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20)
20화. 포착(2)
“바다 없는 바다 그림은 의도적으로 바다를 삭제한 거였어. 하지만 그림 안에선 충분히 바다가 느껴지게 그리는 게 포인트였지.”
수현이 자신의 작업을 처음부터 되짚었다.
“바다처럼 전체가 지워지더라도 그에 속한 오브제들로 진짜 주제를 유추할 수 있는 소재. 그런 걸 찾으려다 보니 어려웠던 거야. 삭제라는 테마에 그렇게까지 갇힐 필욘 없었는데.”
수현이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배경을 지워내도 보이는 듯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또 다른 소재를 몇 시간째 머리 아프게 떠올렸는데 굳이 그런 소재를 찾아야만 하는 걸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작업자가 굳이 삭제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잖아. 이를테면 저 바람처럼. ……그러니까 좀 더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었어.”
수현이 반짝이는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센 바람에 키 큰 나무들이 아직 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처음부터 볼 수 없던 존재, 하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 삭제에서 시선으로 넘어갈 수 있는 중간 단계의 소재. 바람…….”
수현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주제와 생각들이 빠르게 떠올랐다 지워지며 신속하게 이미지를 그려냈다.
바다 그림은 작가가 개입해 과감히 삭제를 시도한 것. 그러나 바람은 원래부터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으니 애초에 삭제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삭제된 바다와 표현법이 비슷하면서도 최종 주제인 시선으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소재. 그것이 바람이었다.
바다와 바람.
아마도 두 그림을 보게 될 사람들은 일부러 가린 주제와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 주제에서 묘한 동질감과 이질감을 동시에 느끼게 될 거다.
주제를 제외하고, 그와 관련된 오브제로만 표현한다는 점에선 통일성을 줄 테지만 각각의 그림이 추구하는 방향은 분명히 다를 테니까.
‘좋아, 그렇게 바다에선 삭제를, 바람에선 시선을 명확하게 보여주자.’
말로는 더 정리하기가 어려웠다.
수현은 벼락처럼 내리꽂힌 영감을 곱씹다가 행여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 마음에 서둘러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리고 떠오른 이미지들을 정신없이 옮겨갔다.
바다와 바람을 그리고 나니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지막 주제도 그려졌다.
바로 빛이었다.
“좋았어. 이걸로 완벽해.”
스슥. 슥. 슥.
수현은 탈진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까지 스케치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세 가지 주제를 연작으로 삭제와 시선이란 테마를 완벽하게 표현할 방법이 수현의 손끝에서 점점 형상을 갖추어 나갔다.
***
“닮은 듯 다르네.”
“묘하다. 심오해.”
“와, 엄청나. 진짜 대작가가 그린 것 같아.”
다시 일주일 후.
아크릴로 완성한 수현의 습작을 본 세 친구가 저마다 감탄을 쏟아냈다.
“진짜 괜찮아?”
수현이 조심스럽게 묻자.
“넌 천재야.”
눈에 콩깍지가 제대로 덮인 박선화가 1번으로 감격했고-.
“깊이가 느껴져. 와, 같은 고등학생인데 이럴 수가 있나. 내 작업이 갑자기 너무 초라해진다. 나도 다시 고민해봐야겠어.”
차윤희도 칭찬과 부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결국 해냈네. 그것보다 이거 어떻게 완성될지 너무 궁금한데?”
그리고 수현에게 연작을 통해 두 주제를 연결해보란 조언을 건넨 스티브는 이렇게 단기간에 해낼 줄은 몰랐다며 놀라면서도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직 갈 길이 멀어. 무엇보다 그림이 세 장으로 늘어서 작업량도 세 배가 된 게 문제고.”
“그러게. 너 이거 유화 작업할 거라고 했지?”
“그러니까. 그게 또 고민이야.”
그러나 수현은 친구들의 칭찬에 취하기보단 앞으로의 작업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이젠 기술적인 부분도 고려해야 할 시기.
곧 8월이니 10월 미술 전시회까지 그림을 완성하려면 빠듯한 시간이었다.
