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44)
144화. 역전극(2)
2년 전, 런던에서 열린 익명 전시회에서 수현의 그림 [창>을 놓쳤던, 아니 스스로 놓아버렸던 개코 윌터.
대신 안전한 그림을 몇 점 구매했고 그것으로 어느 정도 수익을 봤으나 윌터는 한 번씩 그때 일을 떠올릴 때 입맛이 씁쓸했다.
자신이 가치 없다고 판단한 그림을 평론가 캐서린이 가져갔고, 이해할 수 없는 열풍이 불더니 그림값이 훌쩍 뛰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뭘 놓친 거지?’
윌터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냥 처음 느낌을 따라갔어야 했나?’
수현의 그림 ‘창’을 봤을 때 윌터는 분명 어떤 에너지를 느꼈다.
그건 될만한, 특별한 작품을 봤을 때 느껴지는 아주 예민한 감각의 신호였다. 그러나 익명 전시회 마지막 날, 작품의 주인이 누군지 밝혀졌을 때 윌터는 고개를 저었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신인이라니, 스타성을 가지기도, 세계 시장에 진출하기도 여러모로 불리할 조건.
어쩌다 한 번 영감을 주는 그림을 그려냈다 하더라도 그게 지속되긴 어려울 테고, 잠시 뜨거웠던 인기는 금방 사라질 거라 여겼다.
하지만 수현의 그림 [창>은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러 곳에서 회자되고 있었다. 그러니 윌터는 그날의 판단이 틀렸던 건가 헷갈리던 참이었는데,
“한국에 아주 괴물 같은 신인이 하나 등장한 모양이에요.”
조금 전, 윌터는 자기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괴물 같은 신인이라니요?”
뉴욕과 홍콩을 거쳐 잠시 들렀던 일본. 이렇다 할 작품을 발견하지 못해 구매를 망설이던 그에게 오랜 친구가 흥미로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JK라고 한국의 대기업에서 키우는 신인인데, 작품성도 스타성도 아주 뛰어난 모양이에요.”
“대기업에서 키우는 신인이라고요?”
한국 출신의 작가라 하면 제임스 리 정도를 떠올리기 쉬웠다.
그런데 혜성같이 등장한 신인이라니, 그것도 대기업에서 작정하고 밀어주고 있다니 누군가 싶어 윌터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리고.
“갓 스물인데 첫 개인전을 열었대요. 전시회 전에 쇼케이스로 그림을 깜짝 공개하면서 화제를 모았는데, 오픈하고는 관람객이 쏟아지듯 전시장으로 들어오고 있고요. 그 전시회 타이틀이 ‘위로’라던가. 현재 한국 상황이랑도 딱 맞아떨어져서 반응이 엄청난 모양이에요.”
“위로요?”
“네. 어쨌든 이 전시를 아예 상설 전시로 전환하겠다는 얘기까지 나왔다는데, 하. 궁금하지 않습니까? 지금 한국에선 난리라더군요.”
“허허. 그래요?”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리고 윌터는 인맥을 동원해 화제의 전시의 주인공이 한수현이란 걸 알아낼 수 있었다.
그 순간부터 온몸이 부르르 떨리며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고.
“일단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봐야겠어.”
윌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이번에도 그 그림이 자신에게 어떤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면, 한번 반짝이고 말 그림이 아닌 많은 사람을 열광하게 만들 그림이 될 거라면 놓쳐서는 안 될 거라고.
이번에는 꼭 그 그림을 사고야 말겠다고 결심하면서.
하지만 몇 시간 후.
한국에 도착한 윌터는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판매 계획이 없다고요?”
급한 마음에 전시장으로 전화부터 걸어 작품 구매 담당자 연결을 부탁했는데, 전시 작품을 팔 수 없다는 황당한 답이 돌아왔던 거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되묻던 윌터가 질문을 고쳐 물었다.
“설마, 이미 구매가 끝난 겁니까?”
그러자 안내 직원은 다시 묘한 답을 내놓았다.
-상설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은 작품을 판매하지 않을 계획이라서요. 연작으로 진행될 ‘표정’ 그림만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미간을 잔뜩 찌푸리던 윌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쨌거나 일선아트센터 관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아, 나는 윌터 센슨이라고 합니다. 영국에서 온 윌터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죄송하지만 관장님은 지금 사무실에 안 계셔서요. 이달 말까지는 ‘위로’ 전시장으로 거의 출퇴근하실 거라, 빠르게 연락드리긴 어려울 겁니다.
