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34)
134화. 7월
식당에 도착해 주문을 하자마자 이태훈 교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작비가 나왔는데 말이지.”
그리고 그 말의 위력이 어찌나 컸던지 모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허, 천만 원이요?”
“진짜요?”
거금이었다. 아직 남았던 피곤을 싹 달아나게 하는 액수. 그러나 이태훈 교수는 아직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물론 평균적인 광고 금액으로 볼 땐 아주 큰 돈은 아니야. 프로젝트를 집행할 때 잡은 예산에서 크게 벗어나는 금액을 지급할 수 없다는 문제도 있고. 그래도 천만 원이면 어지간한 공모전보다는 훨씬 좋은 대우일 거야.”
“엄청 크죠. 저희가 프로도 아니고.”
“맞아요. 수업 과제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부상이 따라온 거잖아요.”
이태훈 교수는 일반적인 경우에 비춰 말했으나, 아직 학생 신분인 애들에게 이만한 대우는 놀라운 것이었다. 애들이 손을 휘휘 내젓자 이태훈 교수도 편한 얼굴로 싱긋 웃어 보였다.
“그래. 사실 대행사 쪽에서도 크게 신경 써준 부분이긴 해.”
설명에 따르면 부스터 음료 광고는 단발성이 아닌 시리즈로 제작될 계획이라 했다.
그 여러 편 중 하나로 수현 조의 애니메이션 광고가 상영되는 것이고.
또 광고 제작비는 시리즈를 통으로 묶어 산정됐는데, 애니메이션 광고는 애초에 큰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지라 책정된 예산이 300~500만 원 정도로 작았다고 했다.
대학생들에게 던지는 공모전 형식, 기대 없이 진행된 프로젝트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어마어마한 게 나와 대행사 쪽에서도 크게 놀라고 기뻐했다는 거다.
어쨌거나 광고대행사 측에서 먼저 상금 액수를 상향 조정하겠다는 말을 꺼냈는데, 그게 천만 원이란 액수였다.
모든 상황을 듣고 보니 그야말로 최선의 결과였다.
이태훈 교수의 말대로, 이 시기 이만한 광고주의 광고 제작비 단가를 고려하면 천만 원은 절반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었지만, 여러 상황을 고려해볼 때 최대한 힘써줬다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와, 그럼 인당 200만 원이네.”
박준영이 애들을 휙 둘러보며 말했다.
박준영, 박선화, 차윤희, 오유나, 수현까지 다섯 명이 한 조로 고생했다. 상금을 똑같이 나누면 한 사람이 200만 원씩 가져갈 수 있었다.
“근데 그렇게 나눠도 될까?”
수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유나가 장비 구입하는 데 지출을 크게 했잖아. 그 장비 덕분에 과제가 수월했었고.”
슬슬 새로운 장비가 나오면 유나의 장비는 금세 똥값이 된다.
수현은 아직도 그 점이 안타깝던 참이었다. 그걸 짚으니 애들도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오유나가 돈을 많이 썼지.”
“맞아. 장소 제공에 장비 제공에. 이번에 오유나 공이 컸지.”
“그럼 오유나한테 좀 더 몰아줄까?”
그런데,
“괜찮아.”
오유나는 역시 쿨했다.
“장비들 한 대만 남기고 죄다 중고로 팔기로 했어. 가격도 잘 쳐줘서 별로 차이 날 것도 없고.”
“그래도 손해는 봤을 거잖아. 한두 푼도 아닐 건데.”
“아, 괜찮다니까? 그렇게 따지면 너희가 수작업할 때 더 고생했는데? 너희들이 몸으로 때운 거, 나는 돈으로 때운 거야. 그리고,”
오유나가 잠깐 미간을 찡그렸다.
“솔직히 나, 처음엔 상금에도 욕심 없었어. 별로 큰돈 아닐 거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러니까.”
“허.”
“와.”
쿨함을 넘어선 대범한 발언에 애들이 입을 떡 벌렸다.
박선화, 박준영, 차윤희 모두 집안 형편이 넉넉한 애들이었지만, 오유나는 재벌가의 자제라 급이 달랐다.
한 번씩 그 차이가 확- 실감 날 때가 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그런데,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 처음엔 그랬다고. 처음엔.”
“어?”
“그게 무슨 말이야?”
애들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오유나가 새침하게 말했다.
“액수로만 보면 큰 금액은 아니지만 의미가 있는 거잖아. 몇 달이나 같이 고생했고, 노력했고, 그 결과로 받은 상이니까.”
