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2)
2화. 다시 1학년
“어라. 진짜 다 한 거야? 하여간 손은 빨라서.”
무슨 상황인지 아직 영문을 모르겠는데 송민식이 성큼 수현의 자리로 걸어와 시험지를 확인하더니 내용을 평했다.
“음. 됐어. 나가도 좋아.”
“……네?”
“다 했으면 제출하고 좀 쉬어도 된다고. 오후도 소묘 시험이잖아.”
“아, 네.”
수현이 멍한 얼굴로 송민식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한데, 그렇다고 다른 현상이라 가져다 붙이기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하, 이게 무슨.”
실기실 밖으로 나온 수현은 이번엔 익숙하고도 그리운 풍경에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학과동과 연결된 실기동의 나선형 계단. 노출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천장과 벽. 학년별로 색이 다른 사물함들과 세현 예고의 상징색, 프러시안 블루로 칠해진 건물 외벽.
……진짜 세현예고야.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수현이 얼굴을 더듬거렸다.
시력이 나빠진 후론 꿈을 꿀 때조차 풍경이 흐릿했다. 그런데 지금은 딱 맞는 안경을 쓴 것처럼, 아니 시력이 나빠지기 전인 것처럼 모든 게 또렷하고 선명했다.
“허.”
몇 번이나 짚어봤지만 걸리는 게 없었다. 휙- 복도에 세워진 거울에 모습을 비추자 교복을 입은 앳된 얼굴의 자신이 놀란 눈을 마주쳤다.
찰싹.
이번엔 양손으로 세게 볼을 두드렸다.
“아. 아프네.”
통각이 그대로 느껴졌다.
거울 속 얼굴이 차츰 발갛게 물들었다. 너무나 현실적인 속도와 색깔로.
설마, 진짜 돌아온 건가?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해서? 간절히 원하고 바라서?
아니, 이게 말이 되나?
“야! 한수현!”
그때, 누군가 쿵! 세게 몸을 부딪쳐왔다.
“으악!”
수현이 몸을 꺾으며 화들짝 놀라자 깔깔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뭐야! 뭘 그렇게 기절할 듯이 놀라는데!”
차윤희.
노란색 명찰에 박힌 이름을 읽은 수현이 얼른 고개를 들어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차윤희?”
좀 전까지 함께 술잔을 기울였던 친구. 놀랍게도 윤희 역시 앳된 고등학생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야, 벌써 끝낸 거야? 역시 1학년 신의 손답네.”
윤희가 활짝 웃으며 수현의 어깨를 툭 쳤다.
“허억.”
어깨가 저릿해지는 매운 손맛. 한창때라 그런지 파워도 남달랐다.
성격이 털털하고 뚝심이 좋던 윤희는 입학식부터 수현에게 끊임없이 들이댔었다. 덕분에 예고 시절은 물론 대학 시절, 이후 둘 다 미술계를 떠나고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는 단짝으로 지냈고.
“가자, 신의 손. 오후 시험 보기 전에 뭐라도 좀 먹어야지.”
“……신의 손?”
차윤희의 말을 가만히 되뇌던 수현의 머릿속에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세현예고 신의 손.
그건 예고 시절 내내 따라붙었던 수현의 별명이었다. 또래보다 실기 능력이 월등히 뛰어난데다가 기복마저 없다고 친구들이 만들어준 애칭 같은 것.
심지어 한쪽 손을 다쳐 깁스를 하고서도 실기 1등을 놓치지 않은 바람에 신의 손 소릴 귀에 못이 박이게 들었었지.
피식. 수현의 입가에 그리운 미소가 걸렸다. 윤희는 그걸 또 오해한 모양이었다.
“쪼개냐?”
“어?”
“이거 또 시험 잘 봤나 보네. 난 그냥 아무거나 막 쓰고 나왔는데. 아, 뼈와 근육. 벼락치기로 보기엔 양이 너무 많더라. 나 일곱 문제는 그냥 빈칸으로 낸 듯. 물론 넌 아니겠지만.”
아까가 인체해부학 시험이었나?
실기실에서 나올 때 제출한 시험지가 아무래도 그 과목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인체해부학 시험이라면 이제 1학기 기말고사란 소린데.
째앵-.
정답을 맞혔다는 듯, 실기실 밖으로 나서자 뜨거운 햇살이 온몸을 덥혔다. 사아악-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진짜 초여름 날씨네. 그러고 보니 이 교복, 하복이었지.’
즐거운 한때를 잠깐이라도 기억해보란 건가. 만약 이게 꿈이라면 최대한 길게 꾸고 싶다고 수현은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 씨. 망했다.”
“어?”
“야, 뛰어!”
“왜?”
“매점 줄 벌써 저만큼이야! 얼른 뛰라고! 늦으면 참치비빔밥 다 떨어져!”
윤희의 손에 붙잡혀 달리면서 수현의 생각은 점점 바뀌어나갔다.
타닥타닥.
따갑게 바닥에 부딪히는 단화의 느낌.
또르르. 등 뒤로 흐르는 땀방울의 온도.