“뭐요? 관장님이 ‘위로’ 전시장으로 출퇴근한다고요? 하, 알았습니다.”
달칵.
전화를 끊은 윌터가 초조한 얼굴을 했다.
“미치겠네. 일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러니까 당장 팔 수 있는 그림은 달랑 한 점이고 그마저도 꾸물대면 놓칠 수 있단 거잖아? 게다가 관장이 그 전시장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고? 이거 뭔가 있다. 뭔가 있어. 허, 오랜만에 긴장이 좀 되는데?”
윌터가 척 손을 내밀어 택시를 잡고는 기사에게 목적지를 적은 종이를 내밀었다.
위치는 당연하게도 ‘위로’ 전시가 열리는 일선아트센터 특별전시장이었다.
***
같은 시각.
수현은 아뜰리에로 꾸민 자기만의 공간에서 새 작품 구상에 들어가고 있었다.
상설전시 동안 새롭게 걸 ‘표정’의 연작을 얼른 그리고 싶었던 거다.
“빨리 완성하고 싶다.”
머릿속에는 벌써 완성된 그림이 꽉 차게 들어있었다.
맨 처음 ‘표정’ 그림을 그렸을 때와는 또 달랐다.
그때는 간접적인 경험이 절반, 아주 오래된 기억에서 꺼내 온 감상이 또 그 절반의 절반쯤 되었다면 이번에 영감을 받은 소재들은 따끈따끈한 최근의 일에서 온 것이었다.
“허락해주셔서 다행이야.”
수현이 씩 웃으며 쓱쓱 스케치를 해나갔다.
먼저 그린 건 떡볶이 포장마차 사장님인 나경자의 얼굴이었다.
연작을 결정하고 수현은 나경자와 전시장을 찾은 몇몇 관람객에게 그들의 얼굴을 그려도 될지 허락을 구했다.
다음 그림의 모델이 되어달라는 화가의 말에 대부분의 사람은 흔쾌히, 오히려 영광이라며 기쁘게 승낙했고 즉석에서 크로키할 시간까지 따로 내어주었다.
사진 촬영도 문제없었다.
그렇게 얻은 새로운 얼굴들은 표정 연작에 안성맞춤인 것이었다.
슬픔, 기쁨, 분노, 즐거움, 설렘, 무기력. 자기만의 사연을 품고 각각의 감정을 경험한 사람들이 생각지 못한 위로를 얻었을 때, 짓게 되는 표정.
그건 전시장 관람객들의 얼굴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었으니까.
‘오히려 처음 그림보다 더 생생할 것 같아.’
전시를 찾는 사람들은 성별, 연령, 직업, 어느 쪽으로든 치우치지 않고 골고루 모였다. 그러니 다양할 수 있었고, 솔직한 감상을 표현해준 덕분에 수현은 궁금했던 표정을 실컷 볼 수 있었다.
그림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위로를 받은 그들의 표정을.
게다가 모델이 되어줄 사람들은 넘쳐났다. 여태 전시장을 찾아준 사람들과 앞으로 와줄 사람들까지.
연작을 얼마든지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소재는 풍성했다.
“확실히 자연스러워.”
수현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스케치를 확인했다.
전시장에서 보았던 사람들의 표정은 머리와 가슴에 생생하게 각인돼있었다.
그러니 고개를 갸웃할 필요 없이 쓱쓱- 얼마든지 손끝에서 그려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 수현이 그림에 몰입해갈 때,
띠링-.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한수현 작가님, 급히 연락 부탁합니다.
모르는 번호였다.
***
-역시나 예상을 빗나가는 법이 없네요.
김영인 부장에게 내용을 전달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심드렁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제 번호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인맥을 죄다 동원했겠죠. 학교로 알아봤을 수도 있고, 그 정도야 맘만 먹으면 어려울 일은 아니니까요. 어쨌든,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답은 안 했어요.”
-잘하셨어요. 작가님이 대답할 필요 없습니다.
김영인이 차갑게 대꾸했다.
“그분들이 제가 생각하는 그분이 맞는 거죠?”
수현이 잠시 뜸들이다 입을 열었다.
처음 자신에게 연락해달라는 메시지가 도착하고, 그게 누구의 번호일까 고민하고 있을 때. 몸이 달았는지 상대가 연달아 다음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 황정식이라고 합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이야기로 잘 풀었으면 합니다.
이름을 들어도 수현이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아 그대로 두자 이번엔 폭탄 같은 메시지들이 쏟아졌다.
