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06)
106화. 굴레(3)
“스티브!”
며칠 후, 일선화랑 근처의 한적한 카페.
스티브가 나타나자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케일라가 반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상에. 정말 한국에 있었네?”
“알고 찾아온 거 아니었어?”
“그래도, 혹시나 했지.”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한 거야?”
스티브가 까칠하게 굴며 케일라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케일라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넌 아직 법적으로 미성년자야. 여행을 다녀온다고 해놓고 1년 반이 되도록 나타나지 않는데, 찾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네가 내 보호자는 아니잖아.”
“그래. 하지만 가족이잖아.”
“하. 가족.”
“물론 피가 섞인 남매는 아니지만 말이야.”
케일라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과하러 왔어.”
“뭐?”
스티브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떠나기 전, 케일라는 자신이 아빠의 친딸이며 진짜 가족에 끼어든 건 스티브라고 소리를 질렀었다.
그런데, 이제 와 사과라니. 피가 섞인 남매가 아니라니. 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던 거다.
“엄마가 너한테 쩔쩔매는 게 보기 싫었어. 네가 함부로 구는 것도 짜증 났고. 그래서 심하게 말했던 거야. 그렇다고 널 속일 생각으로 했던 거짓말은 아니고, 하…… 나도 오해를 한 부분이 있어.”
케일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아빠 얼굴을 몰라.”
“……?”
“엄마는 한 번도 아빠가 누군지 말해주지 않았어. 엄마 혼자 나를 낳고 키우셨고, 아빠 얘길 꺼내는 걸 싫어했거든.”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얘기였다.
물론 전엔 이런 얘길 나눌 기회도 없었지만.
“괜찮다고 생각하면서도 궁금했어. 누가 내 아빠인지 말이야. 그래서 단서를 수집했지. 그러다가 네 아빠가 나타났던 거야.”
케일라가 작게 미소 지었다.
“엄마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 너무나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더라. 그냥,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해도 축복해주려고 했는데 엄마가 그러더라고. 네 아빠가 엄마의 첫사랑이었다고.”
“……첫사랑?”
“두 분이 같은 고등학교에 다닌 건 알고 있지?”
“들었어.”
“엄마의 앨범을 뒤져봤는데, 네 아빠의 사진이 몇 장 있었어. 엄마랑 다정하게 찍은 사진도.”
“…….”
“그걸 보고 어쩌면 내 아빠가 이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아니, 그보단 진짜 이 사람이 내 아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네 아빠는 완벽해 보였거든.”
케일라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처음엔 몇 가지 가능성만 떠올렸는데, 계속 생각하니까 어느 순간 진짜인 것처럼 생각되더라. 미안해. 그땐 나도 어렸고, 불안정하던 시기였어. 여러 가지로 복잡했고. 너한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거야.”
스티브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그 몇 가지 가능성이란 게 뭐야? 우리 아빠가 친부일 거라고 생각한 데는 이유가 있었을 거 아냐.”
“일단은 내 나이. 엄마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에 날 가진 것 같았어. 네 아빠와 만나다가, 네 아빠가 뉴욕으로 떠난 후에 임신한 사실을 알았던 게 아닐까 했지. 두 번째는 그림이야. 엄마도 전시기획자 일을 하지만 그림은 영 못 그리거든. 그러니 내 재능은 어디서 온 걸까 궁금했는데, 네 아빠가 화가라잖아.”
“겨우 그 정도 이유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거야?”
스티브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묻자 케일라가 얼굴을 붉혔다.
“그래. 말로 꺼내놓고 보니 더 이상하긴 하네. 당시에 엄마가 나보다 널 더 챙기는 것 같기도 했고, 또 네가 나보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게 질투 나기도 했고.”
“케일라.”
스티브가 두서없이 사죄를 이어가는 케일라의 말을 잠시 멈춰세웠다.
“그 사과 꼭 받아줘야 하는 건 아니지?”
“어?”
“너야 마음이 불편하니 사과하고 싶겠지만, 난 당장 마음이 풀리지 않아서 말이야.”
