.]
“딱히.”
백우진은 입을 살짝 틀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차원 이동이 준비될 때까지 한 달 정도 걸릴 것 같아요.]카렌이 생기가 번지는 눈빛을 발하며 일어섰다.
[그리고 우진 님의 부탁은 말씀하신 그대로 진행할게요.] “네? 부탁?”-뭐?
[준비가 끝나는 대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흑암과 백우진이 의문을 표했지만, 카렌은 손을 흔들고서 빛이 되어 사라졌다.
-야.
흑암은 카렌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 눈앞으로 날아왔다.
“왜?”
-네 주제에 누굴 챙기려는 거냐.
“이제 너보다 강하잖아. 강자가 약자를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이지.”
백우진은 코웃음을 치며 달려들려는 흑암을 밀쳤다.
-끄윽! 조, 좋다! 이 몸의 육체가 생기면 네놈에게 누가 위인지 다시 알려 주마.
“그래. 해 보자고. 이번엔 네 뒤통수를 걸레짝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카바론에게 조종당하던 게 내 실력이라 생각했다간 큰코다칠 거다!
“대련 전에 빤스나 하나 더 가져와. 내 심검 보고 지리면 갈아입어야 하니까.
-심검? 그런 건 내 검으로 베어 버리면 그만이야!
“음?”
흑암과 유치한 말싸움을 하던 도중, 우측에 모여 있는 세르빅과 리치들이 눈에 들어왔다.
‘재들은 아까부터 뭐 하는 거지?’
세르빅과 리치들은 찬 바람을 견디는 토끼처럼 둥글게 모인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야수왕은 아예 때려치운 건가?’
-지가 스스로 드래곤이 된 걸 보여 줬으니, 이제 흥미가 떨어졌을 거다.
‘하긴.’
흑암의 말대로 세르빅은 황궁에도 들어오지 않고, 리치들에게 붙어 있었다. 그의 유희는 끝난 것 같았다.
‘리치들을 성에 묶어 둔 걸 풀어 주는 건가?’
리치들은 사자의 성에 있는 게 좋다고 했지만, 그게 진심일 리 있겠는가. 세르빅은 카르덴과 페스의 영혼을 풀어 주고 있을 거다.
“세르빅 님. 다 끝났….”
[아직은 만날 생각이 없어요!]
셋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을 때 이 땅과 어울리지 않는 한국 여성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설마….
‘아, 아니겠지?’
불안감을 느끼며 목을 쭉 내밀어 세르빅이 들고 있는 물건을 보았다. 태블릿 PC다. 그것도 미소녀가 인상 쓰는 장면이 나오는 태블릿 PC.
-이 미친놈들!
‘허….’
헛웃음이 절로 터졌다.
세르빅 마르카렉터가. 이 대륙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는 에이션트 드래곤이 태블릿 PC로 미연시 게임을 하고 있었다.
“호오, 만나자는 내 제안을 거절하는데?”
“진도가 너무 빨라서 그렇다능. 연희는 천천히 공략해야 하는 캐릭터라능.”
“그래?”
“캐릭터마다 공략 방식이 다른 게 미연시 게임의 매력입니다.”
“그렇군.”
세르빅은 즐거운 듯 태블릿 PC를 터치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미 호감도가 떨어졌으니, 진엔딩을 보려면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게 좋다능. 메뉴로 돌아 가라능.”
“알겠다.”
세르빅은 리치의 괴상한 말투에도 익숙해진 듯 신경 쓰지 않고, 게임을 재시작했다.
‘이 자식들….’
자신이 황궁을 정리하는 동안 이놈들은 여기서 연희라는 캐릭터를 공략하고 있었다. 차라리 휴식을 취했으면 이해라도 하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르빅.”
“어, 왔군. 잘 끝났나?”
세르빅은 이쪽에 시선도 주지 않고, 태블릿 PC만 보았다. 제국과의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는 관심도 없이 게임에 빠져든 것 같았다.
