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2)
12화. 조력자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영국 런던 쇼디치의 작은 갤러리. 테라스에 마련된 아담한 테이블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사진을 넘겨보는 제임스 리 앞으로 아름다운 여성이 다가왔다.
“준. 어서 와.”
제임스 리가 활짝 웃으며 여자를 반겼다.
“제임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사진은 뭐야?”
“한국에서 온 거야. 말했잖아. 고등학생들 전시회 심사를 맡기로 했다고.”
“아, 그거? 별 볼 일 없을 거라고 했잖아.”
“그러게. 괜히 승낙한 건가 후회하던 중이었는데, 생각보다 재밌을 것 같아.”
“그래?”
“이것 좀 볼래?”
제임스 리가 두 장의 사진을 준에게 넘겼다.
“세상에. 이게 뭐야?”
바로 행간을 읽은 준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겠지?”
“그러게. 확실히 당신의 흥미를 끌게 생기긴 했네.”
“뭐, 두고 봐야겠지만. 두고 볼 가치는 있는 것 같아.”
“흐음. 어떻게 될지 나도 궁금해지는데?”
준이 제임스 곁으로 바짝 다가오며 남은 사진들을 흥미롭게 넘겨보았다. 세현예고에서 보낸 전시 참가자 전원의 1차 스케치 사진.
대부분은 고만고만한 수준으로 눈길이 가지 않았지만 유독 눈에 띄는 두 장의 그림이 있었다.
“이거 재미있네.”
준이 몸을 앞으로 바짝 당겨 두 장의 그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장 중 한 장은 최근 제임스가 시도하는 ‘삭제’란 테마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또 한 장은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겉모습을 베껴 그리고 있었다. 둔한 눈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지나칠 그림들. 하지만 준과 제임스같이 예리한 예술가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제임스. 다음번 사진이 오면 나한테 또 보여줄 수 있겠어?”
“물론이지.”
“좋아. 요즘 안 그래도 무료했는데, 간만에 재밌는 일이 생겼네.”
준이 콧등을 찡그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
다시 며칠 후, 한국 세현예고.
김윤수 선생이 심각한 얼굴로 아이들의 과제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건 표절이 분명해.’
학교 측은 유야무야하려 했지만 날카로운 그의 눈엔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한수현과 김하영의 바다 그림은 찍어낸 듯 비슷했다.
바다란 소재는 차치하고라도 부드러운 곡면을 각면으로 바꿔 빛의 굴절을 표현하는 방식이나 오브제의 장식, 색감, 디테일이 우연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닮아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거지? 수현이는 부산으로 갔고, 하영이는 강릉으로 갔잖아. 야외스케치 기간에 둘이 마주칠 일은 없었을 텐데.’
알리바이가 견고했다.
야외스케치 과제는 학교로 돌아온 저녁 즉시 제출했고, 두 그림의 유사성이 발견된 건 다음 날 오전이었으니.
‘그렇다면 야외스케치에서 돌아온 직후인 저녁 8시경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밤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건데…… 하, 그게 가능하려면 내부에서 유출을 도울 사람이 있었다는 소리잖아.’
믿고 싶지 않은 추론.
만약 이번이 처음이었다면 다소 찝찝하더라도 생각이 깊이 가진 않았을 거다. 그러나 김윤수는 지난 소묘 시험 뽑기통 사건 이후, 세현예고에 숨겨진 비리가 있을 거란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그날의 연장선상으로 볼 일이라면, 가만둬선 안 되겠지.’
김윤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이들은 비교적 젊은 선생인 자신에게 쉽게 다가와 이런저런 얘기들을 재잘대는 일이 많다. 확실한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아이들 대다수가 이번 일의 피해자는 한수현이란 데에 입을 모았고.
‘장학생으로 입학해 꾸준히 자기 실력을 보였던 수현이와 기교 외엔 특별할 게 없는 하영이. 만약 뒷거래로 더럽게 꾸며진 일이라면 하영이 쪽에서 촌지를 먹였다는 게 더 신빙성 있겠지. 게다가 이 그림. 자세히 보면 흔적이 남아 있어. 수현이의 그림에 비해 김하영의 그림은 선이나 채색이 급하다. 마치 시간에 쫓겨 베낀 것처럼. 그렇다면 수현이가 오리지널인 게 분명해. 아무래도 좀 더 파헤쳐봐야겠어.’