아아아- 음악과 실기동을 지날 때마다 들리던 성악과 아이들의 발성연습 소리와.
지이잉- 띠리링- 뿌우우-.
현악기, 건반악기, 관악기들이 내는 웅장한 소리.
“가장 미친 짓은 현실에 안주하고 꿈과 이상을 포기하는 것!”
연영과 아이들이 매점 앞 열린 무대에서 공연을 준비하는 모습과.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팔자걸음을 걷는 무용과 아이들이 차례로 수현을 스쳐 갔다.
‘꿈이라기엔 너무 정교해. 기억으로 만들어진 이미지 같은 게 아니야.’
결국 매점에 도착할 즈음 수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1995년 세현 예고 1학년 1학기로 돌아온 모양이라고.
‘만약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열망이 통한 거라면…… 그래서 하늘이 또 한 번의 기회를 준 거라면 이번엔 흔들리지 않을 거야.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그림을 그려내야지.’
수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과거로 돌아온 것만으론 만족할 수 없었다.
마음이 가는 대로 그림 그리는 데에만 몰두해선 과거와 다른 삶을 살 수 없을 테니까.
‘지난 시절을 답습할 순 없지.
내 그림을 잃지 않으려면 환경부터 바꿔야 해.’
과거엔 열심히 살았지만 너무나 근시안적이었던 게 문제였다.
후원과 장학금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학창 시절도 제대로 누리지 못했고.
물론 입시에 매진해 명문대에 진학했지만 나중에 보니 다른 길도 얼마든지 있었다.
‘시야가 좁았지. 여유도 없었고.
성적에만 매달리기보다 다가오는 애들과 스스럼없이 사귀고 연대를 다졌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김민준에게 그림을 빼앗기고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편을 들어줄 친구가 있었을 거다.
한 명뿐인 후원자에게 운명을 내걸 이유도 없었을 테고.
‘……이번엔 혼자 버티며 살길을 찾는 데 급급할 게 아니라, 우호 세력을 만들어야겠어.
당당하게 기회를 쟁취하고 바보처럼 뺏기지 않으려면 그래, 수동적인 자세부터 바꿔야 할 거야.‘
수현이 몇몇 사건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미래를 아는 만큼 보이는 게 많았다. 누가 호의를 가지고 다가올지, 누가 적의를 숨기고 접근할지. 그리고 물밑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도.
‘모든 게 운명처럼 반복된다면……
그 환경을 나한테 유리하게 바꿔버리자. 지저분한 것들을 정리하고, 위협이 될 요소들은 치워버리고.
그리고 이번엔 그 환경에서 내 재능을 어디까지 꽃피울 수 있는지 시험해보는 거야.’
김민준이 나를 디디고 얻은 것 이상의 것을 반드시 내 손으로 이뤄내고 만다.
수현이 심호흡했다.
이왕 결심을 굳힌 이상 망설일 게 없었다.
수현은 당장 자신과 실력 있는 친구들이 손해를 본 첫 사건부터 제자리로 되돌려놓을 생각이었다.
과거 세현예고 1학년 1학기 기말시험은 출발선부터가 불공정했으니까.
“한수현! 내 말 안 들려?”
“어?”
깊은 생각에 빠져든 수현을 윤희가 현실로 소환했다.
“시험 말이야. 뭐 나올 거 같냐고. 어? 아무거나 찍어봐.”
“소묘 시험?”
“어. 나 긴장돼 미치겠다. 솔직히 소형이 나올지 중형이 나올지도 안 알려주는 건 좀 너무하는 거 아니냐?”
참치비빔밥을 받아 자리를 잡은 윤희가 거칠게 음식을 비벼가며 투덜거렸다.
세현 예고는 명문 예고답게 실기시험의 비중이 높았다.
특히 전공에 상관없이 공통으로 치러지는 소묘(데생, 채색 없이 선으로 표현하는 회화), 그중에서도 입시와 직결되는 석고 데생은 꽤 부담스러운 과목이었다. 무엇보다 범위가 넓은 게 골치였고.
“하아, 시험 후보가 8개라니 말이 돼? 봐봐. 석고마다 자리는 정면, 반측면 두 자리, 측면 두 자리로 배치하니까 석고당 그려봐야 할 자리만 5개란 소리잖아?”
“그렇지.”
“그럼 5 곱하기 8은 40. 최소 40장은 그려봐야 한다는 거거든? 근데 나 후보 석고 중에 2개는 손도 못 댔어. 시험 범위의 25%를 준비도 못 한 거야. 하아.”
와다다다 불만을 늘어놓는 윤희를 보며 수현이 피식 웃었다.
“심사 기준은 소묘의 본질, 기본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일 거야. 형태를 달달 외워서 그리는 건지, 진짜 이해하고 있는 건지. 명암을 얼마나 잘 표현하고 덩어리와 질감은 잘 나타내는지. 아직 테크닉을 따질 학년은 아니잖아.”
수현이 1학년 소묘 시험의 의미를 되짚어주자 윤희가 팔자 눈썹을 만들며 중얼거렸다.
