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5)
15화. 뜨거운 여름(1)
“한수현!”
저녁 8시.
일선화랑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박선화가 달려 나왔다.
“어? 선화, 너도 있었어?”
“화랑이랑 우리 집이랑 가깝잖아. 대문 나서면 1분 거리야. 그리고 너 온다고 했으니까 기다리고 있었지. 헤헷. 저녁은 먹었어?”
“어, 먹고 왔어. 너는?”
“나도 대충. 우리 이따가 떡볶이 먹을래?”
지난주 금요일. 수현은 박선화를 태우러 온 강유진 관장과 우연히 마주쳐 안부를 나누다 곧 있을 여름방학 얘길 하게 됐다.
아마도 그림을 그리고 학과 공부하는 걸로 시간을 보내지 않겠느냐는 수현의 말에 강유진 관장이 짤막한 입소 프로그램을 권했고. 어쩌다 보니 얼렁뚱땅 일선화랑 아뜰리에 빈자리를 2주간 빌려 쓰게 된 거다.
“와, 마침 시기가 딱 맞아서 된 거래. 네가 들어갈 자리, 조은희 작가님이 최근까지 쓰셨거든. 조 작가님이 지난주에 홍콩으로 가셨는데 새로 입주작가가 들어오는 건 또 내년이라, 그때까진 비어 있는 자리였단 거야. 어쨌든 너무 잘됐다. 우리 방학에도 매일 보겠네?”
“어. 그러게. 근데 조은희 작가님도 일선화랑에 계셨구나.”
박선화의 꼼꼼한 설명에 수현이 감탄하며 아뜰리에를 둘러보았다.
“와, 엄청 좋다.”
“그래? 난 여기 좀 무서워.”
박선화가 수현에게 바짝 다가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워낙 예민한 작가님들도 많고, 전기톱이나 무서운 장비들 다루는 분들도 꽤 있으니까. 가끔 사고가 나기도 하고.”
“아, 그래.”
“어쨌든 따라와. 원래는 엄마가 안내해주셔야 하는데 내가 우겨서 대신 나왔어. 네가 쓸 작업실이랑 방이랑 보여줄게.”
“어.”
갤러리 별채 느낌이 나는 독립된 건물. 2층으로 지어진 아뜰리에는 1층과 지하는 작업실로, 2층은 숙소와 식당으로 구분돼 있었다.
각 작업실은 30평 정도 돼 보이는 널찍한 공간으로 나뉘었고, 2명에서 4명 정도가 공용으로 사용하는 식이었다.
“이쪽이야.”
1층 복도 안쪽까지 수현을 데려온 박선화가 건너편 문을 가리켰다.
“열어봐.”
미닫이로 된 큰 문.
드르륵.
별생각 없이 그걸 밀었는데-.
“허.”
생각지도 못한 풍경이 그 안에 있었다. 수현이 작업장 안으로 옮기려던 걸음을 뚝 멈췄다.
“왜 그래?”
뒤에 서 있던 박선화가 고개를 들이밀었지만,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누가 그린 걸까.’
수현이 심호흡했다.
압도적인 크기의 캔버스가 새하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원시적이고 감각적인 색채. 역동적인 터치. 대담한 구상.
기성작가들이 꽤 있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 수준의 작품을 보게 될 줄이야.
저절로 몸이 파르르 떨렸다.
과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99년, 서울에 로댕갤러리가 들어섰을 때.
수현은 친구 몇몇과 개관일에 맞춰 갤러리를 찾은 일이 있었다.
형편이 좋은 애들이야 벌써 파리의 루브르와 오르세, 런던 테이트모던, 뉴욕현대미술관 같은 곳을 아무 때고 드나들었지만, 수현과는 거리가 먼 얘기였고 마침 서울에 로댕갤러리가 개관한단 소식에 기대를 품었던 거다.
5월이었다.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
수현은 한참이나 지하철에 시달리고 길을 헤매다 겨우 미술관에 도착했다.
전공서에서 손바닥만 한 사진으로만 봤던 작품들을 실물로 볼 수 있겠단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고.
얼른 작품을 보고 싶단 생각에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맡길 우산꽂이부터 찾기 바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수현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우산꽂이를 찾으려 주변을 둘러보던 중 시야에 뭔가가 들어왔단 걸 뒤늦게 깨달은 거다.
‘뭐지? 지금 내가 뭘 봤지?’
