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49)
149화. 시동(2)
“우리 교수님이 살짝 질리는 스타일이네.”
“그러니까. 피 말리는 타입이야. 와, 나 조교님이 왜 말렸는지 바로 알았잖아.”
“애들 표정 봤어? 다들 넋이 나갔던데?”
워밍업이란 말이 무색하게 진한 향기를 남긴 수업이 끝난 후, 차윤희와 박선화, 오유나 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수업 후기를 나누었다.
“이거 맞나? 이대로 가도 되는 걸까?”
“나 작년 애니메이션 광고 수업보다는 훨씬 쉽겠다 싶었거든? 그땐 우리 수백 장 그려야 했는데, 그림책은 많아 봐야 스무 장 안팎일 거라. 근데 숫자로 따질 게 아닌 듯하다.”
“어. 엄청 빡셀 분위기야. 내가 장담한다. 오늘 수업 끝나고 수강 신청 정정하는 애들 엄청 많아질 거야.”
“아니 그런데, 지난 학기 수업에선 이런 말 없지 않았어? 전집 수업은 미담만 가득했는데, 왜 여기만 스파르타지?”
놀랄 만도 했다. 다섯 개로 시작한 질문지는 열 개, 다시 스무 개, 삼십 개, 마지막엔 오십 개로 마무리됐으니까.
“근데, 내가 너무 순진했던 게 아닌가 싶네.”
오유나가 살짝 분하단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뭐가?”
“생각해봐. 우리가 적어낸 질문이 5+10+20+30+50이면 인당 115개야. 근데 수강생이 몇 명이었지?”
“글쎄? 한 30명 됐나?”
“교수님이 3천 개가 넘는 답을 일일이 다 확인할 수 있을까?”
“어?”
오유나의 그럴듯한 지적에 애들이 눈을 끔뻑였다.
“살짝 비슷하게 썼어도 확인하기 어려웠을 건데, 기세에 눌려서 완전히 기가 빨린 거잖아. 와, 이거 좀 억울한데?”
어지간해선 상대의 기에 눌리는 법이 없는 오유나이기에 권인호식 교수법에 당황한 게 꽤 분한 눈치였다. 그러나.
“미련해도 정직하게 임해야 실력이 늘지. 긴장은 했어도 덕분에 얻은 게 있잖아.”
수현은 오히려 그 점이 좋았다며 상기된 얼굴로 수업의 감상을 털어놓았다.
“얻어? 뭘?”
“덕분에 그 그림과 작가, 스토리에 대해서 저절로 알게 된 셈이니까.”
“응?”
애들은 아직 모르겠단 반응이었지만 수현은 확실히 느꼈다. 그리고 감탄했고.
‘역시 권인호 교수님이야.’
한 장의 그림에서 115개의 질문을 뽑아내는 것.
표면적으론 학생들을 몰아붙이는 다소 괴팍한 수업으로 비쳤을 수 있으나 질문을 고민하고 뽑아내는 사이, 학생들은 작가의 시점으로 그림책을 바라보게 되었다.
왜 이런 캐릭터를 창조했는가, 왜 이런 구도와 색을 선택했는가, 선은 왜 이런 굵기로, 감정은 왜 이런 형태로 표현했는가.
작가가 그림책을 구상하며 완성하기까지 끊임없이 고민했을 지점들을 따라가며 사소한 것 하나까지 되짚어보게 됐던 거다.
그리고 이제 자기만의 그림책을 만들게 될 학생들은 그 수업을 통해 구상부터 제작까지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 거고.
“다음 주부터 각자 만들 책에 대해 준비할 거라고 하셨잖아. 그냥 책을 하나씩 만들어와라, 했으면 되게 막연했을 거야. 근데 질문 연습으로 어떻게 기획하고 구상하면 좋을지 연습이 된 거고.”
“흠. 그런가.”
“에잇. 몰라. 어쨌든 느낌이 좋진 않아. 이거 시간 엄청 뺏길 수업이 되겠어.”
“시간이야 뭐, 미대 온 순간부터 내려놓은 부분이긴 하다.”
허탈하게 웃은 애들이 서로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인사했다.
“어쨌든 살아남자.”
“그래, 이번 학기도 파이팅.”
애들과 헤어진 수현은 발길을 돌려 학교 앞 카페 아르누보를 향했다.
드물게 카페와 서점을 겸하는 곳이라 학생들 사이에 유명했는데, 그렇다고 쉽게 드나들긴 어려운 곳이었다.
커피 가격은 물론, 책값도 어마무시했던 거다. 그런데도 수현이 여길 찾은 건 한 잔에 8천 원이 넘는 커피 맛이 궁금해서는 당연히 아니었고.
