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9)
19화. 포착(1)
라볶이를 먹고, 순대와 쫄면을 추가하고, 침치김밥과 치즈김밥도 시켰다.
한진동 일선화랑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맛나 분식.
맛도 좋았지만 초록빛 플라스틱으로 된 분식점 전용 그릇이며 손글씨로 붙은 메뉴판, 벽에 잔뜩 그려진 낙서가 정겨운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잘 먹었다.”
“이번 생은 여한이 없네.”
“그럼 네가 오늘 산 거 나한테 넘길래? 붓 좋아 보이던데.”
“좀 전에 다시 삶의 목적이 생긴 것 같은데. 어때, 박선화. 나랑 한판 뜰까?”
배를 두드리며 밥을 먹고 난 애들은 한층 친해진 말투로 장난을 주고받았고 헤어질 시간이 되자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천천히 인사를 나누었다.
“전화해!”
“삐삐쳐!”
“우리 다음 주말에도 놀까?”
“얼른들 들어가. 늦었다.”
애들을 보내고 작업실로 돌아온 수현은 천천히 짐을 풀었다.
한나절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시달린 바람에 녹초가 된 기분이었지만 마음은 무척 가벼웠다.
‘재밌었네. 어쨌든 다행이고.’
수현이 낮에 있던 일을 떠올리며 싱긋 미소 지었다.
스티브와 수현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차윤희와 박선화도 어쩔 수 없이 같이 다녔던 모양이었다.
수현이 있을 땐 항상 티격태격했는데, 그새 미운 정이라도 붙은 건지 전보단 부쩍 친해진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스티브가 달라졌지.’
수현과 이야기를 나누고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건지, 스티브 역시 전보다 가깝게 애들을 대했다.
물론 한 번씩 무뚝뚝한 면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수현을 대할 때와 비교하면 온도 차가 확실했지만 이 만 하면 눈부신 발전.
“스티브 쟤, 들은 것처럼 이상하진 않던데?”
“아냐, 원래는 엄청 쌀쌀맞았어. 오늘이 진짜 멀쩡한 거야. 하, 근데 갑자기 왜 애가 달라진 거지?”
스티브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차윤희와 박선화도 스티브의 변화가 놀랍다며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었을 정도니, 앞으론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
“그림만 잘 그리면 되겠네.”
수현이 사물함과 선반, 이젤 앞에 가득 채워진 화구들과 텅 빈 캔버스를 차례로 바라보며 각오를 되새겼다.
스케치는 대강 끝났고, 이제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채색에 들어갈 차례.
수현은 먼저 부산 야외스케치에서 영감을 얻은 ‘바다 없는 바다’ 그림을 완성해볼 생각이었다.
가을 미술전시회에 제출할 그림을 그리기 위한 습작이니 큰 부담은 없었지만, 가장 기초가 될 공사라 생각하면 대강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재료는 제대로 구했어.”
수현이 남대문 화방에서 사 온 물감과 붓, 캔버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는 튜브 하나를 사는 데에도 손을 벌벌 떨었는데, 이렇게 많은 색깔을 아무 고민 없이 한 번에 사게 되다니. 새삼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한 장만 그려볼까.”
그러니 이대로 잠이 들긴 아쉬운 밤이었다.
수현은 이젤 앞에 앉아 팔을 들고 힘차게 밑그림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
“세상에. 너 잠을 자긴 한 거야?”
다음 날 아침.
수현이 작업실 문을 열자 심각한 얼굴로 캔버스 앞에 서 있는 스티브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허, 언제 왔어?”
“좀 전에. 너 일어났나 해서 커피라도 주려고 왔지.”
스티브가 손에 들고 있던 묵직한 잔을 수현 쪽으로 내밀었다.
“와, 믹스커피네.”
“어, 지난번에 그거 잘 먹길래.”
“고마워.”
“근데, 밤을 꼴딱 새운 거야?”
스티브가 걱정스러운 눈을 하며 수현의 이젤 앞에 놓인 스케치들을 가리켰다.
대충 봐도 10장이 넘는 그림들.
작업시간이 충분히 유추되는 양이니 아니라고 얼버무릴 순 없었다.
“어, 완전히 새운 건 아니고. 좀 늦게까지 작업하긴 했어.”
