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20)
120화. 미대 오리엔테이션(2)
과별로 진행된 환영사는 솔직히 재롱잔치에 가까운 것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새내기 여러분! 우리는 시각디자인과 97학번입니다!”
첫 순서로 나온 시각디자인과 선배들은 특촬물 배우들이나 입을 법한 유니폼을 맞춰 입고는 미술사의 보물이 될 인재를 찾으러 왔다며 다짜고짜 연극을 시작했다.
객석에 뛰어들어 참여를 유도하는 등 시작은 강렬했으나 얼마 안 가 스토리라인이 무너져 분위기가 산만해지더니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Oh, my love- my darling”
조소과 선배들은 귀에 익은 OST를 배경으로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물레 돌리기를 선보였다.
남남 커플의 파격적인 퍼포먼스에 새내기들은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는데, 그러다 보니 이게 왜 환영사인지 혼란스러워졌다.
“이번 그림은 피리 부는 목동입니다. 삘릴릴 삘릴릴리-.”
동양화과 선배들은 예술의 기초는 명화 탐구에 있다며, 무대 한편에 그림을 걸어 거기에 대칭이 되게 서더니 그림과 똑같은 동작을 하면서 우스꽝스러운 상황극을 시작했다. 다섯 개의 상황극 중 한 개는 좀 웃겼다.
“와. 얼굴이 너무 떨려. 억지로 웃느라.”
“무서워 죽겠다. 우리도 내년엔 저런 거 해야 하는 거야?”
자지러지게 웃는 시늉을 하면서도 어딘가 어색하고 썰렁한 선배들의 공연에 새내기들은 한 번씩 남몰래 한숨을 내쉬며 정색했다.
“하하. 그래도 저거 준비하느라 엄청 고생했겠는데.”
“그러니까. 나서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개중 마음이 넓어 보이는 애들은 그저 해맑게 그 시간을 즐겼고.
몇 차례를 지나, 마침내 회화과 선배들도 무대에 올랐다.
“미술의 근본은 눈입니다! 정확하고 섬세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눈 건강, 어떻게 지키고 계십니까!”
신입생 환영회에서 봤던 97학번 선배 하나가 뜬금없이 눈의 소중함을 강조하며 눈 건강을 위한 운동법을 가르쳐주더니 모두에게 따라 하기를 권했다.
“자, 시계방향으로 두 바퀴! 다시 반시계 방향으로 두 바퀴! 빙글빙글 눈동자를 굴려줍니다! 다시 초점을 흐리고 먼 곳을 바라봤다가 하나, 둘, 셋 하면 자신의 코끝을 바라보세요! 하나, 둘, 셋!”
자신감 넘치는 선배의 말에 이끌린 애들은 저도 모르게 눈 운동을 따라 했고, 그렇게 두 세트를 하고 나자 선배가 다시 비장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이 운동을 하루에 한 번 하면 눈이 맑아질 것이요, 열 번 하면 그림 실력이 늘게 될 것이요, 오십 번을 하면 아티스트의 경지에 이르리니!”
그와 동시에 회화과 선배 전원이 자기 허벅지를 때리며 입으로 두구두구두구- 효과음을 냈다.
그러자 마이크를 잡은 선배가 씨익 웃으며 손짓했고, 선배들이 앉은 자리가 홍해가 갈라지듯 양 갈래로 나뉘었다.
와아아-.
효과음이 함성으로 번지더니 양쪽으로 갈라선 선배들 사이로 한 선배가 불쑥 나타나 무대 위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서지훈! 서지훈!”
“서지훈! 서지훈!”
그의 이름을 외치며 열광하는 회화과 선배들. 흡사 사이비 종교의 신도들 같은 모습이었다.
“보십시오! 경지에 오른 회화과의 참 인재! 그의 능력을!”
눈 운동을 지도했던 선배가 회화과의 진짜 주인공 서지훈을 지목하자, 서지훈이 고개를 까딱하며 무대 중앙에 섰다.
“뭐야?”
“그러니까. 너무 불안하다.”
“앞에 선배들이 했던 이상한 공연보다 더 이상한 느낌이야.”
“너도? 나도 수치스러워서 앉아있기가 힘들어. 미치겠다.”
회화과 새내기들은 가시방석에 앉은 양 어쩔 줄 몰라 했다.
유전자에 새겨진 생존 본능이 다가올 수치사를 강렬하게 예고했던 거다.