자신이 수현의 대선배다, 한국 화단의 원로인데 어째서 알아보지 못하고 답이 늦느냐는 꾸지람과 JK에서 선배 작가들을 오해해 위해를 가하고 있는데 한수현 후배가 나서서 해결을 해줘야 하지 않겠냐는 회유식 메시지.
그리고 다시 화백 누구는 학교에서 퇴출당하고 또 다른 누구는 전시가 취소되었고 안 그래도 힘든 생계가 막막해졌다며 이 모든 게 JK에서 손을 쓴 것인데 이걸 좌시한다면 한수현 작가 역시 앞날이 평탄하지 않을 거라는 분노의 으름장.
이 일로 자신들이 붓을 꺾게 되면 한국 화단 역시 빛을 잃게 될 것이고 한수현과 JK란 이름은 후대의 심판을 받게 될 거라는 망상.
그쯤 되자 수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내 그림을 10만 원짜리라 소문을 낸 당사자구나, 하고.
그래도 문자로만 연락을 해오니 다행이기도 했다. 상대는 전화까지 먼저 거는 건 자존심 문제라고 생각한 건지 자꾸 수현에게 연락하라 요구하면서 문자만 보내왔다.
어쨌거나 수현은 조용히 전화번호를 검색해 JK 김영인 부장에게 상황을 알렸고, 김영인은 수현에게 반응할 필요 없다며 이 일은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겠노라 말하는 중이었다.
-맞아요. 이번 사건의 핵심 인물요. 하, 정리되면 작가님한테도 전하려고 했는데, 우리가 무섭긴 무서웠나 보네요. 아마 이리저리 백방으로 알아봐도 해결 방법이 없으니 마지막으로 작가님한테 연락해 진상을 부리는 걸 거예요.
“네…….”
-작가님, 혹시라도 흔들리거나 맘 약해지면 안 됩니다? 그 인간들 수치도 모르고 양심도 없어요. 사실 전국대회 때부터 지저분한 과거가 밝혀져서 우리 쪽에서 조용히 정리했던 역사가 있는데, 이번에 또 이러는 걸 보니 역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김영인이 평소 그답지 않게 흥분하더니 허허 웃었다.
-어쨌든 대처할 필요없이 지금처럼 아무 답 안 하시면 돼요. 필요하다면 번호를 바꿔도 되겠고, 아니다.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어요. 작가님한테 쓸데없는 연락하지 못하게 제가 이야기할게요.
아무래도 황 화백 무리는 수현에게 연락한 보람도 없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질 운명인 듯했다.
-그보다 새로운 소식이 있어요.
그리고 잠깐 거칠어졌던 목소리를 가다듬은 김영인이 화제를 돌렸다.
“소식요?”
-작가님 그림 ‘표정’요. 구매 문의가 상당해요.
“벌써요?”
-매스컴의 효과도 있겠지만, 전시가 워낙 좋으니까요.
김영인이 부드럽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 마음 같아서는 가장 높은 금액을 부르는 쪽에 그림을 팔자고 하고 싶은데, 작가님한테 맡기는 게 어떨까 하는 얘기가 나왔어요.
“저한테요?”
-마침 문의 시기도 비슷하고, 사겠다는 의지들이 강한 것도 다 같아서요. 연작으로 제작될 테니 번호표를 뽑아줄 수도 있겠지만, 작가님. 이 그림이 누구 손에 들어가게 될지도 신경 쓰고 있잖아요? 이왕이면 작가님이 건네주고 싶은 사람에게 파는 게 좋겠다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되죠. 얼마든지요.
김영인이 강조했다. 자기뿐 아니라 일선아트센터 쪽과도 이미 합의를 본 내용이라면서.
-그래서 말인데, 작가님이 면접을 좀 봐야 할 것 같아요.
“면접요?”
-표정 그림 구매를 하고 싶다는 사람이 오늘까지 총 일곱 명인데, 작가님이 만나보시고 결정하면 어떨까요?
“일곱 명이나요?”
놀라며 되묻던 수현이 곧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좋죠. 근데 어떤 분들인지 알 수 있을까요?”
-네네. 프로필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근데, 좀 특이한 사람이 한 명 있어요.
“누구요?”
-영국인이에요. 윌터 센슨이라고. 그 사람 말로는 작가님과 인연이 깊다는데, 혹시 작가님. 아는 사람이에요?
그 말에 수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2년 전, 지나는 이야기로 한번 스쳤을 뿐이라 수현에게 그의 이름은 아주 낯설었던 거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