“어휴, 너 그러다가 키 안 커.”
“어?”
“작업을 하다 보면 매 순간이 씨름일 건데, 페이스 조절을 잘해야지. 초반에 그렇게 달리면 나가떨어지기 쉽다고. 이거 마라톤이잖아.”
“아, 그래. 그렇지.”
“그래서 뭐가 고민인데?”
따끔하게 잔소리를 늘어놓은 스티브가 다시 수현의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그림을 보기만 해도 뭔가 읽히는 건가?’
수현이 신기하다는 듯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비슷한 스케치를 이렇게나 많이 반복한 걸 보면 뭔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게 있단 거잖아.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질 않는 거야?”
“아. 맞아.”
수현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밤 자신을 잠 못 들게 한 건 처음엔 흥분이었다.
좋은 화구, 최적의 작업공간, 그리고 그리고 싶은 주제가 있으니 작업자에게 더 큰 축복이 있을까.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딱 한 장만 그려보려고 했던 건데.
‘이게 아닌데.’
‘이것도 아니야.’
막상 구체적인 스케치에 들어가자 수현의 생각과는 달리 마음에 드는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이유는 분명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수현에겐 자신만의 주제, 즉 [시선>이란 테마가 있었다.
돌아온 후, 이번엔 누구에게도 그 주제를 빼앗기지 않고 그릴 생각이었고 [시선>을 주제로 한 그림을 선보임으로써 일선화랑 강유진 관장의 눈에 들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가을 미술 전시회 그랑프리를 목표로 삼은 수현은 이번엔 심사위원인 제임스 리의 눈에 들기 위해 [삭제>란 기법을 사용했고, 바다 없는 바다를 스케치해 제출했다.
그러다 보니 [시선>과 [삭제> 두 주제가 그림 안에서 부딪쳤고, 중심을 잡기 어려워진 거다.
삭제에만 충실하면 자기 본연의 색을 잃게 될 테고, 시선만 주제로 삼기엔 아직 예전의 테크닉과 표현법을 회복하지 못해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두 주제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중간 지점을 잡아내고 싶은데, 그걸 염두에 두고 그리기 때문이었을까.
자꾸만 인위적이고 어색한 구도가 나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욕심이 많아서 그래.”
수현이 커피를 홀짝이며 반성하는 얼굴로 말했다.
“욕심?”
“어, 보는 사람들이 이 그림에서 여러 가지를 느끼게 하고 싶거든. 근데 한 장에 그 감정을 담으려니 너무 과해서.”
“음. 네 말대로 좀 복잡하긴 한 것 같아. 섬네일로 봤을 땐 심플했는데 스케치로 풀어놓으니 어려운 느낌이야.”
수현이 털어놓자 스티브도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그러니까.”
“흠. 나타내려는 주제들을 포기할 생각은 없는 거지?”
스티브가 턱을 문지르며 물었다.
“강약 조절은 하겠지만, 아주 빼버리고 싶은 건 없어. 다 나름 이유가 있는 것들이라.”
“그럼 이건 어때?”
스티브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어지는 스토리로 구상해보는 거지.”
“어?”
“꼭 한 장에 담을 이윤 없잖아. 그러니까 네가 생각한 주제들을 연작으로 풀어놓으면 어때?”
“연작?”
스티브의 말을 들은 수현이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 방법이 있었지.
과거에도 [시선>을 테마로 연작을 그렸었잖아. 익숙하게 해왔던 방식이었는데, 이번엔 왜 떠올리지 못했지?
긴장한 나머지 사고가 경직됐던 건가?
“왜? 그것도 별로야?”
생각에 잠긴 수현을 스티브가 재촉하자 수현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아니. 너무 좋은 생각이야. 고마워, 스티브. 이건 정말 진심이야.”
“흠. 흠. 내가 말했잖아. 나한테 털어놓으면 꽤 도움이 될 거라고.”
수현의 인사에 스티브가 헛기침하며 볼을 붉혔다.
“그래. 진짜 그렇네.”
“또 고민 있어?”
“어?”
“뭐든 말해봐. 작업에 관한 거면 내가 아주 소중한 작업 노하우들도 알려줄 용의가 있으니까.”
“와, 정말이야? 그럼 나 또 궁금한 게 있는데.”