툭. 우산을 놓치듯 내려놓고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저만치에 숨을 턱 막히게 하는 위력적인 존재가 우뚝 서 있었다.
[지옥의 문>단테의 신곡을 주제로 한 로댕 인생 최고의 역작.
생각하는 사람과 190여 명의 인간군상이 높이 6.35미터, 폭 3.98미터의 청동 조형물 안에 힘차게 펼쳐져 있었다.
30년간의 구상, 때문에 석고형은 로댕이 숨을 거두기 직전에야 비로소 완성됐고, 청동 조형물은 기술적인 문제가 해결된 후에야 제작됐다.
하지만 그런 작품의 제작 배경이나 로댕의 예술세계를 집대성한 작품이란 세간의 평가, 기타 작품에 관한 정보 같은 건 그 순간 중요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았다.
수현은 생각했다.
이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설명이 없어도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감동. 진짜를 봤다는 희열.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는 경지에 다다른 예술이라는 인정이 수현의 영혼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그날 수현은 한참이나 지옥의 문을 멀리 두고 서 있었다.
차마 가까이 걸어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거다.
그리고 잠시 후. 주룩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설명할 수 없는 영혼의 감동이 각인처럼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오늘.
수현은 그때를 다시 떠올릴 정도로 충격적인 작품을 무방비 상태로 마주하고 있었다.
“이거, 누가 그린 거야?”
겨우 입을 뗀 수현이 고개를 돌려 박선화를 바라보았다.
“뭔데?”
수현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던 박선화가 안에 걸린 그림을 보더니 사색이 됐다.
“허억. 이 방이 아닌가 보다.”
“어?”
“하아, 미치겠네. 잠깐만?”
박선화가 복도로 고개를 돌려 손가락으로 작업실 개수를 가늠하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제 이마를 딱 때렸다.
“미쳐. 이방은 열면 안 되는 곳인데. 얼른 닫자. 네가 쓸 곳은 여기 옆방이야.”
“응?”
하지만, 타이밍이 참 절묘하게도.
“거기 누구야?”
안에 있던 누군가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냈다.
“허억. 안에 있었나 봐.”
“뭔데? 왜 그러는데?”
“몰라. 문부터 닫아!”
박선화의 호들갑에 수현이 얼어붙으며 미닫이문을 스르륵 밀었다.
그러나.
“너희들 뭐야?”
대충 넘어가질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웬 남자애가 수현이 반쯤 닫은 문을 다시 거칠게 열더니 수현과 박선화를 수상하단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하이, 스티브. 지난번 인사했었지? 여긴 내 친구 수현이야. 2주 동안 단기로 아뜰리에를 사용하게 될 거라 안내 중이었는데, 방을 헷갈려서 잘못 열었네? 하하.”
박선화가 어색한 얼굴로 활짝 웃으며 스티브란 남자에게 인사했다.
“하. 여긴 맘대로 열면 안 되는 공간이라는 거 몰랐어?”
“오, 그러게나 말이야. 그런 곳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그게 이 방인지는 몰랐다는 게 문제겠지? 하하. 하필이면 이 친구가 쓸 방이 바로 옆방이라, 잠깐 헷갈린 거야. 절대 고의는 아니니까 너무 화는 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
평소엔 말이고 행동이고 제멋대로 하는 일이 많은 박선화가 이렇게까지 쩔쩔매다니 수현은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박선화와 스티브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혼혈인가? 생김새도 그렇고 한국말을 잘하는 걸 보니 한국계인 것 같은데?
더 놀라운 건 좀 전 그림의 주인으로 보이는 스티브가 굉장히 어려 보인다는 점이었다. 외국인이라 확실한 나이를 읽긴 어려웠지만, 수현의 또래쯤으로 보이는 얼굴. 그리고 또래라면-.
‘잠깐. 설마 이 스티브가 설마 그 스티븐가?’
몇 가지 정보가 수현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동시에 수현의 입이 떡 벌어졌다.
“너…… 혹시, 스티브 맥퀸?”
“……?”
“??”
스티브와 박선화가 눈을 끔뻑이며 수현을 바라보았고, 스티브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날 알아?”
“어?”
진짜 스티브 맥퀸이었어?
어쩐지 다시 생각해 보니 좀 전 그림엔 스티브 맥퀸 특유의 질감과 색감이 나타나 있었다.
미친. 여기서 스티브 맥퀸을 보게 되다니.