“그거 말인데.”
“너희 세계엔 별난 게 있군. 이 게임이라는 거 꽤 흥미로워.”
“언어가 통하지 않았을 텐데?”
“당연히 마법으로 좀 고쳐서 사용했지. 난 드래곤이다. 그 정도는 간단해.”
그래. 그 대단하신 드래곤이 미연시를 하고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다고.
“레어로 돌아가 푹 쉬려고 했지만, 다음 유희가 바로 정해진 것 같다.”
“서, 설마….”
“그래. 사자의 성으로 가서 이 녀석들과 함께 게임들을 정복할 생각이다!”
“자, 잠깐! 게임의 종류는 많아. 미연시부터 하면 망하는….”
“미연시가 최고라능.”
“맞습니다. 여러 가지 해 봤지만, 미연시가 정의입니다.”
백우진이 손을 저을 때 리치들이 뼈로 된 손으로 세르빅의 시선을 가렸다. 녀석들은 새로 나타난 동료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라도 안 놓아주지.
흑암이 픽 웃었다. 세르빅의 능력이라면 전 세계의 게임을 다 모아 올 수도 있다. 리치들은 그걸 노리고 세르빅을 미연시에 빠뜨린 걸지도 모른다.
-이미 먹혔다. 포기해라.
“하아,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백우진은 어깨를 으쓱이고서 뒤로 물러났다. 씹덕 드래곤이면 또 어떤가. 즐거운 게 제일이다.
**
후웅!
데플이 수직으로 검을 내리쳤다. 그의 검에서 피어난 예리한 풍압이 연무장을 갈랐다.
백우진은 뒤에서 그가 검을 내리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썩 괜찮군.
‘계속 노력했으니까.’
데플은 전쟁의 뒤처리 때문에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하루도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지금의 마음가짐을 유지한다면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거다.
‘이제야 마음이 좀 편해지는군.’
백우진은 연무장을 울리는 데플의 기합을 들으며 푸른 하늘로 시선을 올렸다.
대륙 전쟁이 끝난 지 한 달이 지났다.
제국은 침략 전쟁을 인정하며 공식적으로 사과를 전했고, 전쟁 배상금은 5년에 걸쳐 지급하기로 모두와 합의를 마쳤다.
전쟁 이후 수많은 소문이 돌았지만, 그중 가장 큰 덩어리는 당연히 나에 관한 소문이었다.
홀로 제국제일검과 신관장을 베고, 그 배후였던 신까지 죽였다는 이야기가 돌며 고금제일검이라는 어마어마한 칭호가 붙었다.
물론 흑암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그걸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국의 영토도 연합군이 각자 나누어 가지며 대략적인 정리가 끝나 연합군은 해체하고, 모두가 여유롭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만 내가 떠날 시기도 하루 뒤로 다가왔다.
“스승님. 어땠습니까?”
검술 수련을 끝낸 데플이 이마 위의 땀을 쓸며 다가왔다.
“나쁘지 않았어. 다만 앞으로 검을 휘두를 때 조금 더 의지를 담아.”
“의지요?”
“연습이라고 해도 적을 베겠다는 의지를 검에 담아서 휘둘러 봐. 지금은 모르겠지만, 훗날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리고 손목을 돌릴 때도….”
백우진은 데플의 검을 보며 부족했던 부분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스승님!”
데플은 조언을 듣자마자, 다시 연무장의 중심으로 달려가 검을 뽑아 들고 수련을 시작했다.
-말 안 하냐?
‘무슨 말?’
-내일 떠나는 거.
‘이제 모두 평화를 찾았는데, 괜히 혼란스럽게 하기 싫어. 어차피 난 이방인이니까. 천천히 잊혀지도록 조용히 떠나는 게 나아.’
전쟁이 끝나며 평화가 찾아왔지만, 아직 여파는 남았다. 자신이 떠난다고 하면 불안해할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 대륙에 남아 있는 것처럼, 바람처럼 흘러가는 게 나았다.
