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0)
10화. 그림 도둑(1)
세현예고 미술 전시회.
베일에 싸였던 그랑프리 특전은 당대 최고의 작가에게 사사 받을 기회, 즉 한 달 동안의 특별 레슨이었다.
그리고 수십 년이나 그랑프리가 탄생하지 않은 건, 특전의 주인공인 해당 작가가 직접 심사에 관여해 그랑프리의 당락을 결정했기 때문이었고.
애초에 그 작가의 눈에 들지 못하면 그랑프리는 탄생할 수 없는 구조였던 거다.
“야, 대박. 그러니까 이번 수상자는 설민수 작가한테 레슨을 받게 된다는 거야.”
“대단하네. 우리 땐 누구였을까? 심사위원이 몇 년마다 한 번씩 바뀌었다며?”
“우리 때? 설민수보다 윗급이었다는데 소문으론 제임스 리였다고 하더라.”
“제임스 리? 그 사람 영국에서 가장 핫한 화가잖아. 그게 가능해?”
“세현예고잖아. 인맥도 예산도 충분했을 거고, 무엇보다 심사에 참여하더라도 제자로 삼고 싶은 애가 없으면 그랑프리를 뽑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크게 부담 가는 일도 아니었을 거야. 비용도 섭섭지 않게 챙겨줬을 거고.”
“하긴. 그것도 그렇겠네.”
“여튼 초기엔 워낙에 깐깐하고 대단한 인물들을 모시는 바람에 그랑프리가 없었던 거고, 학부모들 항의도 항의지만 학교 위신이 서질 않으니까 이번부턴 급을 낮춘 거래. 그게 설민수인 거고.”
“하, 설민수만 해도 어마어마하지. 일개 고등학생이 그런 작가에게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있겠어?”
“뭐, 일개 고등학생이라 할 순 없지. 무려 세현예고 아니니. 어쨌거나 그렇게 어마어마한 특전인 줄 알았음 나도 목숨 걸고 덤벼볼 걸 그랬어. 하, 아쉽다.”
과거 차윤희는 그랑프리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어딘가에서 주워듣고 와 수현에게 전해줬다.
만약 그 말대로 제임스 리가 95년 미술 전시회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한다면 수현은 어떻게서든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하는 데 그만큼 든든한 스승은 또 없을 테니까. 게다가 제임스 리는 과거 수현이 좋아하고 존경했던 화가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그의 흥미를 끌만 한 그림을 그리는 편이 좋을 텐데, 마침 수현 앞에 적당한 풍경이 나타난 상황이었다.
수현이 다급히 해변 도로로 달려 나와 택시를 잡았다.
“기사님, 부산항으로 가 주세요.”
수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곧 수현이 탄 택시는 빠른 속도로 해안을 달렸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수현은 깊은 상념에 빠졌다.
마음에 드는 소재를 발견한 건 큰 수확이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그리냐에 따라 제임스 리의 시선을 끌 수 있냐 없냐가 갈리게 된다.
수현은 과거에 꾸준히 찾아봤던 제임스 리의 작품과 인터뷰를 떠올렸다.
[삭제>.제임스 리의 그림은 삭제를 테마로 했다.
물체를 이루는 중요한 형태와 색을 과감히 삭제하고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
그는 지워나감으로써 오히려 주제를 강조할 수 있다는 걸 자신의 그림을 통해 여러 번 증명했다.
그리고 그런 제임스 리가 이번 미술 전시회의 심사를 맡는다면-.
‘뛰어난 묘사나 기교, 재치 같은 걸론 흥미를 끌 수 없을 거야. 그가 예술을 대하는 방식에 말을 거는 그림을 그려내야 해.’
그렇다면…… 바다를 그대로 그릴 게 아니라 연관된 오브제를 어떻게 구성하느냐를 고민해야겠지. 바다를 빼고도 바다처럼 느껴지게. 배, 사람, 물고기. 이런 특징적인 오브제들을 살려서 물이 없어도 바다처럼 보이게 그려보는 거야.
몽글몽글 잡히지 않던 것들이 차츰 정리되며 수현의 머릿속에 확연하게 형태를 잡아갔다.
‘……오브제들을 먼저 스케치하고 그것들의 움직임으로 바다가 느껴지게 다음 스케치를 이어가 보자.’
부산항에 내린 수현이 정박한 배와 항구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가방에 넣어두었던 스케치북을 꺼내 빠르게 종이에 옮겨가기 시작했다.
바다에 속한 아름다운 것들이 종이 위에 물결치듯 하나둘 그려졌다.