‘1층이 서점이랬지.’
미술 원서만 취급하는 카페 안 서점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국내 최고 미대가 있는 백현대 앞에는 예전부터 예술계통 원서를 취급하는 서점이 터줏대감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일반 서점에는 유통되지 않는 희귀 서적들과 예술잡지들, 그리고 오래된 중고 서적들을 사고팔았는데, 거길 건너뛰고 굳이 아르누보를 찾은 건 신간을 가장 많이 취급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여기라면 수현이 오늘 수업 후, 갑자기 떠올린 그 책이 있을지도 몰랐다.
스윽-.
먼저 전시된 책부터 눈으로 확인한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제대로네.’
과거, 수현이 알던 책들이 몇 권 보였다.
값도 값이지만 국내에 들어온 수량 자체가 적어 사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던 책들.
당시 수현은 형편 좋은 애들이 그걸 사 보는 걸 어깨너머로 몇 번 훔쳐보곤 했었다.
척.
수현은 저도 모르게 한이 맺혔던 책 몇 권을 옆에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앙 진열대로 다가가 본격적인 탐색에 나섰다.
최신 경향의 디자인부터, 해외 갤러리와 전시 작품들, 그리고 작가 인터뷰들이 실린 잡지며 유명 화가가 자기 작품의 해설과 기법을 달아둔 책도 있었다.
‘이것도 가져갈까.’
본래의 목적은 보라색 양장 커버를 한 블라썸이란 일러스트 책 한 권이었는데, 다른 책들을 보니 욕심이 생겼다. 간절해도 이룰 수 없던 시절에 쌓인 결핍이 보상심리로 작용한 걸까.
‘뭐,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자료들이니까.’
수현은 고개를 끄덕이곤 또 몇 권의 책을 골라냈다.
대부분은 두꺼운 비닐로 꽁꽁 포장돼 있어 내용을 열어볼 수 없었는데, 유명한 잡지는 그 이름만으로도 신뢰할 만하니 크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눈에 익은 작가들의 작품집도 마찬가지. 그렇게 점점 짐을 늘려갈 무렵, 찾으려 했던 일러스트 책 블라썸도 눈에 들어왔다.
“와. 진짜 있었네.”
수현이 놀라며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었다.
블라썸은 초판이 98년 가을이었으니 현재로선 정말 따끈따끈한 신간이었다.
유럽의 유명 일러스트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책, 블라썸.
오늘 전집 수업에서 권인호 교수가 준비한 이국적인 색채의 그림을 본 순간 수현은 곧바로 이 책을 떠올렸다.
국내 그림책 분야는 아직 다양하지 않을 시기.
인식 역시 어린애들이 보는 책이라는 데 그치고 있지만, 해외에선 달랐다. 다양한 연령과 계층을 타겟으로 한 그림책이 활발히 출판됐고, 반응 역시 뜨거웠다.
그러니 수현은 동시대 다른 시장의 그림책들을 좀 더 연구하며 전집 수업을 준비하고 싶단 생각을 했던 거다.
깊이 있게 탐구하는 것과 많은 걸 보는 것. 모두가 작업에 도움이 되는 공부니까.
더불어 궁금한 것도 있었다.
해외 그림책 작가 중엔 회화와 애니메이션, 설치미술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이들이 많았다.
수현 역시 백현대에 들어와 미술의 확장성과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고 경험하던 참이라, 이번 수업 역시 한 번 스치고 마는 작업이 아닌, 앞으로 해나갈 작업에 큰 가지로 뻗을 수 있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앞서간 작가들이 어떻게 작업하는지 알고 싶었고, 직접 만나지 않는 이상, 현재로선 이런 책이 가장 확실하고 구체적인 자료였던 거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할까.”
블라썸 책을 먼저 골라놓은 책들 위에 얹으며 수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들 수 있을까……?”
잡지를 제외한 원서들은 하나같이 두껍고 무거웠다.
미술책들은 그림을 최대한 실물에 가깝게 표현하기 위해 좋은 종이를 사용해 보통 활자 책보다 무게가 더 나갔는데, 그런 걸 겁도 없이 12권이나 골랐던 거다.
빠른 걸음으로도 10분 정도 걸리는 집까지 이걸 다 들고 갈 수 있을까, 몇 권은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하나 내적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아니야.’
그러나 수현은 고개를 젓고는 용감하게 그 책들을 카운터로 옮겼다.
서점을 둘러봤을 때 대부분 책에 재고가 없었다.
그건 다음 기회로 미뤘다가는 영영 살 기회를 놓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였고, 눈에 든 이상 어떻게든 가져가는 게 맞겠다고 정한 거다.
“와, 손님 안목이 좋으시네.”