스티브는 그 일로 2년이 넘는 시간을 방황했다. 사건의 진실이 무엇이 됐든 긴 시간 입은 내상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너는 당시 네가 불안정하고, 복잡했고, 어렸다고 하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나 역시 복잡하고 힘들었어. 게다가 나이는 내가 너보다 어렸지. 내가 더 어렸다고.”
“…….”
“대신 노력은 해볼게.”
스티브가 등을 뒤로 기대며 말했다.
“어?”
“당장은 어렵지만, 언젠가는 용서할 수 있게 노력은 해보겠다고.”
“하아.”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겼는지 케일라가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스티브.”
“그리고, 이왕 온 김에 내 소식 좀 두 분께 전해드려. 나, 한국에서 잘 지내고 있고 당분간은 더 여기 머물 생각이라고.”
“하지만 스티브. 너 학교는 어쩔 생각인데? 고등학교 졸업은 해야 할 거 아냐?”
“케일라.”
“어?”
“그것도 내가 알아서 해. 지금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고 곤란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여?”
“그…… 그건 아니지만.”
“그럼 이 이상은 선 넘지 마. 난 아직 널 내 누나로 인정하진 않으니까.”
“…….”
케일라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은 계속 그리고 있는 거지?”
“한국 화랑의 지원을 받고 있어. 생활도 아무 문제 없고. 아빠에겐 1년 전, 한 번 연락했었어. 여기서 좀 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고.”
“정말이야? 아빤 아무 내색 안 하시던데?”
“뭐, 왜 그랬는지까진 잘 모르겠네. 끈끈한 부자 사이는 아니라.”
스티브가 피식 웃었다.
감당할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에 멀리 한국까지 도망치듯 달려왔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괴로웠는데, 어느새 상처는 많이 아물어 있었다.
케일라에게도 심술을 부리고 있었지만, 전처럼 슬프거나 아프진 않았다.
어쩌면 수현의 말대로 조만간 이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해야겠단 생각도 들었다.
그 애의 말처럼 도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테니까.
“이왕 온 거 재밌게 놀다 가. 그리고, 전시장의 그림은…….”
“아, 그거. 사정을 말하고 내렸어.”
“허.”
“나, 하나만 더 말해도 될까?”
케일라가 스티브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전시장의 그 그림. 네가 남겨둔 그림을 따라 그린 거거든. 너를 찾으려면 그 방법이 가장 빠르겠다고 생각해서 저지른 일인데, 그걸 그리다 보니 알겠더라.”
“뭘?”
“넌 정말 대단하다는 거.”
“뭐?”
“나도 미술에 재능이 꽤 있다고 자부했는데, 차원이 다르단 느낌을 받았달까. 세상에, 넌 몇 년 전부터 이미 기질이 보였던 거야. 위대한 작가 될 가능성 말이야.”
“이런다고 내 마음이 풀리진 않아, 케일라.”
“아니, 이건 입에 발린 칭찬이 아니야. 그리고 네 첫 전시도 엄마가 나선 건 맞지만, 카밀라는 엄마의 말 한마디로 움직일 사람이 아니야. 자존심이 얼마나 대단한데. 그러니까, 그녀가 네 그림을 보고 전시회를 열어주겠다고 한 건 네가 그만큼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란 거야.”
“그래…….”
스티브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건 지나간 일에 더는 발목을 붙잡히고 싶지 않았다.
스티브의 눈은 이미 다음 지점, 다음 그림, 다음 전시를 향하고 있었다.
“먼저 일어날게. 그럼 잘 지내다 돌아가.”
“그래. 여행을 하다가 집이 그리워지면 언제든 돌아와. 아! 네가 원한다면 네가 오는 동안은 내가 나가 있을 테니까. 알았지?”
“후. 알겠어.”
스티브가 카페를 나서며 작게 웃었다.
모든 게 풀리진 않았지만 조금은 편안해졌다.
스티브는 어서 일선으로 돌아가 수현과 오늘의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
“다행이네.”
“그런가?”
그날 저녁. 스티브와 수현이 일선화랑 아뜰리에에서 낮의 이야기를 나누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어쨌든, 네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진 거면 다행인 거지.”