‘불안한데…….’
수현 역시 이 밑도 끝도 없는 퍼포먼스를 불길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문제를 내주십시오.”
서지훈이 손을 들어 진정하란 신호를 보내더니 묵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몇몇 선배들이 커다란 상자 하나를 들고나와 서지훈 앞에 내려놓았다.
“가로 120, 세로 70.”
미간을 찌푸리던 서지훈이 얼마 후 뚱딴지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모두의 얼굴에 물음표가 새겨질 때, 선배 중 하나가 줄자를 척 꺼내 들어 상자의 길이를 쟀고,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가로 120, 세로 70cm입니다!”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정답을 발표하자 다시 회화과 선배들이 열광했다.
“인. 간. 줄. 자!”
“인. 간. 줄. 자!”
환호하는 이들에게 손을 들며 한 번 더 진정하라는 사인을 보내는 서지훈.
그가 이번엔 새내기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생각하십니까? 지금부터 선착순 5명에게 문제를 받겠습니다. 어느 물건이나 제게 보여주시면 길이와 너비를 정확하게 맞혀드립니다.”
‘뭐야, 차력쇼야?’
수현이 황당한 얼굴로 그런 서지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저요!”
“저도요!”
“여기요!”
흥미를 느꼈는지 무수한 새내기들이 우르르 손을 들었고.
“시디과 중간에 안경 쓰신 분, 섬디과 뽀글머리 하신 분, 동양화과 키 크신 분…… 그 옆에도요. 네, 마지막으로 예술학과 거기 손든 남자분, 무대로 올라오시죠.”
서지훈이 무표정한 얼굴로 신청자 중 다섯 명을 골라냈다.
무작위로 뽑힌 다섯 명은 친구들과 상의하고는 문제로 낼 물건을 하나씩 들고나왔고.
“길이 30, 너비 16.5”
“정답입니다!”
“길이 63, 너비 42.”
“또 정답입니다!”
“길이 1m 52, 너비 50.”
“또, 또 정답입니다!”
연이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답을 내놓아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마지막 문제.
“물건은요?”
“저요.”
“네?”
“먼저 제 키, 그리고 쭉 팔을 벌려볼 테니 그 길이를 맞춰주세요.”
짓궂은 얼굴을 한 남자애 하나가 양팔을 쭉 벌리며 나아왔고, 서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문제를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뇨. 전 이 문제로 내고 싶은데요?”
슬쩍 도발하는 듯한 말투에 서지훈이 피식 웃더니 답했다.
“키, 173. 양팔 너비는 170.”
순간, 출제자의 얼굴이 하얘졌고 우르르. 줄자를 든 선배들이 달려들어 출제자의 키와 양팔 너비를 쟀다.
“이번에도 정답입니다!”
와아아-.
이쯤 되자 강당은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서지훈이 싱긋 웃으며 출제자에게 말했다.
“새내기라 아직 모르나 보네? 나라면 그런 문제를 내지 않았을 건데.”
“네?”
“인체의 이상적인 비율로 보면 신장이랑 양팔 너비가 같아야 하거든. 그러니까 후배님은 직접 자기 팔이 좀 짧은 편이란 걸 증명한 셈인 거지. 하하!”
후배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고, 애들이 서지훈을 따라 와하하 웃었다. 90년대니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지적이며, 농담이었다.
어쨌거나 화려하지만, 정확한 목적은 알 수 없는 선배들의 환영 공연이 끝나고는 과별로 흩어져 친목의 시간을 보내게 됐다.
“선배님, 진짜 대단해요. 길이를 어떻게 딱딱 알아봐요?”
“뭘, 그 정도를 가지고. 우리 동기 중에 현태란 친구는 색깔 보는 눈이 기가 막혀. 아무 색이나 보여주면 색이름을 줄줄 말한다니까? 간단한 색 말고 희한한 색이름까지 다 알거든.”
“와.”
잡기에 불과하고 그림을 많이 그리다 보면 저절로 익혀지는 부분이긴 했다.
수현도 사물을 척 보면 대강의 길이 정도는 머리에 떠올릴 수 있었고, 색깔을 구분하는 능력도 뛰어난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직 훈련이 덜 된 새내기들에겐 서지훈의 장기가 굉장히 신기하게 여겨진 모양이었다.
