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4)
4화. 기말의 분위기
사각사각. 슥슥슥.
시험이 시작된 실기실은 바쁘게 움직이는 연필 소리와,
탁탁. 탕탕탕.
화판 위 종이를 두드리며 뭔가를 지워내는 지우개 소리로 가득했다.
다들 긴장한 마음을 다잡으며 실기시험에 임하고 있었지만-.
“하, 짜증나.”
김하영은 영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말시험에 칼리굴라가 나올 거라 철석같이 믿었는데, 몇 주간을 그 석고 하나만 파고들면서 준비했는데 뜬금없이 줄리앙이라니.
뜻밖의 상황에 당황도 되고 화도 나고.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거지?’
생각이 자꾸 다른 데로 몰려갔다.
현장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봤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하, X발. 이번 시험은 독보적인 A가 확정이었는데, 개나 소나 다 잘 그리는 줄리앙이 나올 게 뭐야.’
성질 같아선 으아악-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다들 자신을 미친년 취급할 테니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붙들고 간신히 참는 중이었다. 문제는 멘탈이 이렇게 흔들리니 개나 소나 잘 그리는 줄리앙마저 제대로 그려지질 않는다는 거였고.
“왜 이래, 진짜.”
탕탕탕. 김하영이 지우개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며 틀린 형태를 지워냈다.
“미치겠네.”
시계는 벌써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적어도 15분 안엔 형태를 마무리해야 밑색을 깔고 명암을 넣을 수 있을 텐데, 감정이 날뛰어서 그런지 별로 좋지도 않던 평소 실력조차 절반도 나오지 않았다.
“하필 이 자리가 걸려서.”
자리도 문제였다. 교실에 들어가기 직전 뽑기로 배정받은 자리는 10번.
두 번째 줄, 오른쪽 완전 측면 자리.
하필 계산이 조금이라도 틀리면 형태가 크게 왜곡되는 어려운 자리였다. 목이 짧아 보이기 쉬워 소실점과 명암을 적절하게 써야 하는데, 그게 어디 머리로 안다고 손으로 해결되는 문젠가.
“하아.”
몇 번이나 마음에 안 드는 형태를 벅벅 지워냈더니 종이가 얇고 거칠어져 연필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X발…….”
김하영이 작게 욕을 내뱉었다. 느낌상 이번 시험은 제대로 망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모든 게 자업자득.
비록 수현의 기지로 시험의 판도가 바뀌었으나, 자신의 밑천이 본래 그 정도였으니 딱히 누굴 원망할 일은 아니었다.
***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아이들을 실기실로 들여보내고 몇몇 선생이 복도 끝에 모여 아까의 일을 끄집어냈다.
“누가 그런 쪽지를 보낸 걸까요?”
“그러니까요. 하, 전엔 한 번도 없던 일인데 이번 1학년에선 이런 사고가 터지네요.”
“그러게요. 개교 이래 한 번도 없던 일인데 충격이 큽니다, 아주.”
나름 강사 경력이 높은 이들이 앞서 투덜댔고 젊은 선생들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뿐이었다. 사건의 진상에 일개 강사들은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뭐, 최형욱 선생님이 확인하고 무슨 얘기라도 해주시겠죠.”
최형욱의 후배인 남자 선생 하나가 은근히 사건을 무마하더니 담배나 한 대씩 태우러 나가자며 눈짓을 보냈다.
“그래, 우리가 여기서 떠든다고 뭐 해결이 되나.”
“맞아요. 최 선생님이 이따가 말씀해주시겠죠.”
선생들 몇몇이 끄덕이고는 어슬렁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그걸 김윤수가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수상하네.”
혼자 남은 김윤수가 계단 아래 최형욱의 연구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이들을 모두 시험장으로 들여보낸 후, 남은 선생들끼리 앞서 준비된 뽑기통에 이상이 있었는지 함께 살펴보고 사건을 처리하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최형욱은 뽑기통을 냉큼 챙겨 들더니 자기 연구실로 혼자 들어가 버렸다.
잔뜩 화가 난 표정인데다가 말을 걸 타이밍을 놓쳐 내버려 뒀는데, 이걸 이렇게 처리해도 되나?
“저기 오늘 시험 칼리굴라가 나온다고 해서요…….”
“쌤. 저한테는 여덟 번을 뽑아도 무조건 칼리굴라가 나올 거란 쪽지가 왔는데요?”