“뭐, 그럼 차라리 대형 석고도 범위에 넣든가. 아폴론이나 헤르메스. 이런 거 그리면 엄청 뽀대나잖아. 미술학원에서도 그런 거 그리는 언니, 오빠들한테 애들이 와- 하면서 몰려들고.”
“대형 석고는 2절지에 그려야 해. 1학년들이 4시간 동안 2절지에 헤르메스 같은 걸 완성할 수 있겠어?”
“하긴. 4시간이면 3절지도 빠듯하긴 하지.”
윤희가 또 한숨을 내쉬었다.
내내 엄살을 부렸지만 윤희는 소묘실력이 아주 뛰어난 학생 중 하나였다. 세현예고 미술과는 한국화, 서양화, 조소, 디자인으로 세부 전공을 나눈 후에도 소묘 시험을 공통으로 치러 학년 전체 석차를 알 수 있었는데, 윤희는 미술과 138명 중 항상 5위 안에 들던 실력자였다. 물론 부동의 1위는 수현이었지만.
“떨지만 마. 평소대로 하면 문제없을 거야.”
내내 상위권을 유지하던 그림을 떠올리며 격려하자 윤희가 비빔밥을 먹던 숟가락을 들고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니까. 떨지 말아야지. 시험이 진짜 긴장하고 말고 차이가 확 나더라. 시험만 보면 제 실력 반도 안 나오는 애들이 있는가 하면 평소보다 300%는 잘하는 김하영 같은 애도 있고.”
그래, 그 김하영.
수현이 아까부터 떠올린 이름이었다.
과거엔 몰랐지. 김하영 같은 애들이 부정을 저지른다는 것도, 고고한 예술가처럼 보이던 선생 중 몇몇이 거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것도.
“야,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어딨니? 돈으로 안 되는 게 아니라 돈이 부족해서 안 되는 거지. 그냥 돈 좀 더 주면 안 될 게 없어. 자본주의 사회가 그래.”
대학교 졸업을 앞둔 가을학기.
세현예고 동창회에서 술에 잔뜩 취한 김하영이 진상을 부린 일이 있었다.
한국 대학은 다닐 생각이 없다며 곧바로 뉴욕의 아트스쿨에 입학했다더니, 그게 사실 기부금 입학이었고 세현예고 재학 중에도 돈으로 많은 걸 해결했다는 역한 고백.
“니들 똥줄 타게 시험 준비하는 거 보면서 나 많이 웃었잖아. 사실 뭐가 나올지 미리 알고 준비만 해도 아낄 수 있는 시간이 얼만데, 잠도 못 자고 쉬지도 못하고. 어우, 얼마나 딱해. 한참 성장기에.”
김하영은 당시 미술과 최형욱 선생과 소진우 선생을 돈으로 매수해 실기시험을 아주 수월하게 치렀노라고 한바탕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 기억은 과거로 돌아온 수현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우리 시험에 나올 석고가 뭐뭐였지?”
수현이 맛있게 비벼진 참치비빔밥을 입안에 욱여넣으며 태연하게 물었다.
“허. 뭐야. 너 시험 범위도 몰라? 준비 제대로 안 했어?”
“아니, 아그립파, 비너스, 줄리앙. 그 세 개야 무조건 기본으로 들어갈 거고. 중형 석고 중엔 뭐가 있었지? 칼리굴라, 아리아스. 그 정돈가?”
입시 미술에 나오는 석고상이야 빤했고 대충 기억을 더듬어 툭툭 내뱉자 윤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그리스 부인(아마존)이랑 시저, 그리고 소형에 세네카 추가요.”
“아, 세네카까지.”
수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1학년 기말 소묘 시험에 나온 석고상은 칼리굴라였다.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파다 보면 시험 시간이 훌쩍 지나버리는 인상 더러운 석고상.
옷 주름에 집착해도 시간 안에 그림을 끝내기가 빠듯했다.
입시에 최적화된 3학년 정도면 모를까, 1학년에게는 꽤 까다로운 석고상.
물론 그것만 파며 준비했다면 평범한 수준의 학생도 무난한 점수를 받을 수 있긴 했다.
그리고 아마도 평범한 수준일 김하영은 오늘의 시험을 위해 칼리굴라 석고만을 몇 날 며칠 그려가며 준비했을 거다.
애들은 역시 시험만 보면 평정심을 유지하는 스타일이네, 실전에 유리한 강심장이네, 넘기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잖아.
김하영. 두고 봐.
이번 실기시험으로 부당한 뒷거래 같은 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배우게 해줄게.
“일어나자.”
수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
“다 먹었잖아. 적당히 손이라도 풀자.”
“오, 선 연습? 좋지. 가자.”
참치비빔밥을 사이좋게 해치운 윤희와 수현이 초코우유를 하나씩 물고 매점을 나섰다.
쓰윽-.
실기동에 도착한 수현이 교실을 둘러봤고, 자신의 환경을 바꾸기 위한 첫 번째 안배를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모두가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