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05)
105화. 굴레(2)
그날 저녁, 일선 화랑.
자초지종을 들은 스티브의 얼굴은 아주 볼만했다.
정확히는 케일라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부터 시시각각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직접 만난 거면 대충 얘기도 들었겠네.”
스티브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게. 난 들을 생각이 없었는데.”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민감한 부분을 알아버리게 된 셈이니 수현은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스티브는 그게 아니란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누가 갔어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케일라는 막무가내인 성격이거든.”
“아. 그래.”
“예전부터 그랬어.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난리를 치던 애였지. 하.”
전부터 뭔가 한참 쌓인 듯한 뉘앙스. 스티브를 그리워하는 케일라의 말과는 상반되는 반응이었다.
수현이 이 불편한 공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스티브가 일어나 따뜻한 믹스 커피 두 잔을 타와서는 하나를 수현에게 건넸다.
“우리 엄마는 한국 사람이었어. 아빠는 캐나다인이었고. 두 분은 뉴욕에서 만나서 사랑에 빠지게 됐다더라고. 그러니까, 대학 시절 유학생 신분으로 같은 학교에서 만났던 거야.”
스티브가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자기 얘기를 천천히 풀어냈다.
“엄마는 연주자였어. 플루트 연주자였는데, 엄청나게 우아하고 아름다운 분이셨어.”
사락.
스티브가 지갑을 열더니 카드 아래에 숨겨두었던 사진을 한 장 꺼내 보여주었다. 어린 시절의 스티브와 그의 엄마 사진이었다.
“와, 정말 예쁘시다.”
“그치? 목소리도 좋았어. 따뜻한 분이셨고.”
그때를 회상하는 듯 행복한 미소를 짓던 스티브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게 내가 여섯 살이 되던 해야.”
“어?”
“암이었어. 너무 늦게 발견해서 손을 쓸 수가 없었대.”
“아…….”
어린 시절의 스티브가 얼마나 큰 슬픔에 잠겼을지 수현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마땅한 위로의 말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뭐, 괜찮아. 나중엔 다시 보게 될 테니까.”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인 스티브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혼혈아로 태어나 주변의 시선을 견뎌야 했던 스티브는 엄마의 죽음 이후, 무척이나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고 했다.
쓸쓸한 유년기는 늘 혼자였고, 술에 취하는 일이 많던 아버지는 수많은 여자와 데이트하며 방황했다고 했다. 스티브는 그걸 지켜봐야 했고.
“아버지는 화가였어. 그래도 꽤 작품이 팔리는 화가였는데, 엄마가 돌아가신 후엔 제대로 된 걸 그려내질 못했지. 그러다가 미아를 만난 거야.”
미아는 작은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처음엔 스티브 아빠의 재기를 돕기 위해 나섰다가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그렇게 두 가정이 결합했고, 스티브의 아빠도 그럭저럭 그림을 다시 그리게 됐다는 거다.
“겉으로 볼 땐 완벽했을 거야. 화가와 전시기획자. 총명한 두 아이. 나쁘지 않은 조합이었지. 근데 나는 그 변화가 달갑지 않았어. 어떻게 해도 익숙해지지 않더라고.”
“그래. 이해해.”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자란 후에도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는 상황들.
그걸 유년기에 전부 겪었으니, 게다가 스티브는 상당 기간 방치돼 있었다. 그 상처가 얼마나 클지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
“미아는 나한테 잘했어. 어쩌면 친딸인 케일라보다 날 아끼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고.”
“그래?”
“큐레이터며 전시기획자로 일했으니까 미술에 조예가 깊어서 내가 그림을 그리는 데도 많은 관심을 뒀거든.”
“응.”
“내가 첫 번째 전시를 열 수 있었던 것도 미아의 공이 컸지.”
“그랬어?”
“어. 그게 싸움의 시작이었지.”
스티브가 피식 웃었다.