“쌤. 그런데 진짜 누가 나쁜 장난을 친 거면 혹시 뽑기통도 손댄 거 아닐까요?”
애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했던 말이 귀를 윙윙 울렸다.
쪽지는 단순한 장난이었을까? 혹은 경고였을까?
만약 후자라면, 그래서 시험 주제가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면, 누군가 그걸 알고 고발한 거라면, 내부자가 존재할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선생들도 깊숙이 관여됐을 수 있고 그게 최형욱 선생일 수도 있었다.
“뭐, 지켜보면 알겠지.”
김윤수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실소가 나오는 이 기막힌 상상이 만약 사실로 밝혀진다면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설령 자신에게 크나큰 불이익이 돌아오게 된다 할지라도.
***
같은 시각.
‘우선 한 가지 바로잡았어.’
원래라면 김하영 등의 부정으로 불공정하게 치러졌을 시험이었다.
하지만 수현이 개입하면서 모든 게 어그러졌다. 그리고 이 첫 번째 변화는 앞으로 수현의 환경을 바꿀 중요한 걸음이 될 게 분명했다.
수현은 두근대는 심장을 느끼며 눈앞에 놓인 석고상을 천천히 바라봤다.
‘오랜만이네.’
줄리앙을 바라보는 수현의 표정이 묘했다.
고 1이면 한참 그림에 빠져들던 시기.
시키지 않아도 매일 같이 고된 선 연습에 30분짜리 형태 시험 같은 걸 스스로 해내던 때였다.
형태를 보는 눈을 열고 능숙하게 그려내고 싶단 열망에 타올랐었지.
열정은 열심을 낳았고, 그렇게 오랜 시간 훈련된 눈은 종이에 그려낼 선을 여전히 자연스럽게 떠올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감각이 다시 고등학생이 된 수현의 몸에 그대로 살아났다.
스윽.
어깨를 들어 뻗어 내린 선엔 망설임이 없었고-.
사사삭.
형태를 깎아가는 손놀림은 정확하며 거침없었다.
‘기가 막히네.’
수현이 감격하며 미소를 지었다.
15년이나 그림과 담을 쌓고 살았으니 손이 굳진 않았을까 두려웠는데 다행이었다.
어제까지 꾸준히 연습한 것처럼 손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라니.
그뿐인가.
수현이 숨을 깊이 들이켜며 감각을 열었다. 잘 훈련된 손, 가뿐하고 힘이 넘치는 10대의 몸. 거기에 서른까지 작품 활동을 하며 얻은 경험치가 보너스로 더해졌으니.
‘완벽한 상황이야. 이 정도는 너무 쉽다.’
수현에게 줄리앙을 그리는 일쯤이야 긴장도가 전혀 없는 몸풀기 수준에 불과했다.
슥슥. 스슥슥.
수현이 어깨를 움직였다.
빈 종이 위에 겹쳐진 선들이 꿈틀대며 형상을 만들어갔다.
줄리앙.
본 이름은 줄리아노 디 피에르 데 메디치. 이탈리아 피렌체의 명문가 메디치의 일원이었던 걸로 전해지는 인물.
천재 화가이자 조각가인 미켈란젤로가 메디치가의 의뢰로 만든 조각상이니만큼 완벽한 균형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석고상이다.
수현은 과거 대학 입시까지 이 줄리앙을 수백 장은 그려냈다. 석고상과 가까운 자리부터 먼 뒷자리까지 정면, 오른쪽 반측면과 측면, 왼쪽 반측면과 측면을 번갈아 얼마나 그려댔던지, 나중엔 석고를 보지 않고도 그릴 정도였고.
게다가 운도 좋지.
수현이 씨익 웃었다.
수현이 뽑은 자리는 7번.
두 번째 줄, 왼쪽 반측면 자리로 줄리앙의 매력을 잘 보여줄 수 있어 늘 선호하던 자리였다.
곱슬을 표현한 앞머리의 덩어리를 풍성하게 잡고 큼지막한 쌍꺼풀이 있는 눈과 시원하게 이어지는 콧날을 표현한 후, 두툼한 입술과 깎은 듯 갸름한 턱선을 그려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왼쪽으로 돌려 쭉 뻗은 목선의 기울기를 정확하게 잡아냈다.
형태를 모두 잡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15분.
잘하면 시간이 남겠는데?
수현이 실기실에 걸린 벽시계를 쓱 보다가.
사아아악-.
