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16)
116화. 쇼케이스(2)
2월 17일 화요일.
어제와 다름없는 평일이었지만 수현에겐 달랐다.
“와. 커튼 달아야겠네.”
햇살이 사정없이 내리쬔 바람에 저절로 떠진 눈으로 새집의 풍경이 밀려 들어왔고,
“심장 떨려…….”
오후 3시부터 예정된 쇼케이스를 떠올리자 가슴이 울렁거렸다.
고요하지만 특별한 날.
수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터벅터벅.
침대에서 나온 수현이 계단을 내려가 주방을 향했다.
장을 제대로 보지 않아 냉장고는 텅 비어있어야 했는데, 어제 박선화가 바리바리 싸 들고 온 반찬들이 꽤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모두 일선화랑 강유진 관장이 보내준 것들이었다.
삐삑.
냉동해 두었던 밥을 녹이고 반찬들을 덜어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쪼르륵-.
내려두었던 원두커피를 한 잔 따라 작업공간으로 슬슬 걸어 나왔다.
그래도 겨우 8시.
평소엔 술렁술렁 잘만 가던 시간이 더디게만 느껴졌다.
2시까지는 아직도 한참이니 어쩔 수 없었다.
수현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젤 앞에 앉았다.
시간을 뭉텅뭉텅 보내기에는 역시 그림만 한 게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젤 앞에 앉은 수현은 언제 두근거렸냐는 듯, 무아지경에 빠져 그림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
“춥다.”
겨울의 끝자락답게 바람이 매서웠다. 롱코트와 두꺼운 파카를 입은 사람들이 걸음을 빠르게 옮기며 내뱉는 하얀 입김이 연기처럼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과연 이런 날씨에 통할 수 있을까.
지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내 그림에 시선을 줄까.
긴장으로 가슴이 조여왔다.
이제 10분.
잠시 후면 광화문 지하철역 전광판에 수현의 그림이 떠오를 참이었다.
수현은 인파가 몰리는 대형서점 입구에서 전광판 쪽을 바라보며 서성였다.
마침내 2시 정각.
타앗.
전광판의 광고가 스르륵 사라지더니 잠시 어두워졌다가 반짝 빛났다. 그리고 수현의 개인전에 오를 첫 번째 그림, 스티브의 솜사탕이 나타났다.
보는 이에게 건네주는 듯한 시선의 첫 번째 그림, 솜사탕과 그걸 들고 행복한 미소를 떠올리는 어린 스티브의 모습. 두 장의 그림이 반반씩 화면에 나뉘어 비쳤다.
“후웁.”
수현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가까이 가서 보고 싶은 마음과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어 망설이는 사이,
“……?”
첫 번째 관객이 전광판 앞에 멈춰 서는 게 보였다.
“와, 예쁘다.”
“뭐지?”
연인, 혹은 친구로 보이는 20대 남녀가 그림을 짧게 감상하더니 들고 있던 카메라로 찰칵. 사진을 찍었다.
“직접 그린 건가?”
“그러게, 손으로 그린 느낌이긴 하지? 스캔 받아서 띄운 거 같은데?”
“와, 근데 엄청 섬세하네, 표현이. 진짜 솜사탕 같아. 부드러워 보여.”
커플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 자리를 떴고, 그 자리에 또 하나둘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뭐지?”
“위로?”
“광고인가?”
“근데 왜 아무 표시가 없지? 그림뿐인데?”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들.
정말 노영국 부회장이 노렸던 대로였다.
거창한 소개 글이나 설명 없이 그림만으로 승부를 보자 했던 노영국.
그는 그편이 오히려 대중의 시선을 끌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지하철역을 지나던 사람들은 위로라는 작품명과 그림뿐인 전광판에 오히려 관심을 보이며 바쁜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그걸 가슴 졸이며 얼마나 지켜봤을까.
톡톡.
누군가 수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JK 김영인 부장이었다.
“왔어요?”
반가워하며 인사하는 김영인.
수현이 수줍은 표정으로 꾸벅 인사했다.
“오셨어요?”
“하하. 생각보다 반응이 좋은데요?”
김영인이 눈을 반짝이며 전광판 앞에 선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런가요?”
“전광판에 뭘 걸어놔도 대체로 가던 길을 멈추면서까지 구경하진 않으니까요. 이만하면 좋은 스타트예요.”