김윤수는 일의 진상을 파악하는 한편, 더 큰 피해가 일어나지 않게 수현을 보호해야겠다고 결심했다.
***
“표절이라니요. 김 선생. 그 말 책임질 수 있어요?”
다음 날 교사 회의 시간.
김윤수가 야외스케치에서 표절 시비가 붙은 그림이 있다는 안건을 올리자 최형욱 선생이 인상을 구기며 과민 반응을 보였다.
“물론 나도 소문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애들이 이런저런 말을 막 떠들어대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 나이 땐 작은 것도 부풀려서 호들갑을 떨기 마련인데 거기에 선생들이 휘둘려야 되겠습니까?”
“하지만 두 그림을 제가 살펴봤는데, 표절이 의심될 정도로 상당히 유사한 지점이 많았습니다.”
타이르는 말투로 누르는데도 김윤수가 굽히지 않자 최형욱이 이번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김 선생. 우리 세현예고가 우습습니까?”
“……네?”
“아니면 내가 우스운가요?”
“무슨 그런 말씀을…….”
“그런 소문을 저라고 듣지 못했을 것 같습니까? 대꾸할 가치조차 없으니 무시했던 겁니다.”
최형욱이 김윤수를 비롯해 1학년 실기 담당 선생들과 차례차례 시선을 맞추며 강조했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일 아닙니까. 한수현, 김하영. 두 학생은 야외스케치 동안 마주친 일이 없었어요. 그리고 야외스케치에서 그린 그림은 학교에 도착하는 즉시 제출했고,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상담이 시작됐습니다. 누가 누구의 그림을 베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방법도 없었단 말입니다. 이해되세요?”
역시나 최형욱은 알리바이를 들먹였다. 그리고 기세를 더해 김윤수를 몰아갔다.
“아니면, 설마 김 선생은 그림이 밤사이 유출이라도 됐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누가 쥐새끼처럼 실기동에 들어와 그림을 훔쳐내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고작 성적에도 들어가지 않는 야외스케치 때문에? 대체 세현예고의 명성과 시스템을 뭘로 보는 겁니까?”
하. 뻔뻔한 최형욱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김윤수는 참지 않고 반박했다.
“야외스케치와 미술 전시회가 대학 입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내신으로 적용되진 않죠. 하지만 수상자에게 큰 특전이 주어지고, 그게 장래에 무시 못 할 무기가 될 거란 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뭐라고요? 김 선생. 지금 망상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흠흠. 과열된 분위기에 다른 선생들이 민망한 헛기침을 하며 김윤수를 바라보았다.
두 학생의 그림이 유사하다곤 하나 알리바이는 완벽해 보였다.
그러니 누군가의 부정으로 몰아가기엔 애매했고. 게다가 최형욱의 말대로 학교의 명예가 걸린 일.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 학교 측은 야외스케치 직후 과제를 걷어가는 등 절차를 투명하게 하려 노력했다. 그러니 이 일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보는 게 맞지 않나.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얼마나 있다고, 때론 겹칠 수도, 비슷한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거지.
그걸 고의적인 표절로 몰아가는 건 지나친 게 아닌가 하는 우려의 시선들이 김윤수에게 차례로 꽂혔다.
‘아무래도 정공법으론 안 되겠는데.’
분위기가 불리하게 돌아가는 걸 감지한 김윤수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무래도 직구보단 변화구가 필요해 보이는 시점이었다.
“망상도 아니고 세현예고를 우습게 여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단 제자들의 앞날을 우려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으로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허. 뭐요?”
최형욱의 실소에 김윤수가 목소리를 낮추며 슬쩍 그의 약점을 건드렸다.
“이미 교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건 선생님들도 잘 아실 겁니다. 암만 애들 사이의 소문이라 해도 제때 진화하지 않으면 가을 전시회 땐 걷잡을 수 없는 골칫거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크흠.”
은근슬쩍 정곡을 찌르자 최형욱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기분 같아선 김윤수의 말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만에 하나, 소문이 일파만파 번져 가을 전시회 행사에 잡음이 라도 생긴다면 그건 그거대로 큰일이었다.