“어.”
스티브가 궁금하단 표정으로 수현을 바라보았고.
“넌 나한테 부탁할 거 없어?”
“응?”
생각지 못한 답이었던 걸까.
스티브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부탁? 너한테?”
“응. 친구하자며. 그럼 일방적인 관계는 안 되지. 그러니까 너도 언제든 나한테 부탁할 게 있음 말해. 뭐든 괜찮으니까.”
“어, 아. 그래. 그럴게.”
스티브가 허허 웃었다.
스티브 맥퀸.
뛰어난 재능을 가진 예술가인 동시에 예민하고 괴팍한 성격으로도 유명했던 화가.
미술계에 번진 소문이 어디까지 사실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스티브맥퀸은 20대 시절, 유명세를 탐과 동시에 크게 방황하며 술과 여자, 향락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트라우마, 외로움과 고독함에 영혼이 망가지고 말았다는 카더라 뉴스들.
예전에야 지구 저편에 있는 나와 상관없는 사람의 이야기니 그러려니 했지만, 이제 친구로 가까워진 이상 수현은 그를 모른 척하기 어려워졌다.
앞으로 무슨 일이 스티브에게 생길지는 몰라도 이렇게 유대를 맺고 같은 길을 걷는 친구가 됐으니, 어려운 순간에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단 마음이 들었던 거다.
혼자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져 손을 내밀었을 때 붙잡아줄 친구가 한 명만 있어도 그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는 수현이 스스로의 삶으로 절실하게 깨달은 바였으니까.
“뭐, 그럼 오늘도 파이팅.”
“그래. 너도 힘내.”
아직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이긴 했지만,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스티브는 자기 작업실로 돌아갔고, 수현 역시 이젤 앞에 앉아 자신만의 씨름을 이어 나갔다.
‘연작이라니, 한결 편해지겠어.’
원래의 계획은 [삭제>란 테마를 배경으로 [시선>이란 주제를 드러내려 했다.
그런데 두 개의 요소가 워낙 강렬해 자꾸 충돌했던 건데, 연작으로 무게중심을 차츰 옮겨간다면 꽤 괜찮은 드라마가 완성될 것 같았다.
‘처음엔 바다 없는 바다를 그려서 [삭제>란 테마를 확실히 보여주고 그다음 그림, 또 그다음 그림을 통해 주제를 [시선>으로 옮겨오는 거야.’
그럼 뭐가 좋을까. 바다처럼 관련된 오브제가 확실한 색깔을 띠는 게 뭐가 있지?
지난밤, 늦은 새벽에야 숙소로 돌아갔고 깜빡 눈을 붙이고 나온 다음이라 제대로 그림을 그리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주제를 고민하다 보니 수현의 정신은 오히려 초롱초롱 맑아지고 있었다.
수현은 점점 더 그림에 몰입하며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솨아아-.
작업실 밖으로 요란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창문을 열어두지 않았는데도 귀에 꽂힐 정도로 세고 강렬한 바람.
수현은 눈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촘촘히 심은 갤러리의 나무들이 흔들흔들 휘청이며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눈부셔.’
그리고 순간, 하필 높이 떠오른 정오의 태양이 수현의 눈에 그대로 닿았다.
‘아파’
수현이 고개를 돌려 잠시 얼얼해진 눈을 감고 문질렀다. 그리고 좀 전 정원의 풍경을 다시 떠올렸다.
‘자세히 보면 정말 다 아름답단 말이지.’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경을 꼽을 때 지중해 어딘가, 남태평양의 섬 같은 곳을 손꼽지만, 수현은 달랐다.
그보단 낯익은, 자기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풍경들에 늘 애정을 느끼고 찬사를 보냈던 거다.
이곳에서도 그랬다.
조경에 신경을 쓴 일선 갤러리의 뜰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우아한 멋이 있어 한 번씩 창밖을 내다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됐다.
‘바람과 해가 완벽하게 느껴지는 공간이야.’
수현이 다시 실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허!”
수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거야!”
목욕 중에 욕조 밖으로 넘치는 물을 보고 유레카를 외친 아르키메데스처럼 수현이 환호했다.
“찾았어! 이거야!”
수현의 눈에 연작으로 이어질 다음 주제가 포착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