“읏차.”
백우진은 수련하는 데플을 놔두고 연무장을 나서서 타이쿤의 공방으로 향했다.
쩡!
공방에 들어가기 전부터 땡볕에 선 듯한 열기와 망치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란스러움을 즐기며 공방으로 들어갔다.
쩡! 쩡!
타이쿤은 뻘건 불똥과 쇳물이 흐르는 혼잡한 공간에서 망치를 내리치고 있었다.
“오, 왔나?”
그는 자신을 보자마자, 망치를 내려놓고 장갑을 벗었다.
“딱 맞춰서 잘 왔군.”
타이쿤이 헤죽 웃으며 상의 주머니에서 녹색 보석이 꽃처럼 펼쳐진 반지를 꺼냈다.
“이 반지입니까?”
“그래. 드디어 완성되었어.”
“허….”
백우진이 반지를 돌려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이렇게 만드는 거지?’
녹색 보석을 꽃잎처럼 얇게 펴내고, 그 주변은 은빛 비늘로 감쌌다. 이걸 수작업으로 만들다니, 정신이 아찔할 정도다.
“대단하시네요….”
“나 혼자 한 게 아니다. 그 중심에 있는 녹색 보석은 처음으로 열린 세계수의 씨앗이다. 엘프들이 그걸 내놓을 줄은 나도 몰랐어.”
-그, 그걸 줬다고?
흑암은 넋을 놓은 듯 반지의 보석 부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알기론 엘프와 드워프가 전력을 다해서 만든 최초의 물건이다.”
“…감사합니다.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백우진은 갓난아기를 안듯이 조심스럽게 반지를 받았다.
“네가 해 준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지만, 이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부디 잘 간직해 줬으면 좋겠구나.”
“물론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반지를 손가락에 착용했다. 더운 여름 숲에 들어온 듯한 청량감이 전신을 감쌌다.
“그거면 되었다. 그리고….”
타이쿤이 곰방대에 불을 붙이며 껄껄 웃었다.
“정말 고마웠다.”
**
백우진은 실비아에게도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서 라인 숲으로 향했다.
‘흑암. 네 일을 해라.’
-흥, 누가 보면 진짜 맡겨 놓은 줄 알겠네.
흑암은 헹 하고 코를 풀고서 반지를 검은 기류로 감쌌다.
띵!
[엘프와 드워프의 선물] 등급: 신화드워프 명장 타이쿤이 엘프의 보물 세계수의 씨앗과 드래곤의 비늘을 이용하여 만들어 낸 반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은 드워프와 엘프가 힘을 합쳐 만들어 낸 최초의 걸작으로 마를 물리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모든 능력치 15% 상승.
모든 검로의 위력 15% 상승.
오러 소모량 15% 감소.
세계수의 축복 효과로 마기를 정화시킬 수 있음.
“오!”
백우진은 눈앞에 뜬 메시지를 보고 웃음을 눈을 부릅떴다.
‘엄청난데?’
반지의 옵션도 대단했지만, 드워프와 엘프가 함께 제작한 최초의 걸작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두 종족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니이이! 템빨도 필요 없는 놈한테 뭘 또 주는 거야! 카렌! 나 좀 챙겨 주라고! 나 굶어 죽겠다!
흑암이 짜증을 가득 담아 감정 창을 베어 버렸지만, 역시나 아무 효과도 없었다.
-심검까지 쓰는 괴물한테 왜 저런 걸 주는 거야! 아오!
“카렌이 아니라, 린덴 성의 드워프들과 라인 숲의 엘프가 챙겨 준 건데? 너도 나처럼 베풀고 살든가.”
-끄윽….
흑암은 할 말이 없는지 검날을 채찍처럼 휘기만 할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검사님!”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향할 때 실비아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등장에 숲이 한 톤은 밝아진 느낌이다.
“데플 님 수련을 봐주시는 줄 알았는데, 웬일이세요?”