3개월 동안 세 장의 그림이라니, 한 달에 한 장은 완성해야 한단 얘기잖아.
그림에만 매달려도 아슬아슬한데, 학과며 다른 실기 수업에 한나절 이상을 보내야 할 테니 작업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유화는 확실히 무리수긴 해.’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화는 기름을 섞은 물감으로 캔버스에 그리는 방식.
발색이 부드럽고 묵직한 느낌을 주고 특유의 질감으로 입체감을 드러낼 수 있는 데다가 보존이 쉽다는 장점이 있다.
문제는 기름이 섞인 유화물감은 수용성 물감보다 마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
밑 색이 완벽히 마른 다음에야 덧칠할 수 있는데, 다음 과정을 그리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만 보통 일주일쯤이었다. 수정이 쉽다는 점에선 좋지만 작업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게 단점.
‘세 장을 번갈아 그리면 좀 나으려나? 아냐, 암만 생각해도 물리적으로 무리겠어. 하지만 유화의 질감을 포기하고 싶진 않은데.’
수현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에 빠져있을 때였다.
“뭐가 문제야, 최대한 유화의 느낌을 살리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어?”
“아크릴로 가. 내가 좋은 보조제를 알고 있거든. 그걸 쓰면 꾸덕한 유화의 질감이며 부드러운 느낌을 제법 잘 살릴 수 있어. 색이 가벼워 보이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있고. 내가 다 알려줄게.”
스티브가 씨익 웃으며 수현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 모습에 수현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진짜? 어떤 보조젠데? 유화랑 비슷하면 얼마나?”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면 구분 못 할 정도야. 그게 일반 보조제와는 좀 다르거든. 한국엔 아직 수입되지 않을 건데, 내가 가지고 있어. 너한테 좀 나눠줄게. 발색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꽤 있고.”
“와.”
스티브의 과감한 지원에 수현은 그저 놀랄 뿐이었다.
과거 수현도 그림을 꽤 그렸지만, 좋은 재료에 접근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늘 벽이 됐으니까.
그러니 다시 그림을 그리면서도 부족한 경험이 한계가 되곤 했다.
그런데 그 문제를 너무나 쉽게 스티브가 해결해주겠다고 나선 거다.
스티브가 말한 몇 가지 노하우라면 앞으로의 작업은 한결 수월해질 수 있었다.
“고마워. 정말.”
“에이. 뭐 그 정도 가지고. 내가 말했잖아. 너, 나 같은 친구 두면 앞으로 정말 편할 거라니까?”
“그러게. 정말 편하긴 하네.”
“와, 근데 너희들 보니까 세현예고가 점점 궁금해져.”
“어?”
“미술전시회 수준도 생각보다 높은 것 같고, 여러모로 내가 알던 것보다 재밌을 것 같아. 나도 너희 학교로 갈까?”
스티브가 능글맞게 웃자 차윤희와 박선화가 위기감을 느꼈는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뭐야. 오긴 어딜 와! 그리고 네가 오면 뭐 1등이라도 할 거 같아? 우리 학교엔 신의 손, 한수현이 있거든?”
“맞아. 그리고 한수현 너도 이런 애가 눈웃음친다고 넘어가면 안 돼! 너 고작 보조제 한 병으로 베프 바꾸려는 거 아니지?”
“어라? 누가 베픈데? 요즘 한수현은 나랑 제일 친한데? 그치, 한수현?”
박선화와 차윤희의 정신없는 말에 스티브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어우. 나 편입 생각한 거 취소할래. 그러고 보니 얘들도 세현예고잖아. 난 또 다 한수현 같은 수준인 줄.”
“뭐야?”
“스티브, 너 말 다 했냐!”
“수현아, 그냥 네가 예고 관두고 일찌감치 프로의 세계로 오는 건 어때? 내가 뉴욕이랑 파리 쪽에도 인맥이 좀 있거든. 런던도 좀 아는 편이고. 그래! 일선화랑에서 지원도 해주는데 도전 못 할 거 없잖아?”
