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33)
33화. 포상
“이쪽이야!”
남산 대한호텔 로비 카페.
약속 시간보다 20분 일찍 도착했는데, 제임스 리와 준은 벌써 나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둘은 수현이 회전문 안으로 들어서자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네. 덕분에요.”
“다시 한번 축하해. 세현예고 최초의 그랑프리지?”
제임스 리의 축하에 수현이 멋쩍게 웃었다.
따지고 보면 그가 3만 달러란 거금을 경매에 투척하며 수현의 그림을 지지한 바람에 나온 결과였으니까.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결과를 얻게 될 줄은 몰랐어요.”
수현이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하자 제임스 리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한국의 고등학생 중에 내 시선을 이만큼 끌 애가 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거든.”
“네…….”
칭찬이 고마운 한편, 수현은 조금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이미 한 번 경험해 본 삶.
덕분에 제임스 리가 세현예고 미술전시회의 특별심사위원이 되리란 것도, 삭제란 테마에 흥미를 느낄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 정보를 이용한 게 사실이니 그랑프리를 온전히 내 힘으로 얻었다고 할 수 있을까, 스스로 위축됐던 거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어.”
그런데 제임스 리는 수현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다음 말을 꺼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하나도 없다지만 먼 한국의 고등학생이 나와 같은 ‘삭제’란 테마로 그림을 그린다는 게 무척 신기했거든. 음, 한번 볼래?”
제임스 리가 의자 옆에 얹어두었던 크로스백에서 도록을 한 권 꺼내 내밀었다.
최근 전시 작품이 실린 책.
개성 넘치는 그의 그림들이 페이지마다 강렬한 인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때? 다른 듯하면서도 닮았지?”
“아.”
수현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비교가 안 되잖아.’
이전 삶에서 본 그림들.
그러나 가까이서 다시 보니 수현의 기억에 남은 잔상보다 훨씬 뛰어나고 훌륭했다.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온 수현과의 격차를 가늠하는 건 의미가 없을 정도. 예전 수현의 전성기와 놓고 봐도 천지 차이였다.
같은 테마를 사용했지만 [바다 없는 바다> 그림은 제임스 리의 것에 비하면 아주 아마추어 수준의 것으로 보였던 거다.
“닮았다는 말이 부끄러운데요. 감히 비교가 안 돼요.”
“하하. 테크닉이나 스타일은 당연히 기성작가인 내가 뛰어나야 하지 않겠어? 이래 봬도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인데 말이야.”
제임스 리가 호탕하게 웃더니 다시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내가 닮았다고 한 건 단순한 기법이나 스타일 같은 걸 두고 한 말이 아니야. 만약 그 정도였다면, 내 호기심은 오래 가지 않았을 거고.”
“……네?”
“그러니까 네 그림이 흉내 내기에 불과했다면 흥미가 금세 사그라졌을 거란 말이지.”
아무래도 수현의 그림에서 뭔가를 찾아낸 듯한 말투.
제임스 리는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그러나 차분하게 강평을 이어갔다.
“안 그래도 세현예고 전시회엔 명화를 따라 그린 그림들이 꽤 있던데? 그래. 그런 것들이랑 비교하면 설명이 쉽겠네. 달리니 몬드리안이니 전부 겉핥기식으로 베꼈다 뿐이지 작가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주진 못했잖아. 하지만 네 그림은 달랐지.”
‘설마 내 그림엔 작가의 개성, 정체성이 드러났다는 건가?’
제임스 리의 호평에 수현이 눈을 깜빡였다.
“그냥 흉내 내는 그림과는 달라. 넌 본질을 꿰뚫어 보는 그림을 그렸어. 무엇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스케치 말이야. 그걸 보자마자 확신이 들더라고. 이 아이가 뭔가를 찾아냈구나, 하는 걸 말이야.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졌거든. 특히 세 번째 그림에선 크게 점프해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궁금해졌지. 그래서 한국에 가서 수현이 널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아. 정말요?”
수현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 그림을 알아봐 준 건가.’
[바다 없는 바다>는 제임스 리의 ‘삭제’를 적용한 것이었다.그러나 이후 그려낸 [바람의 목소리>와 [빛의 계절>은 수현이 원래 가지고 있던 자신의 그림을 그린 것이었고.