“반지가 완성되어서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가고 있었습니다.”
백우진은 손에 낀 반지를 빼서 실비아에게 건네주었다.
“와….”
실비아는 반지를 보고 입을 벌렸다.
“저, 저흰 씨앗에 자연의 마나만 담아서 이런 형태가 될 줄은 몰랐어요. 역시 타이쿤 님이시네요. 원 상태보다 훨씬 아름다워요.”
실비아는 반지의 꽃잎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자연 그대로를 사랑하는 엘프가 저런 말을 한다는 건 최고의 칭찬이었다.
“이런 귀한 선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는 하실 필요 없어요. 그런 물건밖에 드릴 수 없어서 죄송스러울 뿐이니까요.”
그녀는 반지를 돌려주면서 고개를 저었다.
“매번 감사하다고 하시는데,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엘프들을 이끌었다는 자부심을 가지세요.”
“후후, 검사님도 계속 비슷한 말만 하시는 거 알고 계세요?”
실비아는 자신의 말에 힘을 받았는지, 조금 상기된 얼굴로 포근한 미소를 그렸다.
“카바론이 사라지면서 세계수의 성장 속도가 빨라졌어요. 이대로라면 500년 안에 이전처럼 커질 거예요.”
“다행이네요.”
백우진이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에 닿을 듯한 나무를 보았다. 저 나무가 얼마나 더 클지 보지 못하는 게 약간은 아쉬웠다.
“전 그럼 돌아가 볼….”
“검사님.”
실비아와 한참 동안 세계수를 보고 있다가 돌아가려 할 때 그녀가 자신을 불렀다.
“…언제 떠나시는 거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밝았던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감이에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저도 모르겠어요. 검사님의 기운이 옅어지는 느낌이 나서요.”
“감이 좋으시네요.”
“그래서 언제 가시는 거죠?”
은근슬쩍 넘어가려 했지만, 실비아는 놓아주지 않았다.
“후우, 내일입니다.”
“그, 그렇군요.”
생각보다 빨랐는지 실비아가 살짝 몸을 떨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하지 않으시나요?”
“조용히 떠날 생각입니다.”
“검사님답네요. 그….”
“네?”
“그 마지막 전쟁에 나타났던 분들이 계신 곳으로 가는 거죠?”
“네. 전부 저와 인연이 닿은 사람들입니다. 감사하게도 절 도와주러 와 줬죠.”
“그것도 검사님다운 일이네요.”
실비아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입을 오므렸다가 폈다.
‘못 말하겠어.’
이전에 그가 돌아오면 마음을 전하겠다고 결정했지만, 떠나는 사람에게 괜히 짐을 씌우는 것 같았다.
특히 그와 연이 닿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걸 보니, 더더욱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그래도 떠나는 모습을 저 한 사람 정도는 봐 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음, 그렇겠네요….”
백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미 알았으니, 상관없을 것 같았다.
“내일 해가 뜨기 전의 새벽 라인 숲 외곽 공터로 와 주세요.”
“고마워요.”
실비아는 조금은 편안해진, 조금은 단호해진 얼굴로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쯧….
흑암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혀를 찼다.
**
[준비가 끝났어요. 두 분과 함께 그 장소로 와 주세요.]백우진은 이전과 달리 힘이 깃든 카렌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숙소를 빠져나왔다.
“떠나려니까 좀 아쉽네.”
“생각보다 오래 있었으니까.”
문주영과 무영객도 조금은 마음이 걸리는지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 여기에 있는 보석들을 다 못 보고 가잖냐. 언젠가는 다시 와야지.”
“그, 그것 때문이었다고? 이 도둑놈아! 백가 망신 좀 그만 시키라고!”
이젠 익숙해진 문주영과 무영객의 다툼을 흘려 들으며 공터에 도착했을 때 예상과 달리 두 사람이 더 있었다.
“검사님.”
“이제 오는군!”
“스승님!”