“당시에 난 새로운 가족에 섞이지 못하고 계속 겉돌았어. 케일라는 아버지랑도 금세 친해져서 친딸처럼 굴었는데, 난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겠더라고. 그래서 더 그림을 그렸던 것 같아. 그림을 그릴 땐 모든 걸 잊을 수 있었거든. 그러다가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어.”
스티브가 담담하게 첫 번째 전시회 얘길 꺼냈다.
“엄청난 기회였지. 학교에서 그린 그림을 카밀라라는 유명한 기획자가 보게 됐고, 전시회를 열어주겠다고 날 찾아왔던 거야.”
“세상에.”
수현이 스티브의 이야기에 빠져들며 반응했다.
“주변에서 엄청난 축하를 해줬고, 난 내가 정말 대단한 화가가 된 것처럼 기쁨에 취했어. 열심히 준비했고, 그렇게 첫 전시를 열었는데.”
아직도 울컥한지 스티브가 잠깐 말을 멈추었다 이었다.
“알고 보니 전부 미아가 꾸민 일이었어.”
“어? 그게 무슨 소리야?”
“미아가 카밀라에게 부탁을 했던 거야. 둘이 친구였거든. 그러니까, 내 재능을 보고 유명한 기획자가 찾아와 전시를 하자고 한 게 아니었던 거지.”
“하지만 카밀라가 정말 제대로 된 기획자였다면 그런 부탁에 자기 이름을 팔았을까? 어쨌거나 네 그림은 훌륭했을 게 분명한데.”
흥분하는 수현을 보며 스티브가 싱긋 웃었다.
“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안 봐도 알아. 넌 분명히 좋은 그림을 그렸을 거야.”
“그래. 그걸 계기로 다른 전시회를 더 열 수 있긴 했어. 일선화랑과의 연도 그렇게 닿게 되었던 거고.”
스티브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싸움이라니. 그건 무슨 얘기야?”
그리고 수현이 다시 아까 얘기로 돌아가자 스티브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3년 전이야. 그럼 열여섯이었을 때고, 지금보단 어릴 때니까.”
“감안하고 들을게. 말해 봐.”
“미아에게 화를 냈어.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말라고 말이야.”
“어?”
“혼란스러운 감정이 들었거든. 내 유일한 안식처가 그림인데, 거기까지 미아가 밀고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달까. 그러니까 공격적이 됐지.”
“아…….”
“사실 미아는 좋은 의미로 도움을 주고 싶었을 거야. 그런데 난 미아의 도움만큼은 받고 싶지 않았거든. 그때 내 마음이 그랬어. 그리고,”
스티브가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내가 미아에게 화를 내니까 케일라가 덤벼들었던 거야.”
“케일라? 누나가?”
“자기 엄마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고, 철없는 애송이라고 나한테 화를 냈지. 뭐, 거기까진 자기 엄마 일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순간 스티브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전에 캐나다에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고 수현이 물었을 때, 일순 스쳤던 쓸쓸한 표정이 다시 나타난 거다.
“케일라가 사실 자기가 내 친누나란 말을 하더라고.”
“뭐?”
“아빠와 엄마, 자기가 진짜 가족이라면서, 끼어든 건 나였다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수현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지금 들은 얘기가 정말 맞는 얘긴지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소리였다.
“아빠가 엄마를 만나기 전, 미아와 사귀었었대. 아빠가 미국으로 떠나고 미아는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았고, 그게 케일라였다는 거지.”
“허.”
수현의 눈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스티브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그저 안타깝고 아프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가족들을 보는 게 더 힘들었어. 차라리 내가 떠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한국행을 결심했던 거야?”
“마침 일선화랑에서 입주작가와 후원을 제안해줬고, 한국은 엄마의 나라니까 궁금했어. 그 전엔 한 번도 온 적 없었거든.”
“정말?”