그리고 수현을 발견하고 카운터로 온 중년 남성이 계산대에 올린 책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말을 걸었다.
“좋은 책들만 잘 골라서요. 하하, 물론 여기 있는 책들이 다 좋긴 하지만.”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
수현은 아무래도 이 사람이 카페 아르누보의 사장인가보다 생각했다. 그리고.
“일러스트 관련 서적이 많은데, 혹시 내가 한 권 추천해줘도 괜찮을까요?”
남자는 영업에도 소질이 있는 인물인지 수현에게 책을 추천하겠다고 나섰다.
“뭔데요?”
“가만있어보자, 잠시만요.”
남자가 후다닥 밖으로 나가 사다리를 들고 오더니 책장에 턱 걸치고는 뒤뚱뒤뚱 올라갔다.
그리고 꼭대기 칸 구석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왔다.
“……?”
수현이 저도 모르게 눈을 끔뻑였다. 다른 책들처럼 이 책도 비닐로 포장돼 있어 열어볼 수 없었는데, 커버까지 별 게 없어 내용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던 거다.
그냥 검은색 벨벳 같은 천으로 만들어진 커버에 금빛으로 꼬부랑글씨가 몇 줄 적힌 게 다였다.
“독일 책이에요. 독일에 미하엘 멘든이란 작가의 작품집인데 아주 독특하거든요.”
그런데 남자는 구석에서 꺼내 온 그 책이 보물이라도 되는 양 소중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 독일요.”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무엇보다 이건 정식으로 출판된 책이 아니라 구하기도 어렵고요.”
“정식으로 출판된 게 아니라고요?”
“출판을 계속 거절당해서 작가가 자비로 몇 권을 찍어냈다고 들었어요. 독일 박람회에 갔을 때 우연히 알게 돼서 내가 두 권을 사서 왔는데, 한 권은 집에 뒀고, 한 권은 서점에 뒀죠.”
역시 남자는 아르누보의 사장이 분명한 듯했다.
“만약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특별히 환불해주도록 할게요. 3일 안에 훼손 없이 가져온다면요.”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영업하니 궁금하기도 했고, 엉망인 책이라면 환불을 책임진다니 수현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것까지 주세요.”
***
꽤 큰 가방을 들고 갔던 덕분에 대부분은 배낭에 짊어질 수 있었지만 다섯 권은 양손에 나누어 들고 와야 했다.
“아, 손 떨려.”
집에 돌아와 책들을 무사히 내려놓은 수현이 부르르 떨리는 팔을 주무르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할 짓은 아니다 싶었지만, 그래도 보고 싶었던 책을 작업실에 들이니 굉장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천천히 봐볼까.”
수현은 책들을 꽁꽁 싼 비닐 포장지를 차례로 벗겨 책장에 넣은 후,
가장 궁금했던 블라썸 책부터 열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후.
“오늘은 본격적으로 감각을 깨우는 수업을 해볼 거다.”
권인호 교수가 이번엔 강의실 한구석에 놓인 대형 뽑기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 여기엔 여러 가지 물체가 들어있다. 여러분은 여기 손을 넣고 하나를 집은 다음, 꺼내기 전 그게 어떤 물체일지 상상한 바를 말해 보도록 한다. 그리고, 꺼낸 것의 실물을 확인한 다음, 그걸 들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도록. 그럼, 용감하게 먼저 나서볼 사람?”
지난 시간과 마찬가지로 종잡을 수 없는 수업에 애들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뭐가 들어있는 거지?”
“야, 야. 물체라고 하면 생명체도 포함이야? 아니지? 물체주머니처럼 그냥 물건만 들어있는 게 맞는 거지?”
“당연하지. 설마 저기에 뱀이라도 풀었을까 봐?”
“하아. 그래도 찝찝한데. 저 교수님, 뭘 넣어뒀을지 내가 믿음이 안 가서 그래.”
115개의 질문지를 내고 한바탕 멘탈이 흔들렸던 수강생들은 그래도 기특하게 대부분 수강 신청을 철회하지 않고 2회차 수업에도 출석했다.
그러나 그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이었나, 다시 한번 자신의 결정을 의심하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뽑기통엔 무엇이 들어있으며, 권인호 교수는 그걸 통해 또 무얼 시키려는 것일까.
바로 그때였다.
“제가 먼저 해보겠습니다.”
수현이 손을 번쩍 들고 자원해 나섰다.
일주일간, 이 수업에 생긴 흥미로 밤을 새워가며 여러 일러스트 작품을 공부해온 수현은 마음이 급했다.
어서 진도를 빼 마음에 꽉 찬 이야기들을 빨리 그림으로 그려내고 싶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