애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그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오유나가 버럭하며 말을 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몫은 정당하게 가져가겠다고. 액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의미가 중요한 거니까. 그러니까 장비로 신세 졌니 뭐니 그런 소리 하지 마. 똑같이 고생했으니까 똑같이 나눠! 우리 다 같은 조 아니었어?”
“와.”
“멋지다. 오유나.”
“오늘부터 언니라고 부를게, 유나야.”
민망함을 감추려 오히려 큰소리를 내는 오유나. 그런 유나의 성격을 아는 친구들은 대충 넘어가기로 합의하며 까르르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수현도 활짝 미소 지었고.
‘유나도 점점 성장하는구나.’
누구에게도 제대로 마음을 열지 않았던 유나는 점점 애들과 진한 우정을 쌓아가고 있었다.
진짜 친구가 되는 법을 알아가며 그 기분을 즐기는 것 같았고. 그걸 보는 수현은 어쩐지 흐뭇해졌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초조한 건 이태훈 교수뿐이었다.
“얘들아, 훈훈한 얘기 중에 미안하긴 한데 말이야.”
이태훈이 나직한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너희, 장비를 벌써 팔아치웠다고?”
“네. 왜요, 교수님?”
“어, 그게 문제가 될까요?”
“수업은 이제 끝이잖아요?”
뭐가 잘못인지 모르겠단 얼굴로 애들이 눈을 끔뻑이자 이태훈 교수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음. 학기 초에 내가 말을 하긴 했는데, 애니메이션 광고 수업의 심화 버전으로 단편 애니메이션 수업이 이어질 거라고 했잖니. ……다들 거기 들어올 생각은 없는 거였어?”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은 눈으로 이태훈 교수가 간절하게 물었으나, 애들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한 학기 동안 많이 배웠습니다, 교수님. 엄청 진하게요.”
“네. 부족함을 깨달아가는 것도 정말 좋은 공부였던 것 같습니다.”
“애니메이션 정말 멋져요.”
감사하는 말로 포장이 되어있으나,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는 상냥한 거절이었다.
결국 이태훈 교수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애꿎은 스파게티 면만 돌돌 말았고-.
그렇게 식사는 조용히 마무리되어 갔다.
잠시 후, 이태훈 교수와 헤어진 애들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백현대 앞 놀이터로 향했다.
조금만 더 떠들고 헤어지기로 한 거다.
“아, 근데 선배들은 어떻게 할까?”
아직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대한 협의가 끝나지 않아 애들은 상금 배분을 두고 고민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게, 도의상 우리만 꿀꺽할 순 없는 노릇이잖아.”
이태훈 교수의 말로는 여름방학 중 제작비가 입금될 거라 했다. 관련 서류 처리 건으로 썬더기획 담당자가 따로 연락할 거라 했고.
일차적으로는 5명의 통장에 나누어 입금되겠지만 애들에겐 수족처럼 부린 선배들이 있었다.
회장 이경민과 인간줄자 서지훈.
그 둘이 영혼을 잃을 때까지 스캔 작업을 도와준 덕분에 작업이 훨씬 빨라졌고, 그 공을 모른 척할 순 없었다.
“아, 선물이면 충분할 거야. 돈은 안 받을 거라.”
그러자 수현이 싱긋 웃으며 정리했다.
“안 그래도 한 번 얘기가 나온 적이 있거든. 아무래도 우리가 일등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수현은 몇 주전 상금이 걸린 과제의 룰을 선배들에게 설명했던 일을 애들에게 전했다.
둘 다 작은 선물만 해줘도 고맙겠다고 손을 저으며 노예에게는 그만한 보너스도 감지덕지라는 말을 했다는 것까지.
“진짜?”
“큭큭. 자기들이 노예인 건 인정하는구나.”
“알뜰하게 부려 먹긴 했어. 근데 수현아. 그거 종신계약이야? 다음 학기에도 써먹을 수 있나?”
“글쎄. 이 정도면 자유민의 신분을 회복시켜줘도 될까 생각 중이긴 해.”
애들과 수현이 크게 웃으며 이번엔 선배들에게 줄 선물을 고민했다.
즐거운 이야기로 오후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
몇 주 후.
부스터를 만든 K제과 본사에서 최종 시사가 열렸다.
다소 딱딱하던 시사회실의 공기에 수현과 친구들, 이태훈 교수도 살짝 긴장했으나 상영 후 함박웃음을 터트리는 광고주의 얼굴을 보며 눈 녹 듯 마음이 풀어졌다.
분위기는 무척이나 훈훈했다.