차츰 해가 저물어 마침내 캄캄해질 때까지 수현은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른 채 그림의 세계로 푹 빠져들었다.
***
2박 3일은 눈 깜짝할 사이 흘러갔다. 어느새 수요일 오후,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으어어. 어깨야. 삭신이야.”
“배고파아아. 마지막 날까지 그림만 그리다 가다니. 너무해.”
“야, 우리 단체 사진이라도 찍자. 바다도 한 번 들어가고.”
“그러자! 얘들아, 모여!”
자유시간이 꽤 많이 주어졌지만 기본적으로 그림에 열정이 높은 애들이라 밥 먹고 잠깐 휴식을 취하는 시간 외엔 작품에 매달렸다.
하지만 열심히 그린다고 모두가 좋은 성과를 가져가는 건 아니었다.
“와, 나 달랑 세 장 그렸어. 다 망쳐 가지고. 마음에 드는 것도 없고. 하아. 최형욱 쌤한테 엄청 잔소리 듣겠다.”
“야, 내 거 보여줘? 스케치까지는 진짜 환상이었는데, 채색 들어가고 멸망이다, 멸망.”
“와. 진짜. 이거 지옥도 아니냐?”
“죽고 싶냐?”
그때랑 비슷하네.
수현이 아웅다웅하는 애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 애들이 그렸던 그림은 수현의 기억 속에 흐릿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이번에 그려낸 것들을 보니 그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고. 몇몇은 그럴듯한 스케치를 해냈지만, 또래보다 낫다 싶은 정도.
발전 가능성은 있으나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로 충격을 안겨주는 작품은 이번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랑프리가 탄생하지 않았던 거겠지.’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냉정하게 말해 그때 내가 참여했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거야. 그 제임스 리가 심사위원이었다면.’
그러나 그건 딱히 할 필요 없는 생각이었다.
이번엔 분명 다른 결과를 낼 테니까.
“이야. 한수현. 언제 이렇게 많이 그렸어?”
스케치들을 정리하는 수현의 뒤로 차윤희와 박선화가 다가왔다.
“박선화, 너 저리 가. 괜히 한 장만 달라, 귀찮게 하지 말고.”
“와. 나 그럴 생각 없었거든? 그리고 이건 수현이가 야외스케치에 내려고 그린 건데 달라고 할 이유가 없잖아.”
“뭐래. 지난번에 한 장만 달라고 조르는 거 내가 똑똑히 봤는데.”
“그건 장난이고요. 조크 몰라? 조크?”
“니들, 안 지겹냐?”
여전히 으르렁대는 둘을 보며 수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되겠다. 올라가는 길엔 둘이 같이 앉아라.”
“뭐?”
“아니, 한수현. 나한테 왜 이래?”
“너희가 좀 친해져야 내가 편해질 것 같아서 그래. 별것도 아닌 걸로 왜 이렇게 싸워.”
“에이. 싸우는 건 아니고 장난이지. 그리고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낼 거야. 그치, 차윤희?”
“어, 그럼. 원래 이러다가 정 드는 거잖아. 그러니까 얘랑 나랑 묶지 마. 올 때처럼 셋이 앉아서 가자. 어?”
한걸음 물러나며 식겁하는 애들의 모습에 수현이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그래. 두고 본다. 어쨌든 가자.”
수현이 스케치북을 들고 버스에 올라탔다.
***
“모두들 고생 많았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한 명씩 면담하면서 야외스케치 내용 보고하는 시간을 가질 거야. 자, 조심히 들어가도록!”
늦은 저녁.
세현예고 운동장에 내린 애들이 인솔 교사에게 스케치북을 제출하고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다.
수현 역시 몇 가지 스케치를 골라 제출을 마쳤다. 룸메이트인 박선화가 수현을 기다렸다가 와락 팔짱을 끼며 기숙사로 향했다.
“나 오늘은 완전 꿀잠 잘 거 같아.”
“속도 좋다. 내일 평간데 괜찮겠어?”
“에이. 뭐. 평가도 기대가 높을 때 의미가 있는 거지, 어차피 쌤들은 내 그림에 큰 기대 없을걸?”
하하. 해맑게 웃는 박선화를 보며 수현이 피식 웃었다.
“참, 구김살이 없어서 좋다. 역시 다이아수저라 그런 건가.”
“어? 다이아수저?”
“아냐. 그냥 해본 말. 어쨌든 빨리 가자. 나도 피곤해.”
부산 버스 외에도 경주, 속초, 제주도 등 각지로 향했던 다른 조들의 버스가 속속 도착했고, 피곤에 찌든 얼굴을 한 애들이 수현네 조원들이 그랬듯 하나둘 스케치북을 제출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쟤는 왜 실기동으로 들어가지?