자리를 옮겨 회화과 모임 장소에 둘러앉은 다음에도 수많은 후배가 서지훈을 둘러싸고 재잘재잘 떠들고 있었다.
‘되게 쾌활한 성격이네. 주목받는 것도 즐기는 타입 같고.’
다만 수현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이런 무리의 행동을 관찰할 뿐이었다.
수현의 입장에선 하나 신기할 게 없는 재주를 과장하며 칭찬할 이유도 없었고, 사람을 제대로 볼 때는 이렇게 거리를 두는 편이 좋았으니까.
그런데 그게 오히려 눈에 띄었던 걸까?
“후배님은 말이 없네?”
서지훈이 수현을 지목하며 말을 걸었다.
“한수현?”
수현이 걸고 있는 목걸이를 보고 이름을 확인하는 서지훈.
“너 혹시 예고 출신이니?”
그리고 서지훈은 음료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 수현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네.”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시 후, 벌써 몇 달이 지나긴 했으나 일반고에서 왔다고 보기 힘든 기장의 긴 생머리를 하고 있으니 예고를 나왔거나 재수생일 거라 생각하는 게 당연하긴 했다.
“어휴. 그렇구나.”
서지훈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음료를 수현의 잔에 따라주었다.
“어디?”
“세현이요.”
“하아, 세현. ……그렇다면 내가 조언할 게 좀 있는데 말이야.”
“조언이요?”
“너, 학교에 들어와서는 예고 출신인 거 티 내지 마라.”
“……?”
보통 조언이라는 건 상대를 걱정하고 배려하는 마음에서 건네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서지훈의 말은 그보단 경고에 가깝게 느껴졌다.
이 인간, 왜 적대적이지?
“우리 학번에도 예고 출신들이 있는데 분위기를 엄청 흐리거든. 특히 세현 애들이 말이야.”
수현의 눈에 깃든 의문을 읽었는지 서지훈이 벽에 등을 기대며 설명을 이었다.
“배려가 없더라. 조별 과제에도 비협조적이고, 말도 함부로 하고 말이야. 아, 너도 집이 좀 사니?”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짐작됐는데, 그 분풀이를 애먼 수현에게 하는 느낌이라 수현 역시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거야 뭐, 상대적인 부분 아닌가요?”
“하, 그런가?”
“중요한 건 그림을 대하는 태도라고 생각해요. 저는 열심히 할 마음이고요.”
“흠. 그래. 뭐, 예고 애들이라고 다 똑같진 않을 테니까. 저 친구도 예고 출신이라기에 눈여겨봤더니 다른 애들이랑 다르더라고? 친화력도 좋고, 선후배 개념도 확실히 잡혀 있고 말이야.”
서지훈이 턱으로 대각선 방향을 가리켰다. 그 끝에 선배, 동기들과 와하하 웃으며 분위기를 주도하는 김민준의 얼굴이 보였다.
‘보는 눈이 이래서야.’
수현이 말을 아끼며 앞에 놓인 종이컵을 들어 음료를 홀짝였다.
94학번, 서지훈.
1학년 2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갔다가 제대 후 곧바로 학교 행사부터 얼굴을 들이민 인물이었다.
곧 복학이라선지 자기란 존재를 제대로 각인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일에 나서는 듯했고.
차기 학생회장으로도 거론되는 회화과 2학년 인싸.
나이는 수현보다 4살 위니, 스물넷이었다.
꽤나 경험 많은 어른처럼 말하고 있지만 이미 그 나이를 한참 넘어 마흔에 가까운 나이까지 살다 온 수현에겐 그저 어릴 뿐이었다.
색안경을 끼고 수현을 보는 것도, 알아서 굽히고 들어오는 김민준을 칭찬하는 것도 영 느낌이 좋지 않았고.
‘게다가 이 인간, 좀 관종인데?’
지켜보니 주목받고 싶은 욕구가 너무나 강한 인간이었다.
모든 대화의 중심이 되려 나서며 다른 애들의 말을 툭툭 끊거나 농담을 가장해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 것도 여러 번이었다.
‘거리를 좀 두는 게 낫겠다.’
경험상 이런 유형은 피하는 게 제일이었다.
스윽.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떨어진 빈자리로 짐을 옮겼다.
그렇게 잠시, 갑갑한 레이더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으나,
다음 날.
수현은 미술과 전원의 시선을 온몸에 받는 사건의 중심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