수현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스티브 맥퀸.
현대 회화작가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던 젊은 화가.
감정의 극사실주의를 달린단 평가를 받던 최고의 추상화가였다.
어떻게 저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것도 이렇게 젊은 화가가.
수현은 혜성처럼 등장한 그의 작품세계에 감탄하는 동시, 좌절을 느꼈었다.
2002년, 수현이 아직 대학생이던 시절. 동갑으로 알려진 스티브맥퀸이 세계 시장을 떠들썩하게 하는 신예로 급부상했던 거다.
“날 어떻게 아는데?”
잠시 상념에 빠진 수현에게 스티브가 재촉하듯 되물었다.
“아, 그게.”
수현이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95년이면 스티브맥퀸 역시 17살의 어린 나이. 아직은 미술시장의 주목을 크게 받지 못할 때다.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게 밀레니엄 열풍이 일었던 2000년이었으니 지금은 가능성을 인정받으며 차곡차곡 자기 그림을 찾아갈 때겠지.
그러니 한국의 일선화랑 아뜰리에에서도 볼 수 있게 된 거겠지만, 아직 대외 활동도 하지 않는데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라니 의심을 하는 게 당연했다.
하, 이걸 어떻게 둘러대지.
수현이 난처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너, 혹시 내 전시를 봤어?”
“어?”
“두 달 전에 소요갤러리에서 연 그룹전. 거기에 왔던 거야?”
다행스럽게도 스티브가 먼저 살길을 열어주었다.
“어, 맞아. 거기서 봤나 보다. 그래. 그랬던 것 같아.”
수현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자 스티브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오, 너 눈이 꽤 좋은데? 그 그룹전 작품 수도 많았고, 난 딱 두 점만 출품했거든. 근데 그 그림을 기억했다가 오늘 내 그림을 보고 같은 작가라는 걸 알아챘다는 거지?”
거의 답을 정해두고 묻는 듯한 분위기. 그러나 굳이 부정할 필욘 없었다. 실력이 뛰어난 작가인 건 맞으니까.
수현이 작게 웃으며 스티브의 그림을 칭찬했다.
“워낙 개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라서. 색감이나 질감 표현이 특이하기도 하고.”
“와. 이거 최고의 칭찬인데? 어쨌거나 다른 그림들에 섞여 있어도 내 그림이 돋보인단 소리인 거잖아. 나만의 아이덴티티가 충분하니 이렇게 알아볼 수 있는 거고.”
“하핫. 그래. 네 그림은 굉장히 시원시원하면서도 강렬해. 사물의 형태보단 영혼을 그려내는 느낌이랄까. 감정이 그대로 전달돼서 보는 이에게 파도처럼 쏟아지거든.”
그건 아주 오래전에 느꼈던 감상들이었다.
이걸 스티브에게 직접 말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수현이 조금 감격하며 말을 꺼내자 스티브의 얼굴이 차츰 발갛게 물들었다.
“진짜 그렇게 생각해?”
“어?”
“사실, 몇 주 동안 작업이 잘 안 풀려서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거든. 그래서 갤러리 쪽에도 내 작업실은 누구도 드나들지 못하게 요청해뒀었고 말이야.”
스티브가 박선화 쪽을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아, 고의적으로 열어본 게 아니었다니까.”
“그래, 어쨌든.”
스티브가 아까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박선화와 수현을 바라보았다.
“너희 이름이 뭐라고 했지?”
“어?”
“아깐 흘려들었거든. 정식으로 인사하자. 난 스티브 맥퀸이라고 해. 캐나다에서 왔고, 한국 나이로 치면 17살이야.”
“난 박선화. 알겠지만 일선화랑 강유진 관장님이 우리 엄마야. 나도 내 화랑을 만들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난 한수현이야. 세현예고 1학년. 강유진 관장님 배려로 일선화랑 후원을 받고 있어. 2주 동안 여기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릴 예정이야.”
“그렇구나. 잘됐네.”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스티브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2주라니 좀 짧은 감이 있긴 하지만 앞으로 잘 지내보자. 나, 수현이 너 마음에 들었어.”
“어?”
“그림을 보는 눈은 일단 합격. 그리고 네가 그리는 그림은 어떨지도 좀 궁금해졌거든.”
“허. 내 그림이?”
“그래. 마침 나이도 비슷하고, 우리 친구할래?”
“어?”
생각지도 못한 스티브의 제안에 수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