수현의 눈에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저녁 9시. 다른 학년도 일찍 수업을 마친 날이라 실기실 문은 굳게 잠겼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도둑고양이처럼 슬금슬금 실기실로 향하는 김하영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뭐야?’
수현이 고개를 갸웃하자, 그 시선을 따라가던 박선화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김하영 저거 또 저러네.”
“어?”
“김하영 쟤, ……아냐. 알아봤자 기분 만 잡치지.”
박선화가 손사래를 치며 말을 거둬들였다. 수현이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
“뭔데 그래?”
수현이 한 번 더 묻자,
“하아.”
박선화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더니 작게 속삭였다.
“한수현. 너 이거 듣고 충격받거나 실망하거나 흔들리거나 하면 안 된다?”
“어?”
“하, 나야 뭐. 어릴 때부터 이런 더럽고 거지같은 일들을 워낙에 자주 봐서 내성이 생겼는데, 넌 아직 영혼이 순수한 예술가잖아.”
“뭐래.”
“흠흠. 어쨌든 아직 확실한 물증이 있는 건 아닌데, 도는 말이 있어.”
“무슨 말?”
“김하영이랑 장민영, 이주호, 그리고 최주희가 학교 선생들 뇌물 먹여서 장난질 친단 소문이 있거든.”
“어?”
뜻밖의 말에 수현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김하영이야 알고 있었지만 장민영, 이주호, 최주희까지 그런 짓을 했다고?
“최주희는 완전 모범생이잖아. 반장이고. 장미영도 얌전한 스타일 아니었어?”
“그러니까 더 어처구니가 없는 거지. 세상 고고한 척은 다 하면서 뒤로 호박씨 까는 거니까.”
“확실해?”
수현이 되묻자 박선화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번 소묘 시험 때 소동이 있었잖아.”
“어?”
“그 뽑기통 말이야. 누군가 제보했잖아. 쪽지로. 칼리굴라가 나올 거라고.”
화제가 소묘 시험으로 향하자 수현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건 미래를 알던 자신이 꾸민 일. 하지만 박선화에게 자신이 한 거라고 말할 순 없었다. 다행히 박선화는 제보자를 밝히는 것보다 다른 데 관심이 있는 눈치였다.
“그 시험 날, 걔들 얼굴이 얼마나 썩어있었는지 모르지?”
“얼굴이?”
“사실 줄리앙이면 다들 반가워할 석고잖아. 익숙하고, 그리기 좋고.”
“그렇지. 아무래도.”
“그런데 김하영, 장민영, 이주호, 최주희. 걔들은 똥이라도 씹은 얼굴이더라고.”
“그것만으로 뭘 의심하고 말고 할 게 있는 거야?”
수현이 되묻자 박선화가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내가 들었어. 걔들이 복도에서 하는 소릴.”
“어?”
“돈은 돈대로 썼는데, 시험은 망했다고 욕을 하더라고. 칼리굴라만 그렸는데 X됐다고 하면서 말이야. 이거 확실히 수상한 정황이잖아?”
박선화의 말을 들은 수현의 눈이 일렁였다. 정황상, 박선화는 과거에도 몇몇 애들이 부정행위를 일삼는 걸 의심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엔 뽑기통 사건이 불거진 바람에 그 의심이 증폭한 모양이었고.
“내가 바로 우리 엄마한테 말해놨지.”
“관장님한테?”
“어. 일단은 가만 있으라고 하시더라. 알아보신다고.”
“아, 그래.”
“그런데 이게 진짜라면 김하영도 그렇고 나머지 애들. 이번 야외스케치에서도 분명 미친 짓을 꾸몄을 거야.”
“미친 짓이라니?”
“야외스케치에서 미술 전시회까지, 1학년에선 가장 큰 행사잖아. 그랑프리 특전을 거머쥐면 그만한 포트폴리오가 어딨겠어? 원하는 대학에도 쉽게 갈 수 있을 거고.”
“하.”
수현이 심란한 얼굴을 하자 박선화가 씩 웃으며 수현의 등을 툭툭 쳤다.
“어쨌든 난 잠깐 엄마한테 전화 좀 하고 가야겠다. 수상한 게 보이면 바로 말해주겠다고 했거든. 너 먼저 들어가서 쉬고 있어.”
“그래.”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기숙사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수현과 박선화가 김하영 등이 감춘 비밀을 밝히기도 전에, 또 하나의 사건이 펑. 터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