“엄마도 반대하는 결혼이었다고 들었어. 당연하지. 그 시대에 국제결혼이라니, 환영할 리가 없잖아. 그러니 엄마도 한국에 날 데리고 간 적이 없었고.”
“그래도 끌렸던 거구나.”
“맞아.”
이야기를 다 털어놓은 스티브가 후련하단 얼굴로 싱긋 웃었다.
“어쨌든 잘한 선택이었어. 여기 와서 친구들도 사귀었고, 그림도 더 잘 그릴 수 있게 됐으니까. 무엇보다 수현이 너를 만났고.”
“그래. 잘 왔어. 스티브.”
수현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려주었다.
처음이 힘들지, 물꼬가 트이자 나머지는 술술 흘러나왔다.
스티브는 한참이나 담고 있던 자기 얘길 털어놓았다.
“음.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상처라는 게 아물려면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까.”
수현은 그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며 위로했고, 어느 순간 스티브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넌 놀랍지 않아?”
“응?”
“뭐, 내가 이런 얘길 여기저기 하고 다닌 건 아니지만, 막상 들으면 엄청 놀라거나 당황할 것 같은데 너무 태연한 느낌인데?”
“아.”
수현이 오히려 그 말에 당황했다.
“뭐, 저마다 각자의 사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흐음. 그러니까.”
가늘게 눈을 뜨고 수현을 바라보는 스티브의 얼굴에 수현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크고 작은 문제들을 저마다 안고 살아가잖아.”
“뭐, 그거야 그렇지.”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 없어 보여도 속은 곪아있기도 하고 말이야.”
그래도 여전히 의구심이 가득한 눈.
수현이 그런 스티브를 위로했다.
“나 역시 그래.”
“어?”
“난, 음…… 입양됐거든.”
“뭐?”
스티브의 눈이 당황으로 일렁였다.
“아, 그렇다고 생판 남은 아니고, 그러니까 큰아버지, 큰어머니 집으로 입양됐어. 두 분이 오래 아이가 없었거든.”
수현이 담담하게 자기 이야길 들려주었다.
“어쩐지. 애가 가끔 너무 성숙하더라.”
짤막하게 요약한 사정을 모두 들은 스티브가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 눈에 자신이 성숙하게 보이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으나, 수현은 굳이 부정하지 않고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내가 내린 결론은 도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야.”
그리고 수현이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상처가 아물고 난 다음엔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순간이 올 거고, 그땐 피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지.”
“그래.”
스티브가 수현의 말에 공감하며 작게 웃어 보였다.
“사실 한국에 와서 많은 부분 치유되긴 했어.”
“정말?”
“응. 사건에서 멀리 떨어진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했고, 정말 집중해서 그림만 그릴 수 있었거든.”
그 말대로 수현과 스티브가 쓰는 아뜰리에는 초반과 달리 완성된 작품들로 빼곡해졌다.
1년 반.
함께 고민하며 그려온 그림들이 차곡차곡 쌓였던 것.
“어떻게 하면 좋을까?”
스티브가 물었다.
“뭘?”
“사실 케일라는 정말 내 스타일이 아니야. 가족으로 엮이지 않았더라도 절대 친구가 될 수 없었을걸?”
“응?”
“외모며 성격이며 생활 습관이며 나랑 맞는 부분도 한 군데도 없고 말이야.”
“하하.”
어쩐지 이런 모습은 남매 케미 같단 생각이 들어 수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날 찾겠다고 한국까지 와서, 그것도 그리기 싫은 그림을, 내 화풍을 흉내 내면서까지 그려서 전시회를 벌인 걸 보면.”
“……?”
“오해를 풀고 싶다고도 했다니까.”
“아, 그거. 나도 자세힌 몰라. 그냥 그렇게만 전해달라고 했어.”
눌러왔던 감정을 털어내고 수현과 이야기를 나누며 뭔가 정리됐던 걸까?
스티브가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케일라를 한 번 만나보는 게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