‘하, 김하영. 그러니까 너무 티 나게 베끼지 말라고 했는데,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최형욱이 미간을 팍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데요?”
여전히 날이 선 목소리. 그러나 아까와는 다르게 들어보려는 자세를 취하는 최형욱의 모습에 김윤수가 씩 웃으며 답했다.
“아이들한테 신뢰를 회복해야죠.”
“신뢰요?”
김윤수가 부드럽게,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화법으로 대안을 제시했다.
“전담 교사를 아이들에게 붙여주고, 그룹 안에서 이뤄지는 감평은 철저히 보안을 지키는 걸로 하면 어떨까요?”
“……전담 교사요?”
최형욱의 눈썹이 사납게 올라갔다.
“지금도 10명 정도씩 소그룹을 만들어 실기 수업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미술전시회 준비도 그런 규모로 나누어 관리하면 어떨까 해서요. 전시회가 열리는 10월까지 해당 그룹 안에서만 그림을 공개하고 작업을 진행한다면 애들도 노출에 대한 부담이 적어질 거고, 소문도 자연스럽게 가라앉지 않을까요?”
뭘 저렇게까지 일을 벌이려는 거야? 김윤수의 말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최형욱이었지만-.
“오, 그거 괜찮은데요?”
“사실 아이디어야 비슷해도 과정과 결과물은 큰 차이가 날 수도 있잖아요. 철저하게 관리된다는 걸 보여주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선생들도 꽤 있어 이대로 뭉개기는 좀 애매했다.
‘흠. 너무 누르거나 몰아붙이면 괜한 반발심만 생길 수도 있겠고, 어차피 하영이도 빼 먹을 건 다 빼 먹은 상황이니까……. 적당히 들어줄 건 들어줄까.’
빠르게 짱구를 굴리던 최형욱이 결국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 정도야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요. 그럼 전담 교사와 반은 어떻게 나누는 게 좋을지 한번 얘기해보죠.”
최형욱의 대답에 김윤수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쨌거나 이만하면 목표를 달성한 셈이었다.
김윤수는 미술 전시회까지 최형욱과 학교 내 썩은 세력들의 부정부패를 밝혀내는 한편 재능 있는 제자의 그림을 지켜내겠다고 속으로 한 번 더 다짐했다.
***
그로부터 3일 후, 공문이 내려왔다.
“오, 전담반을 운영한다는데?”
“전에도 이렇게 했었나?”
“아니, 미술전시회 전담반 운영은 이번이 첨이래.”
10월까지 미술 전시회 준비과정을 진행할 소규모 전담반을 운영한다는 소식에 애들이 웅성거렸다.
“쌤들마다 10명 내외로 맡을 거래. 오, 집중관리 시스템인가 본데?”
“배정은 무슨 기준으로 한대?”
“자유롭게 원하는 선생님 반에 지원하는 방식이라네?”
박선화와 차윤희도 수현의 자리로 와 재잘재잘 떠들었다.
‘이것도 과거엔 없던 일인데…….’
공문을 조용히 읽어 내려가던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시스템이라는 게 갖춰졌나 싶을 정도로 엉성했던 과거의 미술 전시회.
1등인 그랑프리야 특별심사위원의 권한에 따른 것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2등과 3등은 학교 측에서 미리 정해둔 수상자가 있었다.
그러니 학교는 주최 측이 입맛대로 주무르기 쉽게 엉성한 시스템을 유지했고.
그런데, 전담반이라니. 이번엔 왜 바뀐 걸까.
공문의 뉘앙스, 그리고 운용방식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가을에 열릴 미술 전시회의 모든 과정을 더욱 투명하게 진행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혹시 나 말고도 누군가 최형욱 선생 등의 비리를 눈치챈 건가? ……그걸 막으려는 시도가 있었고?’
수현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헐, 이거 선착순 마감이래.”
차윤희가 손뼉을 탁 치며 수현과 박선화에게 얼른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선착순?”
“어. 여기 봐. 실기동에 대자보를 붙여놓고 선착순으로 이름을 쓰는 식으로 반 배정을 한다는데? 인기 많은 쌤들 반은 금방 차겠어. 얼른 가보자!”
차윤희의 말대로 벌써 많은 애들이 삼삼오오 교실을 벗어나 실기동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가자, 우리도.”
수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