썬더기획의 박재형 CD는 자기 딸이 처음 ‘아빠’란 말을 했을 때보다도 더 벅차오르는 경험을 했다며 수현과 친구들의 작업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덕분에 광고주에게 개인적인 복수도 할 수 있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는데, 뭔지는 몰라도 좋은 게 좋으려니 웃어넘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재형은 앞으로 자주 보자는 인사를 건넸다.
무슨 의미일까 싶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아, 이 말이었구나 싶어졌다.
-이번엔 제대로 된 제작비가 지급될 거야! 광고주가 제대로 꽂혔거든. 아, 광고는 봤어요? 어제 9시부터 온에어 됐는데!
박재형은 직접 수현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부스터 광고가 온에어되자마자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고, 광고주가 크게 흡족하며 곧바로 후속작을 언급했다는 거였다.
애니메이션 광고로 시리즈물을 기획할 수 있겠냐는 미션이 떨어졌으니, 당연히 수현의 조에 다음 작업이 가능하겠냐는 의사를 묻는 게 수순이었다.
문제는 수현과 친구들의 일정이었다.
“너무 반가운 소식이긴 한데, 당장 작업에 들어가긴 어려울 것 같아요. 저도 그렇고, 친구들도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미지수라서요.”
-아, 그래요?
박재형은 난감한 듯 말꼬리를 흐렸으나 곧 광고업계 종사자다운 순발력으로 대안을 제시했다.
-좋아요. 그럼 이건 어떨까. 스타일만 잡아주는 정도면.
“네?”
-사실 애니메이션화 하는 거야 전문 업체에 맡겨도 될 거라, 중요한 건 오리지널리티잖아요? 첫 번째 광고에서 보여준 스타일! 그것만 제대로 뽑아줘요! 뒤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 아, 물론 페이도 제대로 지급할 겁니다.
“어, 그 정도라면 친구들이랑 논의해볼게요.”
-긍정적인 답 해줄 거죠? 내가 어지간하면 매달리는 스타일이 아닌데, 여기 여러 사람 목이 달려있어. 제발, 부디. 긍정적으로 고려해줘요.
“하하. 네. 그럴게요.”
잘 봐달란 의미를 강조하려는 건지, 광고 제작비는 전에 들었던 것보다 몇 주 빠르게 입금됐다.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여러모로 신선한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수현은 자신의 그림이 꿈틀꿈틀 움직이며 TV 브라운관에 나온다는 점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아트웍을 잡아주는 정도야 어려울 일은 아니니까.”
그리고 시간을 쪼개 다음 광고에 참여해보는 것도 재밌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갔다.
일단은 거기까지였다.
-어, 수현아. 또 난데.
방학이 시작됐는데 수현은 오히려 학교에 다닐 때보다 더 많이 조교실의 연락을 받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학교 과사무실과 메일로 수현과 친구들의 애니메이션 광고를 잘 봤다며 함께 작업해보고 싶다는 제안이 물밀듯 쏟아졌던 거다.
조교는 그 소식들을 모아 한 번씩 수현에게 알려주었고, 대신 거절하는 업무까지 맡아주고 있었다.
“죄송해요, 조교님. 저희 때문에 더 바쁘시겠어요.”
-아냐. 나름 재밌어. 너희 아니면 언제 그런 기업들을 상대해보겠니. 게다가 거절하는 맛도 꽤 짜릿하고 말이야. 근데, 진짜 이번에도 거절이야? 꽤 큰 건수던데?
“네. 애들도 바쁘고, 저도 방학 중엔 어딜 좀 가보게 됐거든요.”
-흐음. 그래. 알았다. 그럼 방학 잘 보내고 다음 학기에 보자. 아, 심심하면 학교에도 좀 놀러 와.
“네, 그럴게요.”
-그래, 꼭이다?
“네, 조교님.”
통화를 마친 수현이 다이어리를 펼쳐 날짜를 확인했다.
수현이 현재 서 있는 곳은 1998년 7월.
다이어리에는 여기까지 얼마나 숨 가쁘게 달려왔는지를 보여주는 빽빽한 궤적 외에도 연말과 내년까지의 일정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첫 개인전이었다.
“진짜 곧이네.”
수현이 긴장한 숨을 내쉬었다.
작업에 속도가 붙으면서 연말로 미루려 했던 개인전을 10월로 당겼다.
이제 3개월이면 수현의 위로가 제대로 관객을 만나게 되는 거다.
다행히 그림은 대부분 완성되었고, 이제 한 작품만 남은 시점.
수현은 잠시 숨을 고르기로 했다.
마침 또 하나의 중요한 이벤트도 있었다.
이틀 후, 홍콩에서 스티브의 전시회가 열릴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