실비아만이 아니라, 데플과 타이쿤도 공터의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냥 가려고 하다니! 이 고얀 놈!”
“스승님 지인짜 섭섭합니다!”
“으음….”
“휘이익….”
“죄, 죄송합니다.”
백우진이 뒤를 힐끔 보았다. 문주영이 고개를 숙였고, 무영객은 머리에 깍지를 낀 채로 휘파람을 불었다.
“장인께서 제 검을 만들어 주셔서 어쩌다 보니….”
“데, 데플은 저희 동생이잖아요! 속일 수가 없었슴다.”
역시 저 둘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데플과 타이쿤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다만 이번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서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전 스승님이 틀렸다고 봅니다. 저도 스승님도 살아 있잖아요! 언젠가는 또 볼 수 있을 겁니다! 무조건!”
“이번에는 저 꼬마의 말에 동의한다. 앞으로 살날이 창창한데 못 만나긴 뭘 못 만나!”
“후후.”
데플은 주먹을 말아쥐고, 타이쿤은 곰방대를 피워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실비아는 두 사람을 보며 웃음을 피워 냈다.
그러고 보니 이 세 사람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도, 이곳을 떠날 때도 이 사람들은 계속 곁에 있었다.
“후우, 제가 잘못 생각했네요.”
백우진이 자신의 머리를 툭 치고서 세 사람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떠난다고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을 위한다고 생각하면서 제 생각만 한 것 같습니다.”
“스승님….”
“헹, 알면 되었다.”
데플은 마음이 통한 것에 감격했는지 입술을 깨물었고, 타이쿤은 피워 낸 곰방대를 허리춤에 넣으며 클클 웃었다.
우우우웅!
공터에 모인 사람들이 웃고 있을 때 중심부에서 검은 빛의 기둥이 치솟았다. 차원을 이동하는 틈이다.
[미안해요. 발동 시간을 미리 정해 둘 수밖에 없어서….] ‘괜찮습니다.’고개를 젓고서 문주영과 무영객에게 빛의 기둥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가 보겠습니다.”
“그래서 언제 돌아올 것이냐.”
세 사람과 눈인사를 한 뒤 마지막으로 빛의 기둥으로 들어가려 할 때 타이쿤이 물었다.
“살아 있으니 흘러가다 보면 언젠가는 만나겠죠.”
백우진은 데플을 보며 빙긋 웃었다.
“좋은 대답이다.”
“스승님!”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는 감정을 느끼며 검은 기둥에 들어가려고 할 때, 뒤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실비아다. 그녀가 몸을 돌린 자신의 가슴을 꽉 끌어안았다.
“정말 고마웠어요.”
“그 말 어제도 들었어요. 이제 그만하셔도… 아.”
백우진이 눈을 부릅떴다. 실비아의 떨리는 어깨를 보고 있을 때 그녀가 고개를 들어 입술을 맞춰 왔다.
실크로 만든 손수건이 입술에 닿는 듯한 부드러운 감각과 함께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달콤한 과일 향이 흘러들어 왔다.
[꺄악!] -호오!“오오!”
“이야! 스승님!”
“검사님! 부럽게 뭐 하는 짓이에요!”
뒤와 앞에서 떠드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할게요.”
실비아는 만난 이후 처음으로 들뜬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놔주었다.
“다시 뵙겠습니다.”
백우진은 입술에 남아 있는 실비아의 잔향을 느끼며 옅게 웃었다.
그녀의 눈에서 이슬이 떨어져 내리는 순간 시야가 꺼멓게 물들었다.
**
“음….”
백우진이 눈을 떴다. 실비아의 향이 사라지지도 않았건만, 사위가 모두 백색으로 가득 찬 공간이 보였다.
‘예전에도 이랬었지.’
이전에도 차원 간의 균형인가 뭔가를 위해 대기하다가 지구로 넘어갔었다.
“어?”
다만 조금 다른 게 있었다. 혼자였던 이전과 달리 자신의 앞에 한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