수현은 세 점의 그림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면서 ‘삭제’에서 ‘시선’으로 테마를 이동시켰는데 그 고민과 노력을 제임스 리가 정확하게 캐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매에는 마지막 그림인 [빛의 계절>을 출품했잖아?”
“아, 그랬죠.”
공정성을 기해야 한다는 최형욱 선생의 말에 수현은 세 점의 작품 중 하나를 골라 경매에 냈다.
그게 마지막 그림인 [빛의 계절>이었고.
“[바다 없는 바다>와는 완전히 다른 그림이었지. 물론 내 관심을 처음 끈 건 첫 번째 그림이었지만, 비싼 값을 치르고서라도 갖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한 건 [빛의 계절>이었어.”
“하아.”
수현이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보다 더한 칭찬이 있을까.
세계적인 화가 제임스 리가 자신의 그림을 두고 꼭 갖고 싶은 작품이라 말해주다니.
무엇보다 [빛의 계절>은 수현의 오리지널리티가 살아있는 그림이었다. 앞으로 수현이 쭉 그려내고 싶은 주제 [시선>이 담긴 그림.
“너무 과분한 칭찬이에요. 앞으로 더 열심히 그림을 그리라는 격려로 듣겠습니다.”
수현이 한 번 더 고개를 꾸벅 숙였다.
“흠. 그런 의미에서 상의할 게 하나 있는데.”
제임스 리가 싱긋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랑프리 특전에 대해 들었니?”
“네. 알고 있습니다.”
수현이 또박또박 답했다.
전시회 결과가 발표된 직후, 수현은 김윤수 선생으로부터 그랑프리 특전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수현이 알고 있던 대로 제임스 리의 특별 레슨을 한 달간 받을 수 있다는 것. 수현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지난번에 슬쩍 말하긴 했는데, 내가 한국에 그리 오래 머물 형편이 못 돼.”
“아.”
수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했다.
따로 제자를 두거나 그림을 가르치는 일을 하지 않는 제임스 리가 아무리 전시회 특전이라 해도 한 달이나 그랑프리 수상자에게 특별 레슨을 한다니.
‘게다가 난 한국에 있으니 물리적으로도 어려운 일일 거야. 그럼 레슨이 힘든 대신 다른 상을 주겠다는 말을 하려는 건가.’
수현이 물끄러미 제임스 리의 얼굴을 볼 때였다.
“혹시 겨울방학에 런던으로 올 수 있겠니?”
“네?”
제임스 리가 차분한 목소리로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비행기표를 보내줄게. 지내는 건 여기 준의 집에서 머물면 될 거야. 우리가 활동하는 화랑이 준의 집에서 아주 가깝거든.”
“허. 그러니까 제가 영국에서…….”
“맞아. 특전인 레슨을 영국에서 해주려고 해. 와서 견문도 넓힐 겸 어때?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은데.”
제임스 리가 싱긋 웃었고, 미리 말을 맞춰뒀던 준이 분위기로 대화 내용을 눈치채며 찡긋 윙크를 보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제임스 리가 놀란 얼굴을 한 수현에게 또 다른 제안을 해왔다.
***
“많이 놀란 눈치지?”
“아무래도 예상 밖의 얘기였을 테니까.”
수현이 카페를 나선 뒤, 제임스 리와 준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어?”
준이 추가로 주문한 카푸치노를 홀짝이며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였다.
“고등학생이란 걸 감안할 땐 꽤 재능있는 친구지만, 네가 영국으로 불러서 직접 일대일 레슨을 해줄 정도인가 싶어서 말이야.”
“뭐, 한국에 일주일쯤 더 머물면서 며칠 집중 레슨을 해준다고 불렀다가 대충 끝낼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
“그러니까. 너답지 않은 행동이라 궁금하단 말이야. 그림값으로 3만 달러를 내질 않나, 비행기 티켓을 끊어준다질 않나. 나한테 방을 하나 빌려주라고 부탁하질 않나.”
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조금 더 지켜봐도 될 것 같아서. 영국으로 와서 저 아이가 얼마나 더 성장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야.”