“흐음. 그건 그래. 어쨌든 고마워, 수현.”
“뭐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내 부탁을 들어줬잖아. 거기까지 가서 그 그림을 그린 작가가 누군지 알아봐 줬고. 케일라한테 붙잡혀서 귀찮은 얘기도 들어야 했고.”
“글쎄. 난 오히려 네가 말하지 않았던 얘길 다른 사람 입으로 먼저 듣게 돼서 미안했는데?”
“하여간 배려심은.”
“응?”
“어쨌든 소원 하나 들어준다. 내가.”
“소원?”
“케일라 때문에 고생한 것도 있고, 내 고민 상담도 해줬고, 그러면서 너도 감추고 싶었을 네 얘길 해줬잖아. 그럼 나도 뭔가 보답을 해야지.”
스티브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시 원래대로의 스티브였다.
“그거라면 이미 받은 거나 마찬가지야.”
수현이 어깨를 으쓱 올리며 웃었다.
“어? 그게 무슨 소리야?”
“실은 너랑 얘기하면서 내 다음 전시 주제가 좀 더 구체화됐거든.”
수현이 의자를 스티브 쪽으로 당기며 말했다.
“물론 너한테 부탁할 부분이 있긴 해.”
“뭔데?”
“일단 이걸 좀 봐줄래?”
수현이 스케치북을 사락, 넘겨 몇 장의 스케치를 보여주었다.
“……!”
“만약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리지 않을 생각이야. 하지만, 내가 이 주제를 연작으로 그리고 싶은 이유는…….”
제대로 설명을 하기도 전,
“아니. 좋아.”
스티브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는 순간 바로 알았어. 이거, 내 얘기구나?”
스티브가 수현이 그린 솜사탕 그림을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 과거의 일들을 털어놓았던 스티브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그리울 때마다 솜사탕 장사를 찾았단 얘길 했다.
병에 걸린 엄마는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직감했던지, 스티브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갔었고, 거기서 솜사탕을 사주며 어떤 이야기를 들려줬다는 거였다.
그 뒤로 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솜사탕 가게 앞에 앉아 솜사탕이 만들어지는 걸 하염없이 바라봤단 얘기.
수현은 솜사탕이 당시 스티브에게 위로였다는 걸 느꼈고, 전시회 주제인 위로와도 닿아있다고 생각했다. 그 소재를 가져와 ‘스티브의 솜사탕’을 그렸고.
“전시라는 건, 네 첫 번째 개인전을 말하는 거지? ‘위로’를 테마로 한다는 거.”
“맞아. 그거야.”
“아직은 스케치일 뿐이지만…….”
스티브가 수현의 스케치북을 찬찬히 살펴보며 말했다.
“완성된 그림을 보면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어?”
“나한테 오랜 시간 위로가 됐던 거니까. 내가 받았던 위로가 이 그림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진다면 좋을 것 같고.”
잠깐 감상적인 얼굴을 하던 스티브가 돌연 표정을 바꾸며 물었다.
“근데, 아까 연작이라고 했지? 이렇게 솜사탕을 두 개의 시선으로 그린 것처럼 다른 소재들도 표현할 생각인 거야?”
“어. 그렇지?”
“다른 소재는 어떤 건데? 더 찾은 게 있어?”
“아. 생각해 둔 건 있는데, 차차 더 고민해 볼 생각이야.”
“재료는? 어떤 걸로 쓸 거야? 솜사탕은 질감을 제대로 표현할 생각인 거지? 스케치를 보니까 추상적인 느낌은 전혀 아닌데? 여태 네 그림의 스타일로 봐도 그렇고.”
“응. 되도록 사실적으로 그리려고 해. 그러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도 내고 싶고.”
“좋아. 그럼 참고할 만한 그림들이 있어.”
스티브가 벌떡 일어나 책장으로 향하더니 몇 권의 책을 꺼내 뒤지기 시작했다.
“얼른 와! 와서 같이 보자!”
스티브가 진지한 얼굴로 손짓했다. 이제는 완전히 평소의 스티브로 돌아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