스티브는 아랑곳하지 않고 박선화와 차윤희가 기함할 소릴 계속해 나불거렸고-.
“야, 선화야. 스티브 입 막아라. 내가 아무래도 오늘 피를 좀 보게 될 것 같다.”
“피? 블러드? 무슨 소리야? 피를 왜 봐?”
“와, 이럴 땐 한국말 못 하는 척하는 거 보소? 너 내 말 진짜 못 알아들어? 영어로 해줘?”
“글쎄, 네 발음을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아, 혈압 올라. 박선화 뭐하냐! 너네 화랑 입주 작가라고 지금 모른 척하는 거야?”
“그럴 리가. 나한테도 임계치라는 게 있거든? 스티브 너, 오늘 선을 좀 넘은 것 같다. 와라, 스티브. 덤벼, 덤비라고!”
애들은 한참이나 아웅다웅하면서 투닥거렸다.
한 명은 이전엔 말 한마디 섞을 기회가 없던 친구, 한 명은 오해로 친해질 기회를 잃었던 친구, 그리고 과거 유일한 친구였던 윤희와도 이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었다.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을 리 없고, 누구 하나 잃고 싶지 않은 수현의 친구들이었다.
“그만들 해. 유치하게 왜 이러는 거야. 그러지 말고 배고픈데 맛나분식 떡볶이나 먹으러 가자. 지난번에 너희 짜장떡볶이 못 먹었다고 억울해했잖아.”
수현이 피식 웃으며 애들을 중재했다. 애들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시 수현의 옆자리를 차지하려 신경전을 벌였고.
그렇게 여름 방학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
“잘들 지내고 왔냐!”
진짜 방학다운 2주간의 방학은 눈녹 듯 사라졌고, 어느새 8월 초.
세현예고에선 다시 여름방학 특별 보충수업이 시작되었다.
“선생님, 이건 사기예요! 눈 뜨고 일어났는데 2주일이 지났어요!”
“맞아요! 일주일만 더 쉬게 해주세요!”
“옳습니다! 방학이잖아요!”
“왜 학생은 재택근무가 안 되나요!”
애들은 전처럼 여전히 실없고 의미 없는 반항을 늘어놓았고, 수현은 그 철없는 모습에 싱긋 웃었다.
전날 밤, 수현과 박선화는 기숙사로 복귀했다.
학교 수업이 있는 동안엔 기숙사에 머물고 주말엔 일선화랑 아뜰리에로 가 작업을 이어 나갈 계획이었다.
짧다면 짧은 2주였는데, 일선화랑에서의 경험이 너무 진했던 탓일까. 벌써부터 작업실로 가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그림을 그리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분간은 또 학교 일에 집중해야 할 시기.
“자, 지방방송은 꺼주시고. 오늘부터 즐거운 실기 수업이 시작된다. 오전은 공통 실기, 오후는 전공 실기로 들어갈 건데, 1학년은 아직 전공을 정하지 않은 관계로, 오후엔 미술 전시회에 출품할 작품들을 그리도록 한다. 알았나!”
“네에!”
“잘 알겠습니다아!”
미술과 실기동 지하 광장.
언제나처럼 최형욱 선생이 중앙에 나서서 아이들에게 전달 사항을 일러주고 있었다.
“날이 덥다! 자, 다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행복한 실기실로 이동!”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농담을 던지는 최형욱.
그러나 수현은 학교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걸 차분히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 분위기를 지켜보는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잘 지냈니?”
“어, 선생님.”
수현의 전시회 전담반 담임을 맡은 김윤수였다.
“얼굴이 피곤해 보이는데? 컨디션은 괜찮은 거지?”
“아, 별거 아니에요. 재밌게 보냈어요.”
“그래. 그, 그림은 좀 진도가 나갔고?”
안부를 물은 다음엔, 수현의 그림에 대한 궁금증을 바로 비치는 김윤수.
“음. 진척이 있긴 했는데, 이따가 좀 봐주시겠어요?”
수현이 싱긋 웃었고.
“오, 나야 언제든 환영이지.”
김윤수가 활짝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