“그래서 새 그림도 하나 구상해오라고 한 거야?”
“맞아. 저 때는 잠깐 안 본 사이에 훌쩍 성장하기도 하고, 조금만 자극을 줘도 폭발적인 위력을 발산하기도 하거든. 기대 돼. 과연 저 아이가 영국에 올 때 어떤 걸 생각해 올지.”
제임스 리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멀어져가는 수현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확실히 흥미로운 아이란 말이지. 어디까지 성장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경매 대금을 지불하고 그림을 받아 나오던 날.
제임스 리는 강유진 관장과 마주쳤다.
강유진은 전시회 특전에 대해 자세히 아는 눈치였고, 레슨을 맡게 될 제임스 리에게 수현이 얼마나 특별한 아이인지 과하지 않게 칭찬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 한번 보셨으면 해서요.”
강유진은 한수현이란 이름이 적힌 비디오테이프를 내밀었다.
“이게 뭐죠?”
“수현이는 일선화랑의 후원을 받고 있어요. 이건 수현이의 다른 그림들, 그리고 이번 전시회 작품을 그린 과정을 레코딩한 테이프고요.”
“작업 과정을요?”
“네. 지켜보는 재미가 있으실 거예요. 수현이가 어떤 아이인지도 쉽게 이해하게 될 테고요. 물론 특별 레슨을 진행하게 되면 며칠 지나지 않아 파악하게 될 부분이지만, 황금 같은 시간을 그렇게 탐색으로 보내는 건 아까우니까요.”
한마디로 아이를 가르치기 전에 그 아이에 대해 미리 공부해두라는 당당한 조언.
어쩌면 도발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화랑으로 꼽히는 일선화랑 관장이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화가인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다니, 굉장히 흥미로운 상황이기도 했고.
게다가 강유진 관장의 말대로 테이프는 무척 재미있었다.
안 그래도 호감인 한수현에 대한 관심을 쭉 끌어올릴 정도로.
“어쨌든 그만 일어나자. 이틀 후면 다시 영국으로 돌아갈 텐데, 여행의 기분을 만끽해야지.”
제임스 리가 준에게 손을 내밀었고, 준이 그런 제임스 리를 살짝 흘겨보다가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한편 폭풍이 지나간 세현예고는 며칠 잠잠했다.
“어우. 허전해.”
“뭐가?”
“전시회 그림이 끝나니까 전공이랑 소묘 수업만 남았잖아. 너무 널널한데?”
“센 척하시네, 또. 너 어제 전공 수업하고 어깨 빠진다고 파스 찾던 거 그새 까먹었지?”
박선화와 차윤희는 여전히 티격태격했고-.
“야, 젊어서 회복이 빠른 거거든? 너처럼 처음부터 열심히 안 한 애들이야 어디가 아프고 언제 괜찮아지고 감이 없겠지만 말이야.”
“와, 뭐라는 거야. 차윤희. 어이없네. 나 요즘 되게 성실해졌거든? 소묘도 지난 수업엔 B+ 받았고?”
“그거 한수현은 눈 감고도 그리는 시저잖아. 그리고 너 그 전 수업에서 아리아스 그릴 땐 진짜 처참하던데?”
“뭐?”
“머리카락이 아니라 밧줄 그려놓은 줄 알았어. 와, 게다가 머리카락 그리다가 이목구비는 완전 날려버렸던데? 쌤이 아무 말씀 안 하시든? 난 그 그림 점수가 더 궁금하던데?”
“하, 너 요즘 나한테 관심이 많다? 그럼 나도 애정을 줘야겠지? 이리 와. 이리 와. 너 어제 아프다고 했던 어깨가 어느 쪽이야? 언니가 시원하게 마사지 좀 해줄게?”
“어, 얘가 왜 이래. 저리 가. 박선화, 저리 가라고!”
결국 깐족이던 차윤희가 달려드는 박선화를 피해 복도를 냅다 달렸다. 그 순간-.
“차윤희!”
뒤돌아보며 코너를 도는 차윤희를 수현이 급하게 불렀지만.
쾅! 우당탕.
“으악.”
“어우. 아파라.”
차윤희는 들소처럼 누군가를 제대로 들이받고 복도에 대자로 뻗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