그리고 눈짓하자 김영인과 동행한 스태프들이 준비한 카메라로 전광판을 구경하는 행인들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기념이자, 기록으로 필요해서요.”
싱긋 웃어 보인 김영인이 이번엔 다른 스태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전광판 근처로 가 그림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카운트하기 시작했다.
“저렇게까지…….”
“해야죠. 그래야 쇼케이스 효과를 정확히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김영인은 쇼케이스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시간대별 구경꾼들의 숫자와 유형, 반응 등을 기록하기로 했다면서 인상적인 일이 생기면 공유해주겠노라 약속했다.
“근데 날이 추워요, 작가님. 너무 오래 있진 마세요.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
김영인이 눈을 찡긋하며 말했고, 점심을 걸러 마침 허기를 느꼈던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장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그럼 전 먼저 들어가 볼게요.”
“그래요. 아, 그리고 이건 일정표예요. 조금 변동이 있을 순 있는데 일단은 이렇게 알고 계시면 될 것 같아요.”
김영인이 수현의 쇼케이스 일정과 이후 전시 일정을 담은 스케줄러를 건네주었다.
“아, 저도 작업 스케줄을 짜놓은 게 있는데 보내드릴게요. 여기에 맞춰본 다음에요.”
“네. 좋아요. 다음번 미팅 때 보여주세요.”
확실하게 인사를 하고 나니, 김영인과 그 일행들을 다음 장소에서 또 마주치면 굉장히 부끄럽겠단 생각이 들었다.
결국 수현은 백현대 전광판은 포기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5시의 백현대와 8시의 강남역. 분위기가 각각인 장소라 그림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긴 했지만 지켜본다고 딱히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겠고.
게다가 내일부터는 백현대 입학에 앞서 진행될 행사 일정이 빡빡했다.
당장 신입생 환영회가 예정돼 있었던 거다.
일단은 그림과 학교 일에 집중하며 결과를 기다리자고 마음먹으며 수현이 걸음을 가볍게 옮겼다.
그때만 해도 이 쇼케이스로 일어날 나비효과에 대해선 아무것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
-백현대 98학번 신입생 여러분 환영합니다
-백현대 미술대학 신입생 환영회
다음 날 오후.
학교에 들어서자 화려한 플래카드가 곳곳에 걸린 게 보였다.
미술대학 신입생 환영회가 동시에 열리는 날.
신입생과 재학생까지 천 명이 넘는 인원이 북적거려 학교는 그야말로 잔칫집 분위기였다.
“한수현!”
“수현아!”
“이쪽이야, 이쪽!”
그 복잡한 와중에도 매의 눈을 발동한 친구들은 수현을 찾아내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박선화와 차윤희, 그 뒤로 박준영, 오유나도 보였다.
“와, 다들 일찍 왔네?”
“학교가 코앞이잖아. 윤희는 떨린다고 한 시간이나 일찍 왔고.”
“게다가 우리 아직 학교 지리를 모르니까 좀 서둘러왔지.”
“응. 일단 미술과 실기동 쪽으로 가면 되는 거지?”
“어. 언덕 올라서 우회전하면 바로 있더라. 근데 실기동이 두 개로 나뉘어 있던데? 회화과랑 조소과는 같은 건물인데 디자인계열은 다른 건물이더라고.”
“맞아. 디자인계열은 신관에 있어. 아, 예술학과도 같은 건물이던데?”
“그럼 윤희랑 수현이는 같은 방향이고 우린 전부 신관으로 가면 되는 거지?”
“어. 시디과는 몇 층이야?”
“우린 8층. 예술학과는?”
“4층.”
“오, 4층은 구관이랑 연결돼 있다고 하지 않았어? 우리 거기서 자주 만나면 되겠다. 매점도 있다던데.”
“아니, 근데 여기 우리 실기시험 봤던 그 건물 아니냐?”
“그러네? 와, 그땐 정신없이 지나왔는데 이제야 제대로 보인다.”
백현대 캠퍼스는 타 대학에 비해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선배들 사이에선 비가 갑자기 쏟아질 때, 후문에서 정문까지 한 방울도 맞지 않고 가는 법이 공유될 정도로 규모가 작고 건물이 오밀조밀하게 구성돼 있었다.
덕분에 미술대학 안의 11개 과도 밀착돼 있어 교류가 활발할 수밖에 없었다.
11개 과, 3천 명 정원의 백현대 미대만의 행사가 1년에 수차례 기획되는 것도 끈끈한 연대를 유지하는 데 한몫했고.