다시 어깨를 크게 움직이며 밑색을 깔았다.
신의 손이 완벽하게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
“미쳤다.”
“와, 씨! 얘들아, 이것 좀 봐!”
“헐. 한수현 학생. 내일부턴 바로 3학년 교실로 가주시고요.”
오후 5시 반.
시험이 종료되고 혹여 연필 선이 뭉개질까 치이익- 스프레이를 뿌려가며 바쁘게 움직이던 애들이 수현의 그림을 발견하고는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역시 신의 손, 이번에도 완벽하네.”
“선생님, 근데 석고상보다 더 잘 생기게 그린 건 반칙 아닌가요?”
“맞습니다, 선생님. 더 잘생기게 그런 것도 형태의 왜곡인 것 같은데 마이너스 요소가 되는지 궁금합니다!”
수현의 그림을 칭찬하며 장난을 거는 아이들. 그 귀여운 모습에 수현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거 쪼개네, 또.”
언제 그림을 제출했는지 남의 교실을 기웃대던 차윤희가 수현을 발견하고는 성큼 실기시험장 안으로 들어왔다.
“와 씨. 진짜 잘 그렸어. 뭐냐, 너?”
차윤희가 씩씩대며 말했다.
“아, 나도 우리 교실에선 제일 잘 그렸다고 난리 났는데, 이건 뭐. 비교가 안 되네.”
대놓고 늘어놓는 칭찬에 수현이 슬쩍 차윤희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그만하란 눈짓을 보내자 오히려 역효과가 일어났다.
“왜, 왜. 부끄러워?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이 이렇게 그려? 이렇게 시선이 집중되게 그리냐고오!”
“어우, 이거 또 미쳐가지고. 그만해. 너 나가. 여기 너희 교실도 아니잖아.”
“아, 됐어. 빨리 제출하고 나와. 배고파 뒤지겠다.”
차윤희가 낄낄댔고, 수현이 피식 웃으며 그림을 제출했다.
아까는 뽑기 일을 바로잡으며 조금 흥분했는데, 차분하게 시험을 치르고 나니 기분이 또 달라졌다.
다시 열일곱이라니.
마음 한편으로 항상 그리워하던 시절이었다. 가장 순수하게 그림을 그리고 그릴 것을 찾아 헤매던 때.
물론 어려움은 있었다. 복잡한 가정사 때문에 속이 상하는 일도 많았고. 그래도, 내 인생에 이 시절만큼 빛나던 때가 있었을까.
수현은 윤희와 다른 친구 무리에 섞여 매점을 향하면서도 복도의 유리창과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꿈이 아니야. 정말 꿈이 아닌 거야.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2회차인 수현과 다르게 이 시절의 청춘들은 어찌나 일희일비할 일이 많은지.
“하아, 망했다.”
차윤희가 세상 무너지는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긴 줄을 가리켰다.
“연영과 애들도 오늘 연습하느라 늦었나 본데?”
매점 밖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줄. 딱 보기에도 20분쯤은 차례를 기다려야 할 분위기였다.
“으아아. 봉고 시간 다 돼 가는데.”
차윤희가 과장된 몸짓으로 배를 문지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맞다, 너 봉고 타고 다녔지. 양재 봉고였나?”
“뭐야, 너 나한테 관심 없어? 지금 봉고 때문에 서두른 거잖아.”
수현의 질문에 차윤희가 입을 삐죽였다.
세현예고는 전국 단위 특목고인 만큼 재학생들의 주소지가 다양했다. 기숙사 아이들이야 신경 쓸 게 없었지만 통학하는 아이들은 부모님의 차로 다니거나 지역별로 묶은 승합차를 이용하는 게 일반적이었고.
어쨌든 승합차는 양재, 잠실, 안양 등 지역에 따라 조를 짜서 탔는데, 차윤희는 양재 봉고였다.
등하교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약속된 시간을 지키려면 매점에서 뭉갤 시간이 없었다.
“대충 빵이나 사서 가자.”
수현의 말에 윤희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나야 그렇게 해결한다 치고, 너는?”
“어?”
윤희의 말에 잊었던 사실이 또 하나 떠올랐다.
1학년 1학기 중간고사부터였지. 기숙사 생활을 했던 게.
“너, 저녁 먹을 친구 없다고 하지 않았어?”
윤희가 목소리를 낮추며 걱정스레 물었다.
덕분에 수현은 관계를 재정립해야 할 또 다른 친구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