어쨌든 오늘은 그중에서도 손꼽히게 중요한 미대 신입생 환영회 날이었다.
“그럼 이따가 보자.”
“어. 끝나구 연락하자.”
“잘 다녀와! 파이팅!”
“아으. 왜 떨리냐.”
신관과 구관 앞에서 애들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누었고, 차윤희와 구관을 향하던 수현은 1층에서 헤어져 회화과 실기실인 3층을 향했다.
“환영합니다!”
“새내기 여러분, 이쪽으로 오세요!”
“어마! 너무 귀엽다. 새내기야, 새내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기다란 테이블을 놓고 기다리고 있는 선배들과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이름표와 기념품 같은 걸 나눠주는 역할을 하는 도우미들이었다.
“자, 후배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한수현입니다.”
“한수현, 한수현, 한수혀언. 오! 여깄네. 자, 들어가기 전에 명찰 목걸이 걸어주시고 볼펜이랑 수첩은 기념품이니까 가져가세요.”
“아, 오티 안내문도 들고 가세요. 오티는 다음 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2박 3일 동안 진행될 거고요. 신입생은 무조건 참석해야 하니까 일정은 꼭 비워두세요!”
다다다다.
쉴 새 없이 준비한 멘트를 내뱉으며 신입생들을 안내하는 선배들도 하나씩 명찰을 걸고 있었다.
대부분이 97학번. 수현보다 한 학번 위인 선배들이었다.
‘밝네.’
이런 일이 신나 죽겠다는 얼굴로 행사를 주관하고 있는 선배들.
대학의 분위기인지, 선배들의 특징인지, 어딘가 가볍고 경쾌하고 스스럼없다고 해야 할까. 살짝 새침한 구석이 있는 세현예고 애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빨리 친해지려면 이런 성격들도 나쁘진 않겠지 여겼으나,
드르륵.
안내에 따라 실기동 문을 열고 들어온 수현은 순간 멈칫했다.
‘ㄷ’자로 놓인 긴 테이블.
바깥쪽으로는 신입생들이 둘러앉아 있었고, 안쪽으로는 선배들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도합 100명이 넘는 인원을 위한 자리다 보니 그 규모만 해도 충분히 위압감이 느껴졌는데,
‘저건 뭐야?’
테이블 위에 불길한 물건이 올려져 있었다.
‘술? 벌써?’
마치 결혼식 피로연장처럼 테이블마다 정갈하게 올려진 맥주와 소주, 그리고 종이컵과 과자 몇 봉지.
성질 급한 애들은 벌써 한 잔씩 술을 따라 홀짝이고 있었다.
‘잠깐. 신입생 환영회라고 했잖아. 그럼 교수님도 만나고, 선배와 동기들끼리 인사도 나누고, 앞으로 4년간 대학에서 뭘 하게 되는지 얘기도 듣고 하는 자리 아닌가? 근데 소주에 새우과자?’
적어도 수현이 지난 생에 다녔던 대학에선 그랬다.
반듯하게 때론 지루할 정도로 정해진 틀 안에서 모든 행사가 이루어졌고, 적은 인원이 그 안에서 튀지 않으려고 조용히 지침을 따르는 게 보통이었다.
그래서 수현도 과제와 아르바이트가 전부인 삶을 살았는데,
‘완전 다르네. 무슨 대기업 회식 자리 같기도 하고, 환갑잔치 같기도 하고.’
왁자지껄 떠드는 풍경은 수현이 예상했던 신입생 환영회가 아니었다.
그러나,
“거기 후배님!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 이름이? 한? 한?”
“한수현이네! 야, 광진아. 안경 바꿔라. 저렇게 큰 이름표가 안 보이면 어쩌니. 아니면 벌써 노안이냐?”
“에이! 빛이 반사돼서 그래. 내 자리에선 잘 안 보이거든?”
“딱한 녀석. 얼굴도 노안인데 어쩌다 눈까지. 어쨌든 수현 후배님, 이쪽으로 오세요! 와서 한잔 받으시죠!”
딴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왜인지 시선을 받게 된 수현은 선배로 추정되는 인물들에게 질질 끌려가 낯선 테이블에 착석했다.
“자, 자. 환영해. 백현대 회화과에 온 걸.”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한수현 후배님!”
“받으시오~ 받으시오~”
수현을 향해 싱긋 웃으며 잔을 채워주는 선배들.
수현은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